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캔사스 팀 vs 월맹군 2천명 (SOG)

구름위 2013. 11. 2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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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남베트남 북부 케산 지역

 

케산 미 해병대 기지 북서쪽에 여러 개의 유령마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유령마을들이 1971년 여름 사람들이 거쳐 가기 시작

했다. 이것들은 1971년 1월에 잠깐 쓰였고, 이는 남베트남군이

라오스를 공격하는데 지원거점으로 쓰였다. [람손 719작전]

 

그러나 이곳은 엄청난 피의 비극으로 좌절되어 남베트남군은

패주하였고, 일대는 완전히 방치된 지역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역은 거꾸로 호치민 루트의 한 거점으로 넘어가 버렸다.


1971년 7월, 미군 정보부는 대규모 월맹군이 케산 동쪽 12마일

지점으로 은밀하게 들어온 것을 알고 이들을 추적했다. 그들은

후에로 향하고 있었다. 또한, 다낭, 푸 바이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는 마지막 남아 있던 미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건 본질적으로 케산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가에

관한 문제였다. 이곳에 들어가 볼 수 있는 병력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들어가던 MACV-SOG 정찰대 외에는 없었다.

 

 

SOG의 투입


1971년은 미군이 물러나기 시작한 해였다. 결국 SOG의 정찰팀

‘캔사스’에 월맹군 포로를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된다. 이

팀은  그린베레 대원이 팀장/부팀장을 맡고 있고, 8명의 현지민

대원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그러나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월맹군의 와중에 들어가서

포로잡아오라는 명령은 참으로 애매한 것이었다. 팀장 로렌

헤이건 중위는 매우 성격이 태평하고 홀쭉한 미국 중서부인이

었으며, 팀에 다른 그린베레 대원으로는 토니 앤더슨 병장,

부르스 벅 병장이 있었다.

 

SOG 지휘부는 캔사스 팀에게 여러 가지 옵션을 주었다:

 

조금 눈에 띄기는 하지만 과거 미군의 화력지원진지가 있던 자리

랜딩 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분명한 월맹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비상시 퇴출하기에는 매우 편한 장소였다. 고지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월맹군이 공격하면 그곳에 폭격 감지용

센서를 설치하고 나오도록 준비를 시켰다. 그것은 폭격 유도용

비콘이었다. 


헤이건 중위는 자신의 정찰팀에 3명의 그린베레 대원을 더 보강

받는다. 오란 빙햄 하사, 빌 퀸 병장, 윌리엄 리몬디 병장, 여기에

8명의 현지민 대원을 포함해 정찰팀은 총 14명으로 좀 특별히

구성된다. 

 

 

 

<작전의 시작>


팀은 1971년 8월 6일 박모 시에, 케산 인근 과거 미군 화력지원진지

랜딩 했다. 이어서 팀은 3개조로 나뉘어 능선에 있던 3개의 경사

면에 방어를 구성했다. 그들은 즉각 그 자리, 과거에 축성되었던 

개 벙커와 참호를 이용해서 거점을 잡았고, 월맹군이 자신들을 반드

목격했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헤이건은 다음날 정찰을 준비한다. 

 

 

 

<불길한 밤 -A Foreboding Night->


어두워지자 SOG 정찰대는 능선에서 두 개의 모닥불을 발견한다.

월맹군으로써는 볼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한밤중이 되자 월맹군

탐침자들이 진지로 다가왔다. 그들은 사방에서 도발적인, 그리고

약을 올리는 듯한 사격을 해왔다. 


새벽 한 시, 미 공군의 AC-130 스펙트러 건쉽이 도착했다. 건쉽은

밤새도록 40밀리와 20밀리 캐논포를 계속 사격해주었다. 정찰대는

자신들의 화기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로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 3시가 되자, 정찰대원들은 트럭 소리를 들었고, 병력이

뛰어내리는 소리도 들었다. 그들은 끝도 없이 트럭에서 계속

하차했다. 그것은 미군들에게 공포의 소리였다. 공포.... 


고지 아래 내린 월맹군들은 소대와 중대 단위로 제대를 형성

했고, 그들은 여명을 기다리면서 점차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리고 해가 뜨기 전에 불길한 고요가 찾아왔다. 헤이건 중위는

트럭이 더 도착하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SOG는 정찰기와 헬기를 이용해서 마치 탈출하는 것처럼

위장 퇴출작전을 실시했다. 그리고 그들의 일부는 이미 30분

전에 캔사스 팀보다 높은 곳에 있는 고지에 도달해 있었다. 

 

 

 

<월맹군의 공격>


어둠이 가시고 여명이 터오려고 할 때,

헤이건 중위는 경사면에서 월맹군 병사

한 명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경사면에서도 몸은 보이지 않았지만 월맹군의 피트 헬멧이

보였다. 당시는 불규칙하게 안개가 끼어있던 상황이었다. 세 번째

경사면에서도 월맹군이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결국

헤이건 중위는 고지 정상이 월맹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1개 연대 규모로 거의 천 명에 가까운 월맹군이었다.

 

그리고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공격의 정황>


"당시 월맹군은 소련제 파이프로 연료 파이프라인을 전술적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린베레 캔사스 정찰팀이

있던 고지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남베트남까지 연결되고

있었다. 이것의 전술/전략적인 중요성은 1972년 부활절에 있었던

월맹의 공세 때 밝혀지게 된다." (미 정보부)  


월맹군 연대장은 이 미군들을 급히 해치워야 한다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 자신들에게 매우 위험한 장소에 캔사스 팀이 들어와 있었

던 것이다. 태만히 했다가는 하노이의 최고 사령부의 문책과 비판

을 받을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6인치 짜리 파이프가 라인을 형성하여 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몇 달 뒤에 거대한 공격(1971년 부활절 공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파이프라인은 월맹군 탱크 부대가 써야

하는 연료를 책임지게 되어 있었다. 나중에 있게 될 1972년 월맹

의 부활절 공세에 월맹군 304사단과 배속된 308사단의 1개연대

가 그 일대에 준비하고 있었다.


캔사스 팀이 있는 곳으로 월맹군 보병 4개 대대가 안개 속으로

은밀히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 뒤 다섯 번째 대대가 도착했다.

나중에 SOG의 지휘관인 존 새들러 대령은, 이 사건에서 1개

대대를 보강 받은 1개 연대가 캔사스팀을 공격했고, 공격인원

총 2천명에 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그는,

그들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나오는지 몰랐다.

 

당시 파이프 라인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시 월맹군 파이프 라인에 대한 미군 측의 개념도 


 

 


[인해 물결 -A Human Wave-]

 

 

    14명 대 2천명


안개가 물러나자 소름끼치는 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산야가 월맹군으로 꿈틀대고 있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다.

 

그들은 대놓고 행동하고 있었다.

헤이건 중위는 엄청난 병력에 놀랄 여력조차 없었다.

 

중위는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화기들을 재배치했고, 수류탄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여분의 탄창도 바로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8명의 넝 대원들은 대부분 카톨릭 신자였는데,

 

모두 마지막 성호를 그었다.

 

 

 

[공격  Then they came ]


먼저 잘 조준된 RPG 로켓이 부르스 벅 병장이 있는 전방 벙커에

날아와 폭발했다. 벙커는 붕괴되었다. 그것은 공격의 신호였다.

분당 수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엄청난 총알들이 고지를 향해

우박처럼 쏟아졌다.

 

앤더슨은 병장은 먼저 12명 정도의 월맹군이 그가 보고 있던

경사면으로 돌격하는 걸 보았다. 앤더슨은 M-60 기관총의

자물쇠를 풀었다. 그리고 사격을 시작했다. 그때, 헤이건 중

위는 앤더슨에게 부르스 벅 병장의 상태를 보라고 고함쳤다.

 

앤더슨은 부르스 벅이 있던 벙커 자리로 뛰었다. 땅바닥에 총알이

영화처럼 마구 튀었다.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결국 앤더슨은

집중사격을 받으면서 부르스에게 갔으나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때 클라우스 빙햄 하사가 자신의 벙커에서 나가 크레모어 위치를

바꾸고 있었는데, 총알들이 날아와 그의 머리를 때렸고, 그는 쓰러

졌으며 움직임이 없었다. 한 넝 대원이 사격을 무릎 쓰고 빙햄을

참호로 끌고 들어왔으나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14명 중에서, 공격당한지 4분 만에 4명이 전사했다....

 

 


[ The Last Stand ] 


소총탄들이 네 방향 모두에서 날아와 박히기 시작했고, 수류탄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캔사스 팀이 수류탄을 던지자 월맹군들은 근처

크레이터로 몸을 잠깐 피했다. 앤더슨은 다시 고지 정상 쪽으로 뛰어

오고 있었으나 헤이건 중위는 그 당시 그가 어디에 있는 줄 몰랐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카키색 군복을 입은 거의 100명에 가까운 월맹군

고지 정상에 육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M-60을 잡고 그 선

두에 대고 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앤더슨은

탄 벨트를 바꿔가면서 계속 기관총을 쏘았다.

 

그때 앤더슨은 뒤에서 날아오는 수류탄을 보았다. 그의 뒤까지 벌써

월맹군이 올라와 있었고, 그의 뒤 15미터 정도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지 정상의 굴곡 부분을 돌아 나오면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앤더슨이 M-60을 사격하자 일부가 쓰러졌고 다시 굴곡 뒤로

후퇴했다. 


교전이 벌어진 지 12분 정도가 되었을 때,

코브라 헬기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왔고,

그 뒤로 휴이 헬기가 느리게 따라오고 있었다. 

 


캔사스 팀의 수류탄은 떨어져 가고 있었고, 북베트남군의 수류탄은

계속 날아왔다. 수류탄이 터져서 앤더슨의 M-60 기관총이 고장 났다.

그는 등에 걸고 있던 자신의 CAR-15을 돌려서 계속 쏘았다. 그런데

수류탄 하나가 날아와 그 앞에 떨어졌다. 그것이 터졌으나 그는 엎드

렸다가 일어나 다시 총을 쏘았다.

 

그러나 수류탄 파편이 여러 개 그의 몸에 박혔다. 이어 AK 총알이

날아와 그의 단독군장을 맞추고 팔굽을 관통시켰다. 앤더슨은 쓰러

졌다. 그러나 그는 비틀거리며 무릎으로 지탱하고 서서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방어선은 바짝 죄어들었다.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앤더슨은 전방 쪽의 무너진 벙커 옆에서 싸우고 있던

두 명의 현지민 대원들에게 기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앤더슨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 말은 살려달라는 말도

아니었고, 그저 우리가 같이 있다.... 그런 의미로 느꼈다..

 

 

그들은 화력지원진지 바로 아래 월맹군들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몇 분 안에 죽을 것이 뻔했다.

 

“뒤로 후퇴해!”

 

앤더슨은 그렇게 소리치다가 쓰러져 있던 빙햄 병장을 보았다.

그는 빙햄을 들려고 했으나 빙햄은 머리에 맞아서 죽어 있었다.

 

앤더슨은 그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사방에서 나는 총소리는 이제 즈즈즈즈... 즈즈즈즈즈... 이렇게

들렸고 귀가 멍했다. 그리고 현지민 대원들이 쏘는 총의 머즐

플래쉬가 내 귀 옆에서 연사로 터졌다. 정신이 멍하고 혼돈스러웠다.

그러나 빙햄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정상 쪽으로 후퇴했다.

월맹군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그는 빙햄을 끌어다가 부상 당한 빌 퀸이 누워있는 곳에 놓았다.

총에 맞지 않은 것은 당시 리몬디 병장뿐이었다. 그도 맹렬하게

총을 쏘고 있었다. 앤더슨은 다시 총을 잡았고, 리몬디 병장와

등을 기대고 앉아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곧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사격을 잠시 멈추고 무전기를 잡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무조건 정상 쪽에 대고 폭탄과 총을 쏘고 싶은 대로 쏴라.

아군 적군 구별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점거하고 있는 것은

꼭대기에 작은 일부다. 무차별로 사격해서 같이 끝장내야 한다.....”


그런데 잠시 후, AK 총알이 팀의 무전기를 박살냈다.

그래서 앤더슨이 소형 서바이벌 무전기를 꺼냈는데,

다시 총알이 그것을 날려버렸다. 그러자 리몬디 병장이

자신의 응급 서바이벌 무전기를 꺼내서 그에게 던졌다.

 

 

 

<종점을 향하여>


월맹군은 밀물처럼 정상으로 몰려들었다. 총알 소리가 합성되어

끊이지 않는 기관총 사격음처럼 들렸다. 단 0.5초도 총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총소리는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벙커로 몰려들면서 AK를 휘둘렀다. 캔사스 팀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앤더슨은 CAR-15를 계속 쐈는데, 탄창이 떨어지면

최대한 빠르게 갈아 끼워야 했다. 탄창 갈아 끼우는 속도에 생사가

달려 있었다. 


공중에서 이를 목격한 미군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마치 월맹군들이

개미 행렬처럼 보였다. 어디서나 개미들이 정상을 향해 기고 있었다.

코브라 헬기가 정상의 SOG 대원 부근에 20밀리 캐논포를 난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폭기가 하늘에 나타났다. 전폭기는 혼전 속에

발칸포를 쏘고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마침내 공격파가 주춤하면서

밑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상황이 급변했다. 월맹군들은 엄폐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휴이 헬기가 도착했다.


여러 번 부상을 당한 앤더슨은 앞으로 기어나가서 랜딩 하는

헬기를 엄호하기 위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앤더슨은 리몬디와

함께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랜딩존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헬기에 그들을 실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앤더슨은 두 번째 헬기에 부상당한 퀸과 함께 탑승하는데 성공했다.

 


"3개월 전에 그린베레 캔사스 팀이 근처에서 정찰 중 전투를 벌인

일이 있었다. 미 육군 특전단은 정찰 작전에서 당시 북베트남에서

이어지는 3개의 파이프라인을 목격한 바 있었다. 그것은 라오스

에서 북베트남 거쳐 남베트남으로 오는 것이었다. 가장 위험한

파이프라인은 북에서 비무장지대로 은밀하게 숨겨진 것이었다."

(미 공군)

 

 

 


[ 무서운 통행료... ] 

 


30분 동안의 전투였다.

깜짝 놀랄만한 30분이었다.

 

캔사스 팀은 5분이면 끝날 것을 30분간 끌었다.


헤이건 중위는 전사했다.

 

빙햄 병장과 부르스 벅 병장도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6명의 넝 대원이 전사했다.

 

리몬티와 퀸은 모두 다중 파편상을 당했다.

 

앤더슨은 소총탄과 파편상을 모두 당했다.

 

탈출한 2명의 넝 대원들도 중상 상태였다.

 

(사체 포함 11명만 탈출한 것으로 보임)

 

(14명 중, 9명 전사. 부상자 5명.)

 

 


“우린 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몰랐다. 그저 싸울 뿐이었다.”

 

앤더슨은 25년이 지난 시점에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난 것을 팀장인 헤이건 중위의 명예로 돌렸다.

 

“그는 그린베레 장교의 축소판이었다. 사소한 것까지 잘 주의를

기울였고, 많은 리허설을 했으며, 과감하게 행동했다. 우린 준비

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월맹군의 월경상태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준비상태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헤이건 중위가 화기

와 병력을 재배치한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다만, 우리는 어떻

게 되가는 줄 대충 알고 있었고, 죽음을 기다렸다...... 몸이  떨렸

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서로의 눈을 보면서 끝까지 해보자고

눈으로 말했다. 살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헤이건은 부르스 벅 병장을 보호하려고 싸웠다.

 

“그것은 AK의 탄막, 탄벽이었다.

헤이건은 정말 장교다웠다. 그리고

그는 원래 좋은 사람이다.”


캔사스 팀은 월맹군 1개 대대 정도를 전사시켰고,

부상자는 그 두 배로 예상되었다.

 

미 공군은 공식적으로 185 구의 월맹군 시체를 확인했다.

전사/전상 합해서 월맹군은 5-6백 명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월맹군은 동료의 시체를 수습해서 끌고가는 특성이

있었고, 네이팜과 폭탄으로 인해서 날아간 수를 생각하면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앤더슨은 팀원들의 전상 때문에 월맹군의 주검 수치

같은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앤더슨은 몬타냐드 대원

들의 시체 6구를 헬기에 실어 그들의 마을에 데려다주었다.


"그들을 싫은 트럭이 그들 마을에 도착하자,

 가족들은 비탄의 신음소리를 울부짖었다."

 

마을의 공동주택에

마을 사람들이 주검들을 원형으로 둘러쌓다.

 

앤더슨은 회고한다.

 

“나는 통역관에게 그들이 얼마나 명예롭게 죽었으며,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말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용감한 전사들이었으며, 얼마나 용감하게

전사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캔사스 팀이 큰 정보를 획득해주지는 못했지만,

이 지역에 대한 대규모 공중폭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차후 부활절 공세에

대처하는 것에도 도움이 됐다. 미군 정보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월맹군의 대규모 공세를 눈치 챘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아직도 10년이 지나야 기밀에서

해제된다. 헤이건 중위의 가족들은 사후 최고훈장을 받았다.

토니 앤더슨은 수훈십자훈장을, 퀸, 리몬디, 벅, 빙햄은 은성

훈장을 각각 받았다.

 

 


<최고훈장 로렌 헤이건 중위의 공식 기록>

 

의회최고훈장


중위 로렌 헤이건 (Loren D. Hagen)

 

전사일: 1971년 8월 7일

미 육군. 제5특전단. U.S. Army Training Advisory Group

장소: 남베트남

생일: 1946년 2월 25일. Fargo, N. Dak.

 

 


수훈 인용문: 


로렌 헤이건 중위는 소규모의 정찰대를 이끌고 적 장악지역으로 침투했다. 1971년 8월 7일 오전 6시 30분, 정찰대는 굉장히 큰 규모의 월맹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월맹군은 소화기, 자동화기, 박격포, 로켓을 이용해서 공격했다. 중위는 정찰대로 방어를 구성, 돌격하는 월맹군과 소화기와 수류탄으로 방어를 이끌었다. 그는 월맹군 공격 직전에 정찰대원들의 방어를 전술적으로 재구성하여 포위공격하는 적들을 섬멸시켰다.

 

중위는 적의 사격이 노출된 가운데 방어선을 반복적으로 돌아다녔고 총을 쏘면서 정찰대원들에게 구호와 격려함성을 질렀다. 또한 돌아다니면서 탄약을 재분배했고 수류탄 투척과 소총사격을 계속 했다.  그의 행동으로 나머지 정찰대원들은 영감을 얻고 중위를 신뢰하면서 결사적으로 싸웠다. 이때 팀 벙커에 월맹군의 로켓이 명중했다. 헤이건 중위는 무너진 벙커로 달려가 팀원들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벙커는 월맹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중위는 적 쪽으로 기어가 소총을 계속 쏘았다. 그러자 로켓과 수류탄이 중위 근처로 집중적으로 날아왔다. 결국 벙커 쪽으로 기어가는 도중, 파편과 소총 자동화기로 인해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전투의 와중에 장교의 임무를 완수하고 전사했다.

 

 

작전 투입 시기 직전의 헤이건 중위

 

투입전의 팀원, 좌에서 3이 헤이건 중위

 

헤이건 중위는 체구가 작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