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 1803년 ~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의 배경
1792년에 프랑스 혁명전쟁의 발발로 인해 1793년에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페인 등에 의해 제 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프랑스의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에서 2개군, 북부 이탈리아 방면에서 1개 군을 가지고 오스트리아를 포위공략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1796년 3월에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공세에 나서 프랑스군과 대치하던 사르디니아 왕국을
고작 한 달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인 만토바를 포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 해방을 목표로 공격에 나섰지만
나폴레옹에 의해 카스틸리오네 전투, 아르콜레 전투, 리볼리 전투에서 패배했다.
2월 2일에 만토바가 개성하여 오스트리아는 정전을 신청해 4월 18일에 레오벤 조약이 성립되었다. 10월 17일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캄포 포르미오 화평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프랑스는 남 네덜란드와 라인강 좌측을 병합하고 북부 이탈리아는 체자르피나 공화국 등의
프랑스 위성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제 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했다.
프랑스군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영국에 대해선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영국과 식민지 인도와의 연대를 끊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원정을 가는 것을 총재정부에 건의했다. 1798년 5월 19일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군은 툴롱 항을
출발해 도중에 말타를 점령한 후 7월 2일에 이집트의 아부킬 만에 상륙했다.
7월 21일의 피라미드 전투에서 현지군에 승리한 나폴레옹 원정군은 이어서 카이로에 입성했다. 그러나 8월 1일의 나일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면서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고 말았다. 한편 영국이 말타를 다시 점령함으로
해상 통상권을 침해받은 덴마크, 스웨덴과 영국의 지중해 진출에 난색을 표시한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연합하여 1800년에 제 2차
무장중립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영국은 1801년에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냄으로서 무장중립동맹은 와해되어 러시아, 스웨덴은
영국과 화해하여 덴마크는 프랑스에 접근하게 되었다. 1798년 1월부터 스웨덴의 중재 하에 프랑스 혁명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한
라슈타트 회의가 개최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개정을 끌면서 대프랑스 동맹의 재건이라는 시간벌기에 성공했다.
1798년 12월에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에 의해 제 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가 북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다시 프랑스는 위기에 몰려 국민들 사이에선 총재정부의 무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와 11월 9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권을 손에 넣었다.
1800년에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진출했다. 6월 14일에 일어난 마렌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급습을 받아 궁지에 몰렸지만 역습에 성공했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 방면군도 호엔리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1801년 2월 9일에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화평조약에 응하여 캄포 포르미오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또 7월에 프랑스는 로마교황
피우스 7세와 정교조약을 맺어 프랑스 혁명이래의 대립관계를 해소했다. 영국만이 전쟁을 계속 이루어나갔지만 1802년 3월 25일에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체결해 강화했다.
이후 국제평화는 약 1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한 유럽시장에서 영국제품의 퇴출과 조약위반 행동 등에 의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는 대립이 심화되어 1803년 5월 16일에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선전을 포고했다. 전쟁의 목적은 프랑스의 구체제
환원에서 나폴레옹의 타도로 변해갔다.
또 3월 21일에 나폴레옹에 대한 쿠데타 계획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왕족인 앙걍 공이 처형된 일도 유럽각국의 비난을 사서
다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헸다. 1804년 5월 28일에 나폴레옹은 제정(帝政)의 개시를 선언하여 12월 2일에 대관식을 올려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1세로 등극했다.
나폴레옹 전쟁 - 1803년 ~ 1815년
제 3, 4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
1805년에 나폴레옹은 영국상륙을 계획하여 도버해협에 직면한 브로뉴에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영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과 연대하여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첫 싸움은 레이베르히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7만명이 바이에른으로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8월 하순에 브로뉴를 출진해 9월 25일부터 10월 20일까지의 울름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여 5만명에게
피해를 입힌 후 항복을 받아냈다. 나폴레옹은 빈에 입성했지만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와 크튜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 잔존부대와 합류하여 도저냏왔다.
나폴레옹의 즉위 1주년인 12월 2일에 아우스텔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군에 대해 후에 예술로 평가되는 배치로 완승을
거두었다. 한편 해전에선 프랑스의 패배가 이어졌다.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에게
포착되어 10월 21일에 트라팔가 해전에서 괴멸했다.
허나 이 해전은 대륙에 있던 나폴레옹의 패권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12월 26일에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의 화평으로 프랑스에
굴복했다. 이듬 해인 1806년에 나폴레옹은 형인 조셉을 나폴리왕, 아우인 루이를 네덜란드왕으로 즉위시켜 7월에는 남서 독일제후의
연합체로 친나폴레옹의 라인동맹을 성립시켰다. 이에 앞서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1세로 칭한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는 퇴위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라인동맹이 성립되자 나폴레옹의 패권이 독일까지 파급되면서 1806년 7월에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함께 제 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0월 9일에 프랑스에 단독으로 선전포고에 나섰다. 그러나 10월 14일에 프로이센군은
예너, 아우엘슈타트 전투에서 괴멸적인 대패를 당했다.
예너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프로이센군의 후위부대를 격파했는데 아우엘슈타트에서는 프로이센군 주력이 2배의 병력으로 도전했지만
프랑스군에 의해 격퇴당했다. 프랑스군은 추격에 나서 10월 27일에 베를린에 입성했다. 11월 21일에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
(베를린 칙령)을 발포했다.
이것은 공업화가 진행된 영국과 유럽대륙 각 국가와의 무역을 금지하여 영국을 경제적 고립으로 몰아넣기 위함이었다. 허나 역으로
교역상대를 상실한 대륙 각국은 경제가 피폐해지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추격하여
동프로이센으로 향하여 프로이센의 구원에 나선 러시아군과 아이라우 전투를 벌였지만 눈보라 속에 양군모두 사상자가 속출해
승부는 나지 않았다.
그 후 프랑스군은 태세를 정비하여 6월 14일에 프리틀랜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포착해 궤멸시켰다. 7월 7일과 9일에 테르지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폴란드 분할에 의해 독립을 상실한 폴란드는 옛 영지의 일부가 바르샤바 공국으로서 독립을 회복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의 영토를 상실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프로이센의 옛 영지에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설치되어 나폴레옹의 아우인 제롬이 왕으로 등극했다. 한편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프로이센은 철학자인 피히테가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실시하여 애국심을 불태웠고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에
의한 군제개혁이 실시되었다.
1807년 10월에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는 에르푸르트에서 회담하여 스웨덴을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압력을 행사하기로 확인했다. 이로 인해 제 2차 러시아 - 스웨덴 전쟁(1808년~1809년)이 발발하여 패배한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에 할양함과 동시에 파리조약으로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그 후 스웨덴 국왕인 카를 13세는 나폴레옹 휘하의 베르나도트를 양자로 맞이했다. 나폴레옹은 북유럽에서 신뢰할만한 동맹국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베르나도트는 후에 카를 14세로 등극한 뒤 배신하여 스웨덴을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시켜버렸다.
나폴레옹 전쟁 - 1803년 ~ 1815년
제 5차 대프랑스 동맹과 러시아 원정실패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하여 트라팔가 해전과 1807년의 포르투갈 침공에서도 함께 싸웠는데, 국내에서는 국왕인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인 페르난드 7세가 대립했다. 1808년에 나폴레옹은 두 사람을 유폐하고 대신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왕위에 올렸다.
이에 반발한 스페인 민중들은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했다.
이윽고 반란은 스페인 전역으로 확대되었는데 반란지원을 위해 영국은 웰즐리 경(후에 초대 웰링턴 공작)의 부대를 파견했다.
11월에 나폴레옹은 스스로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스페인을 침공해 1809년 1월까지 영국군을 몰아내고 후사를 참모장이던
술트 장군에게 위탁하고 귀환했다.
허나 이후에도 스페인측은 게릴라전과 영국의 지원을 얻어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 스페인 독립전쟁(1808년~1814년)은 이전투구
양상이 되어 프랑스군은 대군을 소모하면서 결국은 패퇴하게 된다. 한편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고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 5차 대프랑스 동맹을 체결했다.
1809년 4월 9일에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으로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재빠르게 대응하여
22일에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5월 13일에 프랑스군이 빈에 입성하자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5월 20일과 21일에 프랑스군은 빈 근교에서 도나우 강을 도하하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로 가교는 파괴되고 반격을 받았다.
아스페른 에슬링크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첫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군은 7월 5일과 6일의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10월 14일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쇤브룬 조약을 맺고 영토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1810년에 나폴레옹은 황후 조세핀을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고 4월 2일에 오스트리아 황녀인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1811년 3월 20일에 왕자인 나폴레옹 2세가 탄생하여 로마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은 프랑스에 병합되어 로마 교황이던
피우스 7세는 유폐되었다.
이 때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 함부르크, 로마 등을 합병한 프랑스 제국 외에도, 지배하에 둔 이탈리아 왕국, 형 조제프가
왕위에 오른 스페인, 아우 제롬이 왕위에 오른 베스트팔렌 왕국, 의붓동생인 뮬러가 왕위에 오른 나폴리 왕국, 종속적이며 동맹국인
스위스, 라인동맹, 바르샤바 공국, 그리고 대등 동맹국인 덴마크 왕국과 함께 나폴레옹의 제정은 절정기를 맞이했다.
한편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의 물자를 반입하지 못하게 된 유럽 각국은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1810년에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교역을 재개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하여 1812년 6월 23일에 27만명의
프랑스군을 주체로 동맹국의 군대를 포함해 70만의 대륙군을 국경인 네만 강을 건너게 했다. 러시아 원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러시아군의 전략은 퇴각하면서 프랑스군을 러시아 안쪽까지 끌어들인 후 초토화 전술로 식량보급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8월 17일에는 스몰렌스크가 함락되었지만 마을은 이미 불탄 뒤였다. 9월 7일에 모스크바 서쪽의 보로디노에서 크튜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결전을 시도했다.
이 보로디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힘겹게 승리했지만 결국 러시아군의 초토화 전술에 더욱 말려들고 말았다. 9월 14일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민 대부분은 마을을 빠져나간 후였다. 14일 밤에 모스크바에선 큰 화재가 일어나 도심은
4일동안 불타며 전체면적의 4분의 3을 소실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은 주거와 식량도 잃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와의 평화협상을 시도했지만 회답이 없는 가운데
겨울이 다가오자 10월 19일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철수를 결의했다. 퇴각하는 프랑스군에 대해 러시아군은 코샤크 기병과
농민 게릴라가 습격하고 11월에 접어들면서 한파가 내습하자 굶주림에 지쳐 사망하는 자가 속출했다.
10월 23일에 파리에서는 쿠데타 미수사건도 일어났었다. 철수과정에서 대륙군은 37만명이 사망하고 20만이 포로가 되었다.
12월 10일에 네만 강을 건너 귀환했을 땐 5천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러시아군도 40만명을 잃었다.
나폴레옹 전쟁 - 1803년 ~ 1815년
제 6, 7차 대프랑스 동맹
1813년 3월 17일에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대패한 것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선전을 포고했다. 나폴레옹은 급히 군대를 재건해
5월의 륏첸 전투, 파우센 전투에서 러시아,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승리했다. 허나 이 때, 스페인에서도 프랑스군은 위기에 봉착해
6월 21일에 비토리아 전투에서 웰링턴 공이 이끄는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에게 황후인 마리 루이즈를 보낸 오스트리아는 정전을 중재했지만 화평협상은 결렬했다.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에 의한 제 6차 대프랑스 동맹이 성립하여 8월 11일에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10월 16일과 19일
사이에 일어난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전투가 되었다.
19만의 프랑스군에 대해 36만의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 연합군은 포위공격에 나서 프랑스군은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1814년에 전장은 프랑스 국내로 이동하여 동쪽에서 연합군이 쇄도하였고 남쪽에선 스페인을 제압한 영국군이 침입하였다.
나폴레옹은 국지전에선 가끔 승리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3월 31일에 연합군은 파리에 입성했는데 4월 6일에 나폴레옹은 황제직에서 퇴위하여 엘바 섬의 소영주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의
퇴위 후 9월 1일부터 빈 회의가 개최되어 전후체제의 대한 말이 오갔는데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그다지 진전을 보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지만 이 정치는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15년 2월 26일에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상륙했다. 국민들에게 환영받은 나폴레옹에 의해
루이 18세는 도망쳐버렸다. 3월 20일에 나폴레옹은 파리에 입성해 다시 황제자리에 올랐다. 이에 각국은 제 7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나폴레옹 타도에 나섰다.
벨기에 방면에서 웰링턴 공이 이끄는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과 브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진격해왔는데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주력을 이끌고 벨기에로 향하여 6월 15일에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승리했다. 그리고 그루시에 별동대를 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면서 자신은 워털루에서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과 대치했다.
6월 18일의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영국, 네덜란드 연합군은 격전을 벌였는데 그루시에서 추격을 당하던 프로이센군이 이어서
전장에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의 측면에 맹공을 가했다. 이것은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프랑스군은 패주했다. 프로이센군은 야간에
추격을 벌여 프랑스군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리하여 나폴레옹의 부활은 백일천하로 끝났다. 6월 22일에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약 20년 이상 이어졌던 전란은 11월 20일에 제 2차 파리조약이 체결되면서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은
비단 유럽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네덜란드 본국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에게 합병되었을 때 네덜란드의 식민지도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는
아미앵 조약의 파기 후 제해권을 확보한 영국에 의해 차례로 공략당했다. 네덜란드령 스리랑카는 1796년, 네덜란드령 케이프 식민지는
1806년, 프랑스령 세네갈은 1809년, 프랑스령 모리셔스와 네덜란드령 몰루카 제도는 1810년, 네덜란드령 자바는 1811년에 함락되었다.
빈 회의 결과, 세네갈은 프랑스, 몰루카 제도와 자바는 네덜란드로 반환되었지만 스리랑카와 케이프 식민지, 모리셔스는 영국령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1803년에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여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철수했다. 중남미의 프랑스령 및 네덜란드령도
영국에 의해 공략당했다. 프랑스령 아이티는 1803년, 프랑스령 세인트 루시아와 네덜란드령 가이아나는 1804년, 네덜란드령 안틸러스
제도는 1807년, 프랑스령 가이아나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는 1809년에 함락했다.
세인트 루시아는 빈 회의에서 영국령이 되었다. 1812년에 영국해군은 해상봉쇄령으로 인해 미국과 유럽간의 교역이 끊기자 미국과
영국간의 알력다툼으로 미영전쟁을 발발시켰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미국은 영국군을 물리쳐 영국의 해상패권에서 이탈하는 것에서
성공하였다.
또 1808년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페이튼호 사건은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일본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주었다. 10월 4일에
영국선박인 페이튼호가 당시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네덜란드 선박의 포획을 목적으로 나가사키에 침입하여 네덜란드인을 인질로
물과 식량, 연료를 요구했다.
나가사키의 부교(奉行)이던 마쓰다이라 야스히데(松平康英)는 페이튼호를 격퇴할 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이 요구를 수용했다.
후에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이 굴욕사건의 책임을 물어 할복했으며, 제멋대로 병력을 줄여 나라와 조정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나베시마 번(鍋島藩) 가신들 몇 명도 책임을 물어 할복케했다.
한편 각국의 이해가 서로 엇갈리면서 진전을 보이지 않던 빈 회의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각국의 타협이 성립하여
1815년 6월에 빈 의정서가 합의되었다. 나폴레옹의 완전실각 후, 주요승전국에 의해 신성동맹(神聖同盟)이 체결되어 유럽은
복고주의, 정통주의를 원리로 한 빈 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허나 나폴레옹 전쟁의 과정에서 민주주의, 근대법, 특권계급의 폐지 등, 프랑스 혁명사상이 유럽 각지와 라틴 아메리카 등
일부 식민지로 파급되었다. 나폴레옹 법전을 기초로 한 각 헌법은 구체제의 부활 후에도 각국에 남겨졌다. 혁명사상은 1848년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은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는 유럽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켜 그 후 100년간 유럽각국은
봉건주의의 영토를 단위로 한 영역에서 국민국가로 변모했다. 한편으로 나폴레옹이 의도했던 유럽 통일국가 구상은 와해되었다.
유럽의 통일기운이 다시 높아진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였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봉건질서가 부활했다. 국내에서는 왕당파와 나폴레옹주의자들의 심각한
대립이 남겨졌다. 그러나 프랑스 왕정복고하의 반동적인 정치체제는 길게 이어지진 못하여 이윽고 7월 혁명으로 타도되었다.
후에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한 사부아와 니스를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프랑스 본국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영국은 케이프 식민지를 비롯한 해외영토를 획득했는데 다시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해군력을 타도함으로 인하여
영국해군이 세계의 바다를 쥐는 제해권을 확립하여 대륙봉쇄령과 이에 대항하는 해상봉쇄라는 프랑스와의 경제전쟁에서도 승리해
식민지 무역에서 지배력을 강화하여 영국의 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19세기에 영국의 패권국으로서 지위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독일에서는 나폴레옹의 침략에 굴복했기에 민족주의 운동이 높아져 독일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라인란트를 비롯한 영역을 확득하여 대국으로 대두하여 독일의 통일을 주도했다. 오스트리아 제국도
군제개혁을 달성하여 나폴레옹의 공격에 내실을 다지는 한편 전후 이탈리아 북부를 획득하여 대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했지만 차츰
프로이센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강력한 육군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파병하여 전후 신성동맹을 제창하여 자유주의 운동을 막으면서
유럽의 구체제 수립의 중심으로서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농노제가 남아있던 국내경제는 서유럽의 타국보다 훨씬 뒤떨어져
러시아가 시대에 뒤떨어짐을 알게 된 것은 크림전쟁이 일어난 후였다.
출처 : 에밀 부칼리 <나폴레옹의 원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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