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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대전 - 1914년 ~ 1918년

구름위 2013. 12. 1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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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세계대전 - 1914년 ~ 1918년 

 

 

삼국동맹 VS 삼국협상, 사라예보 사건

 

 

1867년에 아우스글라이히(맹약,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탄생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와

헝가리 왕을 겸임하며, 헝가리는 군사, 외교, 개정을 제외한 광범위한 자치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제국 내의 복잡한 민족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당시 제국내엔 9개 언어를 쓰는 16개의 민족과 5개의 종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최대 관심은 동방문제였다. 대두하기 시작한 슬라브인의 민족주의 운동은 제국정부를 주도하는 독일인과

마자르인에 있어서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1912년부터 1913년에 걸쳐 일어난 발칸 전쟁의 결과, 인접국인 슬라브인 국가인 세르비아의

영토가 약 2배로 확장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국내의 슬라브 민족운동을 경계하게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은 제국 남부는 남 슬라브 연합국가에 흡수되는 것을 원했다. 이런 모험적 민족주의에 대해 스스로

슬라브인의 수호자를 자처한 러시아는 일정의 지원을 부여했다. 1908년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ㆍ헤르체고비나를 합병했기 때문에

보스니아ㆍ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인은 오스트리아에 불만을 가졌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슬라브인 민족주의 운동이 다른 민족운동과

연대하고 러시아가 개입하는 사태를 위험시했다.

 

한편, 독일제국은 1871년의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제 2 제정에 승리하여 성립되었다. 독일은 프랑스에서 알자스, 로렌지방을 빼앗음으로

프랑스 국내에 반독감정이 심했다. 독일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화시켜 알자스, 로렌의 탈환의지를 꺾어버린 후

독일의 안전을 노릴 목적에서 1882년에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체결했다.

 

1887년에는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묵인시하는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을 체결하고 비스마르크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1890년에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독러 대보장 조약은 연장되지 못했다. 더우기 1894년에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 VS 프랑스,

러시아의 충돌 가능성이 높아졌다.

 

독일의 참모총장이던 알프레드 폰 슐리펜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정면작전에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슐리펜 계획을 고안했다.

이 전쟁계획은 광대한 러시아가 총동원 완료까지 걸리는 시간차를 이용한 것으로, 러시아가 총동원을 발령한다면 바로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군의 배후를 돌아 프랑스에 조기 승리한 다음 다시 러시아를 꺾는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슐리펜 계획은 순전히 군사기술적인 측면만을 우선하여 외교에 의한 전쟁회피 노력을 무시했으며, 또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하는 것에 의해 국제적 오명과 영국의 참전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슐리펜 계획은 독일을 세계 규모의 대전쟁으로 빠트릴

가능성이 커서 너무나도 위험한 전쟁계획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은 자국의 안전보장적인 관점에서 전통적으로 자국연안의 인접국가들을 중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1839년의 런던

조약에서 영국은 벨기에를 독립시키고 그 중립을 보증했다. 영국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경우 만약, 벨기에의 중립이

침범당한다면 먼저 침공한 쪽의 상대측에 서서 참전하는 것을 표명했다.

 

허나 19세기 말이 되자, 독일의 국력신장으로 인해 차제에 영국과 독일과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영국과 독일은 해상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건함(建艦)경쟁을 반복했다. 영국은 패권유지를 위해 1904년에 프랑스와의 오랜 대립관계를 해소하며 영불협상을

체결하고, 그 외에도 1902년에 영일동맹, 1907년에는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렇게 유럽 열강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협상의 대립을 주축으로 다수의 지역적인

대립을 포함한 복잡한 국제관계를 형성했다.

 

 

사라예보를 방문중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의 모습.

 

 

 

 

1914년 6월 28일, 이 날은 세르비아의 중요한 경축일인 성(聖) 비튜스의 날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차기 황제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오스트리아가 합병한 보스니아ㆍ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 방문일이었다. 이 날은 1389년에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한 코소보 전투가 일어났던 날이기도 해서 황태자 부부의 방문은 세르비아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결과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제국 재건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국적이 다른 각 민족이 <노예>로서 일체화 되는 것이 아니라,

연방을 형성하는 형태로 하는 것을 이상으로 했다. 그렇지만 보스니아 내부의 슬라브인에 의해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압제의 심볼이 되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세르비아인 육군장교를 중심으로 한 비밀조직이던 흑수회(黑手會)로부터 권총과 폭약을 넘겨받은 암살단은 6월 28일에 대공부부의

살해를 꾀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페르디난트 대공부부의 14번째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대공의 아내인 조피는 보스니아의

백작비 하녀여서, 합스부르크가는 그녀를 황족의 일원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페르디난트도 그녀와의 결혼으로 인해 궁정에선 경멸의 시선을 받는 등, 평판이 좋지 못했다. 빈에서 불우한 생활을 보내던 아내를

가엾게 여긴 페르디난트 대공은 위로차 사라예보에 그녀를 대동했다. 베오그라드에서 조직된 흑수회 급진파 암살단원들은 총 7명으로

이들은 계획실행 후 자결을 위해 청산가리를 배분했다.

 

페르디난트 대공부부의 암살단원들과 그 역할은 다음과 같았다.

 

1. 다닐로 일리치 - 폭탄운반 및 감시역

2. 네델류코 차브리노비치 - 수류탄 투척역

3. 트리프코 그라베쥬 - 행동대장역

4. 크비젯코 포포비치 - 폭탄 담당

5. 바소 추블리로비치 - 폭탄 담당

6. 무하마드 메흐메드바시치 - 첫번째 저격담당

7. 가브릴로 프린칩 - 첫번째 실패시 차기 저격담당

 

이들은 주로 일리치를 제외하곤 당시 미성년 학생출신의 청년조직원으로,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어리숙했고 계획도 미숙했지만

몇 가지의 우연이 겹치면서 거사를 실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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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대공부부의 암살장면(좌)을 그린 삽화, 오른쪽은 실행범인 가브릴로 프린칩

 

 

 

6월 28일 오전 10시 15분에 4대의 자동차로 구성된 차량행렬이 첫번째 암살실행범인 메흐메드바시치의 앞을 통과하여 지나갔다.

그는 창문에서 대공의 저격을 노렸지만 저격위치를 놓치면서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10시경에 두 번째 실행범인 차브리노비치가

수류탄을 대공이 탄 자동차로 투척했지만 폭발의 시간차로 인해 후미차량의 수행원 12명이 부상했다.

 

차량행렬은 속도를 내어 시청으로 향했다. 실패한 차브리노비치는 독을 마신 후 강에 몸을 던졌지만 마신 독약이 변질되고 치사량에

이르지 못해 경관에게 체포되어 구타당했다. 폭발음을 듣고 나머지 암살범들은 자리에서 떠났다. 시청에 도착한 페르디난트 대공은

예정을 변경하여 폭발로 다친 사람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한편 식사를 위해 식당에 머무르던 프린칩은 가게 교차점에서 병원으로 향하던 페르디난트 대공의 차량이 길을 잘못들어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대공의 차량임을 직감했다. 프린칩은 권총을 꺼내든 후 차로 뛰어들어 첫번째 탄환을 임신중이던 조피

황태자비의 복부에 쏘고, 두 번째 탄환을 대공의 머리에 쏘았다. 대공부부는 보스니아 총독관저로 이송되었지만 곧 둘 다 사망했다.

 

암살에 성공한 프린칩은 처음에 독을 마신 후 다시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지만 몸의 거부반응으로 독을 토해내는 바람에 권총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붙잡힌 프린칩은 다른 암살범들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는데,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한 다닐로 일리치가

자백하여, 무기가 세르비아 정부의 지급품임을 고백했다.

 

암살범들 중, 도주한 메흐메드비치, 성년이었기에 1915년에 교수형에 처해진 일리치를 제외하곤 모두 징역형에 처해졌다. 종신형인

프린칩, 징역형인 차브리노비치, 그라베쥬는 옥중에서 결핵으로 인해 1918년에 사망했다. 메흐메드비치는 제 1차 세계대전 후 귀국해

복역한 후 1919년에 출소해 1943년에 사라예보에서 우스타샤(크로아티아 민족주의단체)에게 살해되었다.

 

포포비치와 추블리로비치는 1918년에 출소했는데, 포포비치는 사라예보 박물관의 학예원으로 일한 후 1980년에 사망했다.

추블리로비치는 베오그라드 대학교수, 유고슬라비아 삼림장관을 지낸 후 1990년에 사망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베르히톨트

외무장관은 징벌적인 세르비아전을 염두에 두고 7월 23일에 세르비아 정부에 10개 조항의 이른바 <오스트리아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후통첩은 48시간 이내에 세르비아 정부가 수락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제국정부의 군주제에 대한 증오, 경멸을 획책하는 모든 출판을 금한다.

2. 나로드나ㆍ오드브라나(세르비아 국가주의자 조직)이라 칭하는 조직을 해산하고 수단을 몰수함. 그리고 제국정부에 대한 선전조직도

   같은 조치를 취한다.

3. 제국정부에 대한 선전을 조장 혹은 조장할 위험성이 있는 모든 자(교사와 교재를 포함해)를 세르비아의 공교육에서 배제한다.

4. 제국정부에 대한 선전을 행한 자는 제국정부가 일관되게 모든 군 관계자와 정부요원을 해고할 것.

5. 영토보전에 반하는 파괴분자의 운동제압을 위해 제국정부의 관련기관 협력을 받아들일 것.

6. 사라예보 사건의 공범자를 법정신문함과 동시에 제국정부의 관련기관을 그 수속에 참여시킬 것.

7. 제국정부가 실시한 예비조사로 인해 부상한 두 명의 지명수배범을 조속히 체포할 것.

8. 무기와 폭발물의 위법판매, 유통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제어할 것.

9. 국내, 국외를 불문하고 제국정부에 적의를 드러낸 세르비아 정부고관의 진술서를 제출할 것.

10. 모든 건에 대한 실행수단은 지체없이 제국정부에 알릴 것. 적어도 7월 25일 오후 6시까지 제국정부는 수락을 대기한다.

 

 

세르비아 정부는 범인 심문 및 다른 사항은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5항과 6항처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정부가 자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에는 거부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조건부 승낙은 납득할 수 없다면서 7월 25일에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망설이던 헝가리

수상 이슈트반 티사도 황제의 반대를 무릅쓰는 형태로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다.

 

러시아 정부는 1909년에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을 승인하는 대신 세르비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에 서약했었다.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인해 러시아 군부는 전쟁준비를 주장하여 황제인 니콜라이 2세에게 압력을 가했다. 독일황제인 빌헬름 2세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 사이의 전보협상이 결렬되자, 러시아 정부는 부분동원으론 늦다고 판단하여 7월 31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러시아에게 동원해제를 요구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동원을 해제할 경우엔 단기간에 다시 전시체제로 이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각국의 이해관계와 세계대전으로의 비화

 

 

독일은 삼국동맹에 기초하여 대응하러 온 오스트리아에게,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을 보고받고

참모총장인 몰트케는 결국 슐리펜 작전을 발동시켜 8월 1일에 총동원을 내리고 동시에, 벨기에에 대한 무저항 통행을 요구했다.

독일정부는 다음날인 2일에 러시아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고 3일엔 프랑스에 대해서도 선전을 포고했다.

 

독일에 의한 갑작스런 도전에 직면한 프랑스는, 8월 1일에 동원령을 내리고 독일전을 상정한 <플랜 17>이라 불린 전쟁계획을 발동했다.

8월 4일에 프랑스 수상인 르네 바비아니는 의회에 전쟁수행을 위해 <신성동맹>의 결성을 부르짖었다. 의회는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전권위임의 거국 일치내각을 승인했다.

 

영국정부는 독일군이 벨기에로 침공하는 것을 확인하자 외교단절에 나서고 8월 4일에 독일에 선전을 포고한 뒤, 프랑스로 해외파견군

파견을 결정했다. 또 1867년에 자치령이 된 캐나다도 종주국인 영국을 따라 참전했다. 같은 형식으로 호주와 뉴질랜드도 참전하게

되었다.

 

일본은 영일동맹에 의해 영국과 동맹관계였는데, 개전과 더불어 영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연합국 편에 서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당시 수상이던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영국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자, 어전회의를 거치지 않고 의회의 승인 및

군 통수부와 절충도 하지 않은채 긴급회의로 요청하여 36시간 후, 참전방침을 결정했다.

 

오오쿠마의 전례 무시와 군부 경시는 후에 정부와 군부의 관계악화를 초래하게 된다. 일본정부는 8월 15일에 독일에 대해 최후통첩을

권고했다. 일본정부가 참전에 신중했던 것에 의해 일주일의 기간을 주었지만 결국 독일이 응답하지 않자 의지를 표시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23일에 독일에 선전을 포고했다.

 

이탈리아는 참전에 대해 찬반양론으로 나뉘었다. 1882년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동맹을 체결했지만 <미회수의

이탈리아>라 불린 오스트리아 사이에서의 영토문제에서 균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맹에서는 독일이 프랑스와 교전할 경우,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군단을 라인 지역으로 파견하게 되어있었다.

 

이에 따라, 참모총장인 루이지 카드르나가 군단파견을 준비하여 국왕이 이를 승인한 8월 2일에 이탈리아 정부는 중립을 표명했다.

그 후 영국과 프랑스와 접근해 1915년에는 연합국측에서 참전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적대관계였기에

중앙동맹국에 참가했다.

 

북유럽 각국은 대전시 일관되게 중립을 지켰다. 1914년 12월 18일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는 덴마크, 노르웨이의 국왕을 초대해

삼국 국왕회의를 열고는 북유럽 국가의 중립유지를 표명했다. 스웨덴은 이전부터 친독 분위기가 있었지만 중립을 선언했었다.

단, 러시아 혁명 후의 핀란드 내전에서 스웨덴 정부는 핀란드로의 의용군 파견을 묵인했다.

 

미국은 당시 먼로주의를 내 걸어, 교전국과 동맹관계가 없었다. 더우기 개전시에 미국은 중남미 국가에서 멕시코 혁명에 개입하는 등

군사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중립을 선언했다.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고립주의를 신봉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대전시 미국은 중재나 전쟁종결을 위한 외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루시타니아호 사건과 독일의 무차별 잠수함 작전, 치머만 전보사건을 겪으면서 여론이 독일을 비난하자 1917년에 연합국에

서서 참전했다. 또, 프랑스와 영국이 패배할 경우엔 양국에 다액의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의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1914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는 보불전쟁 이후 유럽에서 40년만에 일어난 대규모 전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기사도 정신에 입각한 로맨틱한 모습을 상상하여, 양 진영의 수뇌부와 국민 모두 전쟁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의 흥분에 의해 상상력을 뒤흔들어 <이 전쟁은 단기결전으로 끝날것이다>, <크리스마스 전엔 집에 갈 것이다>,

등으로 상상하면서 국가선전과 애국심의 열정에 눌려 군대에 지원했다.

 

프랑스에선 예비역 장병들은 이 전쟁을 신성한 조국방어전쟁으로 여겨,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서 알자스와 로렌 탈환에 열을

올렸다. 독일에서는 민중들이 전쟁을 사회불안과 경제불만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환영했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들은 이 전쟁에

매우 비관적인 우려를 안고 있었다.

 

영국 육군의 호레이쇼 키치너는 전쟁은 장기화되어 막대한 희생을 치를 것이라 예측하여, 대규모의 신병모집에 의한 키치너 육군의

구상에 착수했다. 국제 금융시장은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에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한편 중앙동맹국에서는 싸움의 전략에 관한 마찰이

발생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진공을 지원하는 것을 확인했지만 러시아와 프랑스의 참전이 명확해지자 슐리펜 계획에 기초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을 우선시하였기에, 오스트리아군은 러시아군에 대한 방어태세만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준비하던

오스트리아군은 동원을 완결한 군을 북방의 러시아군과 대치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재이동을 해야 했기에 각지의 찰도수송에 혼란이

발생했다.

 

오스트리아군과 세르비아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는 8월 12일에 세르비아 서부의 드리나 강 연안에서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강행도하를 시작했지만 세르비아군은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격렬히 맞서서, 8월 19일에 오스트리아군은 드리나강에서 퇴각했다.

이것은 연합군의 첫 승리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세르비아를 공략한다는 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채 이후,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등 여러 방면의 작전에 시달려야 했다.

 

벨기에로 진격하고 있는 독일군 보병의 모습.

 

 

 

독일군은 슐리펜 작전에 기인하여 8월 2일에 벨기에 정부에 무저항 통과를 요구했다. 벨기에가 이를 거절하자 독일군은 8월 4일

오전 8시에 리에주 동쪽에서 국경을 넘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진격했다. 벨기에군은 리에주 전투(8월 5일~8월 16일)에서 방어전을

펼쳤지만 질과 양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당했다. 허나 벨기에는 민중들이 철도와 교량을 파괴하는 등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게 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은 영국의 참전을 불렀는데, 영국정부는 키치너를 육군대신으로 임명하고 존 프렌치가 지휘하는 영국해외파견군

(BEF)를 프랑스로 보냈다. 플랑드르에서 독일군과 영불 연합군은 처음으로 맞섰는데, 이 플롱티아 전투(8월 14일~8월 24일)에서

독일군은 영불연합군을 압도했다. 하지만 영불 연합군의 저항에 의한 지연과 예상보다 빠른 러시아군의 동원에 의해 슐리펜 계획은

현실과의 사이에서 차이를 내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먼저 동원을 완결한 21만의 제 1군과 20만 6천명의 제 2군으로 동프로이센을 공격했다. 독일군은 일부를 떼어 내,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지휘하에 15만명의 제 8군을 편성하여 쾨니히스베르크와 탄넨베르크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탄넨베르크 전투 (1914년 8월 17일 ~ 9월 2일) 

 

 

영불 연합군은 러시아가 동부전선을 형성하면,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저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러시아는 철도망이

낙후되고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않아 만족스러운 병력수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남쪽의 오스트리아, 극동의 일본이란

존재로 인해 러시아의 동부전선 파견은 제한되어졌다. (일본은 1914년 8월 23일에 독일에 선전포고)

 

한편, 독일측은 러시아를 가장 큰 위협으로 인식했다. 슐리펜 계획에서 프랑스를 가능한 한 빨리 항복시킨 후 철도편으로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수송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독일 제 8군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있었는데, 러시아 제 1군은 쾨니히스베르크

동부, 제 2군은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중 제 2군은, 폴란드 돌출부로 알려진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러시아측의 작전은 파벨 렌넨캄프 지휘하의 제 1군이 동프로이센,

특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공세를 걸 예정이었다. 알렉산드르 삼소노프가 지휘한 제 2군은 바르미아 마즐리 주변에서 서진하여

북상해 독일군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고립화시킬 예정이었다.

 

8월 17일에 러시아는 파벨 렌넨캄프 지휘하의 제 1군이 동프로이센으로 침입했다. 독일은 이미 제 8군의 절반을 이송했기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소규모 수비대를 강화하여 쾨니히스베르크 동쪽 국경근처로 진을 쳤다. 국경 근처의 슈탈페넬에서 일어난

슈탈페넬 전투에서 소규모 경합을 거쳐 헤르만 폰 프랑소와가 지휘한 독일 제 1군단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독일 제 8군의 사령관이던 막시밀리앙 폰 프릿츠뷔츠는 군비넨으로 향해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격은 8월 20일에

예정되어있어, 성공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제 17군단과 제 1 예비군단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프랑소와 혼자서 서두른 공격은

러시아의 중포(重砲)에 반격받아 패주했다. 독일군의 반격을 물리친 러시아군은 쾨니히스베르크 남부에 진을 쳤다.

 

8월 21일에 삼소노프가 이끈 러시아 제 2군이 고작 3개 사단만이 지키고 있는 동프로이센의 남부국경에서 진군을 개시했다.

프릿츠뷔츠는 군비넨에서 패배하고 러시아 제 2군이 남부에서 전진하는 것을 보고 비스와 강에서 철수해 동프로이센을 완전히

버리면서 러시아에게 넘겼다. 이로 인해 프릿츠뷔츠는 몰트케에 의해 해임되었다.

 

참모총장이던 요아힘 루드비히 폰 몰트케는 제 8군 사령관의 후임으로서, 은퇴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앉히고 그 참모장으로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임명했다. 상황은 베를린의 독일군 사령부가 생각하는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두 명의 러시아군 사령관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봉천전투 이후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었다.

 

알렉산드르 삼소노프는 공공연히 파벨 렌넨캄프를 비판했다. 이들은 봉천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주시 봉천역에서 책임소재를

두고 역에서 서로 주먹다짐을 한 일도 있었다. 렌넨캄프는 이러한 과거로 인해, 극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삼소노프를 도울

생각은 없었다.

 

당시 삼소노프의 제 2군은 보급물자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렌넨캄프는 이를 몰랐다. 렌넨캄프는 독일측의 별도의 공격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제 1군의 재편성을 위해 진군을 늦추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측은 군사력의 규모에선 약 40만으로

15만의 독일 제 8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독일 제 8군은 삼소노프의 진군을 막지 못해, 삼소노프의 좌익군은 저항없이 즐거운 행군을 할 수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에 위치한

독일군 부대는 전진을 막지못해 곧 포위될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프릿츠뷔츠의 참모였었던 막스 호프만 중령은 러시아군

사령관들의 불화를 알아차렸다.

 

러시아군이 이대로 각각 행동할 경우 호프만은 아직 쾨니히스베르크의 동부를 수비하던 독일군의 대부분을 남서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때 러시아 제 1군의 남쪽에 있던 제 17군단과 제 1 예비군단을 삼소노프의 우익인 러시아 제 6군단과 대치하기 위해

다욱 남쪽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했다.

 

독일의 제 1 기병사단은 쾨니히스베르크의 남동쪽 수비로서 렌넨캄프의 제 1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동쪽에만 병력을

배치하여 남쪽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정석으로 보면 이 계획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만약 제 1군이 쾨니히스베르크로 향하여

직접 서진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하여 남서로 진군할 경우, 제 8군의 최좌측 전방으로까지 진출하게 되어 제 8군이 반격하지 않는다면

텅 빈 남부에서 쾨니히스베르크 북부에 진군할 것임이 뻔했다.

 

그러나 호프만은 러시아군 사령관 사이에서의 원한과 질시, 그리고 다음날 명령을 라디오로 통해 전하는 러시아의 관습에서 이 작전을

자신있어했다. 러시아는 전보선의 한계를 넘어 진군하고 말았기 때문에 단거리 무선기사도 부족했고 암호이론도 무지했기 때문에

암호화되지 않은 전파통신에 의존했다. 이는 정확한 메세지는 전달받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동시에 독일군에게 청취되어 간단히 계획이

노출되고 말았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8월 23일에 도착하여 철수를 중지하고 바로 호프만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프리츠뷧츠는 이미 철도를

이용한 독일군의 철수를 명령한 상태여서, 루덴도르프는 제 1군단에게 도이치 아이라우에서 하차시켜 군비넨 전투 후 러시아 제 2군과

대치중이던 제 20군단의 좌익을 보충하라고 명령했다. 호프만도 같은 명령을 내려 약간 혼선은 있었지만 이렇게 함정이 준비되었다.

 

루덴도르프는 몰트케가 서부전선에서 3개 군단과 1개 기병사단을 빼내어 동프로이센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이해했지만, 그 도착이

늦어지자 항의했었다. 이 때는 동시에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공세가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몰트케는 동프로이센을 잃는 것은

매우 큰 패배라고 생각하여 루덴도르프의 항의를 무시했다.

 

슐리펜 작전은 파리 동부의 프랑스군을 쾌속포위 후 섬멸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지만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8월 22일에 삼소노프의 부대는 독일군과 조우해 몇 개의 고지를 누르는 데 성공했다. 23일에 삼소노프는 독일 제

20군단을 공격하여 올라우에서 프랑케나우까지 독일군을 후퇴시켰다.

 

이 때 호프만은 새로운 라디오 통신을 청취했다. 렌넨캄프의 새로운 명령은 호프만의 기대대로, 삼소노프를 무시하고 제 1군을 계속

서진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삼소노프는 독일이 탄넨베르크까지 후퇴한다고 생각하여 제 2군을 북서로 진군시킨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이 때까지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는 접수한 정보가 사실인지 의심했었지만, 결국 이 정보를 믿고 작전을 수립했다. 작전에서

제 1군단은 러시아의 좌익을 공격하고, 그 사이 제 17군단이 남쪽으로 이동해 재빨리 러시아의 우익과 대치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소와는 성공을 위해서는 대포의 보급을 기다려야한다고 주장하여 프랑소와와 루덴도르프가 협의한 결과, 결국 프랑소와의

희망대로 27일에 반격을 개시하는 것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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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 1군 지휘관이던 파벨 렌넨캄프(좌)와 제 2군 지휘관이던 알렉산드르 삼소노프.

봉천역 싸움이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둘의 사이는 매우 좋지 못했다.

 

 

 

26일 아침에 러시아 제 1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쾨니히스베르크로 서진했다. 이 때, 독일군은 제 2군의 우익을 막기 위해 남부로

이동했다. 러시아군의 움직임과 독일군의 움직임에는 다소 시간차가 있어서, 러시아군의 본부에선 독일군의 기동에 주의하면서

제 1군은 계속하여 쾨니히스베르크로 서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독일측도 이를 청취하여 같은 형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랑소와는 27일에 러시아의 좌익에서 공세를 걸어, 2개로 나뉜 러시아 제 6군단은 혼란 속에서 국경근처로 후퇴하면서 교전했다.

러시아 제 2군의 우익은 탄넨베르크로 진군했지만 독일 제 20군단에 저지되어, 러시아군 가운데 전진에 성공한 것은 중앙군 뿐이었다.

러시아 제 13군단은 올슈틴에서 독일군과 대치하지 않고 진군했다. 

 

프랑소와는 27일에 러시아의 좌익에 포진했던 제 1군을 공격했다. 독일군의 대포위력은 위압적인 것이어서, 이 날 밤 러시아는

퇴각하기 시작했다. 전선의 안정화를 위해 삼소노프는 러시아 제 13군단에 대해 올슈틴을 포기하고 탄넨베르크를 경유하여 남서로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이 만들어졌을 때 러시아 제 2군의 대부분은 탄넨베르크에 있었다.

 

8월 28일 저녁, 러시아군은 위기적인 상황이 극한까지 다다랐음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는 우익에 있던 제 6군단과 좌익에 있던

제 1군단이 각자 퇴각하여버렸고, 중앙부는 심각한 보급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공세를 이어나가기란 불가능한 상태였다. 삼소노프는

렌넨캄프에게 쾨니히스베르크를 포기하고 남서를 지원하면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었다. 프랑소와는 즉각 동쪽으로 진군하여 러시아군의 퇴각로인 남쪽에 전선을 형성했다. 동시에 북부의 제 17군단은

남서로 이동했다. 다음날 러시아군의 중앙부는 군의 재편도중 이들 독일군과 교전하여, 포위당하고 말았다. 탄넨베르크 동부에 형성된

포위망은 29일까지 철저하게 포격전으로 나섰다.

 

러시아 제 1군이 구원을 시도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었다. 독일의 기병이 포위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제 1군의 구원은

포위망에서 70km 떨어진 지점에서 발이 묶였다. 다른 러시아군 부대는 이미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에서 이탈하여, 남겨진 제 1군도

달아날 수 없는 위기적인 상황에 빠졌다.

 

8월 30일에 러시아 제 2군은 프로게나우 근교의 호수 늪지대에서 괴멸하여, 92,000명이 포로가 되고 78,000명이 사상했다. 60대의

열차가 러시아군 포로를 독일로 이송하는데 사용되었다. 삼소노프는 도주했지만 니콜라이 2세에게 제 2군의 파멸을 상신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껴 29일에 권총으로 자결했다. 한편 독일군의 피해는 2만명 정도였다.

 

힌덴부르크는 <탄넨베르크 근교에서 승리>라는 내용을 긴급 타전하여, 탄넨베르크 전투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러시아 제 2군이 포위섬멸당한 프로게나우는 탄넨베르크에서 약 30km 서쪽에 떨어진 곳이었다. 한편 탄넨베르크 전투라는 이름의

싸움은 1410년에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연합군이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탄넨베르크 전투가 있다.

 

이 승리로 인해 러시아 제 1군은 동프로이센으로 러시아 국내로 후퇴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2개 군단을 차출하게 됨으로 인하여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기사회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탄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는 호프만의 공이

아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공으로 독일 국민에게 선전되었다.

 

1917년 이후, 루덴도르프의 독재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낸 힌덴부르크의 집권은 이 탄넨베르크 전투의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기초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승리하긴 했지만 서부전선에서의 병력차출로 인해 슐리펜 작전이

실패하면서 9월에 파리 근교의 마른 강까지 진군한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한편, 아프리카 대륙에선 8월 8일에 영불 연합군이 독일 보호령인 토고랜드(현재의 토고)에 침입하자, 8월 10일에는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의 독일군 부대가 영국령 남아프리카(현재의 남아공)를 공격했다. 이 때, 남아프리카의 보어인이 독일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마리츠 반란을 일으켰다.

 

카메룬에선 1916년 2월까지 독일군의 저항이 이어졌지만 최종적으로 중립국이던 스페인령 적도 기니로 후퇴하면서 무장해제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는 파울 폰 폴베크가 이끈 부대가 게릴라전으로 대전 후반까지 교전을 계속했다. 태평양에서는 8월 30일에

뉴질랜드군이 태평양의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다.

 

또, 9월 11일에는 호주군이 노이폼메른 섬(현재의 뉴 브리튼 섬)일부에 상륙하는 등, 수 개월 안에 연합국측이 태평양의 독일군

부대를 항복시켰다. 11월 7일에는 중국의 독일 거점이던 칭따오를 일본과 영국 연합군이 공략하였다.

 

 

출처 : 제럴드 마이어 <제 1차 세계대전>, 데니스 윈터 <제 1차 세계대전 리뷰>,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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