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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독립전쟁

구름위 2013. 12. 1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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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독립전쟁 - 1821년 ~ 1829년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와 서유럽의 대두

 

 

1389년에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서 발칸제후연합군을 격파하고 1453년 4월에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 제국군이 점령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발칸반도에서 기독교 최후의 땅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거의 가 점령당한 불가리아, 그 후 세르비아,

그리스, 그리고 알바니아도 점령되어 발칸반도의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의 주민들을 무리하게 이슬람 교도로 개종시키지는 않았지만 무장의 권리는 빼앗고 정치에 참가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리스도 처음엔 같은 운명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고 해도 그리스인들은 서유럽과 일반적인 왕래를 했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도 가혹하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파날리오티스라 불린 그리스계 정교도층은 오스만 제국에서 정부통역관, 제독통역관, 왈라키아 공국, 몰도바 공국의

공위로 임명되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또 종교, 언어, 민족이 다른 사람들도 종교를 축으로 하는 통합,

공존을 꾀한 온건한 사회시스템과 강력한 조직력으로 인하여 그리스는 <오스만의 평화>가 흘렀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하의 정교도들을 다스리는 정교도 밀렛의 수장, 콘스탄티노폴리 대주교 자리, 밀렛의 고위 성직자리도 그리스인들이

손에 넣어 밀렛 수장은 부여된 세금의 징수, 수입 및 질서유지, 분쟁처리 등을 맡았는데 이것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정교도 전체에

대해 전권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또 이러한 밀렛의 존재는 발칸 각 민족의 정교도와 터키인을 대표로 하는 무슬림과의 융합을 막기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한편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터키인에 의한 토지몰수가 진행되어 경작면적의 3분의 2가 소수파인 터키인의 소유가 되었고

나머지 3분의 1이 그리스계 유력지주가 지배했다. 그리스계 유력지주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지방자치제도의 범위내에서 징세와

치안유지의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특권층이었지만 이들은 터키인의 토지확대를 적대시했고 사회저변에 형성된 중빈농층도

오스만 제국말기의 무질서와 부패에 희생되었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 동방정교회 상층부도 오스만 제국에게 흡수되었기에 하급 성직자들은 농민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16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서유럽의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자 이제껏 오스만 제국의 우위는 점차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18세기 초에는 오스만 제국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서유럽의 충격이 강하게 밀어닥쳤다.

 

특히 러시아 제국은 원래 남하정책을 채용하여, 1710년에 발발한 러시아 - 터키 전쟁당시 오스만 제국하의 정교도 수호자를 자칭하며

이들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1768년부터 1774년에 걸쳐 일어난 제 2차 러시아 - 터키 전쟁에서 승리하여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을

체결한 후 흑해 연안의 거점을 손에 넣고 러시아와 같은 정교를 신앙하는 발칸의 정교도 보호권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내정간섭을 하는 입장이 되어, 1778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오스만 제국으로 공격을 가하면서

발칸반도로 영향력을 높였고, 발칸반도에 사는 주민 대다수를 형성하는 슬라브인들을 부추겨 발칸 각 민족의 독립을 지원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발칸반도의 각 민족을 도운 러시아가 해방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사태에 오스만 제국 지배층은 18세기 이후, 군사분야에서 근대유럽의 기술, 모델을 도입하여 서구화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서서히 체계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군사분야에 한정된 것으로, 사상과 문화 등에는 19세기까지 그 문호가

개방되지 못했다.

 

서유럽의 충격에 감화된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 지배층만이 아니었다. 발칸반도의 기독교계 각 민족들도 이 영향을 받았는데,

그 속에는 민족주의에 작가한 사람들도 생겨나 18세기에 그리스계 정교도 중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환멸을 느끼고 서유럽의

문화충격에 감화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발칸반도에서 생산되는 면화, 옥수수의 재배가 17세기 이후 성행해지면서 수출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에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것과 맞물려 상인들과 선원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지게 되었다. 원래 그리스 상인들은 비잔틴 제국 이후 상업면에서

활약하여 한때 베네치아, 프랑스, 영국으로 해외진출을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영역이 축소되었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영불전쟁 등의 영향으로, 프랑스, 영국과의 상업활동이 다시 재개되면서 그리스 상인들의 활동은 활발해졌고

세르비아 상인, 불가리아 상인, 유대 상인 등이 뒤를 다랐다. 그 후 각지에서 수공업이 소규모로 발달했지만 상업과 상품생산의 발달로

인하여 상공업에 관련된 중산계급의 사람들 가운데서 민족의식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자제를 서유럽으로 유학보내어 지식을 흡수하였기 때문에 중산계급의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현실을 타파

하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 상인들은 트리에스테, 베네치아, 빈, 암스텔담, 부다페스트, 오뎃사 등에서 상업활동을 하게 되어

이러한 서유럽 지역에서의 지식취득과 자금획득을 바탕으로 지역민들의 지적자각을 추진했다.

 

한편 그리스 독립전쟁의 효시가 된 펠리키 에텔리아(그리스 비밀결사)는 오뎃사 주재의 그리스 상인들에 의해 설립되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이후, 유럽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재평가되어 친그리스주의(헬레니즘)이 대두되면서 그리스로의 여행이 활발화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로의 정열은 그리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고대 그리스의 후예로 여겨 이들이 <이민족>에게 지배당하는 상황을 구출해야

하며 고대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 책무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스 부흥을 희망한 조류는 유럽에 존재했던 그리스의 지식인, 상인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그리스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유럽에서 발생한 계몽사상도 그리스로 흘러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 각지의 그리스인 거주지역, 베네치아 지배하의 이오니아 제도, 이스탄불, 스미르나, 몰도바, 왈라키아 공국에도

미쳐 각지의 그리스 학교에서는 고대 그리스어, 고대 그리스 역사, 그리스 고전문학에 중점을 둔 교육이 실시되었다. 더우기 파리에

주재했던 그리스인으로, 고전학자이던 아다만티스 콜라이스는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의 경험에서 그리스인 스스로가 그리스인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콜라이스에 의하면 비잔틴적인 기독교의 요소가 그리스인이 속박을 푸는 근원이며 그리스인의 문화적 근원은 고대 그리스에 있다고

설파했다. 이에 콜라이스는 <그리스 문고>라 불린 그리스 고전의 출판을 실시하여 그리스 민족의 의식고양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고양은 그리스인들에게 정치적 자생의식을 심어주어 1799년에 실시된 이오니아 제도의 합병 등 프랑스 혁명사상과 계몽사상이 그리스의

유입으로 동방정교회 지도자층이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1798년에 정교회 지도자층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문서인 <아버지의 가르침>을 출판했지만 콜라이스는

이에 <형의 가르침>이라는 문서로 대항했다.

 

대두하는 민족주의와 독립의 열망

 

 

18세기 말에,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흑해, 발칸반도로 세력확장을 노린 것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킨 후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 제국의 부흥, 그리고 손자에게 콘스탄틴이란 이름을 붙여 황제로 즉위시킨 후 <발칸제국>을

건설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1763년 이후 러시아의 사자는 발칸반도를 돌면서 그리스인 유력자, 고위 성직자, 백성들과 유랑민, 산적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봉기를 부추겼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면서 민족주의가 유럽을 휘감았는데 특히 독일 낭만주의의 대두로 인해

각 민족은 모국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것은 서유럽에 이주했던 발칸 각 민족의 상인들에 의해 발칸반도로 전해졌는데, 그 결과 발생한 것은 세르비아 봉기였다.

1804년에 일어난 세르비아 봉기는 오스만 지배층에 의하여 성직자, 교사 등 세르비아 지도층이 대량학살되었는데 당시 봉기는

오스만 지배층 및 예니체리에 대한 반감으로 일어난 것이라 민족주의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유럽열강들이 여기에 관여하면서 민족해방의 색깔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세르비아 봉기는 결과적으로

자치를 획득하여 후에 세르비아 공국의 성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봉기는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를 불러와서 그리스에서도

민족주의 운동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스에서도 1770년 2월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그리스인 명망가를 중심으로 하는 봉기가 발생했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제압되었지만 이 봉기는 처음에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남하정책을 지지한 것이었기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는

러시아 - 터키전쟁(1768년~1774년)이 발생하였다.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에 침입하자 에게 해에서도 이에 편승해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후에 그리스 독립전쟁의 중심점이 되어버려 이 봉기는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반란은 유력자와 고위 성직자들이

지도했기 때문에 외국세력에 의해 획책된 봉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다 민족적이며 방향성이 제시된 집단화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동방문제가 발생한 가운데 열강 3국(러시아, 영국, 프랑스)들의 패권다툼과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로 인하여 그리스의

독립은 결코 실현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여 지중해에서 프랑스 상인들이 일소되었기 때문에

지중해는 그리스 상인들의 활동중심이 되었는데 이것은 오스만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인들이 해외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활동은 그리스의 독립을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797년에 캄포 포르미오 조약의 체결로 인해 이오니아 제도가 프랑스에 의해 점령당하자 나폴레옹은

프랑스 보호하에서 그리스를 독립시키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중에 <동방의 사냥꾼>이라는 부대가 편성되었고

1807년엔 <알바니아 연대>가 결성되었는데, 그 속엔 후에 독립전쟁의 영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1798년에는 그리스인, 알바니아인들에 의한 봉기위원회가 결성되어 알리 파샤와 오스만 제국에 반항하는 주민을 책동하기

위해 밀사가 발칸반도로 파견되었다. 18세기 이후, 프랑스 혁명에 의한 혁명정치사상, 사회사상의 영향은 상인과 나폴레옹에 의해

파급되어 코자니, 케어, 사모스에선 지방자치의 범위 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적인 당파가 생겨나 공화주의자들은 <칼마뇨르>라 호칭했다.

 

그리고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 동업조합과 협동조합 내에서 수장과 직원, 대주주와 소주주 사이에서는

수공업자 단체와 대기업 경영자의 사이 등 사회적인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1800년에 이오니아 일곱도서 연방국이 열강의

타협으로 그리스인이 운영하는 국가로서 창설되어졌다.

 

이 이오니아 일곱도서 연방국은 1807년에 티르지트 조약이 러시아, 프랑스 사이에서 체결되면서 이오니아 제도가 다시 프랑스령이

되면서 소멸했지만 헌법의 제정, 외교 등의 권리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독립으로 향하는 상징이 되어 다시 일어난 러시아 -

터키 전쟁(1806년)의 결과, 영국의 보호하엔 있었지만 법적인 독립국으로서 이오니아 제도합중국이 창설되어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아닌 그리스 지역이 출현했다.

 

그러나 그리스 독립의 제 1보라고 생각했던 이오니아 제도의 독립은 영국에 의해 인정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농민과 시민계층, 러시아와 프랑스에 호의를 품었던 귀족계급의 일부는 영국의 호민관에 적대감을 가져 1817년과 1819년에는

산타 마브라와 자킨토스에서 민족주의적 양상을 띤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민족주의 활동은 지도자들이 희망했던 것과는 전혀 상반되어, 고위 성직자, 장로의 대부분은 회의를 가졌다. 이 한편으로

알리 파샤는 이필로스, 남 알바니아, 서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그리스 본토 서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열강의

독립을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여 알바니아, 그리스국을 건설하는 것을 계획했다.

 

알리 파샤는 반란을 진압하면서도 한편으로 오스만이 독점한 행정지위를 그리스인들에게 위임하였고, 군대에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알리 파샤의 궁정은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정치, 군사학을 배우는 학교로 변모했다. 한편 18세기 말에는 그리스 해방운동을

이룩하기 위한 비밀결사가 만들어졌다.

 

이 대표자였던 리가스 벨레스텐리스 폴레오스는 1798년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루멜리 소아시아, 에게해 제도, 왈라키아,

몰도바 주민의 신정치체제>라는 책을 저술하고 나폴레옹이 그리스에 들어오면 봉기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활동은 오스만 당국에

의해 밝혀져 폴레오스는 처형되었지만 그가 오스만 지배하에서 발칸 각 민족을 해방,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공화국을

창설한다는 사상은 필리키 에텔리아가 계승하여 폴레오스는 그리스 독립의 첫 순교자로 기억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생활했던 몇 명은 프랑스 혁명에도 참가하여, 1792년 이후 프랑스와

그리스의 관계는 견고하게 되었다. 1795년부터 1796년에 걸쳐 마르세이유 항구로 추입하는 선박 중에서 그리스 선박이 우위를 점유하여

마르세이유에서 그리스인의 지위는 높아졌다.

 

그리고 프랑스의 보호를 받은 그리스 선박은 오스만의 깃발이 아닌 예루살렘의 깃발을 내 걸었기에, 그들은 <독립한 그리스인>이라

불리웠다. 또 에프테미오스 브라하바스를 지도자로 하는 테살리아의 농민봉기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었다. 또 여러가지

다른 비밀결사도 조직되어 1809년엔 파리의 <헬리노그롯손 크세노드키오>, 1812년 아테네의 <필로무소스>등은 그리스의 문화발전에

봉사하는 단체로 비춰졌지만 실제론 민족혁명의 준 조직이었다.

 

1814년에 오뎃사에서 그리스 상인이던 엠마뉴엘레 크산토스, 니콜라오스 스쿠파스, 아타나시스 차카로프 등 3명에 의해 필리키 에텔리아

(우애협회)라 부르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이 프리메이슨 조직은 오스만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인들 뿐만 아니라 이오니아 제도,

러시아, 서유럽, 동유럽의 그리스인들도 참가했다.

 

필리키 에텔리아의 목표는 그리스의 해방이었지만 처음엔 전체적으로 미숙하였기에 그 수단과 장래성도 회원들 사이에서 일치하지

않았고 세르비아 등과의 공동투쟁을 목표로 한 제 1차 세르비아 봉기의 지도자들이 봉기가 진압된 후 벳살라비아로 달아나버렸기에

카라죠르지에 페트로비치에 의하여 세르비아에서 새로운 봉기를 계획했지만 이것은 제 2차 세르비아 봉기의 지도자였던 밀로슈

오브레노비치의 정책과 반하여 대립했기 때문에 카라죠르지에는 암살당했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의 봉기계획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그 후, 러시아가 필리키 에텔리아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에 에텔리아의 지도자층은 러시아에서 원조를 얻으려고 생각하여 러시아에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고 지도자에게

이오니아 일곱제도 연방과 연대하여 1809년 이후 러시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1세 치하에서 외무차관을 지낸 이오아니스 카포티스

토리우스에게 부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외교경험이 풍부했던 카포티스토리우스는 에텔리아의 계획은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질서를 망칠 우려가 있어 실패한다고

여겨 이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조직의 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과 적대했던 러시아인 장교인 파날리오티스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입셀란테스를 1820년 4월에 취임시켜 그리스 해방의 수단과 무장봉기계획을 관철시키고 필리키 에텔리아가 그리스 해방의 효시가

될 것으로 결정지었지만 그리스 주도의 계획은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의 지지를 받지못해 낙관적이던 계획은 벽에 부딫쳤다.

 

1820년 7월 이후, 입셀린테스는 러시아 각지에서 활동하면서 10월 7일에 벳살라비아의 이스마일에서 필리키 에텔리아의 주력멤버들을

소집하여 무장투쟁방침을 결정하고 2개월 내에 봉기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독립을 향한 궐기 

 

 

1820년 12월에 스리 지구의 산악민과 알리 파샤가 연대하여 이필로스에서 오스만군과 격돌했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던 마흐무드 2세는 그리스 본토의 다수를 지배하던 실력자인 알리 파샤를 섬멸하고 약체화해야만 오스만 제국의 권위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동원했다.

 

1821년 1월에 필리키 에텔리아를 적대시하던 왈라키아공 알렉산드로프 스초프가 사망하면서 왈라키아 공국에 정치적인 공백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하는 테오도로스 코로코트로니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각지에서 봉기를 부르짖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필리키 에텔리아는 이해관계로 인해 알리 파샤와 동맹을 맺었기에 지도자인 알렉산드로스 입셀란테스는 이를

호기로 여겨 거병하기로 결정해 그는 형제들을 대동하고 키시뇨프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1821년 3월 26일, 입셀란테스가 거느리던 부대가 루마니아 국경의 프루트 강을 건너 얏시에서 봉기하여 그리스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입셀란테스는 도하중에 고대 그리스의 토지를 해방하는 것을 맹세하고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에게 가호를 기원한 후 혁명을 선언했다.

그리고 각지의 그리스인들에게 봉기를 제창했다.

 

4월이 되자 오뎃사에서 부대가 도착해 물자를 보충한 다음 러시아의 그리스인들도 의용병과 자금조달에 협력했다. 또 일부 러시아군

장교들도 필리키 에텔리아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협력을 실시했다. 입셀란테스의 계획은 남러시아의 그리스인, 몰도바의 필리키

에텔리아 회원들을 모집한 후 왈라키아, 몰도바 두 공국을 점령한 다음 도나우 강을 건너면 세르비아, 불가리아의 사람들이 동조할

것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입셀란테스의 곁에는 러시아와 몰도바, 왈라키아 공국의 그리스인, 러시아의 코사크 병, 발칸 각 민족의 사람들이 모여

약 7천명이 되었지만 이것은 처음의 예상을 크게 밑도는 숫자였다. 입셀란테스는 루마니아인인 튜도어 블라디미레스쿠가 이끄는

루마니아 명사들이 1821년 1월에 일으킨 반란을 이용하여 전선확대를 노려 러시아의 개입이 가까워졌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입셀란테스가 믿었던 러시아 황제는 이에 분노하여 입셀란테스의 군적을 박탈하고 그를 비난한 뒤 불개입을 표명하고

오스만 제국을 돕는 자세를 보였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루마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들처럼 오스만 제국에 처음에

동조했던 그리스인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입셀란테스는 세르비아의 오브레노비치에게 밀사를 보내 그리스, 세르비아의 영구

공수동맹을 제안했지만 이 밀사는 오스만 제국군에 잡혀 살해당하고 말았다.

 

더우기 운나쁘게 4월이 되자, 블라디미레스쿠는 러시아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것에 필리키 에텔리아가 자신들을 이용한 것으로

여겨 협력을 거부했다.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은 입셀란테스가 이끄는 의용군의 활약을 억누르기 위해 도나우강 남쪽에 병력을 보냈다.

이 때문에 입셀란테스는 처음에 생각했던 도나우강을 강행돌파해 그리스로 이르는 작전은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1821년 5월, 오스만 제국군은 왈라키아, 몰도바로 일제히 진격해 5월 27일에 부카레스트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블라디미레스쿠는 부카레스트를 퇴각했지만 블라디미레스쿠가 오스만 제국에 협력하여 필리키

에텔리아를 배후에서 급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입셀란테스는 블라디미레스쿠를 붙잡아 처형했다.

 

궁지에 몰린 입셀란테스는 불가리아인이 봉기하여 오스만 제국군을 막아줄것을 희망했지만 소수 세력이던 불가리아인은 움직일수

없었다. 이에 입셀란테스의 부대는 서서히 피폐해져 1821년 6월에 드라가샤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패배했다. 결국 입셀란테스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 

 

하지만 6월 23일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부도시인 칼라마타를 반란군이 장악한 것 외에, 파토라, 마케도니아, 크레타 섬, 키프로스

등에서도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다. 오스만 당국은 반란을 전혀 예상치 못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 반란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초 그리스인 전체가 반란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는데, 3월 중순에 이르면서 칼라바리타 전투에서 반란군이 승기를 잡자

3월 21일에 마니에서 코로코트로니스가 주도하여 무장봉기가 일어나 23일에 칼라마타를 점령하고 메세니아 의회를 개설했다.

그리고 1821년 3월 25일에 파토라 부교주이던 팔레온 파트롱 게르마노스가 성 우브라 수도원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자유인가, 아니면 죽음인가>를 외치며 그리스인 병사들을 향해 싸움을 맹세케한 혁명정부를 설치했다.

 

이 3월 25일은 그리스 독립기념일로서 지금까지 축일로 지정되고 있다. 그리고 3월 28일, 메세니아의 평의회는 그리스가 독립을

위한 혁명을 개시했음을 선포했다. 1821년 4월 2일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불타오르던 독립전쟁의 불길은 중앙 그리스 동부로

번져나가 4월 중순엔 푸살라 섬, 이드라 섬, 5월엔 텟살리아, 6월엔 크레타 섬에서 봉기가 개시되었다.

 

이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마흐무드 2세는 격노하여 무슬림들에게 성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스탄불과 다른 도시에서 기독교도들을 살해하고 약탈했다. 그리고 오스만 정부는 그리스인 고관들과 정교회 주교들을 처형했는데

여기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그레고리우스 5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더우기 학살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처음에 봉기참가를 주저했던 그리스인들도 분노하여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봉기가 발생하자 크레타 섬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보낼 기부물자를 모집하여 무장봉기 준비를 실시했지만

이를 안 무슬림들이 주교를 살해하고 수십명에 이르는 정교도의 교도와 사제들을 무차별로 살상했다.

 

이에 정교도 주민들은 스파키아를 중심으로 봉기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미하일 콤네소스 아펜드리에프가 크레타 섬으로 넘어와  봉기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1822년에 봉기는 크레타 섬 전역에 번져

무슬림들도 간디아, 레스모, 하니아 등의 요새로 퇴각하면서 봉기측이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5월에 아르메니우스에 모인 봉기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통합을 결의했지만 이것은 무함마드 알리의 개입공작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봉기는 변경에서 일어났던 점과 주재 오스만 제국사령관인 흐르시트 파샤가 이필로스의

알리 파샤 토벌을 위해 떠났기에 그리스 반란군의 본거지가 되었지만 그리스 남부의 도서지역은 섬 지형인 특성상 연대가 힘들었고

각 지역세력의 이익추구가 지나쳐 불완전한 통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 내륙, 펠로폰네소스 반도, 도서지역의 지도자들도 제각각이었고 부유한 계층과 하층민들간의 대립도 발생했기 때문에

반란군들은 오월동주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1821년 이후, 올림푸스, 마케도니아까지 넓은 지역에 분포했던 반란세력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그리스 본토, 그리스 주변의 도서지역, 그리고 사모스 섬만이 독립전쟁 종결때까지 근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군은 숫자에서는 우세했지만 학살과 약탈행위로 인한 주민들의 불신과 게릴라전의 경험이 풍부한 산악주민들의 분투,

해전에 능했던 그리스군 앞에 오스만 제국군은 쩔쩔매기 시작했다. 또 친 그리스주의가 확대되던 유럽에서는 그리스의 반란에 대한

동정이 높아졌다.

 

그리스는 서유럽 문명의 발원지로서 당시 성행했던 낭만주의의 관점에서도 탄압받는 기독교도를 기독교 국가들이 일치단결하여

그리스 독립지원을 해야한다는 의견에 따라 조지 고든 바이런같은 낭만주의 대표시인들이 유럽 의용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로 넘어왔다.

이 의용군들은 고대 그리스라는 환상에 젖어 참가했기에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테네 시민을 상상하여 동경을 품은 자도 적지 않았는데

그리스인들의 행동을 스스로가 가진 사상의 실현장으로서 활동한 자와 단순한 원정에 따른 이익을 보고 활동한 자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반격과 이집트의 참전 

 

 

오스만 제국은 반란진압에 나서면서 반란의 저지를 하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그레고리우스 5세를 처형했다. 그리고

유력 그리스인 지주들과 지배계층을 학살하고 몰도바, 왈라키아 두 공국의 공위도 박탈했다. 그리스군은 1822년에 해상에서 일어난

콘스탄티노스 카날리스가 이끄는 그리스 화염선이 오스만 제국해군을 격파했는데 6월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7월엔

코로코트로니스가 이끈느 부대가 데르베나키아에서 메흐메드 알리 파샤의 부대를 격파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군은 1823년에 아크로코린소스를 폐기하고 메솔론기에서도 패배했다. 하지만 이런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반란군과 오스만 제국군의 승패는 나지 않았다. 이것은 독립전쟁 직후, 각지에서 대두한 독립세력들의 이해관계로 인한

대립때문이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테스의 동생이며 필리키 에텔리아의 후계자임을 주장한 디미트리오스라는 명망가, 

그리스 북부의 파날리오테스 출신인 알렉산드로스 마블로코로다토스가 이끄는 서부 루멜리 의회, 그리스 동부의 테오도로스 네그리스의

동부 루멜리 최고의회가 각각 정부를 수립하여 그리스인들은 의견이 일치하지 못했다.

 

더욱 좋지 않았던 사실은 3개로 분열된 반란세력은 고정되지 못하고 다시 경우에 따라 개인, 사회집단, 지역에 따라 당파가 제각각으로

쪼개졌다. 이들 지도자들도 그리스 해방이라는 목적으로 일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 유지와 세금징수, 명망에 의해 독립전쟁에

참가했고 재물획득이 목적이었기에 약탈행위로 인한 민심이반으로 오스만 제국에 투항하는 자도 나타났었다.

 

한편으로 필리키 에텔리아가 과거에 협력을 요청했던 세르비아의 밀로슈는 그리스에 협력하는 일로 인하여 세르비아의 자치권을

회수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시종일관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알바니아의 무슬림도 오스만 제국에 협력했다. 그러나 북부 그리스에선

필리키 에텔리아와 접촉한 불가리아인들이 과감하게 싸웠고 불가리아 상인들도 그리스측에 지원을 하여 후에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루마니아, 세르비아로 망명했고, 이드라섬, 스페치아 섬의 알바니아인도 해군부대를 편성하여 협력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회유책으로 인하여 알바니아인과의 유대관계가 흐려졌는데 1821년 12월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 디미트리오스는

에피다우로스에서 3개 정부에 의한 제 1회 국민의회를 개최해 대립해소를 꾀했다. 이 의회에서 마블로고르다토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그리스 독립을 어필하고 1822년 1월엔 주권재민의 헌법이 발포되었다.

 

그리하여 민족적 혁명으로서 그리스 독립을 선언하여 혁명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민중을 획책하여 반란을 꾀해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과 차별을 꾀했다. 3월 25일에 오스만 제국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히기 위해 항만봉쇄를 선언하고 1823년에는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인 헌법이 교부되어 세 정부를 통합한 그리스 중앙잠정정부가 설립되었지만 근본적인 대립은 해소되지 못했다.

 

이때문에 상호불신이 가속화되어 결국 내전으로 비화하였다. 1823년 11월에 코로코트로니스는 군사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에

이에 분개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 명망가들을 이끌고 정부를 수립했지만 반 코로코트로니스파인 도서지역 유력자들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명망가 대다수와 도당을 이끌고 정부를 수립해 이에 대항해 코로코트로니스의 군부는 정치에서 멀어졌다.

 

1824년에 접어들자 제 2회 국민의회가 아스트로스에서 개최되었지만 코로코트로니스파, 반 코로코트로니스파의 싸움은 계속되어

코로코트로니스파가 주도권을 잡고 나플리오에 정부를 수립했다. 이 의회에서 지방관청은 폐지되고 개인권리에 관한 규칙이

명확히 확정되어 그리스 독립을 위한 의론은 진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차관이 도착하자 정부 내에서 지위가 하락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자유주의파와 지식인들이 지원한 도서지역 유력자들이 1824년 10월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유력자를 격파하고

코로코트로니스를 투옥시켰다.

 

그리고 게오르기우스 쿤둘리오티스와 마블로고르다토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클라니디에 정부를 수립하여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가 보내졌지만 집안싸움에만 그쳤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인의 대립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도서지역, 내륙부, 토착민과 유입민의

갈등이라는 치부를 드러내고 말아 이 문제의 해소는 절망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내전에서 그리스 잠정정부를 포함한 그리스군의 각 파벌끼리의 동맹, 제휴관계는 끊이지 않고 변화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토호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서 권력, 특권의 유지를 희망하였고 섬에 사는 선주들도 해전의 공헌으로 인한 각자의 정치권리를

요구했다.

 

내전에서 파벌주의가 득세하면서 군벌 대 민주주의파, 혹은 시민벌과 귀족벌에 의한 권력투쟁으로 비화하여 오스만 지배하에서

자치와 완전독립파로 의견이 분분해졌다. 하지만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인하여 시민사회사상과 계몽사상으로 인해 민중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상태보다는 그리스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한편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마흐무드 2세는 무하마드 알리에 의해 통치되어진 이집트에 도움을 구했다.

알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의 할양 등을 요구조건으로 하면서 1824년 7월에 참전을 결정하여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는

1825년 2월에 칸소,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부에 남겨졌던 오스만 최후의 거점이던 메트니에 상륙했다.

 

그리고 나발리노, 메솔롱기를 점령하고 아테네도 함락시켰다. 위기상황에 빠진 그리스군은 유럽 열강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는데

그 한편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코로코트로니스, 그리스 본토에선 게오르기우스 카라이스카키스, 해상에서는 안드레아스

미아울리스가 게오르기우스 사크튜리스에게 집결하여 각 세력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크레타섬에 상륙한 이집트군(사령관 하산 파샤)은 처음에 크레타 동부에서의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서부에선 그리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이집트군 사령관은 후세인 베이로 교체되었는데, 후세인은 동굴로 달아난 기독교도들을 질식시키기 위해 불을 피워

학살하고 가혹하게 다루어 이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추방시켰다.

 

이 때문에 그리스군은 크레타섬 동부로 철수했지만 결국 대다수가 1824년 4월에 붙잡혀 이집트로 연행되었다. 일부 군대는 모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도망하여 1825년 7월에 크레타섬 재탈환을 목적으로 900명의 부대가 크레타섬에 상륙해 요새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집트군의 우세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나발리노의 해전이 발생하면서 패배한 이집트군은 크레타섬에서 철수했는데 반격을 가한 그리스군은 1828년 8월 13일부터

14일에 걸쳐 간디아에서 기독교도 학살사건이 일어나자 주민 6천명이 봉기하면서 크레타 섬 전역에서 반 오스만 운동이 벌어져

1829년까지 항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크레타 섬은 결국 그리스로 편입되지 못하고 1830년에 체결된 런던 의정서에 따라 오스만 제국령으로 결정되어 무하마드

알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빈 체제의 붕괴 

 

 

당초에 오스만 제국의 과격한 약체화를 희망하지 않았던 유럽각국의 정부들 사이에서는 그리스의 독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이것은 당시 유럽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로 이행되었지만 절대왕정의 정통주의가 스페인 남미식민지에서의 반란,

피에몽테와 나폴리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혁명, 부르봉 왕조에 대한 스페인 자유주의자들의 봉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독립 움직임에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신성동맹, 영국, 프랑스는 스페인 혁명 이후의 처리를 위해 라이바하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여기서 그리스의 독립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의 재상인 클레멘스 메테르니히는 영국과 함께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에 대하여

그리스의 반란은 오스만 제국내의 반란이라며 불개입과 정통주의의 주장만을 외쳤는데 발칸반도의 안정을 추구한 알렉산드르 1세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무하마드 알리의 등장은 유럽에 다시 친그리스주의의 대두를 초래했다. 필레리네스 위원회는 유럽전역에서 모금활동을

실시했는데 1822년 4월에 키오스 섬에서 오스만 제국해군 제독이던 칼라 알리가 이끄는 함대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면서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모금활동은 제한된 성과만을 올렸지만, 친그리스적 사고는 일정의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 독립에 대한 영향 앞에

당시까지 사태에 방관적이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도 눈여겨 보는 상황이 되었다. 또 서유럽에 널리 퍼진 친그리스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이상주의자, 시인, 민족주의자, 모험가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유럽을 필두로 한 세계여론이 그리스 혁명에 동정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하지만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사태를 우려하여 베로나에서 회의를 열고는 사태수습에 나섰다. 허나 영국은 처음엔 국왕 조지 4세와

외무상 캐슬레이와 메테르니히와의 사이에서 터키의 자제, 러시아의 불간섭, 그리스의 승리 불희망에 일치했지만 캐슬레이가

정신질환으로 자살한 후 후임이 된 조지 캐닝이 취임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캐닝은 내정불간섭주의자로 유럽각국에 불어닥친 혁명운동에 대해 성원하여 메테르니히와 상반된 사고를 가졌었다. 1822년에

베로나에서 회의가 개최되어 터키의 자제를 기다린다는 결론으로 맺어졌는데, 이것은 터키의 압정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면서

회의가 파행되는 것을 막기위함이었는데, 결국 이 회의 이후 빈 체제는 암운이 드리우고 말았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누폴리 대주교인 그레고리우스 5세를 처형하고 정교회가 파괴된 것에 불만을 가졌는데

입실란테스가 독립운동에 실패하고 망명한 후에도 왈라키아, 몰도바 두 공국의 비상사태체제를 해제하지 않는 것에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의 태도를 변화시켜 1821년 7월에 오스만 제국에 최종통고 후 국교를 단절하고 1825년 8월에 그리스 문제와

관련된 것에 의해 신성동맹에서 탈퇴해버렸다.

 

영국은 러시아의 단독행동을 위험하게 여기고 유럽전역에서 그리스 혁명의 동정이 파급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열강 삼국의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어느 한 국가가 동지중해의 무역을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것에 서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자 발칸반도와 흑해를 차지하는 것에 우려해 이를 막으려고 생각했다.

 

영국은 1822년 3월 25일에 그리스가 선언한 오스만 제국의 항만봉쇄를 승인하고 그리스가 전시상태임을 인정했지만 이것은

영국의 지중해 무역보호가 목적이어서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선박에 대한 해적행위를 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해적행위를

범죄행위로 보고 전투행위라고 판단한 정치적인 측면도 있었다.

 

한편 프랑스는 이집트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이 영향력을 지중해에 행사하기 위해 오를레앙공 루이 필립의 차남이던

누믈 공 루이 샤를 돌레앙을 그리스 왕으로 세우는 것을 계획했다. 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회담을 가진 후 1824년 1월 19일에

그리스를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 서 그리스, 동 그리스의 세 개로 분할하여 자치국으로서 속국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열강 5개국이 이를 보장한다는 안건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확실히 러시아의 권익을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안건은 그리스인들의 반감을 사고말아, 1824년 8월 24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러시아는 필리키 에텔리아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그 한편으로 12월 1일에 영국 외무상인 캐닝은 러시아의 제안을 부정하고 그리스의 독립지지와 오스만 사이에서

중재의사를 발표했다.

 

이 때문에 잠정정부는 1824년, 1825년에 걸쳐 영국의 중재를 요청했으며, 다시 몬테네그로의 페탈 1세에게도 지원을 구했다.

이에 페탈 1세는 그리스 지원에 답변하기보다도 헤르체고비나와 산자크, 알바니아의 오스만 제국군을 경계하여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먼저 영국이 잠정정부에 의한 중재를 요청한 것에 여기에 개입하는 것을 결정하자 이어서 러시아도 개입을 결정했다.

1825년 9월 30일에 영국 외무상 캐닝은 그리스측이 제안한 <그리스를 영국의 보호하에 둔다>란 제안을 물리쳤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스트랫포드 캐닝을 파견해 오스만 제국에게 타협이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타협하지 않을 것에 대비하여 웰링턴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러시아에 파견하기로 협의했다.

한편으로 러시아는 당시까지 메테르니히와 협조적이던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면서 즉위한 니콜라이 1세가 메테르니히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리스 문제와 관련해 캐닝과 의견이 일치했다.

 

그 결과, 1826년 4월에 페테르부르크 협정서에 의해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한 그리스 자치국 창설을 제안으로 한 독립전쟁에

개입함을 확인한 후, 프랑스도 끌여들여 찬동을 얻어냈다.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협정서는 이듬 해에 런던 조약으로 변경되어 8월에

정식으로 독립전쟁에 개입을 개시했다.

 

이 조약에는 오스트리아도 권유를 시도했지만 메테르니히의 거부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참가하지 않았다. 무하마드 알리의 군대에

의해 궁지에 몰렸던 그리스 잠정정부는 이를 수락했지만 외국세력의 개입으로 인하여 그리스 국내에서는 <영국파>, <러시아파>,

<프랑스파>의 세 파벌로 나뉘어 그리스인들은 각각의 파벌에 소속하게 되었다.

 

1827년 10월 20일,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에 위치한 나발리노 만에 정박중이던 영불연합함대와 오스만, 이집트 연합함대 사이에서

우발적인 싸움이 일어나 나발리노 해전으로 번졌다. 원래 열강삼국의 지중해 각 함대는 오스만 제국군에 대한 휴전을 요청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친그리스주의자였던 영국해군대장 에드워드 코드링턴 경이 이끄는 영불연합함대가 본격적으로 맞서면서 비화되었다.

 

이 해전에서 숫적으로 열세였던 영불연합함대가 오스만 제국함대를 오히려 궤멸시켰기 때문에 그리스 독립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해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영국정부는 함대사열관인 코드링턴 경을 해임했다. 이 싸움은 웰링턴경에 의하면 희망하지

않았던 예상 외의 산물로, 오스만 제국의 즉각적인 약체화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었다.

 

이 해전 직후 러시아군이 행동을 개시하는 것을 두려워한 오스만 제국군은 루멜리의 부대를 몰도바, 왈라키아 방면으로 이동시켜버려

공백지역은 그리스군이 점령하였고 또 프랑스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했다는 정보가 나돌자 이집트군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1827년에는 프랑스인 장군이 지휘하는 1만의 반란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다.

 

그리스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근거지로 하여 아테네, 테베 등 그리스 본토를 점령했다. 유럽에서는 당시 폴란드 독립혁명(실패),

벨기에 독립혁명, 프랑스 7월혁명 등 각지에서 민족독립운동이 반복되면서 빈 체제를 동요시켰는데 유럽의 여론은 그리스의 독립에

호의적이었다.

 

결국 유럽열강이 그리스의 독립지지로 돌아서면서 빈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발칸반도에서 이슬람 교도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토대가 되었다. 1827년 5월에 그리스는 트레제네에서 제 3회 국민의회를 열고 제 3헌법을 공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토리우스를 선출했다.

 

그러나 카포디스토리우스는 자유주의적인 조항과 의회의 파벌역학을 경멸했기 때문에 헌법과 의회를 정지시키고 직접 지배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육군을 창설하고 행정 시스템, 교육 시스템의 정비, 교통수단의 개선, 경제체제 구축에 활발하게 나섰다.

특히 토지문제에서 자작농을 육성하여 신 국가의 토대로 만들려고 했지만 이것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주와 현지의 군 지휘관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그리고 열강의 판단에선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한정될 것으로 보았는데 카포디스토리우스는 이런 범위로는 그리스가

나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평의회가 오스만 제국과 협상하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카포디스토리우스는 영토정책에

분주했다.

 

이에 코린토스 만 북부대륙의 그리스 지역에 파병하여 국경선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러시아 - 터키 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그리스 국경선의 결정은 1932년에서야 이루어졌다.

 

 

 

그리스의 독립 

 

 

1828년에 러시아는 1826년에 체결된 앗켈만 조약을 파기한 오스만 제국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을 포고해 러시아 - 터키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군은 고전 끝에 이스탄불 북서쪽의 도시인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했다. 러시아군의 독주를 싫어한 영국 및

오스트리아의 중재로 인해 1829년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제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그리스의 자치국화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발칸반도의 오스만 제국령에 대한 처우와 관련한 조문 중에는 그리스에 대해서는 자치국으로 독립을 보장했지만 그리스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을 유의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리스의 완전독립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1830년 2월의 런던 협정서에 의하여 그리스의 완전독립이 인정되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부에 주재하던 열강의 대사들은 오랜 협상 끝에 서쪽은 알타에서 동쪽은 보로스에 이르는 국경을 승인하였는데

그 규모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루멜리아, 몇 개의 도서부를 포함한 것에 지나지 않아 인구도 독립전쟁 개시전에 살던 그리스인의

3분의 1 이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는 세습제의 왕정을 결정하여 열강 3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유럽의 왕족을 선발하는 것을

결정했다.

 

처음에 작센 코부르크 가문의 레오폴드가 후보에 올랐지만 레오폴드는 카포디스토리우스로부터 그리스의 비관적인 상황을 보고받고는

사퇴했다. 결국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의 차남이며 뷔텔스바하 가문의 오토가 선출되어 1832년 5월 7일에 오토의 고향인 바이에른

정부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열강 3국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리스는 어디까지나 <보호국>에 지나지 않아 차관제공으로 인하여

정치, 경제적으로도 속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카포디스토리우스는 그리스인이 정치에 나서는 것은 아직 능력부족이라고 믿고 활동했기에 그리스의 지식인층과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자들은 정치에서 배제시켰다. 이것은 사회에 영향력을 가진 층의 반감을 사게 되었는데 특히 페롤폰네소스 반도 남부의

마니에서 세력이 컸던 마블로미하리스 가문은 카포디스토리우스에게 불만을 가졌다.

 

이에 1830년 7월에 발생한 프랑스 7월혁명의 영향으로 마블로미하리스 가문의 수장이던 페트로베이스는 나프플리온에서 의회소집을

실시하여 카포디스토리우스가 정지시킨 의회와 헌법의 부활을 선언하고 반 카포디스토리우스파의 대다수를 차지한 인드라 섬의

그리스인들을 조직하여 봉기에 나섰다.

 

카포디스토리우스는 기선제압을 위해 페트로베이스를 체포한 후 투옥했는데 이것은 오히려 격렬한 증오를 불러 일으켰다. 임시수도인

나프플리온에서 1831년 10월 9일에 마블로미하리스 가문의 게오르기우스, 콘스탄디노스는 카포디스토리우스를 유인한 다음 살해해

버렸다.

 

그리스가 혼란에 빠지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서로의 견제와 그리스에 영향력 증대를 생각하여 1832년 6월 11일에 열린

회의에서 그리스를 군주국으로 하는 것을 정식으로 결정한 새로운 런던 협정을 체결하여 오스만 제국은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이에 동의했다. 7월에 오스만 제국 및 유럽열강의 사이에서 조인된 콘스탄티노플 조약으로 그리스의 독립은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하지만 카포디스토리우스가 사망한 후 동생이던 아우구스티노스, 코로코트로니스, 코렛티스 등에 의한 잠정통치위원회가 설립된

그리스에선 아우구스티노스, 코로코트로니스파와 코렛티스파가 대립했기 때문에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이 내전에선 코렛티스가

승리를 거두어 1832년 7월에 브로뉴에서 국민의회가 개최되었지만 열강 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코트로니스를 중심으로 한 카포디스토리우스파가 11월에 독자적인 군사위원회와 평의회를 창설하자 다시 두파는 격돌하여

이를 프랑스군이 진압했다. 열강은 빈 체제에 안주하여 공화제의 수립엔 난색을 표시하여 그리스인이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강제적으로

왕정으로 이행시켰다 (그리스 왕국)

 

열강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국과 연줄이 옅은 뷔텔스바하 가문의 바이에른 왕자 오토를 그리스왕 오토 1세로 즉위시켰지만

이것은 코렛티스파, 카포디스토리우스파의 싸움이 진압된 2주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독립을 얻은 그리스였지만 그 영토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주변과 에게 해 일부, 대륙 그리스 남부로 한정되어 그리스의 경제적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 이즈미르,

텟살로니카,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결국 그리스 왕국이 성립할 당시 인구는 약 90만이었는데(그 중 무슬림은 63,000명) 텟살리아, 이필로스,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이스탄불, 이즈미르 등 그리스령이 되지않은 지역에 약 200만의 그리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의 대 오스만

전쟁은 계속되어지게 되었다.

 

한편, 비잔틴 제국의 붕괴이후, 그리스는 예속되었지만 1800년에 이오니아 일곱도서 연방공화국이 성립하여 3세기 반만에 그리스인들은

정치를 맛보았다. 단 이 나라는 열강 3국인 영국, 프랑ㅅ, 러시아의 생각 속에만 있었기 때문에 메우 한정된 권한과 시간 밖에 성립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이오니아 일곱도서 연방국의 성립은 이후 1세기에 걸친 동방문제의 해결 실마리가 되었다.

 

그와 한편으로 당시 나폴레옹의 출현에 의해 민족의식의 각성이 시작되었지만 이를 억누르기 위해 열강 각국은 빈 체제를 쌓고

구 질서의 유지를 꾀했다. 하지만 발칸 각 민족은 이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열강의 지원을 얻어 신성동맹을 체결하자 열강들도

결국 이를 지원하게 되었다.

 

이로서 신성동맹과 이슬람 세력간의 대립이 명확해지자 이후 발칸반도에는 열강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빈 체제는 그리스의 독립에

의해 동요되면서 1848년 혁명으로 붕괴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재상으로 불린 메테르니히는 몰락해버렸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인과

이민족의 존재로 인하여 그리스의 독립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이에 열강들은 그리스를 속국화하는 것을 생각했는데 이는 그리스 민족운동가와 지식인, 상인 등이 주축이 되어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독립운동의 전초를 구축해 나갔다. 그 후 발칸의 각 민족들은 자치를 이루어나가 최초로 자치권을 획득한

세르비아였지만 완전독립은 그리스가 이루어냈다.

 

이 독립은 이후 시작된 발칸 각 민족의 독립의 서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처음엔 왈라키아, 몰도바에서 개시되어 발칸 각 민족체제의

해체를 불러왔다. 그리고 각 민족의 대립은 제 1차 세계대전의 개전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편 그리스의 독립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불러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처형 및 기독교인의 학살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인들이 국외에 남겨진 사실은 범그리스주의를 촉발시켜 먼저 형성된 세르비아, 후에 성립한 불가리아 등에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대립을 불러 일으켜 발칸반도는 화약고로 변했다.

 
 

출처 : 사쿠라이 마리코 <그리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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