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발견과 정복
브라질의 대표 원주민 - 투피족
브라질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원주민은 투피족이었다. 이들은 많은 부족을 받아들여 부족국가를 형성했는데, 지도자는 따로 없었고 전쟁터에서 가장 용감했던 전사를 각 거주지역의 지도자로 선정했다. 투피족은 자신들이 위협을 느낄 때나 많은 사람의 동원이 필요할 때에만 모였고, 벌목, 추수, 사냥, 고기잡이 등의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이들은 강과 해안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수영 솜씨와 카누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특히 투피족이 짧은 기간 내에 브라질 전역에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카누 때문이었다.
주로 브라질 해안 전역에 거주했던 투피족은 포르투갈의 오지 개척단인 반데이란치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문화가 브라질 전역에 전파되었으며, 17세기에는 아마존 지역까지 진출했다.
카브랄의 대서양 횡단
브라질에 최초로 상륙한 사람은 스페인 출신의 핀손이었다. 그는 1499년, 4척의 배로 구성된 탐험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출발해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1500년 1월에 오늘날의 브라질 동북부 페르남부쿠 주에 도착했다. 이후 핀손은 아마존 하구지역을 비롯한 북쪽지방의 여러 지역을 탐험했다.
포르투갈의 브라질 탐험은 토르데시야스조약에 의해 확정된 자국의 영토에 대한 본격적인 탐험을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동 마누엘 왕은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고, 바다에 대한 경험은 없지만 유능한 항해사의 능력을 갖춘 32세의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을 선장에 임명했다. 카브랄은 1500년 3월, 15척의 배에 군인과 예수회 선교사, 승무원을 포함해 1,500명과 함께 리스본을 출발했다. 카브랄의 함대는 카보베르데 인근에서 항로를 이탈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바이아 주 포르투 세구루에 도착하여 포르투갈인으로는 처음으로 브라질의 존재를 확인했다. 리스본을 출발한 지 한 달 반 만이었다. 이때 포르투갈인은 처음으로 원주민과 대면했고, 동행했던 선교사는 브라질 땅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이처럼 카브랄의 대서양 횡단은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식민사업을 위해 '브라질'이라는 유일하고 중요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파우 브라질 - 브라질
그 후 1501년에 포르투갈 왕실은 최초로 브라질 해안 답사를 위한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은 인도와의 직접 교역을 통해서 향료와 고추 등 동양의 특산물을 대량 들여오는 등, 인도와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해가고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금과 상아, 노예와 다이아몬드 등을 들여왔는데, 이는 당시 포르투갈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특별한 자원 보유 여부가 확실치 않았던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원정대는 이렇다 할 귀금속을 발견하지 못하고 염료재료로 이용할 수 있는 다량의 파우 브라질(Pau-Brasil)만을 싣고 귀환했다. 이 파우 브라질은 붉은 염료를 얻을 수 있는 나무였다. 키가 8~12미터, 몸통 지름은 80센티미터~1미터에 이르는 이 나무는, 주로 리우그란데두노르테 주에서 리우데자네이루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안지역의 밀림에 분포되어 있었다. 초기의 파우 브라질 채취는 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원주민들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채취 즉시 배로 옮겨져 포르투갈로 향했다. 인류학자 쟝 드레비가 "채취된 파우 브라질 나무는 원주민들에 의해 15~20레구아(1레구아는 약 5.5킬로미터)나 되는 밀림을 뚫고 운반되었다"고 말할 만큼 이 나무의 채취와 운송은 매우 힘들고 고통스런 작업이었다.
지금 현재의 '브라질'이라는 국명은 바로 이 '파우 브라질'이라는 나무를 채취하던 사람을 일컫는 '브라질레이루(Brasileiro)'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포르투갈 왕실은 인도에서 들여오는 특산물에 비해 파우 브라질이 그다지 경제성 있는 자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나무의 채취와 운송, 그리고 판매의 권한을 1502년에 유태인 개종자인 페르난두 지 노롱냐에게 주었다.
그 후 1차 원정대에 이어 2차 원정대가 1503년 브라질에 파견되었지만, 다른 귀금속을 얻지 못하고 역시 다량의 파우 브라질만 싣고 귀환했다.
포르투갈 선원과 브라질 원주민의 만남.
이처럼 1500년대 초기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거의 방치된 상태로 남겨두었다. 이는 브라질에는 인도에 비해 상업적 가치가 있는 상품이 없었고, 식민사업을 바로 전개할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울창한 열대림으로 인해 사람의 거주와 지리적 탐험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포르투갈도 당시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총 200만 명에 불과해서 브라질의 개척사업에 투입할 노동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끊이지 않았던 금과 은의 발견 소식으로 인해,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에서의 귀금속 발견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 후, 브라질의 정복사업은 '엔트라다(Entrada)'와 '반데이란치(Bandeirante)'에 의해 행해졌다. 엔트라다와 반데이란치는 브라질 중서부 지역의 정복을 위해 파견된 개척 원정단이었다. 엔트라다는 포르투갈어로 엔트라(entrar, 들어가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는 탐험대'를 의미했다. 주로 군인으로 구성되었던 이 탐험대는, 금 발견 및 원주민 사냥을 목적으로 했던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의 공식 원정단이었다. 이들은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조약으로 정해진 브라질 영토 중에서 주로 북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반면에 반데이란치는 '깃발'이라는 의미로 '기를 들고 내륙으로 침투하는 탐험대'를 의미하며, 원주민 사냥, 금 발견 외에도 도망친 흑인노예와의 전쟁, 그리고 식민사업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었다. '반데이란치'는 17, 18세기에 들어와 주로 상파울루를 거점으로 구성되었으며, 식민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운영했기 때문에 토르데시야스조약에 의해 정해진 경계를 무시하면서 스페인령까지 침투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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