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독립전쟁 - 1808년 ~ 1814년
1806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는 유럽대륙의 각국에게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베를린에서 선언했다.
둥립을 유지하던 스웨덴과 포르투갈은 나폴레옹의 이 요구를 거부하였기에 나폴레옹은 무력을 동원해 이 두 나라에 대륙봉쇄령을
강제로 실시하게끔 획책하기 시작했다.
1807년의 티르지트 조약 후 스웨덴은 러시아와 개전하게 되어 나폴레옹은 남은 포르투갈의 공략을 결정했다. 1807년 10월 27일에
스페인 수상이던 마누엘 데 고도이와 프랑스는 퐁테뉴블로 조약에 조인하여 포르투갈은 북 루시타니아 왕국, 알가르베 후작령,
그리고 나머지인 포르투갈 왕국의 3개 나라로 분할되고 말았다.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사람들은 자유주의파, 공화파, 급진파의 속에서 1807년까지 나폴레옹이 명확하게 자유주의와 공화제의
사상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잠재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이전부터 계몽주의 사상과 프랑스 혁명에 동경하여 친불사상에
빠졌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국왕으로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세워, 봉건적인 성직자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을 실현하는 한편으로
거의 모든 스페인 자유주의파를 폭력과 잔학행위로 다스려 반발하게 만들었다. 1807년 11월에 대륙동맹 참가에 포르투갈의 섭정이던
조안 왕자(훗날의 조안 6세)가 최종적으로 이를 거절하면서 장 앙드슈 주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부대는 포르투갈 침공을 위해
스페인으로 보내졌다.
동시에 스페인 수상인 마누엘 데 고도이가 나폴레옹의 위임을 받아 듀퐁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카디스 방면으로 보내고 수르트 장군의
부대도 코르나 방면으로 보냈다. 포르투갈 점령과 함대탈취를 노린 것은 고도이도 같은 생각이어서 스페인군 2개 사단을 프랑스군과
합류시켰다.
양군의 침공으로 인해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수비대가 영국군의 공격으로부터 항만과 해안보호를 위해 배치되어 있었기에
저항하지 못한 채 12월 1일에 공략당했다. 그러나 11월 29일에 포르투갈의 여왕인 마리아 1세와 조안 왕자, 그리고 6천명의 사람들은
도망하여 조안 왕자는 브라질을 포함한 해외의 식민지를 관할하는데는 성공했다.
이것은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큰 타격이 되었는데 나폴레옹은 훗날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의 기념비에 <이것이 나를 망하게 했다>
고 기록할 정도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군의 포르투갈 점령을 보강한다는 구실로 나폴레옹은 군대를 스페인의 요충지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팜플로나와 바르셀로나가 1808년 2월에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다.
외국군의 주둔이 이루어진 스페인에서는 귀족들에 의한 정변이 발생하여 카를로스 4세가 퇴위하고 그가 등용한 고도이가 실각해
대신 페르난드 왕자가 페르난드 7세로 즉위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가를 추방시키고 5월 5일에 퇴위를 강요하여 스페인의
왕위를 자신의 형인 조제프에게 주었다.
스페인의 어용 의회는 이 새로운 국왕을 승인했는데 조제프는 다시 스페인 국왕 호세 1세로 등극해 개혁을 추진하여 스페인의
통치를 강화하자 프랑스인의 지배를 혐오한 스페인 사람들의 반란과 조우하게 되었다. 5월 2일에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대해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봉기는 뮬러에 의해 분쇄되었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봉기는 스페인 전역으로 번졌다.
당시 영국은 해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몇 번이나 거두었지만 대륙에서의 육상전에서는 중반이후 계속 패하여 체면을 잃었었다.
강력한 동맹국이 없이는 영국육군은 프랑스에 대한 승리를 희망할 수 없었는데, 포르투갈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전쟁시
영국의 지원을 거부하였었다.
스페인 봉기군은 7월 16일부터 19일에 걸쳐 일어난 바이렌 전투에서 피에르 듀퐁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어
15,000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다. 이 싸움으로 호세 1세는 마드리드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6월 18일에는 포르투갈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의 국민반란은 영국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켜 왕과 귀족이 아닌 일반 국민들이 <큰 침략자>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영국의 선전대로 흘러가 당시의 나폴레옹 전쟁에서 새로운 전개를 불러오게 되었다.
1808년 8월에 영국군은 소장이던 웰즐리 경의 지휘하에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포르투갈의 베르나르딤 안드라데 장군이 이끄는
전위부대가 루이 앙리 르와송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 부대를 저지하는 사이, 웰즐리의 본대는 드라보르듀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8월 17일의 로리사 전투에서 격파했다.
8월 21일에 영국, 포르투갈군은 주노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웰즐리의 철저한 통솔과 강력한 지도력으로
주도면밀한 전략을 펼쳐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웰즐리는 군인으로서는 너무 젊고 포르투갈에 새로 보충되는
원정군을 맡기엔 지휘경험이 없었기에 해리 버라드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곧 버라드가 사망하면서 다시 휴 달링블이 임명되었다.
일련의 승리로 신트라 조약에 의해 1808년 8월에 포르투갈에서 프랑스군은 철수했다. 영국군 사령관은 3만의 정예병을 거느리는
존 무어 경을 남기고 신트라 협정에 따라 영국으로 귀환했다. 영국과 포르투갈군, 스페인군이 승리하자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이베리아 반도로 2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섰다.
영국군은 부르고스 시 근교에서 공격했지만 압도적인 프랑스군에 의해 퇴각하면서 추격에 쫓기게 되었다. 1809년 1월에 아 코르냐에서
철수한 무어 경은 코르냐 전투에서 시가전으로 방어하던 중 전사했다. 이리하여 스페인의 대부분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점령하에 들어갔다.
고작 2개월 만에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 원수의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굴복했는데 그 후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귀국했다.
3월에 수르트 원수는 북쪽 회랑지대를 통해 2번째의 포르투갈 침략에 나섰다. 먼저 미뉴 강에서 포르투갈 민병대를 격퇴한 다음
샤베스, 브라가를 공략한 후 1809년 3월 29일에 포르토를 공략했다. 하지만 아말란테 등의 도시에서 저항은 수르트군을 나포르토에
고립시켜 수르트는 북 포르투갈에서 퇴각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승리로 스페인군은 파멸했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스군에 대해 게릴라전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에서는
미구엘 페레일라 폴하스가 영국에서 보낸 자금과 병력으로 군대를 재건했다. 1806년부터 제시된 군제개혁이 실행되면서 처음에
2만의 상비군과 3만의 민병은 이후 상비군 5만에 민병 5만으로 늘어나 의용군도 합세했다.
1809년 4월에 웰즐리는 다시 영국과 포르투갈군을 지휘하기 위해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영국군은 이 때, 폴하스와 각 지역의 지사들에
의해 조직된 포르투갈의 군대에 영국식 기풍을 불어넣어 강화에 나섰다. 이렇게 조직된 군대는 5월 10일과 11일에 일어난 글리호 전투와
5월 12일의 오포르토 전투에서 수르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때 북부의 모든 도시도 공략되었다.
포르투갈군을 남긴 채 웰즐리는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데 라 구에스터의 군대와 합류하여 스페인으로 진군했다. 연합군은 7월 27일부터
28일의 타라벨라 데 라 레이나 전투에서 호세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 왕국군을 격파했다. 승리로 인해 웰즐리는 웰링턴 자작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후에 스페인군은 오카나 전투와 아루바 데 트루메스 전투에서 처참한 참패를 맛보았다.
참패한 스페인군과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프랑스군의 위협을 느낀 웰즐리는 포르투갈의 방어를 강화하는 결단을 내렸다.
리스본을 방어하기 위해 그는 네베스 코스타 소령의 계획을 채용하여 주요 도로에 참호와 토담을 구축하여 강력한 교두보를
만들어 토레스 베드라스 선을 형성했다.
1811년 7월에 프랑스군은 안드레 마세나 원수가 이끄는 6만명의 병력으로 재침공했다. 전투는 코아에서 일어났는데 이 때
마세나는 포르투갈에서 만든 최악의 도로를 걷게 되었다. 9월 27일에 부사고 전투에서 패배를 당했지만 영국, 포르투갈 연합군을
토레스 베드라스 선까지 몰아냈다.
10월 14일의 소브랄 공격 후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포르투갈군은 초토화 작전으로 맞섰기에 프랑스군은 보급의 상실과 질병의
창궐로 인해 철수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1811년 초에 새로이 영국군의 증원이 도착하자 연합군은 다시 보강되어 공세로 나섰다.
프랑스군은 카디스의 포위를 풀었던 것이 패착의 원인이 되어 3월 5일의 바롯사 전투에서 패배하고 페스테 오놀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이르자 마세나는 결국 포르투갈에서 철수했다.
마세나는 25,000명의 병력을 포르투갈에서 잃고 오귀스트 마르몽과 교체되었다. 수르트는 바다호스를 위협하기 위해 남부에서
이동했지만 윌리엄 베레스포드가 이끄는 영국, 포르투갈 연합군과 스페인군에 의해 5월 16일의 알벨라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전쟁은 일시 휴전상태에 들어갔지만 숫자에서 우세했던 프랑스군은 우위를 지키지 못하고 스페인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렸다.
프랑스군은 35만명이 넘는 병력이 스페인에 있었지만 20만이 넘는 병력이 실전부대보다도 게릴라에 의한 보급로 방어전에 나서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스페인에서는 전시중에 각 지역에서 구성된 최고중앙평의회가 만들어지면서 1810년에 카디스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자유주의적인
<1812년 카디스 헌법>의 초안이 마련되게 되었다. 1812년에 웰즐리는 스페인의 동맹군 재편을 실시하여 1월 19일에 시우다 로드리고의
요새화된 마을을 포위하여 공략 후 바다호스를 4월 6일에 습격하여 공략했다.
7월 17일에 동맹군은 마르몽이 진군한 살라만카에 진주했다. 양군은 7월 22일에 살라만카 전투를 벌였는데 프랑스군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 하지만 베레스포드 원수도 중상을 입었다. 영국, 포르투갈군은 8월 6일에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부르고스에 진군했다.
재탈환을 노리던 프랑스군은 1812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면서 재기에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3만의 정예를 스페인에서 차출해갔는데, 1813년 이후 영국군이 공세로 나서면서 프랑스군의 스페인에서의 우위는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5월말에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측면에서 포위하여 호세 1세를 사드라 강 연안으로
쫓아버렸다.
6월 21일에 비토리아 전투에서 호세 1세의 65,000명의 군대는 53,000명의 영국군, 27,000명의 포르투갈군, 19,000명의 스페인군에 의해
퇴로가 막혔다. 웰즐리는 프랑스군을 산 세바스티앙에서 몰아냈다. 동맹군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피레네 산맥에 7월초에
도달했다.
수르트는 프랑스군에게 명령을 내려 반격하기 시작했는데 동맹군에게 마야 전투와 롱세스 발리에스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다시 영국 연합군에게 격퇴당하여 기세를 잃고 7월 28일부터 30일에 일어난 솔라울렌 전투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피레네의 전투라고
불린 이 싸움에서 웰즐리(웰링턴 자작)는 승리해 10월 7일에 프랑스의 국경을 넘었다.
스페인 독립전쟁에서 베라 곶, 니빌 전투, 바이욘느 및 니브 전투, 오르세 전투, 툴루즈 전투에서 동맹군이 승리하면서 프랑스군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는데 마지막 싸움은 나폴레옹이 유배를 떠난 후였다. 전쟁 중에 영국은 포르투갈 민병과 스페인 민병을 지원하여
프랑스의 대군을 물리쳤다. 이것은 역사상으로도 비정규병에 의한 승리이기도 했다. 스페인어로 이 전법을 게릴랴(작은 전쟁)로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게릴라의 어원이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반도전쟁(半島戦争)이라고도 하는데 포르투갈이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로 궁정을 이전한
것은 이후 독립하는 브라질의 국가건설에 시발점이 되었다. 궁정, 정부, 육군으로 구성된 1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포르투갈 함대에
나눠타고 망명한 것은 브라질에 있어서는 축복이었으며 포르투갈도 그 수혜를 입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독립의 열망을 불러와 부재중인 왕에게 지명된 포르투갈의 지사는 프랑스의 침략과 영국의 점령이 이어진 것에
영향을 받았다. 전쟁대신이라 불린 미구엘 페레일라 폴하스의 역할은 독특했는데, 웰링턴은 그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 혼자만이
정치가>라고 보았다.
포르투갈군의 참모와 55,000명이 상비군, 50,000명 이상의 국민방어대 <밀리시어스 >처럼 여러 향토방위대 오르데나사스를
창설했다. 1812년에 러시아의 궁정대신이던 슈타인 남작에게 보낸 편지에 폴하스는 초토화 작전의 채용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타파할 유일한 방법임을 추천했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웰링턴의 포르투갈군 전략을 모방하여 나폴레옹의 대륙군을 초토화 작전으로 아사직전에
몰아넣어 전투를 피하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시련은 훈련과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포르투갈 본토에 잔류한
새로운 계층이 신생 포르투갈의 독립을 주장한 점에서 본 전쟁은 구체제의 지도층에 막대한 충격을 주어 프랑스 혁명에 버금갔다.
베레스포드 원수는 1814년 이후에도 포르투갈 육군(예하에 160명 정도의 영국군 장교가 핵심이었다)의 사령관(국왕은 아직 브라질에
있어서 일종의 식민지 총독)으로 잔류했다. 그의 지휘하에 포르투갈의 새로운 정책이 책정되었다. 이것은 브라질 연합왕국, 아프리카의
식민지에 걸친 노예공급문제, 브라질의 산업, 포르투갈과의 교역 등 금후 국가계획이 정해졌다.
그러나 1820년까지 이는 모두 파기되었다. 포르투갈의 반도전쟁에 참가한 포르투갈군 장교는 영국군을 추방하고 8월 24일에
오포르토에서 자유주의 혁명을 개시했다. 포르투갈에서 자유주의 체제의 성립은 1832년부터 1834년까지의 내전종결 후 그 결실을
맺었다.
한편 스페인의 호세 1세(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처음에 프랑스와의 협력관계로 근대화와 해방을 믿은 친불파 스페인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그 한 예가 이단심문의 폐지였다. 그러나 성직자와 애국자는 국민을 선동하여 실제로 프랑스군이 제압한 사건이
일어나자(1808년 마드리드) 침략자에 대항해 국민을 단결시켜 용기를 진작시키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스페인에 남겨진 자들은 프랑스군에 종속하여 프랑스로 탈출했다. 화가인 프란시스코 고야는 이러한 친불 스페인파의 한 명으로
전후 고발당할 가능성 때문에 린치를 당하지 않을 프랑스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지지파는 전통파와 자유파로 나뉘었다.
전후 새로운 국왕인 페르난드 7세는 각지의 연합을 모아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카디스에서 소집한 독립의회에서 사회적 진전을
무효화했기 때문에 칼리스타 전쟁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봉건군주제를 부활시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를 전원 체포하여 처형하였는데, 최악의 행위는 딸인 이사벨 2세를 위해 왕위계승법을
바꾸어 기존의 왕위계승자였던 왕의 아우, 돈 카를로스의 지지자와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스페인 사람들이 일으킨 독립전쟁은
실제로는 외국의 침략보다도 폭정, 기아, 파멸, 죽음의 길로 들어서 스페인을 백년 이상 후퇴시켰다.
그러나 근대화를 요구한 스페인 사람들의 열망은 이윽고 리에고 혁명 등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자유주의 의회는 1812년 3얼 19일에
제정된 스페인 1812년 헌법을 가결했다. 허나 이것은 후에 국왕에 의해 파기되었다. 한편 식민지였던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는
크리올(스페인과 현지인의 혼혈)이 각지의 시 참사회에서 페르난드 왕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연합조직을 결성했다.
이 자치의 경험과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 등의 독립운동은 후에 자유주의자에 의한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프랑스군은 카톨릭 교회의 재산을 대량으로 약탈했는데 교회와 수도원은 마굿간과
병영으로 사용되어 스페인의 문화유산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었고 미술품은 프랑스로 보내졌다.
이에 더해 영국, 포르투갈군이 스페인의 도시와 농촌에서 약탈을 일삼으면서 전쟁은 스페인의 경제를 급속히 저하시켜 19세기의
정체를 불러오게 되었다.
출처 : 데이빗 게이츠 <스페인의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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