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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스키와 키푸스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7. 2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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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문명(2)

 

콘티키 비라코차와 우아카

 

잉카인은 잉카제국 최고의 신이었던 태양신 인티를 섬기면서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이 태양신과 함께 가장 많은 숭배를 받았던 신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던 우이라코차(Huiracocha) 또는 비라코차(Viracocha) 신이었다. 이 신은 원래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 있던 티아우아나코 문명의 신이었으나 그 발생 장소가 잉카와 비슷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잉카인에게 알려진 신이었다. 이 비라코차 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신화가 전해 내려온다.

 

빛이 없는 어두운 밤뿐인 오랜 옛날에 한 호수에서 왕이 솟아났는데, 그의 이름은 콘티키 비라코차1)였다. 그는 하늘과 땅을 만든 후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 살게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비라코차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불친절하게 대했다. 이에 화가 난 비라코차는 사라졌다가 다시 티아우아나코에 돌아와, 전에 만들었던 것을 모두 돌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들고 태양에게 하늘을 돌라고 명령했다. 비라코차는 또한 돌멩이를 이용해서 다시 사람들을 만들고 그들을 다스릴 지도자와 많은 여자를 창조했다. 그리고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많은 부족을 창조한 후, 자신의 신하들과 함께 땅 위를 걷듯이 바다를 건너서 사라졌다.


잉카인은 비록 태양신을 섬겼지만 태양신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수많은 신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잉카인은 또한 '우아카(Huaca)'라고 하는 매우 독특한 종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우아카는 '태양의 신전 안에 자리를 잡지 못했을 뿐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 또는 그 신의 상징'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보통의 인간을 일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초인적인 힘이나 그런 초인적인 힘을 가진 사람을 '우아카'라고 불렀다. 또한 손가락이 다섯 개인 손이 일반적인 것이라면, 손가락이 여섯 개인 손을 가진 사람 역시 우아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 절벽, 작은 신전, 마을 입구에 위치한 기아한 모양의 바위, 제단, 무덤, 길 등 실로 우아카는 그들의 모든 생활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잉카제국의 신앙의 심지인 코리칸차로부터 반경 20킬로미터 이내에는 이 우아카가 모두 332개가 있었다. 이 우아카들은 코리칸차를 중심으로 세케(Seque, 케추아어로 '선(線)'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41개의 보이지 않는 직선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이 '선'이 왜 만들어졌는가를 나타내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잉카인은 멕시코의 아스텍인처럼 태양이 죽어서 다시 떠오르지 않는 날이 곧 올 것이라 걱정해서, 태양을 좀 더 튼튼하게 고정시켜 세케를 만들었다. 잉카인의 태양의 신전에는 항상 인티와타나(케추아어로 '태양을 묶어두는 기둥'이라는 의미)라는 1미터 높이의 네모난 돌기둥이 있었는데, 이는 태양이 떨어져 죽지 않도록 이 기둥에 태양을 묶어두려고 했던 것이다.

 

잉카제국의 사회

 

잉카(왕)의 지배하에 있던 사람들은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과 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그 대신 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엄격한 법들을 지켜야만 했다. 잉카에서는 다른 사람이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범죄자를 엄하게 처벌했다. 잉카제국에서 가장 큰 죄는 신과 잉카에 대한 도전이나 반역행위였다. 잉카의 법은 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돌로 짓이겨 죽이기, 몽둥이로 때려죽이기,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기, 맹수 우리에 갇혀서 죽이기 등 잔인한 방법으로 처벌했다.

 

잉카사회는 또한 도둑질, 거짓말, 게으름을 죄악시했다. 도둑질을 한 자는 처벌 외에도 자기가 훔친 것의 2배만큼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했고, 만약 경제적으로 그럴 능력이 없으면 평생 하인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주인이 이를 거부하면 즉시 사형에 처해졌다. 게으름을 피우고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은 세금 포탈을 의미했다. 잉카의 조세법은 현물 대신에 왕의 땅을 경작하고 노역을 하는 등의 노동력을 지불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게으름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많은 사람 앞에서 심한 채찍질을 당했다. 또한 자기 몸을 씻지 않고 그릇을 더럽히는 게으른 여자에게는, 광장에서 커다란 물통을 가져다 놓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팔과 다리를 씻게 한 다음, 그 물을 모두 마시게 했다.

 

그 이외에도 처녀를 강간한 자는 채찍으로 때린 후 땅에 엎어놓고 위에서 무거운 돌을 떨어뜨려 죽였다. 또한 여성은 천시되었기 때문에 간통한 여자를 남편이 죽이는 것은 허용되었으나, 반대로 부정한 남편을 죽인 여자는 거꾸로 매달아 사형에 처해졌다.

 

카미노 레알 - 차스키

 

잉카제국은 북으로는 콜롬비아 남부지역에서 남으로는 칠레 중앙부의 마울레 강, 아르헨티나 북부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이렇게 넓은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원활한 연락이 매우 중요했다. 잉카제국은 이를 위해서 '카미노 레알(Camino Real, 왕도(王道))'이라고 불리는 도로망을 만들었다. 안데스산맥에 있는 이 길은 폭은 1미터에서 6미터까지 비교적 좁은 길로써 총 길이가 5,229킬로미터에 달했고, 해안사막을 관통하는 해안도로는 총 길이가 4,054킬로미터로 그 폭은 약 7.3미터로 비교적 일정했다.

 

바퀴를 사용하지 않았던 잉카인이 이렇게 길을 거미줄처럼 정비한 까닭은 교역과 물자 수송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군인을 빨리 이동시키기 위한 군사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서 원정군이 길을 떠날 때에는 항상 새로 길을 넓히고 중앙정부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연락망을 구성했다. 정복이 끝난 다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명령과 보고가 긴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연락망을 유지하는 데 이 길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도로망을 이용한 연락제도로는 탐보 제도와 차스키 제도가 있었다. 탐보는 약 20~30킬로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역으로, 숙박시설과 함께 왕과 태양신의 창고가 있었다. '차스키'라는 말은 '교환하다, 주다, 받다'라는 뜻의 케추아어로, 릴레이 경기 주자들이 바통을 주고받듯이 연락을 주고받는 제도였다. 차스키는 국가의 기밀을 취급했기 때문에 출신 성분이 좋은 귀족의 아들 중에서 선발했다. 그리고 만약 정보를 잘못 전달했거나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누설했을 경우 가차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 차스키들은 1.2킬로미터마다 있는 오두막집에서 24시간 대기했는데, 연락을 받은 차스키는 전력질주해서 연락 내용을 다음 차스키에게 전달했다. 이러한 소식은 아무리 먼 지역이라도 이틀이면 쿠스코나 지방에 전달되었다. 해안가에서 잡은 생선을 쿠스코에 있는 왕의 식탁에 싱싱한 상태로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차스키 제도는 일사불란하게 운영되었다.

 

결승(結繩)문자 - 키푸스


결승(結繩)문자 '키푸스'.
그들만의 문자가 없었던 잉카인은 다양한 굵기와 색깔의 끈에 여러 종류의 매듭을 사용해서 물건의 종류나 숫자 등을 기록하였다.
 
차스키들은 메시지를 전달할 때 키푸스('키푸(Quipu)'는 '매듭' 또는 '매듭을 맨다'라는 의미다)를 사용했다. 키푸스는 다양한 굵기와 색깔을 가진 끈에 여러 종류의 매듭을 서로 다른 위치에 만들어, 여기에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해 정보를 기록하는 일종의 결승문자다.

 

끈의 색깔은 기록하는 물건의 종류를 나타냈다. 예를 들어, 노란색 끈은 황금을, 하얀색 끈은 은을, 붉은색 끈은 군인을 나타냈다. 매듭의 형태로 숫자를 표시했는데, 십진법의 수학체계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옭매듭은 1에 해당되며, 이 옭매듭을 한 번 더 돌려 감으면 2, 한 번 더 하면 3, 이런 식으로 10까지 이어졌다. 결국 매듭의 형태, 즉 감은 횟수에 따라서 의미하는 숫자가 달랐다.

 

그리고 매듭이 나무막대기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랐다. 예를 들어, 키푸스를 자연스럽게 들고 있을 때 맨 위 매듭은 가장 높은 수치인 만 단위를 나타냈고, 다음은 그 아래인 천 단위, 백 단위 순으로 표시했다. 한 마을의 인구를 나타낼 때에도 이와 같은 매듭의 위치를 사용했다. 맨 위의 매듭이 60세 이상의 노인 인구를 표시한다면, 그 밑에 있는 매듭은 50세에서 60세 사이의 인구를 표시하는 식이었다.

 

이 키푸스를 담당하는 자는 키푸 카마욕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땅의 분배, 사람의 수, 생산량, 생산품목, 창고의 재고량, 세금납부 등 모든 행정사항을 처리했다.

 

잉카인의 건축술

 

쿠스코에 있는 태양 신전이나, 수많은 담벼락, 삭사와망 요새, 마추픽추 등 잉카인이 만든 석조건물의 정교함은 그 어떤 건축물에도 비할 수 없다. 잉카인은 수십, 수백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들을 면도칼이나 종이 한 장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맞추어서 '외계인이 와서 쌓았다' '잉카 사람들은 돌을 부드럽게 하는 풀을 알고 있었다' 등의 억측을 낳게 할 정도였다.

 

잉카인이 기록을 남기지 않은 탓에 그들의 건축과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미완성으로 남겨진 건축의 흔적과 초기 스페인 침략자들의 목격담을 통해서 그 과정과 방법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먼저 건축계획이 세워지면 터를 닦고 건물에 사용될 돌을 가까운 채석장에서 1차 가공하여 운반해왔다. 가깝다고 해야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재료로 쓰일 돌의 색깔이나 품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아무 돌이나 사용하지 않았다. 에콰도르 남쪽 토메밤바에 신전과 궁전을 지을 때에는 무려 1,400킬로미터나 떨어진 쿠스코에서 그 재료가 되는 돌들을 운반해왔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멀게는 1,000킬로미터 이상 되는 곳에서 돌을 가져왔는데, 잉카에는 코끼리나 황소, 말처럼 짐을 끌게 할 힘센 동물도 없었고 바퀴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전히 사람의 힘에 의존해야 했다. 이렇게 운반한 돌들을 가지고서 먼저 아랫돌을 놓고 그 위에 올라갈 돌의 아랫부분을 어느 정도 가공한 다음, 아랫돌의 윗면 부분을 정밀하게 다듬어서 쌓고, 옆면도 마찬가지로 다듬기와 놓기를 반복하면서 쌓았다. 이 모든 작업은 석공들의 눈대중과 감각으로 행해졌다. 이렇게 잉카인의 석조기술은 매우 정교해서, 1950년 쿠스코를 덮친 대지진 때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건설한 많은 건축물은 파괴되었으나 잉카인이 만든 건축물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각주
1 콘티키 비라코차: 케추아어로 '콘(Con)'은 '번개가 칠 때 떨어진다는 돌'이고, '티키(Tiki)'는 '근원' 또는 '시초'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