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스크랩] 잘 싸우지만 지나치게 잔인하다”

구름위 2014. 7. 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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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14일 맹호부대 병사들이 수용소로 가기 직전의 남베트남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군은 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베트남에서는 사상자 수가 더 많아졌다. <김용택 보도사진집-역사의 찰나>

[토요판]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13) 초기 한국군의 명암

베트남의 한국군은 다른 나라의 군대와 달리 단일하게 운영되지 않았다.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고 있었던 맹호부대보다 10여일 먼저 베트남에 도착한 청룡부대는 독립작전이 가능하도록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월한국군 사령부보다는 미국 제1야전군 사령부와 더 긴밀히 협조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주월한국군 사령부에는 미 제1야전군 사령부의 작전지시를 통보하여 형식상으로 추인을 받는 형식’이었다.

작전 방식도 달랐다. 최대한 민간인이 다치지 않도록 한다는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되었지만, 작전 방식은 맹호부대와 달랐다. 맹호부대는 전술책임지역을 방어하는 평정작전이 중심이었다면, 청룡부대는 적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수색과 격멸의 전술을 수행했다.(청룡부대 여단본부 참모장 정태석 증언) 이는 미군과 동일한 방식의 전술이었다.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는 서로 다르게 운용되었지만, 남베트남 쪽의 입장에서는 용감했고, 베트콩의 입장에서는 잔인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은 잘 싸우지만 적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소문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중에 11중대장 정○○ 대위가 국내에 돌아왔을 때 국방부 장관이 정 대위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눈알을 빼버린다”는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해병대 출신이었던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아무 문제 없어. 죽기 아니면 살긴데 까짓것 눈알이 아니고 불알을 빼버리면 어때!”라고 하면서 해병대 후배들을 칭찬했다.(www.vietnamwar.co.kr의 참전 수기에서 인용) 미국 정부의 문서는 강경한 국방부 장관을 ‘골칫거리’로 묘사하기도 했다.(1968년 2월15일자 백악관 회의 기록)

성공한 작전만 있지는 않았다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들은
성공한 내용만 담고 싶어하는데
전쟁에서 교훈 얻기 위해서도
실패 경험이 더 소중할 수 있다

“피난민 관계로 26연대가 실패
피난민촌에 나가 통제했는데
2200명인가 집결시켜 놓고
몇 명은 굶어죽는 현상 빚고
일부는 강간으로 문제 일으켜”

사격 뒤 갈지자 도망가는 적 쫓았다가…

한국군이 전쟁터에서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을 경험한 지휘관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대장급 이상은 대부분 한국전쟁을 경험한 지휘관들이었다. 전쟁에서 경험은 제일 중요한 무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군은 현지의 상황에 적응해 갔고 베트남에서의 독특한 자체 전술을 마련하면서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베트콩이 최종 공격대기 지점에 이르기 전에 중간집결지를 찾아 전투를 함으로써 효과를 올리기도 했고, 미군과는 다른 방식의 대민지원을 한 것도 한국군만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베트남 민간인들을 만나면 ‘장유유서’의 유교사상으로 나이 든 사람에게 공경을 표했고, 쌀 한 가마의 보급품을 전달하더라도 한 번에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서 줌으로써 민간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취했다.

한번은 닌호아에서의 전투 중에는 물소 20마리를 쏴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에서 물소 한 마리당 30달러 정도 하는데, 한국군은 100달러를 쳐서 보상해 주었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이 보상금을 받고 나서도 죽은 소를 달라고 했다. 이에 한국군은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베트남인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 인심 좋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성공한 작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들은 모두 성공한 내용만을 담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으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도 성공한 경험보다도 실패한 경험이 더 소중할 수 있다.

“베트콩들은 우리가 휴식을 하고 있을 때 3~4명이 은밀히 접근해서 갈깁니다. 조준사격을 피하면서 갈지자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때 잡아 오너라 하니 쫓아 들어가는 것이지요. 분대가 들어가면 분대가 전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전술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추격을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14명인가 15명이 전멸했습니다.(청룡 2호 작전 사례) 중대장을 군법회의에 회부했습니다.”(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증언)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좀 더 냉철하게 판단하는 쪽이 이길 수밖에 없다.

냉철한 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소한 지형과 게릴라전이라고 하는 생소한 전투 형태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우리가 실패한 작전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만회를 했는데 처음에 우리가 산을 포위를 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가 길을 뚫으면 그 뒤를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 계획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분대장이 앞을 서면 그다음 사람은 종대대형이 되는 것입니다. 뒤를 따라가게 되니까. 그것이 월남에서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 소대장이 좌우 5m 내에서 볼 수 없으니까 그들이 일렬종대로 올라가는지 횡대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결과는 1개 종대로 쭉 대열을 지어 가지고 올라가다가 적이 보다가 쏘았습니다. 우리가 일진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휘관이 이것을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지를 올라가니까 적은 계속 사격을 해서 상당한 피해가 났습니다. 적이 사격은 하지만 계속 올라오니까 희생자는 모르지요. … 우리는 희생을 당하면서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적은 오판을 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지하화되어 있는 동굴은 거미줄 같은 것이었습니다. 희생은 많이 났는데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

모든 작전이 일렬횡대로 전개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월남의 전투가 모두 그러한 형태이다. 월남의 작전 형태가 그 모양이며, 처음부터 끝까지가 똑같은 것이다. 결국 월남전은 소대장, 중대장들이 위력수색을 하는 형태지, 그것이 전면작전도 아니고, 게릴라전도 아니고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무의미한 전쟁이 아닌가 본다.”(주월한국군사령부 작전과장 김○○ 증언)

상급 부대 지휘관의 지나친 간섭

전과나 상황이 조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우선 미군, 남베트남군과 서로 연락을 하면서 전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전과를 올렸다고 연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지역에 가 보면 완전히 다른 상황이 눈앞에 놓여 있기도 했다. 전과 계산에서도 무기 1정을 노획하면 3명을 사살, 5명을 사살하면 15명이 부상했다고 보고했으니 통계 역시 불확실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의 공식 전사에 성공한 작전으로 묘사된 전투에서도 상당한 문제가 발견되기도 했다.

“오작교 작전 시 9사단 제28연대 11중대 피습과 ○○사단 26연대 제2중대 피습 상황을 현지에서 조사한 일이 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사단에서는 부분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로 26연대에서는 피난민 문제에 실패했다고 본다. 그때 부연대장 문○○이 피난민촌에 나가서 통제를 한 일이 있었는데, 2200명인가를 집결시켜 놓고, 몇 명은 굶어 죽는 현상을 빚었고, 또 일부는 강간을 해서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그때 피난민 관계로 제26연대가 실패한 것만은 사실이다.

현지에서 피난민 문제를 다루면서 유○○ 사단장과 다투기까지 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내가 캐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피난민을 지휘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2중대가 피습된 원인은 여자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자관계로 첩보가 샌 일이 가끔 있다. 기지 주변에 떠도는 여자는 대부분이 베트콩 뿌락치(프락치)니까. 제26연대 2중대도 ○○○의 여자관계로 인해서 첩보가 누출되고 이로 인해 피습되었다 하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그 당시 오작교 작전이 성공하였다 하면서 미·월 등 주변에 대하여 대대적인 선전을 하여 한국군의 이미지를 더욱 좋은 각도로 크게 전환시켰다. 따라서 맹호, 백마 사단장은 연결작전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전쟁의 영웅처럼 된 상태였는데, 사실상 그 작전 다음에 일어난 후유증은 정신이완 상태였다.”(주월한국군사령부 전투발전부장대리 김○○ 증언)

작전 지휘부로서는 자기 부대의 전과를 최대화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의 전과도 높여주어야 했다. 부대원들의 사기를 높여주지 못할 사항들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안전사고나 부비트랩을 밟아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 적의 습격을 받아 피해가 난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사령부의 훈령에도 없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사령관과 사단장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사고를 조사하러 가려다가 기상조건 때문에 하루이틀이 지나 가보면 이미 상황은 모두 종료되었고, 사고에 대해 정확히 말해 줄 사람도 없었다.

“2중대는 11중대 기습 때보다 비참했다. 2중대는 사람들이 자고 있는 집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처럼 베트콩이 호 속에, 벙커 안에까지 들어와 수류탄을 던지고 설쳐댔다. 벙커 안에까지 들어왔으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지경으로 당했다.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한창 큰소리치다가 갑자기 당했으니 어디다 대고 창피해서 말도 못 했고, 타 병사들의 사기 문제도 있고 해서 사실 많이 감추었다. 내 생각에 아직 많은 젊은 사람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자료만 계속 수집했다가 나중에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주월한국군사령부 전투발전부장대리 김○○ 증언)

한국군이 이렇게 혼란을 겪은 데에는 상급 부대 지휘관의 지나친 간섭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월남전의 교훈은? 민족적인 성격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상급 부대 지휘관의 간섭 문제이지요. 우리 한국군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 잘못 자라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윗사람들의 간섭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윗사람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연대장은 소대장이 하는 일까지 간섭을 합니다. 사단장도 연대장, 대대장이 하는 일을 간섭합니다.

싸움을 한번 시작해 놓으면, 높은 사람들이 다 나와 가지고 ‘감 놔라 대추 놔라,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합니다. 이래 가지고는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기면 만사가 다 괜찮은데, 이것이 잘못되면 위에서 이렇게 하라고 해서 했다고 합니다. 또한 하급 장교들은 책임감이 없어요. 그러니까 누가 먼저인지 몰라.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 그러니까 자기의 분에 맞춰서 일을 해야 합니다.”(○○사단 기갑연대장 신○○ 증언)

돈을 벌어 온다는 소문, 죽을지 모른다는 소문

작전 초기 상급 부대의 무리한 작전 계획으로 인한 혼란도 있었다. 제1연대 제5중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1966년 1월에 있었던 비호 전투에서는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을 작전 범위로 정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작전을 실행할 수 없었다. 무리한 계획이 실패를 자초하게 된 것이다. ‘확정된 전선이 없고 제복을 입은 적군도 없었다. 무기를 갖고 대항하는 자는 적이었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자는 양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 어디서 적대행위를 할지는 모른다. 그들이 손을 흔드는 지역은 양민의 거주지역이고, 항거하는 지역이 전선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상황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좀 더 구체적인 지시들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1. 저명한 지형지물이 없는 개활지에서는 지형 판단이 어렵다. 2. 마을에서 기르는 개는 기도비닉(침투를 위해 몸을 숨기는 것)에 큰 장애가 된다. 3. 참고점을 미리 선정하고 콤파스(컴퍼스)에 의한 방위각을 기록 유지해야 한다. 4. 보측을 확실하게 하고 평지와 수렁에서의 보간 간격의 차이를 익혀 두어야 한다. 5. 적의 매복지를 우회키 위하여 소로는 가급적 회피해야 한다. 6. 수답(논)을 답파할 때는 소리가 크게 나므로 정숙보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행동해야 한다. 7. 주간과 야간의 물체 형상이 다른 점을 사전에 분석해야 하고 모든 병사에게 이를 숙지시켜야 한다.”(맹호부대 제1연대 제6중대 제1소대장 박○○ 증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군은 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베트남에서 사상자 수는 더 많아졌다. 장교건 사병이건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한국 사회에 점점 퍼졌다. 베트남에 다녀오면 돈을 벌어 온다는 또 다른 소문도 있었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가야 했다. 장교들은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100% 지원의 형태로 파병되었다. 장교의 50% 이상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으며, 국가의 부름을 따라야만 했다. 사병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이들도 대부분 자원해서 간 것이었을까?

출처 : 탈 리 아
글쓴이 : 032k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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