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독립전쟁 - 1810년 ~ 1821년
멕시코의 첫 독립전쟁은 1650년 12월에 아일랜드인이던 카톨릭 교도, 윌리엄 램포트가 이단심문 감옥에서 탈주하여
독립선언문을 멕시코시티에서 실시한 것이 시발점으로 본다. 이것은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독립선언이었는데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군주를 두고 인종의 평등과 토지개혁을 공약한 최초의 문서이기도 했다.
램포트의 희망은 멕시코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그는 체포되어
이단으로 화형을 당했다. 한편 1808년 7월 16일에 페르난드 7세의 퇴위와 프랑스군이 스페인으로 침공했다는 소식이
누에바 에스파냐로 알려지자 프랑스 정부파와 저항파의 두 사자가 누에바 에스파냐를 방문해 각자의 정부승인을 요구했다.
이 사태를 본 일부 백인지도층들은 총독을 해임하고 퇴역군인인 페드로 데 가리바이를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1810년 9월에
새로운 총독으로 하비에르 데 베네가스가 취임했다. 멕시코 중앙고원의 켈레타로 시 주변에선 반란을 기획한 크리올 집단이
있었다.
그 속엔 과나후아토 주의 작은 마을이던 돌로레스에서 사제직으로 있던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틸라가 있었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백인(크리올)이던 그는 돌로레스의 사제로서 선주민(인디오)과 혼혈(메스티조)인 농민과 노동자 층의 생활개선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한편 인디오의 말을 배워 농민들의 어려운 삶을 통감했다. 또 은광이 유일한 산업이었던 것에 산업의 다양화도 모색했다.
미겔 이달고는 사제로 일할 때부터 동료 크리올들과 함께 인디오와 메스티조의 농민이 부유한 도래백인(페닌슈랄)의 지주와 귀족들에게
봉기하자는 계획을 꾸몄었다. 또 이달고는 자신의 집을 자유토론의 장으로 만들어 인디오, 메스티조, 크리올, 페닌슈랄 등 많은 사람들을
맞아들여 토론을 열곤 했다.
이달고는 그 자리에서 사회문제와 경제문제를 자주 피력했는데 이러한 토의 중에는 스페인이 지배하는 식민지 정부에 대하여 직접
봉기하여 누에바 에스파냐를 스페인의 강제지배에서 해방시키자는 의견도 나오게 되었다. 이 때 스페인 본국에선 스페인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이 혼란에 편승해 식민지의 해방기운이 중남미에 널리 퍼졌다. 또 과나후아토 주에서 켈레타로 주에 걸친 넓은 바히오 평원의
농촌에선 흉작으로 인해 주식인 옥수수가 말라죽으면서 식료품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바람에 농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달고 자신은 사회적 저항을 의식하여 직접 농민, 빈민들과 호응해 봉기준비를 진행하여 1810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삼았다.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기 시작한 이달고는 봉기직전인 9월 13일에 동료들 중의 배반자로 인해 지방정부에 반란계획이 알려졌다.
지방장관이던 미겔 도밍게스는 반란자들의 아지트 수색과 체포를 명령했는데 이달고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를 피해 몸을 숨긴 후
거사를 앞당기기로 했다.
1810년 9월 16일 아침에 돌로레스 교회의 종을 울려 무리를 모은 후 스페인 식민정부와 지배층에 대한 대항을 선언한 이달고는
사악한 정부와 식민지배자들에게 죽음을 내리자고 외치면서 멕시코 만세를 연호했다. 이는 유명한 <돌로레스의 외침>이란 연설로
전해온다. 이 때 이달고는 모인 인디오들에게 총독의 타도를 외치면서도 <독립>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달고의 봉기에 호응한 인디오와 농민들은 바로 행동에 들어가 당시 최대의 광산촌이던 과나후아토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많은 농민과 메스티조가 참가하여 그 수는 23,000명으로 불어났다. 행진 도중에 이달고는 농민에 대한 인두세의 폐지와 노예제의
폐지, 부당하게 빼앗긴 농민의 토지반환 등을 요구했다.
이달고의 연설에 감명한 민중들은 열광했다. 이윽고 성난 민중들이 이 지방의 거점도시이던 과나후아토로 행진하면서 광부들과
현지의 인디오, 메스티조 노동자가 참가했다. 관리와 부유한 자 등 지배자 층은 남기지 않고 학살, 약탈을 면치 못했다. 이달고가
이끄는 독립군은 과나후아토에서 멕시코시티로 진군하여 도중에 사카테카스, 산 루이스 포토시, 모렐리아를 함락하고 고위인사를
살해했다.
1810년 10월 30일에 독립군은 누에바 에스파냐의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지척에 둔 몽테 데 라스 크루세스에서 정부군의 저항과
조우하여 막대한 희생을 내고 진군이 멈추면서 수도공략에 실패했다. 결국 독립군은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북쪽의 텍사스로 향했다.
이듬 해 다시 수도를 목표로 진군을 개시한 독립군은 백인층에 적대했기에 폭넓은 지지를 얻는데는 실패했다.
3월에 독립군은 정부군에게 대패하여 대다수가 포로가 되었다. 미국으로 달아났던 이달고는 체포되어 이단심문소에서 사제로서
재판이 이루어져 이단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1811년 7월 31일에 총살형에 처해진 이달고의 몸은 난도질되어 참수된 목은
과나후아토 시내에 내 걸려 경고의 대상이 되었다.
이달고는 처형되었지만 누에바 에스파냐에서는 각지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다. 특히 큰 반란은 남부에서 원주민의 피를 이어받은
메스티조였던 카톨릭 사제인 호세 마리아 테클로 모렐로스 이 파본이 이달고의 봉기 직후에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1812년에
남부일대를 지배하고 1813년에는 아카풀코의 주요도시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농민운동 성격이 강했던 이달고의 독립운동과는 달리 모렐로스의 독립운동은 확실히 스페인에서 독립과 공화국 건설을 내세웠다.
무질서의 통제되지 않은 농민들을 이끈 이달고의 봉기는 6개월만에 끝난 반란에 불과했지만 모렐로스의 군은 훈련이 잘되었으며
규율이 엄정한 소수의 편성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남부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한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는 1813년에 치르판신고(현재의 게레로 시)에 각지의 대표를 모아 회의를 개최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이듬 해, 주권재민, 삼권분립, 노예제 폐지, 사유재산의 보장 등 자유주의적인 내용의 멕시코 최초의 헌법인
아파칭간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정부군은 공세에 나서 1814년에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로 스페인 본국에서는 페르난도 7세가 국왕에 대한 반란을 엄격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모렐로스의 군은 패주하여 1815년에 모렐로스도 체포되어 12월 22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현재 멕시코의
모렐로스 주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모렐로스의 처형 후 누에바 에스파냐는 스페인에서 지명된 총독의 지배하에 스페인 왕을 지지하는 지배층과 보수파 카톨릭인 크리올의
병력에 의해 안정화되었다. 1815년부터 1821년에 걸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전투는 고립화된 게릴라 조직에 의해 산발적으로
이루질 뿐이었다.
이러한 조직 가운데 두 명의 인물이 두각을 드러냈다. 호세 모렐로스의 부하로 그의 뒤를 이은 과달루페 빅토리아와 비센테 게레로
였는데 이들은 인망이 두텁고 게릴라들과 지지자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한편 정세가 안정됨을 느낀 총독은 1820년에 무기를 버린
반란자들에겐 은사를 베푼다고 선포했다. 10년간의 내전에 지친 사람들은 이달고 등 독립지도자의 죽음에 의해 1820년에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은 둔화되어 붕괴되기 시작했다.
반란군과 게릴라 조직은 스페인군의 강함과 지지기반이던 민중의 무관심에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이달고군 및 모렐로스군 등
비정규군에 의한 과격한 폭력과 대중영합적인 정치수법은 크리올 사이에서 인종투쟁과 계급투쟁에의 공포감만 안겨주고 말았다.
크리올들은 피를 흘리는 어려운 독립의 길보다는 보수적인 스페인 식민지 지배를 싫어하면서도 묵인하는 길을 생각했던 것이다.
1820년 12월에 약체화된 반란군에 대한 최후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비센테 게릴라군에 대한 토벌이 개시되었는데 총독이던
후안 루이스 데 아포다카는 왕당파의 크리올인 어거스틴 데 이튜비데를 파견했다. 이튜비데는 모렐리아 출신의 토착백인으로
독립혁명의 초기에 미겔 이달고 및 호세 모렐로스 등의 강력한 독립군을 상대로 빛나는 전과를 거두어 누에바 에스파냐 식민지
정부 및 그 지지자들로부터 열광적인 명성을 쌓고 있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기독교 교회의 권위에서 이튜비데는 경건하고 종교적, 사회적 특권의 수호에 헌신적인 보수파 크리올의 화신이긴
했지만 크리올 출신인 그는 출세와 부의 길이 막힌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어서 독립파 게릴라에게 공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튜비데의 원정임무는 우연히도 스페인 본국에서 페르난드 7세의 독재정치에 대한 군사쿠데타의 성공과 같은 시기이기도 했다.
쿠데타의 지도자인 라파엘 델 리에고 대령은 남미의 독립운동 진압을 위해 국왕이 편성한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지만 반란을 획책해
1812년 헌법의 부활동의를 국왕에게 강하게 요구하여 스페인에 자유주의가 싹트게 했다. 자유주의 운동의 성공뉴스가 멕시코에 전해지자
이튜비데는 이를 멕시코를 지배하는 왕당파에 대한 위협임과 함께 크리올이 멕시코의 지배권을 장악할 기회라고 여겼다.
이튜비데의 생각대로 식민지의 보수파, 왕당파는 모국의 자유주의 임시정부에 대해 반항하기 시작하였지만 이것은 멕시코가 스페인에
독립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이튜비데는 비센테 게레로군과 첫 충돌 후 식민지 정부로의 충성을 버리고 반란군의 리더인 게레로와
회담하여 새로운 독립투쟁의 원칙에 대해 논의했다.
이구알라 마을에서 주둔하던 사이, 1821년 2월 24일에 이튜비데는 멕시코의 스페인에서의 독립을 위해 3원칙인 <이구일라 강령>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멕시코는 스페인에서 맞이한 페르난드 7세 국왕이 아닌, 보수적인 유럽각국에서 인정한 왕이 지배하는 독립군주국이다.
2. 토착 크리올과 스페인에서 태어난 페닌슈랄은 평등한 권리와 특권을 지닌다.
3. 카톨릭 교회는 멕시코에 대한 특권과 종교적 독점을 보증한다.
이튜비데는 그가 이끄는 군대가 이구일라 강령을 받아들였다고 확신한 다음 게레로에 대해 자신의 군대와 합류하여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새로운 독립계획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군대인 <세가지 보증군>이 이구알라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이튜비데의 지휘하에 행동을 시작했다.
이 계획안은 넓은 기반에 기초했기에 왕당파도, 애국파도 만족하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 독립이라는 목표와 카톨릭 교회의 보호는
멕시코 모든 당파를 일체화하는 것이었다. 이튜비데는 과달루페 빅토리아 등 각지의 게릴라 반란군을 합류시켜 진군하여 스페인인
왕당파와 본국의 자유주의 정부와의 연결을 단절하는데 성공했다.
1821년 8월 24일에 베라크루즈 주 코르도바에서 이튜비데와 총독 사이에서는 이구알라 강령을 확인하는 코르도바 조약이 체결되어
멕시코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이리하여 1821년 9월 15일에 이튜비데는 군을 거느리고 멕시코시티에 저항없이 입성하는데 성공하여
스페인군의 철수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이튜비데의 지휘아래 새로운 헌법을 결정하는 의회가 개최되었는데 군주제가 시행중이던 유럽의 국가들에게서는 좋은 답변이
없었다. 페르난드 7세는 멕시코의 스페인 식민지 복귀를 희망하여 타국의 왕실도 스페인의 입장을 고려해 멕시코의 인정을 거부했다.
1822년 7월 21일에 이튜비데는 스스로 황제인 <어거스틴 1세>로 칭하면서 군주가 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아 제 1차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출처 : 앨런 나이트 <멕시코, 식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