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전쟁 - 1792년 ~ 1802년
1780년대 7년전쟁 이래 유럽 대국들간의 대립관계는 해소되어갔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3국은 제 1회 폴란드
분할(1772년)로 협조하여 각각 국경에 인접한 지역을 획득했다. 러시아와 스웨덴은 1788년부터 제 1차 러시아 - 스웨덴 전쟁을
일으켰지만 스웨덴의 우세로 인해 러시아는 핀란드로의 간섭을 정지하고 양국관계는 개선되어졌다.
영국은 미국독립전쟁과 수반해 제 1차 무장중립동맹의 결성으로 국제적 고립에 처했지만 전쟁종결로 인해 고립도 해소되었다.
이러한 국제환경 속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의 동향에 주시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는
프랑스 왕가와의 유대관계로 인해 일찌기 반혁명의 입장을 표명했다.
1791년 6월에 루이 16세 일가의 프랑스 탈출이 실패로 끝나자 바로 프랑스에서의 망명귀족(에미글레)과 결탁해 반혁명 십자군의
결성을 유럽각국에 호소했다. 그러나 호소에 대답한 것은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뿐으로 결국 결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792년 3월에 구스타프 3세가 암살당하면서 스웨덴은 혁명전쟁에 참가할수 없었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드 2세도 결단에 압박받았는데 레오폴드 2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오빠여서 혁명이 과격화되는 것에 대해 친족의 신변에 닥친 위험을 관과할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1791년 8월 27일에 레오폴드 2세는
망명귀족이던 아르투와 백작(루이 16세의 동생)의 중개하에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공동으로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프랑스 왕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서는 혁명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레오폴드 2세 자신은 그다지
전쟁을 희망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혁명정부에겐 이 선언이 심각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졌다. 거기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벨기에)와
독일에 있던 왕당파 망명귀족들에 의한 획책활동도 혁명정부를 자국하기엔 충분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는 알자스 - 로렌의 귀속문제라는 대립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당시 외무대신의 지위에 있었던
뒤므리에의 주도하에 프랑스 입법의회는 1792년 4월 20일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뒤므리에는 남 네덜란드로의 침공을
계획하였는데 현지주민들은 프랑스군에 호응해 황제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시기가 맞지 않았으며 혁명에 의해 프랑스군의 기강도 혼란한 상태였다. 사관들은 귀족계층이었기에 혁명정부에 비협조적이었으며
병사들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 탈영하거나 혁명에 의해 상관을 살해하는 행위도 속출했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이유로는 적진에
프랑스군의 작전을 누설한 혐의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7월에 국경을 넘어 베르덩을 함락시켰다.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은 망명귀족인 콩데 공이 작성한 왕정복고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7월 11일에 입법의회는 <조국에 위기가 닥쳤다!>라는 선언을 발표하며 선언을 통해 프랑스 각지에서 의용병이 파리에 집결했다.
이 때 마르세이유에서 온 의용병이 부른 군가가 널리 퍼지면서 후에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되었다. 파리시민과 의용병은
프랑스군의 수세적인 원인이 전쟁에 비협조적인 국왕이라 여겨 8월 10일에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권을 정지하고 국왕일가를 모두
탕플 탑에 유폐했다. (8월 10일 사건)
뒤므리에와 켈레르만이 이끄는 프랑스 의용병과 포병대는 발미 전투(9월 20일)에서 프로이센군의 침략을 막아냈다. 전투 자체는
격렬하지 않았으며 프로이센군의 퇴각은 전술적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첫 승리는 프랑스 국민들을 열광케했다.
프랑스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플랑드르 방면에서 뒤므리에가 쥬마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여 남 네덜란드 전역을
점령했으며 켈레르만은 독일로 침공해 프랑크푸르트까지 도달했다.
1793년 1월에 국민공회는 전시체제의 강화를 위해 국방위원회(후에 공안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 때 프랑스군의 상태는
악화되어 있었다. 이전에 군에 참전한 의용병들은 만기를 이유로 귀향하고 상비군의 병사들은 만족할만한 급여를 받지못해
전선의 병력은 차츰 감소되고 있었다.
더우기 1월 21일에 혁명정부에 의한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을 뒤흔들어 스페인, 네덜란드, 나폴리 왕국, 사르디니아 왕국, 그리고
당시 시민혁명에 동정적이던 영국마저 반혁명 입장으로 돌아섰다. 영국에게 있어서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자국의 안전보장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을 중심으로 주요국가들은 제 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2월 1일에 프랑스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했다. 2월 24일에 국민공회는 병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30만명 모병>을 가결했지만 생각만큼 병사들을 모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다 강제적인 모병의 반발로 3월에는 반데 반란이 일어났다.
전선에서는 뒤므리에가 남 네덜란드 방어라는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네덜란드로 침공했지만 병력부족과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으로
전선에서 철수마저 여의치 않게되었는데 결국 네르빈덴 전투에서 대패했다. 궁지에 몰린 뒤므리에는 자코뱅파에게 처형당하기보다는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고 부대에 말했지만 반대에 부딫쳐 4월 5일에 적진으로 달아나는 처지가 되었다.
남프랑스에서는 자코뱅파 정권에 대한 반란도 일어났다. 4월 29일에 마르세이유, 5월 29일에 리용에서 반정부의 반란정권이 탄생해
7월 12일에는 툴롱이 반기를 들고 영국군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더우기 영국은 5월 31일에 프랑스에 대한 해상봉쇄를 발령하여
스페인군, 사르디니아군도 국경을 넘었고 오스트리아군이 발렌시엔느를 함락시켰다.
다시 궁지에 몰린 프랑스는 8월 23일의 국민공회에서 <국가 총동원>을 발령하여 징병제도를 시행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한 30만의
의용병과는 달리 각 계층의 국민을 공평히 징병하여 새로 120만의 병사가 군에 가담했다. 이것은 용병을 군의 주력으로 삼던 당시
유럽의 군주제 국가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대병력이었다.
거대화된 국민군으로 변화한 프랑스군은 카르노의 지도하에 13개 사단으로 재편되어 반격준비에 나섰다. 9월에 우샤르가 요크 공의
영국군을 온더스코트 전투에서 격파하고 덩케르크를 포위에서 해방시켰다. 10월에는 후임의 조르당이 왓티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8월 25일에 마르세이유, 10월 10일에 리용의 반란이 진압되었다. 허나 툴롱은 영국군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공략에 난항을 겪었다. 프랑스군은 10월 30일과 11월 15일의 두 차례 공격에 실패하여 사령관이 파면되었다. 후임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고미에가 당시 24살의 포병사관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작전을 채용하여 12월 19일에 툴롱의 탈환에 성공했다.
프랑스군은 거대화하여 병력으로도 대프랑스 동맹군을 압도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대군에 들어가는 보급물자의 대다수를 적국의
영토에서 징발로 의존했다. 이후 전쟁은 프랑스에 의한 침략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1794년에 조르당이 플류스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했다. 그 결과 대프랑스 동맹군은 라인 강 서쪽에서 철수하여 프랑스군은 남 네덜란드와 라인란트의 대부분을 제압했다.
1795년 초, 하구의 결빙으로 인해 네덜란드의 요새방어력이 저하하는 겨울철이 되자 피슈그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네덜란드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찬동하는 협력자들도 많아 도시는 차례로 함락되어 네덜란드 총독이던
빌럼 5세는 도망하고 네덜란드 함대는 접수되었다. 네덜란드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이 성립하여 브라반트와 마스트리히트가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네덜란드의 함락을 본 프로이센도 프랑스와의 강화를 결정하여 바젤 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에 의해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라인란트
합병을 인정하여 폴란드 분할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스페인으로도 진격하여 스페인도 강화에 응했다. 제 2차 바젤 조약으로
스페인은 점령지의 회복과 교환하여 혁명정부의 승인과 산토 도밍고의 할양을 인정했다. 두 나라와의 강화로 프랑스는 궁지에서 벗어났다.
1796년에 프랑스 총재정부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계획했다. 라인 방면에서의 2개군은 조르당과 모로가
이끌었고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는 발라스의 계획에 의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추천되었다. 세 개의 군은 티롤에서 합류해
빈 점령작전에 나섰다.
작전은 4월에 개시되었는데 당시 조르당과 모로는 순조롭게 진격했다. 모로는 바이에른을 통과하여 9월에 티롤의 국경근처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조르당은 카를 대공에게 패해 프랑스군은 라인 강의 서쪽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작전을 성공시켰다. 먼저 사르디니아 왕국을 1개월만에 항복시키고 오스트리아군의 거점인 만토바를 포위했다.
뷜름저와 알빈츠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의 해방을 목적으로 반격에 나섰지만 나폴레옹에게 카스틸리오네 전투와 아르코네
전투에서 모두 패배했다. 이 때 왕당파의 참가와 영국군의 지원으로 인해 오랫동안 끌었던 반데의 반란은 옷슈에 의해 1796년 전반에
모두 진압되었다. 12월에 옷슈는 내친 김에 아일랜드로의 원정을 시도했는데 영국함대의 방해로 인해 상륙작전은 실패했다.
또 10월엔 스페인이 프랑스측에 서서 영국에 선전포고했는데 스페인 함대는 1797년 2월 14일에 일어난 산 비센테 갑 해전에서 저비스와
넬슨의 영국함대에게 패했다. 1797년에 이탈리아 방면에선 오스트리아가 리볼리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2월 2일에 만토바가 함락되었다.
나폴레옹은 티롤에서 빈으로 향해 진격했는데 카를 대공도 나폴레옹의 세력을 멈추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정전을 신청하여 4월 18일에 레오벤 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반년동안 협상이 진행되어 10월 17일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는 남 네덜란드를 병합하고 북 이탈리아에 체자르비나 공화국 등 위성국을 성립시켰다. 그 대신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병합했다.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제 1차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파라미드 전투의 모습을 그린 전투화
오스트리아의 탈락으로 영국만이 전쟁을 계속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제해권을 쥐고있는 영국에 대해 프랑스는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식민지 인도와의 연대를 끊기위해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원정을 총재정부에 진언했다. 1798년 5월 19일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집트 원정군은 툴롱 항을 출발해 도중에 말타 섬을 점령하고 7월 2일에 이집트의 아브킬 만에 상륙했다.
피라미드 전투(7월 21일)에서 현지군에게 승리한 나폴레옹은 이어서 카이로에 입성했다. 그러나 직후 일어난 나일 해전(8월 1일)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에게 프랑스 함대가 대패하여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고립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시리아 방면으로 침공하여
앗코를 공격해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해 이집트로 퇴각했다.
이 때 유럽에선 2월에 프랑스군이 교황령에 침공해 로마 공화국을 건국했다. 3월에는 스위스의 내란에 개입하여 여기에 헬베티아
공화국을 건국했다. 여기에다 제네바도 합병했다. 8월에는 아일랜드의 반란에 편승하여 프랑스군은 다시 아일랜드로 원정길에 올랐다.
상륙에는 성공했지만 제해권이 없는 상황에서 작전은 오래 지속될 수 없어 증원에 실패한 원정군은 9월에 항복했다.
1798년 1월부터 스웨덴의 페르센 백작의 조정하에 프랑스 혁명전쟁의 종결을 목표로 한 라슈타트 회의가 열렸지만 메테르니히의
책략으로 오스트리아는 회의를 연기하여 강화에 이르기 전에 대프랑스 동맹의 재건이라는 시간벌기에 성공했다. 12월에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에 의해 제 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1799년에 북 이탈리아에선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와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전선참가로 인해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려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령관 모로는 8월에 제노바까지 후퇴했다. 라인 방면에서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해 프랑스군은 슈토크아하
전투에서 패해 조르당은 해임되어 마세나가 후임이 되었다.
스위스 방면에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이어나갔는데 마세나는 제 2차 튤리히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했다. 러시아는 이듬 해 프랑스와 화평을 체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와 11월 9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집정정부를 수립하고 제 1 집정으로 취임해 독재권을 쥐었다.
1800년에 나폴레옹은 반격을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 이탈리아로 진출했다. 6월 14일의 마렝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급습을 받아 궁지에 몰렸지만 역습에 성공했다. 모로가 이끄는 라인 방면군도 12월 3일의 호엔린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했다. 이듬 해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을 맺어 프랑스와 강화했다.
프랑스와 전쟁을 이어나간 것은 다시 영국 뿐이었다. 영국의 말타 섬 점령으로 통상권을 침해당한 덴마크, 스웨덴과 영국의 지중해
진출에 난색을 표시한 러시아가 프로이센과 함께 제 2차 무장중립동맹을 결성해 영국과 대립했다. 1801년 4월에 영국은 코펜하겐의
해전에서 덴마크 함대를 격파하여 무장중립동맹을 해체시키고 이집트에서 제 2차 아브킬 전투, 알렉산드리아 전투에 승리하여
반년 후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군을 항복시켰다.
1801년에 영국에선 대프랑스 강경파였던 윌리엄 피트가 국내의 종교문제 등으로 퇴진하여 대프랑스 화평파인 애딩턴이 수상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제 1 집정인 나폴레옹이 국내안정에 중시하여 강화를 희망했다. 1802년 3월 25일에 양국은 프랑스 북부의 아미앵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그때까지 프랑스가 획득한 영토를 인정하고 말타 섬, 케이프 식민지, 이집트 등의 점령지에서 군을 철수하기로 약조했다.
프랑스도 나폴리 왕국과 교황령에서 철수를 약속하여 이후 약 1년간 유럽에서는 평화가 찾아왔다. 아무튼 프랑스 혁명정부는
붕괴직전의 위태로운 상황까지 몰렸었지만 국민군을 조직하여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했다.
네덜란드, 남 네덜란드, 라인란트, 스위스, 이탈리아라는 지역을 정복하고 프랑스의 역대 군주들이 장기간 안고있던 영토적 야심도
달성한 프랑스 혁명정부였지만 전쟁과정에서 군대의 정치력이 증가하면서 장군들은 제멋대로 적국과 협상하고 나폴레옹같은 일개
사관으로 최고권력자에 오르는 하극상도 일어났다. 나폴레옹에 의한 제정의 개시(1804년)는 공화정 자체를 종결시켰다.
아미앵의 조약을 체결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관계는 근본적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1803년 5월 16일에 영국은 아미앵의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을 포고하면서 양국은 다시 유럽전체를 뒤흔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신생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을 압도했지만 이것은 혁명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모두 상실하는 최종적 패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프랭크 애터 <유럽에서의 혁명전쟁>,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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