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아스틀란에 사는 사람들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7. 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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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텍 문명(1)

 

선인장, 독수리 그리고 뱀


멕시코의 문장.
이 문장은 아스텍족이 지금의 멕시코시티에 정착한 계기가 되었던 수호신의 계시, 즉 "독수리가 뱀을 물고 선인장 위에 있는 곳에 정착하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섬에 세워졌다는 수수께끼의 도시국가 아스틀란에 살았던 아스텍족은, 자신들의 수호신이자 전쟁과 정복의 신인 우이칠로포크틀리의 인도를 받으며 멕시코 중앙고원으로 향했다. 나우아틀어를 사용했던 아스텍족은, 그들의 신이었던 우이칠로포크틀리의 명령에 따라 '아스텍'이라는 말을 '멕시카'로 바꾸었다.

 

남쪽으로 내려온 아스텍족은 차풀테펙(메뚜기의 언덕)에서 잠시 머문 후, 자신들을 환대했던 쿨우아칸의 세력권으로 1299년경에 이동했다. 이는 그곳에서 창궐하던 독사들이 아스텍족을 남김없이 물어 죽이기를 바랐던 쿨우아칸의 음모였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과는 달리 아스텍족은 독사들을 잡아먹으면서 톨텍 문명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기나긴 대장정 끝에 마침내 작은 섬에 도착했는데, 이 섬이 바로 자신들의 수호신 우이칠로포크틀리가 가리켰던 곳이었다. 그 수호신은 아스텍족에게 날아가는 독수리를 가리키며 "저 독수리가 뱀을 물고 선인장 위에 앉는 곳에 정착하라"는 말을 했다. 아스텍족은 멕시코 계곡에 있던 5개의 커다란 호수 중 하나인 텍스코코라 불리는 한 호숫가의 작은 섬에서, 신의 계시와 일치하는 장소(이곳은 지금의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인 소칼로(Zócalo)다)를 발견했다. 그리고 수호신의 말대로 그곳에 '테노치티틀란'을 건설했다. 이것이 서기 1325년의 일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이름인 '멕시코'가 바로 이 '멕시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멕시코는 이 기원설화에 바탕을 둔 '선인장 위에 독수리가 뱀을 물고 앉아 있는 모습'을 국기나 동전, 그리고 각종 증명서에 많이 사용하고 있다.

 

거미줄의 중심 - 삼각동맹

 

아스텍족이 정착한 멕시코 계곡에는 테파넥족의 아스카포찰코가 막강한 위세를 떨치면서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강력한 아스카포찰코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자는 텍스코코였다. 텍스코코는 점차 주변의 부족들을 받아들이면서 '아메리카의 아테네'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스텍족은 1428년에 텍스코코, 타쿠바와 삼각동맹을 결성해서 아스카포찰코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이 삼각동맹은 거대한 거미줄 같은 구조를 이루는 '아스텍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 거미줄의 중심에는 바로 삼각동맹이 있었다. 이들은 비록 효율적인 운송수단이나 문자체계와 같은 의사소통수단이 없었지만, 수천 개의 지역이 결혼동맹이나 상호간의 원조를 통해서 또는 강압적인 관계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440년, 삼각동맹의 한 축을 이루는 멕시카(아스텍)의 목테수마 1세가 아스텍 제국을 통치했다. 그의 통치기간 중에는 메뚜기 떼의 엄습, 홍수, 한파, 흉년 등 천재지변이 잇따라 발생했다. 목테수마 1세는 이러한 재앙들이 신의 노여움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믿었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멕시코 만 동쪽지역이나 푸에블라 계곡에 사는 민족들과 전쟁을 벌여 신에게 바칠 포로들을 잡아들였다.

 

아스텍인에게는 전쟁에서 포획해 제물로 바치는 이 포로들이 적이 아니라 신에게 보내는 사자(使者)였다. 따라서 전쟁은 신명나는 놀이판이자 다음 전쟁에 대비한 정규 군사훈련이며, 이 세상을 지속시키기 위해 정성스럽게 마련하는 제식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꽃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468년에 목테수마 1세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스텍족은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주변의 여러 부족에 대한 정복활동을 해나갔다.

 

1502년 목테수마 2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제국의 영토는 과테말라 국경까지 확장되었고 정치체제는 절대군주제로 바뀌었다. 목테수마 2세는 선대의 왕들이 정복하지 않은 지역을 복속시키고 자신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 세력을 떨쳤던 아스텍 제국은, 목테수마 2세의 통치기간 동안 1만 명이 넘는 주민이 사는 도시국가만도 약 12개에 이르렀고,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인구가 약 15~30만 명에 달했다.

 

제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멸망의 씨앗 - 공물

 

이 거대한 아스텍 제국을 받쳐주던 원동력은 정복한 주변의 도시국가들이 바치는 공물이었다. 이 공물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의 짐꾼에 의해서 아스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으로 집결되었다. 해마다 징수하는 공물의 목록에는 그 종류와 수량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만 톤에 달하는 식량과 10만 벌이 넘는 의류, 3만 꾸러미 이상의 깃털, 그리고 상당량의 귀금속과 희귀한 동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물은 대부분 행사와 제식을 호사스럽게 치르는 데 사용되었다. 이는 당시 아스텍 제국이 노동과 종교의식을 구분하지 않는 사회이자, 1년 내내 행사와 제식이 거행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또 공물의 일부는 행정 조직을 유지하거나 주민의 생계와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데 사용되었다. 정복된 도시국가들은 이러한 공물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의 대규모 토목공사에 동원될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다. 물론 아스텍 제국은 노동력을 제공한 도시국가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기도 했고, 국경 수비를 담당하는 도시국가들에게는 공물의 납부를 면제시켜주는 등 유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처럼 아스텍 제국은 주변의 도시국가들에게 전쟁과 유화정책을 병행하면서 엄청난 양의 공물과 노동력을 획득했다. 이와 함께 아스텍 제국은 결혼동맹을 통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일부 도시국가들에게 공물의 일부를 분배했다. 이들 도시국가의 군주들이 테노치티틀란을 방문하고 떠날 때에는 마차에 호사스런 선물이 가득 찼다. 따라서 아스텍 제국은 이러한 충성에 대한 대가를 제공하기 위해 더 많은 공물을 필요로 했다.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끊임없이 더 먼 곳, 더 위험한 곳으로 원정을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는 주변 도시국가들의 반란과 분노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얻은 공물과 노동력은 아스텍 제국을 받쳐주는 중요한 요소임과 동시에, 통치에 대한 부담을 더 가중시킴으로써 제국의 멸망을 재촉하는 씨앗이기도 했다

아스텍 문명(2)

 

인신공양

 

 

아스텍 문명의 인신공양.
제물이 되는 포로는 더는 적이 아니라 신에게 보내지는 사자(使者)였다. 그래서 제물의 복장은 마치 신의 복장처럼 화려했다.
 
아스텍족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신이 창조한 우주가 지속적으로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역시 '생명력의 원천'인 인간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신들에게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신들이 이 우주의 생명을 계속 유지시키고 정기적으로 비를 내리게 해서 자신들의 토지를 비옥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스텍족은 보다 많은 포로를 획득하여 신들의 생명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사명감을 갖고, 정복전쟁을 통해 1년에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신에게 바쳤다. 수도 테노치티틀란 중앙광장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신에게 바쳐졌다거나, 어떤 인신공양 의식에 희생될 사람들이 도시 외곽까지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데만도 며칠이 걸렸다고 하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이처럼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간 도살'이었던 인신공양은 대규모의 제사의식을 통해 거행되었다. 제사의식이 진행될 때 사제들과 희생자들은 신의 형상을 하고 등장했다. 이는 신과 인간이 한 몸에 결합됨으로써 제사의식을 지켜보고 있는 군중 앞에 신적 권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인신공양은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을 제단에 발가벗긴 채 한 줄로 늘어서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집행자가 제물이 된 사람의 다리를 각각 하나씩 잡고, 다른 두 사람은 각각 손 하나씩을 붙들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이 뾰족한 돌을 찔러 그의 등을 고정시켰다. 그리고서 또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목에 목걸이를 던지고, 최후의 집행자가 흑요석으로 만든 끝이 뾰족하고 넓적한 칼로 그의 가슴을 절개했다. 그리고 손으로 심장을 꺼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심장을 태양을 향해 들어 보이고 그 온기를 태양에게 바쳤다. 그리고 꿀로 반죽된 근대와 옥수수나무로 만든 우상의 얼굴을 향해 그 심장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의식을 끝냈다. 그리고는 희생된 사람의 몸을 층계로 굴렸다. 이러한 방식으로 늘어선 모든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이러한 제사의식을 통해 수많은 포로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중요한 통치수단 중 하나였다. 공포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들을 쉽게 통치할 수도 있었고, 정복한 지역의 위험한 인물들을 처형할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이 아스텍 제국의 사회는 정복한 자의 잔인함과 냉혹함을 통해서 거창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구경거리의 사회'였다.

 

아메리카의 베니스 - 테노치티틀란

 

아스텍족이 건설했던 테노치티틀란은, 멕시코의 중앙고원에 자리 잡은 해발 2,200미터의 대분지에 있는 두 섬과 텍스코코 호수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에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3개의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호수 주변에는 여러 도시국가가 건설한 화려한 신전이나 궁전이 있었다. 이 테노치티틀란은 총 면적 12~15제곱킬로미터의 섬으로, 중앙에는 한 변이 500미터쯤 되는 정사각형 구역 안에 아스텍족의 신들을 모시는 대신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신전이 있었다.

 

후에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국왕에게 쓴 보고서에서 이 테노치티틀란의 위용을 알 수 있다.

 

이 테노치티틀란이라는 대도시는 호수 안에 건설되었고, 육지에서 시내까지는 어느 방향에서 들어가더라도 2레구아 거리입니다···. 이 도시는 세비야나 코르도바처럼 크며 주요 도로는 아주 넓고 곧게 뻗어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광장이 많은데 그곳에서는 시장이 계속 열려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살라망카 시의 2배쯤 되는 대규모 광장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매일 6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국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의 상품을 사고팝니다.

 

이 도시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원과 우상을 안치한 신전들이 많습니다···. 대단히 높고 아름다운 탑이 40개 정도 있으며, 가장 높은 탑은 꼭대기까지 50단이나 됩니다. 이것은 세비야 대성당의 탑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던 테노치티틀란은 섬이라는 공간의 한계로 식량문제가 심각해졌다. 아스텍족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갈대를 엮어 만든 틀을 호수 밑바닥에 말뚝으로 단단히 고정시킨 후, 그 위에 흙을 덮어서 인공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옥수수, 콩, 고추, 호박 등을 경작했는데 이러한 경작법을 치남파(Chinampa)라고 했다. 이 농법은 바둑판처럼 구획을 이룬 땅 사이로 수로를 만들어, 마치 농사짓는 땅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하여 물속에 있는 많은 영양분이 땅으로 쉽게 스며들게 하는 수경농법이었다. 이 농법은 생산성이 매우 높아서 1년에 7경작까지도 가능했다.

 

아울러 테노치티틀란은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 덕분에 외적 침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천연요새였다. 치남파 덕분에 섬과 뭍이 연결되어 있었고 수로에서는 배를 교통수단으로 활용했다. 이런 까닭으로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이 도시를 '아메리카의 베니스'라고 불렀다.

 

태양석

 

1790년, 멕시코시티의 시청 공사 도중에 거대한 원형석 태양석이 발굴되었다. 이 태양석은 무게가 24톤 이상에 직경이 3.5미터에 달했다. 이것은 대신전에 설치할 목적으로 1479년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1521년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이 태양석이 상징하고 있는 아스텍인의 신앙체계를 파괴하고 자신들의 종교인 가톨릭을 전파할 목적으로, 멕시코시티의 대광장 부근에 묻어버린 것이다.

 

이 태양석의 중심에는 인간의 심장과 피를 요구하며 혀를 내밀고 있는 태양이 새겨져 있다. 아스텍인은 세계가 52년을 주기로 하여 파괴되고 다시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첫 번째 원 안에는 이미 소멸해버린 4개의 태양이 들어 있는 4개의 사각형이 있다. 이는 이 세상에 앞서 네 번의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첫 번째 태양은 재규어에 의해서, 두 번째 태양은 바람에 의해서, 세 번째 태양은 비에 의해서, 네 번째 태양은 대홍수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 태양석을 조각할 당시 아스텍인은 다섯 번째의 태양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번째의 태양이 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아스텍인의 우주창조론, 신화, 달력체계를 담고 있는 이 태양석은 현재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칼푸이

 

아스텍 제국의 사회조직은 복잡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인은 가족에 속하고 여러 가족이 모여서 '큰 집'을 의미하는 '칼푸이(Calpulli)'라는 집단을 이루었다. 씨족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사회조직이었던 칼푸이는 기본적으로 토지에 기반을 둔 집단이지만 자신들의 종교의식도 행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칼푸이는 점차 발전된 정치구조를 띠게 되었다.

 

칼푸이의 장(長)은 일반적으로 한 씨족 내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맡았다. 그리고 각 칼푸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아스텍 제국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관인 위원회를 구성, 각 부족의 의견수렴과 의사결정을 했다. 이 칼푸이는 정치와 경제 등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정의 단위를 이루었는데, 처음에는 테노치티틀란에 7개가 있었으나 나중에는 20개로 늘어났다.

 

아스텍 제국의 경제의 기본단위도 역시 칼푸이였다. 토지는 국가의 소유였고 각 칼푸이에게만 경작권이 주어졌다. 각 칼푸이의 장(長)은 토지를 받아 각 가정의 가족 수에 따라 일정한 면적을 분배하여 경작하게 했다. 분배받은 토지의 매매와 권리의 이양을 금지했고 2년 동안 계속해서 땅을 놀리지 못하게 했지만, 상속은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