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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배꼽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7. 2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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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문명(1)

 

 

마추픽추 전경.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의미를 지닌 케추아어다. 2,400미터의 고지에 위치한 마추픽추는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공중 도시'라고도 불린다. 이 도시는 1460년에 세워졌는데 그로부터 100년 후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침입하자 잉카의 지도자들은 이곳을 버리고 떠났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잊혀 있다가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이 발견했다.
 

 

마추픽추에 있는 '태양의 신전'이다.
 
세계의 배꼽 - 쿠스코

 

잉카문명은 서기 12세기경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기원했다. 이 문명은 수세기 동안 페루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차빈, 모체, 나스카, 티아우아나코 문명들을 정복해서 정치, 경제, 문화, 언어 및 종교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이들이 건설한 잉카제국은 콜롬비아에서 칠레의 마울레 강까지, 그리고 태평양에서 안데스의 동부 계곡지대까지 안데스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 거대한 제국 내에는 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살고 있었다. 이렇게 독자성이 강한 여러 민족을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모아서 다스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잉카인은 다른 부족을 점령했을 때 제일 먼저 점령지에 행정관을 배치해 통치구조를 잉카식으로 고치고, 그들에게 잉카의 태양신을 최고신으로 모시게 했다. 또한 지도자들에게 잉카의 언어인 케추아어를 가르쳐서 이들을 잉카제국의 통치권 속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그 지역의 다음 왕이 될 젊은 왕자를 수도 쿠스코로 데려와서 잉카식 교육을 시켰다. 후계자가 쿠스코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에는 반란을 꾀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에 따른 정책이었다. 반란의 낌새가 있을 때에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주민을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여 반란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서 잉카제국 내에서는 반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거대한 잉카제국은 '케추아어'라는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었다.

 

이 잉카제국은 바로 '배꼽'이라는 의미를 지닌 쿠스코를 중심으로 막강한 제국을 구축했다.

 

태양신과 금 막대기

 

잉카인이 언제부터 쿠스코 골짜기에서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티티카카 호수 근처나 쿠스코 남쪽 어딘가에서 이주해왔으리라는 추정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잉카제국의 기원신화들 중에 '태양신과 금 막대기에 관한 신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안데스산맥에 인간들이 짐승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를 불쌍히 여긴 태양신 인티가 이들을 교화시키고 신을 모실 수 있도록 자신의 아들 '망코 카팍'과 딸 '마마 오크요'를 지상으로 내려 보냈다. 태양신은 자식들에게 한쪽 팔 길이보다 약간 짧은 두 손가락 굵기의 금 막대기를 주며 "너희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 금 막대기를 땅에 던져라. 이 금 막대기가 땅속으로 사라지게 되면 그 자리에 너희의 나라를 세워라. 그리고 자비로운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듯이 세상의 인간들을 대하라. 나는 인간들을 위해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이제 그들은 짐승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남매이자 부부인 이들은 가는 곳마다 계속 금 막대기를 땅에 던졌다. 어느 날 이 금 막대기가 땅속으로 사라졌는데 이곳이 바로 쿠스코의 한 골짜기였다.

 

이에 망코 카팍은 자신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마마 오크요에게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곳에 머물라고 명령하셨다. 지금부터 각자 헤어져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모아 여기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망코 카팍은 북쪽으로, 마마 오크요는 남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들은 태양신으로부터 이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아 이곳에 왔으며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설명했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망코 카팍과 마마 오크요는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집 짓는 법을 가르쳐 쿠스코를 건설했다.

 

망코 카팍은 자기를 따라온 사람들이 살 곳을 '윗마을(아난사야)', 여동생인 마마 오크요는 자기를 따라온 사람들이 살 곳을 '아랫마을(우린사야)'이라고 불렀다. 그 후, 잉카의 땅에는 모든 도시와 마을들이 항상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었다.

 

제국의 형성

 

잉카는 본래 쿠스코 계곡 내의 작은 부족국가였다. 이 작은 부족국가가 제대로 된 왕국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제9대 왕 파차쿠텍 잉카 유팡키(재위 1438~1471년)부터였다. 당시 중부 산악지역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찬카족은 15세기 초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서 아푸리막(케추아어로 '크게 말하는 자'라는 의미다) 강을 건너 쿠스코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에 당시 잉카의 왕이었던 비라코차는 겁을 먹고 달아났다. 이때 바로 파차쿠텍이 나타나 찬카족을 물리쳤다. 그 후 파차구텍 왕은 페루 남부 중앙고원은 물론, 티티카카 호수 지역, 아마존의 삼림지대에 인접한 우루밤바 강의 하류 유역 등을 정복했고, 쿠스코 시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으며, 농지분배, 조세제도 확립, 종교의식의 체계화 등 제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무엇보다도 케추아어를 잉카제국의 공용어로 삼아 통일된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다.

 

1471년, 파차쿠텍 잉카 유팡키의 뒤를 이어서 두 아들 중 한 명인 투팍 잉카 유팡키가 계승했다. 그는 외교술과 군사력을 적절히 구사하여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남쪽으로 내려가 칠레의 마울레 강까지 진출했으며 북쪽으로는 키토를 복속시켰다. 북부 해안지역에 있던 치무 왕국도 함락시켰다. 투팍 잉카 유팡키 왕은 자신의 이복동생과 결혼하여 아들 우아이나 카팍과 딸 코야 쿠실마이를 낳았다. 그는 죽기 전에 이 두 남매가 결혼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카제국의 11대 왕이 된 우아이나 카팍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친동생과 결혼했다. 우아이나 카팍은 페루 북부 해안지방을 정복하고 해안도시 툼베스를 건설했다. 그리고 그는 키토(지금의 에콰도르 수도)와 오늘날의 콜롬비아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여 잉카제국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시켰다. 그가 키토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잉카제국에는 두 파벌, 즉 쿠스코에 남아 있던 왕족들과 우아이나 카팍을 따라 카토에 와서 전쟁에 참여했던 왕족들 간의 파벌이 형성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우아이나 카팍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럽에서 건너온 새로운 전염병인 천연두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우아이나 카팍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잉카제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이 두 파벌 간의 세력다툼이 극심해졌다.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쿠스코의 왕족들은 순수한 태양의 혈통을 가진 맏아들인 우아스카르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키토에 있던 왕족들은 우아스카르를 왕으로 인정하고 쿠스코로 돌아간다는 것을 자신의 권력 상실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키토에 계속 머물면서 우아이나 카팍의 첩의 아들이었던 아타우알파를 왕으로 옹립시키고자 했다.

 

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쿠스코에 있던 와스카르는 아타우알파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고는, 키토로 군대를 보내 아타우알파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와스카르의 군대는 오랫동안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잉카 최강의 아타우알파 정예부대를 무찌르기는커녕 오히려 전멸했다.

 

그 후, 아타우알파는 쿠스코에 남아 있던 왕족들을 모두 죽이고 1532년 잉카제국의 13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해안지방에서 올라온 전령으로부터 긴 수염이 난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은 바로 스페인의 정복자들이었다.

 

통치의 기본구조 - 아이유

 

잉카제국이 위치한 안데스 산지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계단식 밭과 농수로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돌을 쌓아 둑을 만들고 높은 지대에 있는 수원지로부터 물을 끌어오는 일은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재해 때문에 수확량이 적을 경우 생활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따라서 외부의 도움 없이도 모든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공동체가 필요했는데, 이 공동체가 바로 '아이유(Ayllu)'였다.

 

아이유는 아스텍 문명의 사회구조에 있어서 기본단위였던 칼푸이에 해당했다. 이는 공동의 토지로 협동생산 등의 공동 경제활동을 하며 가부장 중심의 단일한 조상을 가진 씨족공동체였다. 중앙정부는 아이유에 속해 있는 주민이 생활하고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의 토지를 임차해주었다. 이 토지는 모두 삼등분해서 경작되었는데 하나는 태양신의 몫, 또 하나는 잉카(왕)의 몫, 나머지는 공동체의 몫이었다. 태양신의 땅에서 난 생산물은 태양의 신전과 선택된 처녀들의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 잉카(왕)의 땅에서 난 생산물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공동체의 땅에서 생산된 것들은 재해가 생기고 기근이 들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공동체 사회였던 아이유들이 여러 개 모여서, 씨족공동체 집단인 약타와 좀 더 확장된 개념의 지역공

 

 

동체인 마르카를 형성했다. 그리고 이 마르카가 여러 개 모여 부족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잉카제국의 국명은 '모든 방향' 또는 '네 방향의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 '타우안틴수유'였다. 잉카제국은 쿠스코를 수도로 하여 안데스산맥의 지세에 따라 4개의 구역, 즉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쪽은 안티수유, 서쪽은 쿤티수유, 남쪽은 코야수유, 북쪽은 친차이수유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