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1492년 10년 12일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처음으로 만나는 모습.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콜럼버스는 영어식 이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본국인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스페인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불린다. 크리스토퍼의 원형인 '크리스토퍼런스(Christoferens)'는 예수를 의미하는 '크리스트(Christ)'와 운반자를 뜻하는 '퍼런스(Ferens)'가 합성된 말로써, 콜럼버스의 이름인 크리스토퍼는 결국 '예수-전도자(Christ Bearer)'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콜럼버스가 대서양 항해를 나섰던 이유가 바로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함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 콜럼버스가 쓴 《콜럼버스 전기(The Life of the Admiral Christopher Columbus)》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그를 라틴식 이름인 크리스토포루스 콜로누스(Christophorus Colonus)로 부른다면, 성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위험천만한 망망대해 너머로 예수를 전파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대서양 서쪽을 건너 아시아 대륙에 도달할 목적으로 당대의 지리적인 지식을 탐구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우스의 학설을 토대로 지구 둘레를 1만 8,000마일로 추산했고, 다이이 추기경이 쓴 《세계의 형상(Imago Mundi)》을 바탕으로 지구의 7분의 6이 육지, 나머지 7분의 1이 바다로 되어 있어서 황금향인 지팡구(Zipangu, 일본 왕국)까지의 바다는 길어야 2,600여 마일을 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이는 실제 거리인 1만 2,000마일보다 4분의 1이나 작게 계산한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또한 '아시아 본토로부터 남동쪽 1,500마일에 황금이 가득한 지팡구라는 섬이 있다'고 묘사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향료와 금은보석으로 가득한 카타이(Cathay)에 도달하려면 항로를 서쪽으로 잡아야 하며, 서쪽의 바다는 그리 넓지 않다'라고 썼던 토스카넬리의 서한을 통해서 자신의 탐험계획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콜럼버스의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은 '지구는 둥글다'라는 혁명적 학설이었다. 1459년 피렌체 출신의 의사이자 천문학자였던 토스카넬리가 주도한 이 학설은, 항해가들에게 서쪽의 대서양을 통해 인도에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는 아프리카 서안의 대서양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길과는 또 다른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산타페 협약
콜럼버스는 이러한 지리적 근거를 가지고 대서양 탐험을 실행하고자 했다. 그는 1484년, 처음으로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자신의 탐험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의 지원 요구 중에는 항해선단을 조직하는 일을 후원해줄 것, 모든 발견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줄 것, 자신을 제독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자손들이 이를 세습토록 할 것, 그리고 획득될 부의 일정 부분을 할애해줄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실은 대서양을 횡단해서 동방의 무역로를 개척하겠다는 콜럼버스의 생각을 지나치게 위험 비용이 높은 사업으로 평가하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는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 개척사업의 눈부신 성장 기회를 외면한 것이었다.
1486년, 후원자를 찾아 헤매던 콜럼버스는 마침내 스페인 카스티야 왕조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서 자신의 구상을 말하고 지원 요청의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1490년, 왕실조사위원회의 거부 결정으로 또다시 좌절하고 말았다. 그 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의 궁정에 재차 후원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끝에 스페인 왕실과 '산타페(Santa Fe) 협약'을 맺게 되었다. 이 협약에서 스페인 왕실은 콜럼버스에게, 앞으로 발견되는 지역의 대제독과 식민지 총독 및 부왕(副王)의 칭호를 부여하고, 이러한 직위들이 그의 자손들에게 영구히 상속되며, 그곳에서 산출된 모든 귀금속의 10분의 1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는 등의 내용을 명시했다. 이는 콜럼버스 개인의 열망과 스페인의 팽창정책에 대한 필요성이 서로 일치된 결과였다.
육지다! 육지다!
1492년 10월 12일 그 날,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는 말했다. "육지다! 육지다!" 그 고대해온 말에 모두가 뛰어나갔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배 안에 있던 모든 선원이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알았을 때, 모두 무릎을 꿇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492년 10월 12일, 드디어 육지에 상륙했다. 콜럼버스는 구세주와 관련시켜서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 구원자)라고 명명했다. 그는 자신이 도착한 곳을 인도로 생각하여 카리브 해의 원주민을 '인도 사람'의 의미를 지닌 '인디오(indio)'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그곳은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있는 구아나아니라는 조그만 섬이었다.
콜럼버스는 섬에 거주하는 '원주민'들과의 만남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폭력이 아닌 사랑을 통해 해방되어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에 귀의할 것이라는 점을 믿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빨간 모자를 선물했고, 그들의 목에 유리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리고 별로 값어치가 나가지 않는 것도 그들에게 많이 주었는데, 그들은 기쁜 듯이 그것을 바라보았고 또 놀라워했다··· 나중에 그들은 앵무새와 실 뭉치, 창 그리고 그밖의 것들을 헤엄을 쳐서 우리가 탄 배로 가져와 유리구슬, 탬버린 등과 교환했다.
1492년 10월 12일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문명권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던 사람 모두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콜럼버스가 중세의 지리적 기반을 무너뜨렸음과 동시에, 신대륙을 유럽에 소개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지평을 크게 넓힌 사건이었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은 '예수의 탄생과 죽음을 제외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한편,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으로 신대륙에서의 식민지 개척을 위한 하나의 근거지를 마련한 스페인은, 17세기 중반까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막대한 양의 귀금속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화폐가치 폭락과 가격 혁명의 촉발을 야기했고, 이는 다시 상업혁명으로 이어져 유럽 자본주의의 성장과 발전에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아울러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으로 스페인은 스페인어와 종교, 문화 등을 중남미 전역에 걸쳐 전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처럼 '1492년 10월 12일'은 단순히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던 날을 의미하는 것 이상으로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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