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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큰 나라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7. 2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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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티키호의 모험

 

바다 건너 큰 나라

 

1914년, 노르웨이 출신의 인류학자 소르 헤이에르달은 남태평양의 외딴섬에서 1년간 바다생물 및 지구상에서 이미 사라진 문명의 유물을 수집하고 있었다. 헤이에르달은 섬에서 생활하면서, 바닷물과 그 위에 피어오르는 구름은 항상 동쪽 수평선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어느 날 저녁 헤이에르달은 그 섬 토박이 노인에게서 귀에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우리의 족장이자 신(神)이었소. 우리 조상들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군도로 이끌고 온 사람은 바로 티키였소. 예전에 우리 조상은 바다 건너 큰 나라에 살았다오" 노인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통해 전해준 '태양의 아들이자 위대한 폴리네시아의 족장 티키'에 대한 전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노인이 말한 '바다 건너 큰 나라'란 바로 남아메리카였다.

 

헤이에르달은 원주민들이 언제부터 이 섬에 살았는지, 이들이 왜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만 살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이스터 섬의 석상(石像)들이 남아메리카의 선사시대 유물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사실도 생각했다. 여기에서 헤이에르달은 페루의 문화, 신화, 언어가 폴리네시아의 종족신 티키의 기원임을 증명하는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실제로 일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기억을 돕기 위해 잉카인처럼 끈에 복잡한 매듭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후 10여 년간 폴리네시아 문명을 연구한 헤이에르달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페루 땅에 살던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자 뗏목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그들은 폴리네시아의 외딴섬에 정착해 남아메리카에서 누렸던 문명을 다시 건설하면서 살았다'라고.

 

자네 생각은 틀렸네"

 

선생님께서 제 논문을 읽지 않으셨기 때문 아니십니까?"
"젊은이, 내용이 뻔한 걸 무엇 때문에 읽나? 결국은 잉카인이 태평양을 횡단해 폴리네시아까지 갔다는 말이 아닌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선생님, 발사(Balsa) 나무로 만든 뗏목이 있었습니다."
"자네는 그 뗏목으로 그 넓은 태평양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뗏목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보게나."
"···"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게."

 

이는 1946년 어느 겨울날, 뉴욕의 한 박물관장과 인류학자 소르 헤이에르달 사이의 대화다. 이처럼 그 누구도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던 두 지역이 서로 관련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헤이에르달의 주장과 그의 연구논문은 학자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직접 발사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서 이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콘티키호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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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카야오 항에서 출항 준비를 끝낸 콘티키호.
원주민들의 항해 수단과 똑같이 만든 뗏목에는 벽이 터진 대나무 오두막과 정사각형의 돛이 설치되어 있다. 탐험계획의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게르트 볼트 양(좌측 위)이 선수(船首)에 야자즙을 뿌림으로써 콘티키호가 탄생되었다.
 
헤이에르달은 옛날에 페루에 살았던 사람들이 탔던 것과 똑같은 뗏목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못과 철사를 전혀 쓰지 않으면서 옛 사람들처럼 나무덩굴로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 위에 갈대로 엮은 자리를 깔고 대나무로 선실을 만들었으며 돛대도 2개를 세웠다. 대원은 헤이에르달과 4명의 노르웨이 출신 동료, 1명의 스웨덴 출신 동료 등 모두 6명이었다.

 

1947년 4월 28일, 태양왕 콘티키를 돛에 그린 뗏목 콘티키호는 페루의 카야오 항을 떠났다. 뗏목을 다루는 데 익숙해지기 전에 콘티키호의 대원들이 겪은 제일 큰 어려움은 방향을 제대로 잡고 나아가는 일이었다. 콘티키호는 여러 날 동안 파도와 싸우면서 항해를 해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물결이 높아도 방향만 잘 잡고 있으면 바닷물이 선실까지 들어오지는 못했다. 바닷물은 뗏목 바닥의 나무 틈으로 새나갈 뿐 절대 들어오지는 않았다. 뗏목 타기에 제법 익숙해진 콘티키호 대원들은 고기잡이할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콘티키호는 폭풍우를 세 번이나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섬을 만났다.93일 만이었다. 투아모투 군도 가장자리에 있는 푸카푸카 섬이었다. 그러나 바람과 해류로 인해 콘티키호는 안타깝게도 그 섬을 비켜 지나쳤다.

 

헤이에르달은 페루를 떠나기 전에, 정상적인 항해가 이루어진다면 97일 만에 섬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97일째 되던 날 아

 

침, 기적처럼 또 하나의 섬을 만났다. 앙가타우 섬이었다. 산호 암초가 섬을 빙 둘러싸고 있었지만, 원주민들이 타고 온 카누 4척의 인도를 받아서 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준 콘티키호 대원들은 다시 바다로 나왔다. 그 후 100일째 되던 날, 콘티키호는 집채만 한 파도로 인해서 파손된 채 산호섬에 도착했다. 그 후 콘티키호의 대원들은 노르웨이 정부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장장 8,000킬로미터에 가까운 뗏목 항해가 성공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콘티키호 탐험대원들을 워싱턴으로 초대해서 축하해주는 등 전 세계가 열광했다.

 

탐험을 마친 헤이에르달은 1952년 《태평양의 아메리카 인디언(American Indians in the Pacific : The theory behind the Kon-Tiki Expedition)》이라는 책을 펴내 남아메리카 문명이 폴리네시아로 건너갔다는 주장을 폈다.1961년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0차 태평양과학회의에서는 남아메리카가 태평양 여러 섬의 주민과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가 채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