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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감자, 옥수수, 설탕

구름위 2014. 8. 2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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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의 산물들

 

'기적의 수확물'이냐 '악마의 식물'이냐 - 감자

 

잉카 시대의 감자 영농법.
안데스에서 태어난 감자는 안데스의 많은 문명을 살찌웠다. 이 감자는 1570년 페루에서 유럽으로 건너와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의 주식으로 부상했다.
 
안데스에 거주하는 케추아 원주민들은 감자를 '파파(papa)'라고 불렀는데, 1500년경에 이 감자가 중남미 전역에 퍼지면서 스페인어로도 자연스레 '파파'로 통하게 되었다. 7,000년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이 '파파'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안데스 산지에서 재배되었다. 4,500미터 고지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는, 서리가 잦고 토양이 척박한 안데스 고지대의 원주민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었다.

 

이렇게 안데스에서 재배되던 감자는 1537년에 신대륙을 정복하러 온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목격되었다. 그 후 1570년경에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감자를 스페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감자를 처음 본 지 무려 30년이 지나서였다. 감자는 세비야 병원의 환자들에게 제공되면서 유럽에서 먹을거리로써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유럽의 어느 나라도 감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에다 이 흉측한 모양의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속설까지 퍼졌다. '비천한 자들의 음식'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유럽에 도입된 감자에 대해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 분파는 '악마의 식물'이라고까지 불렀다. 감자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영국, 독일 등지로 펴져 나갔지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인이라 해도 양식으로 감자를 주는 주인은 섬기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인이 감자밭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에, 약탈을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농민들이 심은 작물이 바로 감자이기도 했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구가 급증한 영국은 쇠고기와 곡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쇠고기를 수입해왔다. 이로 인해서 아일랜드의 귀리밭은 소를 키우는 방목지로 변해갔다. 귀리죽을 먹던 농민들은 점차 감자와 우유로 주식을 대체해야만 했다. 그런데 감자는 무엇보다도 단위면적당 칼로리 생산량이 다른 작물보다 훨씬 더 높았다. 땔감이 부족하고 오븐이 없었던 유럽의 농민과 도시 빈민들은 번잡스런 빵 굽기를 그만두고 저장이나 요리에 편한 감자를 선호했다. 이렇게 해서 감자는 아일랜드 농민의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1845년에 예고도 없이 감자 역병이 찾아왔다. 아메리카에서 유행하던 균류(菌類)가 화물 여객선을 통해서 영국과 아일랜드로 들어와 감자가 검게 썩어들어갔고 줄기는 말라 비틀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양실조나 영양실조로 인한 괴혈병, 이질, 콜레라로 죽어갔다. 대기근 전에 아일랜드 인구는 대략 820만 명 정도였으나 대기근으로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100만 명이 죽었다. 이 대기근을 피해 1845년부터 10년간 150만 명의 아일랜드 농민이 신대륙으로 떠났다. 이처럼 감자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들어온 지 거의 300년이 지나, 유럽인이 감자 역병으로 인한 기근을 피해 다시 신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신성한 주식 - 옥수수

 

네 개의 선을 긋고, 네 개의 모서리를 만들고,
길이를 재고, 네 곳에 말뚝을 박고,
이랑을 나누고, 이랑을 긋지.
하늘에, 땅에,
네 면, 네 모서리에.


마야 키체족의 성서 《포폴 부》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장면에 대한 묘사다. 이는 옥수수밭을 만드는 장면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옥수수는 신대륙, 특히 메소아메리카1)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곡물이었다.

 

그들은 신들이 '신성한 주식'인 옥수수를 갖다 준다고 믿었고, 옥수수를 신으로 숭배했다. 또한 길에 떨어진 옥수수를 보고도 줍지 않는 자는 지옥에서 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옥수수를 술과 바꾸는 행위는 하늘에 대한 불경으로 가뭄을 초래한다는 민간전설도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인간의 탄생과 성장을 옥수수와 상징적으로 연관시키는 풍습도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옥수수 위에서 자르고, 이 옥수수 낟알을 파종하여 얻은 수확의 일부를 신에게 바쳤으며, 그 나머지로 아이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클 때까지의 식량도 탯줄을 자를 때 피를 묻힌 옥수수 종자에서 나온 수확으로 충당하여 옥수수와 사람의 일체감을 강조했다. 이 풍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신대륙의 원주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옥수수가 콜럼버스의 항해 직후 유럽에 들어왔다. 16세기에 신대륙에서 은이 대량으로 들어와 물건의 가격 인상과 함께 밀의 가격도 덩달아 인상했다. 이에 왕실에서는 보리, 귀리, 호밀과 같은 전통작물보다, 단위면적당 소출량이 2~3배나 많고 재배를 위해 1년에 단지 50일의 노동만을 필요로 하는 옥수수 재배를 적극 권장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에 옥수수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소비 역시 증가되었다.

 

흰색의 금 - 설탕

 

설탕은 기원전 8,000년경, 남태평양의 뉴기니에서 시작, 필리핀, 인도, 중국, 아랍을 거쳐 스페인에 전해졌다. 그 후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대서양 상의 카나리아 섬에 사탕수수밭을 만들었다. 뒤이어 포르투갈인에 의해서 브라질의 북동부 해안가에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했다. 설탕이 감자의 4배, 밀의 10배나 되는 열량을 내는 고칼로리 식품으로 알려지자 유럽 노동자의 필수 식료품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유럽에서 설탕의 수요가 폭발했고 설탕은 수익성이 좋은 '흰색의 금'이 되었다.

 

신대륙에서는 브라질의 수도였던 살바도르가 설탕 생산의 중심지로서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금은 광산을 찾을 수 없었던 포르투갈인은 브라질의 북동부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하고, 흑인노예를 끌어들여 설탕산업을 활성화시켰다. 브라질은 1542년에 제당소를 만들어 설탕을 수출한 이래, 유럽을 위시한 세계 여러 나라에 설탕을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브라질의 바이아, 헤시피, 페르남부쿠 지역을 점령하면서 노예무역과 함께 설탕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645년, 현지인의 반란으로 인해 네덜란드인은 설탕산업을 접어야 했다. 그 후 네덜란드인은 흑인노예들을 데리고 카리브 해의 프랑스령 안티야스로 설탕산업의 거점을 옮겼다. 카리브 해, 특히 쿠바는 사탕수수 재배의 최적지였다. 우기의 더운 여름 날씨는 사탕수수의 생장에 유리했고, 온화한 겨울은 설탕 정제에 적합했다. 16세기 이래 쿠바를 위시한 카리브 해역의 섬들은 유럽시장을 겨냥한 거대한 설탕 생산지였다. 유럽인은 이곳에 흑인노예를 이용한 기업형 제당소를 만들었다.

 

사탕수수는 이렇게 남태평양에서 출발해 아시아,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자리를 잡은 '글로벌 작물'이 되었다. 사탕수수는 '아시아의 작물, 유럽의 자본, 아프리카의 노동력 그리고 아메리카의 대지가 결합된 진정한 국제적 작물'이었다.

 

각주
1 메소아메리카: 멕시코의 동부와 남부를 포함해서, 과테말라와 벨리스 및 엘살바도르의 전 지역, 온두라스의 서부와 남부, 그리고 남쪽으로는 코스타리카 등 중앙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을 망라하는 지역이다

출처 : 성호 콘덴서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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