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스크랩] 잉카제국의 내분 .......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8. 26. 17:02
728x90

 

잉카제국 정복

 

정복자 피사로

 

코르테스가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은 스페인 본국에 많은 모방적 추종자를 낳았다. 피사로도 이들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으로서 많은 정복자를 배출한 피사로 가문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아버지 곤살로는 호방한 군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천민 출신이었다. 피사로는 서자였기에 돼지치기로 성장했지만, 그에게는 정복자 피사로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피사로의 형제들은 비록 이어받은 피가 서로 달랐지만 결속력이 매우 뛰어나 형제 모두가 신대륙 정복에 참여했다. 서자인 피사로에게 유럽 땅은 그의 신분적 구속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는 시선을 신세계로 돌렸다.

 

피사로는 1513년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원정대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태평양을 본 유럽인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피사로는 파나마에서 남쪽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내려가면 엄청나게 부유한 제국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피사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는 탐험을 추진하고 싶었지만, 결과가 불확실하고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어야만 하는 이 탐험을 결행할 능력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제 페르난도 데 루케와 손을 잡고 1524년, 드디어 파나마 남쪽을 향해 탐험을 시작했다. 파나마 지역에서 소유하고 있던 농장과 원주민에 대한 특권을 뒤로 하고 피사로가 새로운 정복의 길에 나선 것이었다. 피사로는 그의 동료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함께 2척의 배로 열대 특유의 밀림으로 뒤덮인 남아메리카 해안을 탐사했지만, 모기떼에 시달리기만 했을 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알마그로는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한 쪽 눈을 잃기까지 했다.

 

이슬라 델 가요의 13인

 

1526년에 두 번째 탐험에 나선 피사로와 알마그로는, 본격적인 탐험에 앞서 남쪽으로 부하들을 보냈다. 얼마 후 남쪽을 탐험했던 부하들이 돌아왔다. 부하들은 남쪽에 '우아이나 카팍'이라는 통치자가 금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곳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사로에게 알렸다. 그곳은 바로 지금의 페루와 에콰도르 국경에 위치한 툼베스였다. 피사로는 탐험대원들과 원주민 통역을 배에 태우고 툼베스로 향했다. 그들과 대적하기에 병력의 수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피사로는, 파나마로부터 증원군을 요청하기 위해서 일부는 파나마로 돌려보내고 '이슬라 델 가요(Isla del Gallo, 닭의 섬)'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배가 돌아오자 피사로와 함께 남아 있던 사람들은 힘들고 지친 나머지 파나마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피사로의 결심은 확고했다. 의기소침해진 동료들 앞에서 피사로는 해안가 모래밭에 선을 긋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동지들이여, (선 바깥쪽을 가리키며) 저쪽은 죽음, 고난, 굶주림, 헐벗음, 폭풍우를 의미하고, 이쪽은 편안함을 의미한다. 저쪽을 선택하면 그대들은 파나마로 돌아가 가난해지는 것이고, 이쪽을 선택하면 그대들은 부를 얻을 것이다. 훌륭한 스페인인으로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라!
피사로의 외침은 단호했다. 결국 12명의 추종자가 남았는데, 후에 이 12명의 추종자와 피사로를 '이슬라 델 가요의 13인'이라고 불렀다. 그 후 피사로는 파나마 총독의 증원군의 도움을 받아 잉카의 도시 툼베스에 상륙했다.

 

피사로의 불타는 정복욕

 

툼베스에 상륙한 정찰대는 잉카인이 가지고 있던 많은 양의 금과 은, 그리고 화려한 복장 등에 대해 피사로에게 보고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잉카문명에 대해 보고 받은 피사로는 자신의 정복욕을 더욱 더 불태웠다.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갔다. 왕에게 정복에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1532년 피사로는 63명의 기병과 2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잉카제국을 정복하러 페루로 갔다.

 

당시 잉카제국은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죽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우아이나 카팍의 아들인 우아스카르는 그의 이복형 아타우알파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고, 우아스카르와 그의 가족은 모두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이렇게 부당하게 왕위를 찬탈하여 잉카제국을 통치하고 있던 아타우알파는 카하마르카라는 도시의 중앙광장에서 피사로 일행을 만났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가 이끄는 정복자들에게 커다란 황금 술잔에 담은 옥수수술(치차)을 제공했다. 정복자들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위협에 가까운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마셨다.

 

이렇게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피사로와의 1차 만남이 끝나고, 그 다음 날 피사로는 곧바로 황제를 납치하기로 결정했다. 2차 만남에 나온 아타우알파 황제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황제는 앵무새 깃털로 호사스럽게 장식한 가마에 올라탄 채,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근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피사로는 수백 명의 부하들을 주변 건물에 매복시켜 놓았다. 이윽고 사제가 원주민 통역자를 데리고 나와서 황제 앞으로 나가 한 손으로 성호를 긋고 다른 손으로 성서를 내밀면서 "나는 그대에게 신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노라"라고 말했다. 이에 아타우알파는 성서를 빼앗아 귀에 대보고는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이 잉카 황제의 불경스러움에 피사로는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황제의 팔을 잡아 가마에서 끌어내렸다. 화승총과 말 등을 사용하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던 스페인 병사들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거의 비무장 상태였던 많은 수의 잉카인을 학살했다. 포로가 된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자기를 풀어주면 그 대가로 커다란 방을 황금으로 채워주겠다고 약속했다.

 

카하마르카 전투.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카하마르카 중앙광장에서 아타우알파 황제를 사로잡아 화형에 처한 후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로 이동하여 잉카제국을 점령했다.
 
잉카제국의 정복과 내분

 

그러나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1532년 아타우알파를 화형에 처했다. 화형은 잉카인에게 가장 잔인한 처벌이었다. 잉카인은 육체가 없어지는 화장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타우알파는 화형 대신 목이 잘린다는 조건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까지 했다. 피사로와 그 부하들이 쿠스코와 파차카막의 신전들을 거의 약탈하다시피 해서 모은 황금과 은 공예품은 엄청났다. 총 11톤의 금 공예품은 모두 녹여서 1만 3,420파운드의 순금으로 만들었고 2만 6,000파운드의 순은도 확보했다. 피사로는 이 전리품을 보병 1인당 금 45파운드, 은 90파운드를 지급했고 기마병에게는 이것의 2배를 지급했다.

 

1533년,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로 군대를 신속히 이동시켜서 잉카제국을 점령하고 1535년에는 리마를 건설했다. 그 후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아타우알파의 동생 망코 카팍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다. 정복의 쾌감에 도취해 있던 스페인 정복자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발생했다. 피사로는 그의 오랜 동료였던 알마그로와 서로 주도권을 놓고 싸웠다. 결국 알마그로는 피사로의 손에 죽었고, 피사로는 1541년에 다시 알마그로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잉카제국의 정복 후,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나는 이곳에 금을 찾으러 왔지 농부처럼 땅을 파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한 피사로의 말처럼 엄청난 양의 금을 얻었다. 1492년부터 1600년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옮겨진 금의 양은 총 75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출처 : 성호 콘덴서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