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대양이 시작되는 곳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7. 2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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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팽창정책

 

포르투갈 = 항구 + 서쪽

 

'포르투갈(Portugal)'은 그 이름이 라틴어의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 즉 '항구'라는 의미를 지닌 포르투스(Portus)와 '서쪽'의 뜻을 가진 칼레(Cale)의 합성어에서 왔다. 이처럼 포르투갈은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서양에 면한 나라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포르투갈은 지중해와 북유럽을 오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십자군전쟁 시에는 원정군에게 물자를 보급하거나 원정군의 함대가 일시적으로 정박하는 곳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이라는 명칭에서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국기에서도 그들의 해양왕국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포르투갈의 국기는 바탕색이 좌우 각각 녹색과 적색인데, 녹색은 15, 16세기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을 때 포르투갈인이 가졌던 희망을 상징하며, 적색은 이를 위해 수많은 포르투갈인이 흘린 피와 희생, 그리고 고통을 상징한다. 가운데 원형모양은 지구의(地球儀)로서, 포르투갈인이 발견했던 새로운 세계와 그곳에 살던 여러 민족과 행했던 교류를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미지의 대양을 항해하는 데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위치에 있었던 포르투갈은, 명칭과 국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대지가 끝나는 곳이자 대양이 시작되는 곳이었고, 지중해 역사에 이어 대서양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 - 동 주앙 1세

 

포르투갈의 제1왕조였던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왕인 동 페르난두가 후손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동 페르난도의 외동딸 베아트리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인 카스티야의 돈 후안 1세가 포르투갈을 합병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포르투갈 국민은 일제히 반대하면서 당시 아비스 기사단의 수장이었던 동 주앙을 국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그 후 카스티야는 포르투갈을 침공하여 전쟁을 벌였지만 포르투갈에게 패배했다. 1385년 아비스 기사단의 수장인 동 주앙 1세의 등극과 함께 보르고냐 왕조가 막을 내리고, 제2왕조인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동 주앙 1세는 카스티야와 평화조약을 맺어 독립전쟁을 완전히 종결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전쟁 귀족'이 자신들의 힘을 분출할 곳을 찾았고, 그 당시 해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아비스 왕조의 설립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상인계층도 경제적인 불황 속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 주앙 1세는 국내의 불만세력들의 관심사를 외부로 돌려, 자신의 중앙집권정책을 강화하기 위해서 해외 영토 개척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동 주앙 1세는 15세기 포르투갈 번영의 초석을 다졌을 뿐 아니라, 지리상의 발견과 탐험에 있어서 포르투갈이 해양왕국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을 놓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포르투갈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프리카 대륙 진출의 교두보였던 세우타를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우타 정복

 

지금의 모로코 북부에 위치해 있는 세우타는 이슬람 문명권과 기독교 문명권 간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유럽의 세력권이 그동안의 지중해 중심에서 대서양 중심으로 바뀌는 출발 지역이었다. 세우타는 또한 바다 건너편의 지브롤터와 연결되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세워졌다는 전설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포르투갈은 1415년, 바로 이 세우타 정복을 시작으로 대서양 남부 연안의 아프리카, 더 나아가 인도 항로와 아메리카 식민지를 개척해나갔다. 이 세우타 정복전쟁에 200여 척의 전함에 1,700명의 수병, 1만 9,000명의 전투병, 그리고 항해왕자 엔리케를 포함한 많은 귀족이 참여했다.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정복함으로써 아프리카 대륙에 전초기지를 마련하여, 아프리카 연안의 대서양과 아프리카 내륙지역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왕족이기는 했지만 지도력이 검증되지 않았던 엔리케 왕자의 능력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엔리케는 세우타의 아랍 상인으로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며 대서양의 남쪽으로 더 내려갈 야망을 키울 수 있었다.

 

항해왕자 엔리케와 사그레스 성

 


항해왕자 엔리케.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연 동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인 엔리케 왕자는,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의 전초기지가 될 세우타를 점령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엔리케 왕자는 동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주앙 1세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연안의 탐사작업을 주도했다. 1419년에는 대서양 상의 마데이라와 아조레스 군도에 원정대를 파견하여 식민사업을 전개했다. 이는 유럽 국가에 의한 최초의 대서양 원정이었다. 그 후 엔리케 왕자는 세네갈, 카보베르데,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진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아조레스 군도와 카보베르데는 후일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이러한 모든 업적은 엔리케 왕자가 세웠던 사그레스 성에서 시작되었다. 이 성에는 세계 각지에서 우수한 조선기사, 항해기술자, 세공업자, 탐험가, 지리학자, 천문학자가 모여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항해와 지리적 지식을 서로 교환하고 연구했다. 뿐만 아니라 사그레스 성에는 각종 기행문과 지리서적, 각국의 지도와 항해관련 서적이 모두 수집되었다. 자료가 축적되어감에 따라 이 자료를 보려는 전문가들이 세계 도처에서 모여들었고, 이들이 나눈 대화와 연구가 다시 기록으로 남아 사그레스 성에 보관되었다.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사그레스 성은 일종의 도서관이었고, 포르투갈인에게 사그레스는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세상의 끝'이었다. 또한 사그레스 성은 포르투갈의 해외팽창에 두뇌 역할을 했던 곳이었고, '항해왕자'라는 칭호를 얻었던 엔리케가 해외팽창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