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ㆍ마지 반란 - 1905년 ~ 1908년
1880년대에 유럽열강에 의해 아프리카가 분할된 후, 독일 제국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로는 독일령 동아프리카(후의 탄가니카, 탄자니아의 대륙부, 르완다, 브룬디 및 모잠비크의 일부), 독일령
서아프리카(후의 나미비아), 독일령 카메룬(후에 카메룬 및 나이지리아 동부), 독일령 토고랜드(후의 토고 및 가나 동부)였다.
그 중에서도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지배력이 비교적 약하여 아부시리의 반란 및 무크와와가 일으킨 헤헤족의 저항 등이 일어났지만
독일 식민지 정부는 현지민 지배를 위해 가혹하고 탄압적인 방법을 씀으로 인해 영내 전역의 요새화 시스템 유지와 관리를 실시했다.
1898년에 독일 식민지 정부는 인두세(人頭稅)의 징수를 시작하여 도로건설과 그 외 사업에 가혹한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1901년에 식민지 총독으로 구스타프 아돌프 폰 괴첸이 취임하자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발에 힘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많이 들어와 있던 북동부에서는 노동력 부족에 고민하여 농업생산의 확대는 순조롭지 않았다. 1902년에 괴첸은 환금작물로서
면화에 눈독을 들여, 남부에서 공동재배를 명령해 마을마다 공동의 면화밭(플랜테이션)을 일구게 했다.
면화재배에는 마을의 성인남성이 징용되었지만 연간 28일로 정해져 있는 작업일수는 자주 연장되어 적은 품삮만이 주어졌다.
이러한 남성징용은 매우 불만이 많아서(그들은 자신들의 밭 농작물도 거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많은 마을사람들은 토지경작을
거부하면서 납세를 거부했다. 그리고 촌장 등 재배관리를 위임받아 일을 강요한 자들에 대한 원성도 높아갔다.
이러한 독일의 정책은 단지 불평만이 아닌, 아프리카인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역의 사회구조는 급속히 변화하여
남녀의 사회적 분할도 그 영향을 받아 변했다. 남성은 집을 나와 일해야했기에 여성은 전통적인 남자의 일을 맡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남성의 부재는 마을의 생활, 자산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켜 당시 식민지 정부에 대한 상당한 적의감을 품게 되었다.
1905년에 가뭄마저 들자 이들은 정부의 농업, 노동정책에 반기를 들어 7월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현지 독일 이민자에
대한 반감도 높았지만 동시에 독일인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던 가운데 독일령 동아프리카 동남부, 루피지 강 남쪽의 마툰비 고지에
사신(蛇神) 보켈로의 사자 <혼코>로 빙의했다는 영매사(霊媒師) 킨지키틸레 응그왈레가 나타나 예언에 따른 제조법을 전수했다.
그의 제조법이란 독일인의 탄환을 물로 바꾼다는 <비약>이었다. 그리고 보켈로의 예언이라면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사람들은
독일인을 배제해야 한다고 하여 비밀리에 각 부족의 단결과 반란세력의 규합을 부르짖었다. 이 <비약>은 물(스와힐리어로 마지)에
피마자 기름과 잡곡의 씨앗을 혼합한 것이었다.
이윽고 킨지키틸레는 자신을 보켈로라 칭하고 자신을 따르는 자를 혼코라 부르며 많은 신자를 모았다. 킨지키텔레는 순례자에게
마지(물)를 주고 혼코를 교세확장의 도구로 쓰면서 물을 가져다주는 하늘의 사자라며 주변각지에 설파하게 했다. 1905년 중반에
마툰비 및 키치 고지와 그 인근의 대부분이 킨지키텔레의 신자가 되었다.
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식민지 총독이던 구스타프 아돌프 폰 괴첸. 재정을 메우기 위한 가혹한 농업정책은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1905년 7월에 마툰비 고지 난데나 마을의 마툰비족 주민이 징세에 반발하여 면화나무 세 그루를 뽑아냄으로서 반란은 시작되었다.
폭도는 주변 사람들을 규합하여 7월 30일에 현지 감독관의 주거지를 습격했다. 7월 31일에는 키치족이 연안의 소만가를 습격해
재배중이던 면화를 뽑아내고 상인들의 취락을 불태운 후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소만가의 습격은 처음 이 반란이 마툰비의 일부 소동으로 경시했던 식민지 정부를 경계하게 만들었다. 당시 남부에는 458명의 유럽인
경관과 588명의 병사밖에 없었기에 괴첸은 200명을 킬와로 보냈다. 린케 중위가 이끈 독일군 부대가 마툰비를 공격했지만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고전하면서 그들의 사기가 매우 높음을 알게 되었다.
이 반란은 킨지키텔레의 명령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란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6주 후에는 다르에스살람 및 키로사 이남의
모든 지역이 반란지역으로 변했다. 킨지키텔레의 신자들은 짚으로 머리를 감은채 권총이나 창, 활 등 빈약한 무기로 봉기했지만
숫자가 많았다.
8월 4일에 킨지키텔레는 식민지 정부에 체포되어 모홀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8월 7일에 모골로에 집결한 키치족을 독일군
해군육전대가 격퇴하여 키치족은 루피지 강 연안에서 게릴라 활동을 이어나갔다. 8월 8일에 독일군은 산악지대로 달아난 마툰비족의
여성과 아이들, 감시소 등을 철저히 수색했다.
마툰비에서의 반란소식을 들은 응긴도 족은 이에 호응하여 동원령을 내리고 8월 13일에 세 방향으로 나누어 리왈레를 습격해
함락시켰다. 다음 날에는 평화를 설파하기 위해 다가온 기독교 선교사를 살해하고 연안으로 몰려온 독일군은 매복으로 격퇴시켰다.
남쪽에선 무우엘라 족이 봉기하여 주민들을 강제로 참가시킨 후 독일의 영향이 강했던 르쿠레디 및 니얀가오로 진격했다.
8월 28일에 니얀가오에 도착한 반란군은 기독교 전도소를 불태웠다. 그 후 반란군은 르쿠레디로 향했지만 선교사들은 사전에
탈출하였다. 반란군은 르쿠레디의 촌락을 약탈하고 그 후 마사시로 향했는데, 그곳의 야오족과 마쿠아족은 반란을 알지 못해
이들을 무우엘라족의 침략으로 보고 적대시했다.
이들의 충돌은 반란군 측에 27명의 사망자를 내게 했다. 반란은 북부의 자라모족에게도 알려져 이들도 참가하면서 8월말에는
다르에스살람 남부의 대부분이 반란지역이 되었다. 전도소가 파괴되고 반란이 걷잡을 수 없게되자 8월 31일에 괴첸은 병력부족을
이유로 일시적으로 무우엘라에서 철수를 명령하고 독일 본국에 증원을 요청했다.
독일 본국은 처음에 증원요청을 거부했지만,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는 곧 2척의 순양함으로 해병대를 파견할 것을 명령하고, 그 외에
멀리 뉴기니아에서도 증원부대를 보냈다. 수도인 다르에스살람에선 반란에 대한 공포로 인해 패닉상태가 되어 유럽인 지원병은
매일 밤 군사훈련을 받았다.
9월 5일에 괴첸은 더욱 더 두려운 뉴스를 접해야 했는데, 도망쳐 온 한 명의 병사로부터 무분가족의 군대가 이파칼라를 취한 후
마헨게와 이린가의 중요한 군사주둔지가 위태롭다고 보고했다. 이린가에는 다르에스살람 바깥의 가장 중요한 요새로, 117명의
병사를 니그만 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니그만 대위는 8월 24일에 이파칼라에서 도망쳐 온 교역상으로부터 반란소식을 접하고는 헤헤족의 반란참가를 막을 수 있다면
반란의 서부확대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니그만은 9월 3일에 75명의 병사와 함께 헤헤족의 수장에게 설득을 위해 출발했다.
헤헤족은 독일군의 화력을 알고 있었고 반란한 광신자들을 혐오했는데 무쿠와와 이후 전체를 다스릴 수장이 없었기에 독일측에 붙었다.
이 때문에 반란군에게 포위당했지만 9월 5일에 니그만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 후 니그만은 이파칼라 방면으로 후퇴하던 무분가족 부대를
확인하고는 마헨게 및 응게아 방면으로 향했다. 한편 그 전인 8월 16일에 이파칼라는 무분가족의 습격으로 함락되었었다. 무분가족은
보켈로를 신앙하진 않았지만 마지의 일은 알고있어 강경파가 부족의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마지를 이용했다.
8월 16일 밤에 무분가족의 공격대는 이파칼라 수비대를 제압하고 독일군의 깃발로 장교의 목을 매어 죽였다. 그 후 이들은 마헨게로
향했지만 반란에 반대했던 한명의 부족장이 배반하여 마헨게의 독일군에게 투항하면서 도로 습격을 받았다. 8월 23일에 이를 안
마헨게 수비대의 폰 핫셀 중위는 60명의 병사를 이끌고 매복하여 150명을 사살하여 격퇴했다.
핫셀은 급히 마헨게로 돌아가 주둔지를 보강하고 반란에 동조하는 자들을 체포한 후 교수형에 처했다. 대규모의 응긴도족 부대가
남쪽에서 1,200명 정도로 마헨게로 다가오면서 8월 30일에 공격을 실시했다. 2정의 기관총을 장비했던 독일군이 진격해 오는 적을
다수 사살하자 공격대는 뿔뿔히 흩어져 달아났다.
9월 1일에 무분가족이 마헨가를 다시 공격했지만 같은 모양으로 격퇴당하여 그 후 수 주간 마헨가를 포위하기만 했다. 마헨가를
포위한 무분가족은 주변을 조사하여 니그만 대위의 증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자 니그만 부대를 매복하여 공격했다. 니그만은
일시 후퇴했지만 우회하여 9월 20일에 마헨가에 입성했다.
월 23일 새벽에 니그만의 부대는 메헨가 북부에서 무분가족 진지를 기습했다. 보초도 세우지 않고 느긋이 있던 무분가족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한 채 달아났다. 마헨가의 수비진지는 고립된 채였지만 니그만은 3일 후 마헨가를 떠났다.
반란군을 향해 주시하고 있는 독일군 아프리카계 병사들. 이들은 스와힐리어로 <아스카리>라 불리웠다.
루피지 강 북부에선 무분가족 출신인 2명의 혼코가 반란을 조직했다. 비둔다의 수장은 마지를 거부했지만 그의 부하들 대다수는
마지를 원하여 결국 봉기했다. 그들은 키로사에 들어서서 마을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반란군에 편입시키고 상점을 약탈하고 독일군
주둔지를 공격하였다.
독일군은 부대를 소집하여 반란집압을 위해 출진했다. 전투는 혼전이 되어 반란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낸 다음에 후퇴했지만
독일군도 철수했기 때문에 혼코는 승리를 선언했다. 그 후 우르굴에서 증원이 도착하자 반란군은 도중 마을에서도 촌민들을 강제적으로
반란군에 편입해 모로골로 방면으로 진격했다.
8월 13일에 리왈레가 함락된 후 응긴도족은 당시에 가장 강력한 군사조직을 가졌던 응고니족을 반란에 끌어들이기 위해 마지를
지참한 사자를 보냈다. 이 때 반란세력은 절정에 이르러 8월 26일에는 응긴도족이 응게아에서 파견되어 온 독일인 경찰대를 전멸시키는
등, 일부 반대의사를 보이긴 했지만 결국 응고니족 수장은 마지를 받아들였다.
많은 부족민은 마지를 받아들였지만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무력에 의한 강제참여를 거부하다가 7명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응게아의
독일군 장교인 리히터 대위는 8월말에 응고니족 봉기소식을 접한 후 바로 31명의 아스카리 및 25명의 보조요원과 함께 응고니족의
거점 중 하나인 우웰레카의 제압에 나서 9월 3일에 공격을 걸었다.
우웰레카에선 아직 봉기를 준비중이었기에 갑작스런 습격에 반란군은 당황하였다. 창을 장비한 응고니족 전사들은 독일군을 향해
돌진했지만 1명의 아스카리만 살해한 채 200명이 사살당하면서 퇴각했다. 리히터는 바로 응게아로 돌아가 6주간에 걸쳐 수비에 나섰다.
그 사이 반란은 남쪽의 응고니족 지역까지 확대되어 마텐고족 및 니야사족도 소수가 참가했다.
9월 초에 아랍인 교역상의 취락을 공격하려다 실패하자 이후 5천명으로 구성된 응고니족 공격대가 응게아로 향했지만 이때에 이르러
마지에 대한 신용은 추락하여 병사들의 사기도 낮아져 있었다. 공격대는 응게아 공격을 위해 한달간의 준비를 걸쳤지만 이러한 늑장이
독일군을 도왔다.
10월 17일에 니그만 대위는 응게아로 향하여 10월 21일에 응고니족 공격대에 접근했을 때, 응고니족은 보초도 세우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새벽에 독일군의 기습이 시작되자 응고니족은 수비도 하지 못한 채 뿔뿔히 달아났다. 응긴도족은 다시 남부 고지의
팡구와족, 베나족에게도 혼코와 마지를 보냈다.
팡구와족은 밀로의 전도소를 부수고(선교사는 해방) 마지를 거부한 키치족을 습격했다. 베나족의 지역인 우베나에선 독일측에
가세한 헤헤족 등과 내전상태를 벌였다. 9월 19일에 베나족은 3천명의 신자가 있던 야코비의 기독교 전도소를 습격했지만 강력한
수비대에 막혀 30명의 사망자를 내고 후퇴했다.
하지만 수비대가 야코비를 버리고 철수하자 베나족은 야코비 주변에서 약탈을 행하여 기독교도와 여성을 살해했다. 그 후 생 족이
독일측에 가담하면서 사태는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실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란의 소문은 타볼라, 므완자, 무소마까지 퍼져
각지에선 긴장이 흘렀다.
1905년 10월 말에 독일 본국에서 1,000명의 정규군이 도착했다. 괴첸은 이들을 남부 공세로 돌리면 치안을 회복하리라 여겼다.
괴첸은 3개의 원정대를 편성하여 반란군을 구축함과 동시에 반란지역 마을의 가옥과 밭을 파괴하고 기아에 허덕이도록 하는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반겐하임 대위는 키로사에서 이린가를 경유하여 1906년 3월에 마헨가에 당도했다. 슐라이니츠 소령은 비두바 산을 점령했다.
요하네스 소령은 응고니족, 베나족, 그리고 팡구와족에 대한 작전을 위해 11월 29일에 응게아에 도착했다. 그런 후 반란참가자들을
투항시키기 위해 무기를 버리고 <주모자와 요술사>를 잡아 건네면 사면해 준다고 선언했다. (붙잡아 건네진 자들은 대부분 처형)
그리고 투항자는 한 명당 비교적 높은 4실링의 임금을 주는 노동부역에 처했다. 반겐하임은 10월 22일 보고 속에 <나의 사견으로는
기아와 빈곤만이 최종적인 복종이라 본다. 군사행동에 의한 직접적인 효과는 그저 큰 바닷속의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술회했다.
한편, 반란군은 각지에서 식량을 압수하면서 경작을 위해 안전한 근거지를 모색했다. 1906년이 되자 반란군은 독일군을 피하는
게릴라전으로 선회했다. 기아와 식량압수, 그리고 학살행위로 인해 이미 일반 반란자들은 항복을 희망했다. 항복은 죽음을 뜻한다며
강경파의 혼코 및 과격파 리더는 이들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도망행렬을 막을 순 없었다.
이에 처음으로 자라모족이 항복했다. 몇 명의 강경파 수장들은 달아났지만 그 수장 중 한명인 바실라는 1906년 3월에 체포되어
다르에스살람에서 망고나무에 목이 매이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남부의 르쿠레디에서는 전도소를 습격시 마지의 실패로 인하여
무우엘라족, 마쿠아족, 마콩데족의 신뢰관계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쿠아족은 억지로 반란에 참가했기에 1905년 10월에 이탈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콩데족은 전도소 습격 후, 무우엘라족과의
관계를 끊고 본거지인 오지 수목지대로 들어가 방어전을 펼쳤지만 부족원의 배신으로 수장이 처형되면서 와해되었다. 남은
무우엘라족은 12월 1일에 2천명으로 응구푸르의 독일군 캠프에 야습을 감행했다.
하지만 무우엘라족 부대는 반격에 나선 독일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생존자들은 이후 게릴라전으로 나섰지만 무우엘라족의 일반인은
대부분이 독일군에 투항하여 1906년 1월 29일에 독일군은 린데에서 반란종결을 선언했다. 키치족은 1905년 10월까지 대다수가 투항했고
강경파는 마툰비족과 합류하기 위해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10월 27일과 11월 14일에 키치족 강경파와 마툰비족 연합군은 키바타의 독일군 진지를 습격했다. 두 차례의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1천명 이상이 기관총에 쓰러지면서 패퇴했다. 당시 이들 대부분은 기관총이 무엇인지 몰라 사격소리를 무기가 부딫치는 소리라
착각하여 돌진만 거듭했다. 결국 1906년 3월 초에 마지막 수장들이 체포되면서 이 지역의 반란군은 붕괴되었다.
반란군을 향해 사격중인 독일군 아스카리 부대원.
마헨게 주변에선 11월 18일에 루이파에서 전투가 발생했다. 2천명의 무분가족 전사는 배수진을 치고 독일군의 기관총 앞으로 돌진하다가
300명을 잃고 대다수가 익사하면서 격퇴당했다. 1906년 3월에 반겐하임 대위의 독일 원정군이 마헨게에 도착했다. 2개월 후 무분가족은
몇 명의 혼코를 교수형에 처한 후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북부의 우르굴 산지에서는 12월 31일에 서쪽 숲에서 독일군의 슐라이니츠 소령의 매복부대에 반란군이 당했다. 반란군은 기관총 공격에
무너져 달아났다. 슐라이니츠는 농지와 가옥을 철저히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해 결국 1906년 7월경에 북부의 반란은 종식되었다.
응게아 방면의 요하네스 대위는 10월 21일에 응고니족을 격파하고 11월 2일에 그들의 거점을 함락시켰다.
11월 29일에 응게아에 도착하여 요하네스가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자 1906년 1월 6일에 현지 반란군의 수장이 붙잡히면서 응게아의
반란은 종료되었다. 1906년 1월 6일에 베나족 및 팡구와족 부대가 루피지 강을 건너 돌진했지만 독일군의 매복에 걸려 흩어졌다.
3월에 강경파의 리더들이 요하네스의 부대에 포위되면서 4월 2일에 대부분이 와해되었지만 일부는 탈출하여 보복행위를 일삼았다.
하지만 반란은 차례로 진압되어 대부분이 붙잡히거나 자결했다. 남서부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수장들도 1908년 5월과 7월에 각각
사살당하면서 3년에 걸친 반란은 종료되었다. 마지 마지의 반란은 독일측이 유럽인 15명, 아스카리 73명, 보조요원 316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반란측은 20만에서 30만 가까이가 전사 혹은 기아로 사망했다.
반란지역의 총 인구는 3분의 1이 줄어들었다고도 했는데, 괴첸은 마툰비족의 반수가 사망했고 팡구와족은 4분의 3 이상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이 때문에 1908년 4월까지 식량수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란측 리더들은 대부분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응고니족은 지배계층의 약 100명이 처형당하여 일시 부족통치에 문제가 생겨 치안이 악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교수형 전에 많은 응고니족 수장들이 기독교 세례를 받아 이후 남부에선 기독교가 급성장했다. 이것은 반란의 실패로 인해
민속신앙이 신용을 잃은 결과였다. 반란 후에도 독일령 동아프리카 동남부는 전화 및 기아로 인해 인구가 감소했다. 그리고 경제도
회복되는데 오랜 시간을 요구했다. 이는 현지민의 저항심을 꺾어놓아 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식민지는 평온했다.
반란 후, 독일 정부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행정개혁을 실시하여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통치가
원활한 유럽의 식민지로 여겨졌다.
출처 : 데이비드 앤더슨 <아프리카의 역사>,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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