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바그다드 전투

구름위 2013. 12. 1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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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전투 - 1258년

 

 

 

12세기의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의 제 37대 칼리프인 무스타 아쉼이 통치하던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다.

바그다드는 동서무역의 중심에서 번영을 누려 산업혁명 이전에 세계최대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약 100만 명의

주민과 6만명의 정예병이 상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1200년대 중반부터 영향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는데, 몽케의 명령으로 서쪽 정벌에 나선 훌라구는

몽골군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 고원을 넘어 아바스 왕조의 영지로 침공을 개시했다. 훌라구와 중국인 부지휘관인

곽간(郭侃)이 이끄는 몽골군은 1257년 11월에 드디어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훌라구는 몽골군 역사상 최대규모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모든 몽골군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병사는

훌라구의 군사였다고 한다. 약 12만명의 공격부대에는 대규모의 기독교도 파견단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그루지아인으로

이슬람에 대한 보복으로 파괴활동을 일삼았다.

 

당시 바그다드 전투에는 몽골군에 편입된 많은 현지인 부대가 있었는데,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보내 온 프랑크인 용병부대도

있었으며 1,000명의 중국인 화포전문가, 아르메니아인, 그루지아인, 투르크인 등이 아바스 왕조의 포위공격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훌라구는 무스타 아쉼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무스타 아쉼은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공격한다면 알라신이 보복할 것이다>라고

경고하면서 항복요구를 거부했다. 그렇지만 아바스 왕조군은 증원도 없고 바그다드의 성벽강화도 이루어지지 않아 이미

상황은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니콜에 의하면 무스타 아쉼은 만용으로 훌라구의 요구를 거절하는 바람에 화를 자초했다고 기술했다.

만약 그가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여 칸의 권위를 인정했더라면 몽케는 무스타 아쉼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란 이유였다.

바그다드를 포위하기 전에 훌라구는 롤 족(이란 북서부에 거주하는 이란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들을 학살했다.

 

이를 보고 두려운 마음이 생긴 니자르 파(시아파의 계통)의 암살교단은 1256년에 싸움을 포기하고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진

아란트 성채를 몽골군에게 내 주고 말았다. 훌라구는 티그리스 강 부근에서 군대를 동서로 양분했다. 아바스 왕조군은

서쪽 연안에서 공격을 걸어 몽골군을 후퇴시켰지만 동쪽연안은 견디어내질 못했다.

 

몽골군은 아바스 왕조군의 후방에 잇던 제방을 무너뜨려 수공을 실시했다. 이에 아바스 왕조군의 대부분은 후퇴도중

학살당하거나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곽간의 명령으로 몽골군의 중국인 부대가 방책과 참호를 건설하면서 공성병기와

투석기로 바그다드를 웨어쌌다. 

 

바그다드 공격은 1월 29일에 이루어졌는데, 몽골군의 공격은 포위공격의 정석대로 빠르게 실시되어 2월 5일에 바그다드의

성벽은 몽골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무스타 아쉼은 훌라구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간 뒤라 보기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2월 10일에 결국 아바스 왕조는 몽골군에게 항복했다. 몽골군은 2월 13일에 바그다드로 입성했다. 무스타 아쉼은 사로잡힌 후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처형당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모조리 살해당하고 유일한 아들 한명만이 몽골로 압송되었다. 그로부터

약 1주일간 바그다드 시내는 몽골군의 살인과 약탈, 강간, 방화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원래 바그다드는 만술이 구축한 난공불락의 성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마라로 수도를 이전할 때 폐기되어 사마라에서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왔을 땐 이미 황폐해진 뒤였다. 아바스 왕조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새로운 칼리프의 궁전과 시가지 조성을

착수했지만 이것은 백성들의 불만과 바그다드의 약체화를 불러 오면서 몽골군에게 바그다드가 쉽게 무너지고 만 원인이 되었다.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몽골군의 잔학행위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약학에서 천문학까지 광범위하고 귀중한 서책들을

보관하고 있던 바그다드의 지혜의 관은 파괴되었다. 당시 생존자들은 몽골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로 티그리스 강이

붉게 물들고 버려진 책들의 잉크로 인해 티그리스 강물이 검게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바그다드의 성 내에 거주하던 시민들은 달아났지만 대다수가 몽골군에 잡혀 학살당했다. 당시 학살숫자는 약 10만을 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몽골군은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등을 약탈하고 파괴를 일삼아 몇 세대를 거쳐 전해온 위대한 건축물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술탄이던 무스타 아쉼의 말발굽 처형은 몽골전통의 귀인의 사형시 실시하던 관례였지만 무슬림들에겐 치욕적인 것이었다.

몽골군이 살해한 사람들의 시체가 부패해 코를 쥐고 다닐 정도로 처참하게 변한 바그다드였지만 항복한 도시들에 대해서는

몽골군은 파괴하지 않았다. 이것은 몽골군의 전술이기도 했다.

 

그 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군이 1260년에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처음으로 몽골군에게 승리하여 이들을 쫓아버릴때까지

이슬람 세계는 몽골군에게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당시 세계문화의 중심지이던 바그다드의 파괴는 이슬람 세계에선 큰 충격이었다.

이것은 일본으로 보면 역사적 고도인 쿄토와 그 문화유물들이 외적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출처 :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제국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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