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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혁명 - 1791년 ~ 1804년

구름위 2013. 12. 1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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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혁명 - 1791년 ~ 1804년 

 

 

 

카리브 해의 부유층은 유럽에서 증가하기 시작한 설탕의 기호에 의존하여 대농장의 소유자가 북미에서 식료와 유럽에서의

가공제품을 설탕과 교환했다. 1730년대부터 프랑스의 기사는 사탕수수의 생산증대를 위해 관개설비를 들여와 1740년대까지

생 도맹그는 자메이카와 함께 세계의 설탕공급원이었다.

 

설탕생산은 엄격히 통제된 아이티의 식민지 대농장 경제에 의해 대량의 흑인노예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혹독한 육체노동을

필요로 했다. 설탕수출로 부를 쌓은 백인 농장주는 압도적으로 많은 흑인노예에게 둘러싸였기에 늘상 노예들의 반란에 신경을

곤두세웠었다.

 

1758년에 백인의 토지소유자들은 유색인종의 권리를 제한하여 엄격한 계급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법률제정을 시작했다. 많은

역사가가 당시 생활자들을 세 계급으로 구분했는데 첫번째 계급은 백인 식민자로서 프랑스어로 블랑크(blancs)라 불리웠다.

두번째 계급은 자유흑인(대체적으로 뮬라토, 유럽계와 아프리카계의 혼혈)으로 프랑스어로 유색인이라는 장 드 끌레

(gens de couleur)로 불리웠다.

 

세번째가 숫자 상으로는 다른 계급을 10대 1의 비율로 압도하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흑인노예들로 프랑스어의 방언화인

서아프리카어, 이른바 크레올어를 사용했다. 백인식민자와 흑인노예들 사이에서는 몇 차례 폭력적인 분쟁이 이어졌는데

마룬이라 불리던 도망노예의 집단은 숲 속에 숨어살면서 내륙의 설탕과 커피농장에 때때로 폭력을 동반한 습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공격의 성공은 아이티 국내에서도 정치에 대한 폭력과 학살행위로 이 집단은 종종 설탕과 커피 농장을 공격했고, 이런 공격이

성공함으로써 아이티 흑인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폭력과 잔인한 방식을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룬의 숫자는 크게

늘어났지만 이 집단은 대규모 목표를 실행하기 위한 리더쉽과 전략을 갖추지는 못했다.

 

실질적인 최초의 마룬 지도자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부두교 주술사였던 프랑소와 마칸달로, 아프리카 전통과 종교를 이용해 흑인

저항세력을 하나로 모았다. 마칸달은 노예간의 비밀 조직망을 결성해 1751년부터 1757년까지 반란을 이끌었다. 1758년에 마칸달이

프랑스군에 잡혀 화형에 처해졌지만 마룬은 그의 사후에도 무력투쟁을 계속했다.

 

1789년에 생 도맹그는 당시 전세계 설탕의 40%를 생산하며 프랑스가 가진 가장 값진 식민지였다. 생 도맹그는 카리브 해의 노예식민지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발전하는 곳이었다. 가장 낮은 계급의 흑인노예들은 백인과 자유인들에 비해 그 수가 8배나 많았다. 1789년에

카리브 해의 노예는 약 100만명이었는데 이 섬에만 전체 노예의 절반 정도가 살고 있었다.

 

노예 대부분은 아프리카 출신으로, 카리브 해에서 사망률은 출산률보다 높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수입해야 했다.

노예인구는 과로, 영양부족, 의식주의 문제, 의료부족 등과 성별 불균형(남성이 여성보다 많음)으로 인해 매년 2~ 5%의 속도로 줄었다.

일부 노예들은 가사노동이나 하인 또는 장인역할을 하는 도시노예들의 크레올 엘리트 층을 이루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던 이런 계층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노예들로, 힘들게 일하는 하층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생 도맹그의 북부해안은 가장 큰 사탕수수 농장을 가진 비옥한 지역이었다. 여기서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마시프라는

높은 산맥으로 식민지의 다른 곳과 고립된 채 여러사람들이 함께 생활했다.

 

이 지역은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자립시키고 싶어했던 그랑 블랑(grand blancs)이라 불리던 부유한 백인 식민자들의 소유였다.

1789년에 생 도맹그에 있던 4만명의 백인 식민자 중 유럽출신의 프랑스인들이 주요 행정요직을 독점했다. 그랑 블랑의 농장주들은

대부분 귀족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주기적으로 식민지를 휩쓸던 황열병을 피해 가능한 빨리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쁘띠 블랑(petits blancs)이라 불리던 평민층 백인들은 장인, 상인, 노예상인, 감독관, 일일 노동자 등의 직업을 갖고 있었다.

이 때 장 드 끌레라 불리던 생 도밍그의 유색 자유인은 28,000명 이상이었다. 많은 유색 자유인은 장인, 감독관, 저택의 하인 등으로

일했다.

 

백인, 유색자유인, 흑인노예 간의 계급, 인종간 갈등 뿐 아니라 생 도맹그에는 북부, 남부, 서부간의 지역 간 갈등도 있었다.

또 생 도맹그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프랑스 지지자, 스페인 지지자, 영국 지지자 등 다양한 집단 간에 경제적으로

중요했던 생 도맹그의 권력을 잡기 위한 갈등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국왕의 자문기구였던 삼부회의 다수가 국민의회를 만들어 1789년 8월 26일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의

<프랑스 인권선언>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국법에 급격한 변화를 주었다. 프랑스 혁명은 생 도맹그의 분쟁과정에 영향을 주었고, 혁명의

정신은 생 도맹그의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생 도맹그 섬의 흑인들은 부유한 유럽 농장주들이 생 도맹그에 무역제한을 가한 것에 반발해 독립을 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생 도맹그가 농장주들에 의해 독립할 경우, 자신들의 처우가 더 악화될 것을 우려해 프랑스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 및

영국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1780년부터 생 도맹그의 줄리앙 레몽으로 대표되는 유색 자유인들은 백인과의 평등을 위해 프랑스에 활발히 의견을 제시했다.

레몽은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이 문제를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다뤄지는 식민지에 대한 중요한 문제로 만들었다. 1790년 10월에

빈센트 오제는 제헌 국민의회에서 통과된 법을 보고 파리에서 생 도맹그로 돌아와 흑인에 대한 투표권을 주장했다.

 

식민지 총독이 투표권 부여를 거부하자 오제는 캡 프랑새 부근에서 일어난 잠시간의 폭동을 이끌었다. 오제는 1791년 초에 잡혀

수레바퀴에 묶인 후 망치로 때려 죽음에 이르는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오제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펼치지는 않았으나,

그의 잔인한 처형은 1791년 8월 노예 반란군이 봉기를 결정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이 때까지의 분쟁은 백인의 분파간, 또는 백인과 자유 유색인간의 분쟁이었다. 노예 흑인들은 이 분쟁을 관망하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미라보는 생 도맹그 백인들이 직면해 있었던 노예반란의 위기를 가리켜 <백인들이 베수비오 화산아래 자고있다>라고

표현했다.

 

가장 뛰어난 흑인 지도자들 중 하나였던 투생 루베르튀크는 독학으로 공부한 노예였다. 투생의 군사적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은 프랑스에 대해서 우위를 점하며 생 도맹그의 대부분을 손에 넣을수 있었다. 그러나 투생은 섬을 장악한 후 프랑스에

굴복하지 않고 자치정권을 수립하여 섬을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투생은 레제 페리시테 송토냐, 앙드레 리고 및 에두빌 백작 등의 라이벌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 성공했다. 에두빌 백작은

리고와 투생에 맞선 후 프랑스로 달아났다. 투생은 1788년에 영국 원정대를 물리치고, 인근의 산토 도밍고까지 침략하여 1801년에

그곳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프랑스의 장군 에티엔느 라보는 1794년 5월에 프랑스군과 함께 스페인과 싸우자고 투생을 설득했다. 한편 송토냐는 1793년 8월 29일에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1801년에 투생은 생 도맹그 헌법을 시행하여 자치 정부를 만들기로 하고, 투생 자신이 종신총독이 될 것을

결의했다.

 

나폴레옹은 투생을 값나가는 식민지인 생 도맹그 탈환의 장애물로 간주했다. 노예 제도의 재도입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1802년에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샤를르 르클레르가 이끄는 원정군이 생 도맹그를 다시 점령하려 시도했다. 프랑스군에 알렉산드르 페숑 및 앙드레

리고가 이끄는 뮬라토 군대도 참전했다. 리고는 3년 전에 투생에게 패배했던 경험이 있었다.

 

결국 장 자크 드살린 등 투생과 협력했던 자들이 프랑스군으로 도주했다. 투생은 남아있는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에 투항하면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말에 1802년 5월에 투항에 동의를 했지만 이것은 거짓말이었고, 결국 잡힌 투생은 프랑스로 이송되어

유대인 요새에 수감되어 있다가 이듬해인 1803년에 사망했다.

 

몇 달 동안 섬은 나폴레옹의 지배 하에 평온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노예제도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것이 밝혀지자 드살린과 페숑이

1802년 10월에 반기를 들고 프랑스와 싸웠다. 11월에 레클레르및 많은 프랑스군 병사들이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르클레르의 후임인

르샹보 자작는 전임자보다 더 잔인한 방식으로 싸웠다.

 

르샹보 자작의 만행으로 원래 프랑스 왕당파의 대부분이 반란군 측에 붙었다. 프랑스군은 영국의 해상봉쇄로 기세가 위축되었고,

나폴레옹은 요청받은 대군을 보내는 것을 망설였다. 나폴레옹은 1803년 4월에 미국 루이지애나 시민지를 매각하여 신대륙에서의

사업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드살린은 반란군을 이끌고 1803년에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아이티 혁명의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는 1803년 11월 18일에 카파이티앙 근처에서 일어났다. 아이티 반군은 드살린이,

프랑스 식민지군은 르샹보 자작이 지휘했다. 베르티에르 전투의 결과, 1804년 1월 1일에 드살린들은 고나이브에서 아이티의 독립을

선언하고 토착민인 아라와크 족의 말을 따서 <아이티>라고 국명을 지었다.

 

혁명직전 섬의 인구는 약 550,000 명이었으며, 1804년엔 300,000명으로 줄었다. 생 도맹그의 상실은 프랑스와 식민지 제국에

큰 타격이 되었다. 독재적인 헌법 하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된 드살린은 아이티 자유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아이티는 미국에 이어

신대륙에서 두 번째 독립국이 되어 세계역사에서 유일하게 노예반란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이 나라는 몇 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농업기반은 피폐했으며 공식적인 상업은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교육 및

기술도 없었다. 장 피에르 보와이에의 통치하에 아이티는 1825년에 샤를 10세의 압력을 받아 독립의 승인과 프랑스인 노예 소유자에

대한 보상으로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에 동의했지만 1838년에는 9천만 프랑(30년 나머지 6천만 프랑)까지 감소시켰다.

 

이것은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댓가였다. 그러나 이 배상금으로 아이티의 재정은 파산상태가 되었으며,

아이티의 미래를 담보로 프랑스 은행에서 첫번째 지불을 위한 자금을 차입했기 때문에 배상금과 이자는 그 후 오랫동안 아이티가

번영을 누리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배상금을 모두 갚은 것은 97년 후인 1922년이 되어서였다.

 

1804년 아이티 혁명의 종결은 이 섬에 대한 식민지의 종식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예제도 하에서 커진 사회적 갈등은 이후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혁명은 아이티를 계속 통치하게 되는 엘리트 계층과 함께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요소가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되었는데 남부를 장악한 알렉산드르 페숑의 지지자들은 뮬라토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북부의

앙리 크리스토프 지지자들은 대부분 흑인이였다. 이 두 파가 새로운 국가 사업의 대부분을 쥐고 있었기에 아이티는 분열이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아이티에 자유를 부여했지만 마르티니크와 과달루페는 노예제도를 계속했다. 영국은 1808년에 노예무역을 폐지하였고

1834년에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완전히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프랑스는 거액의 배상금에 대한 대가로 1834년에 아이티를

독립국가로 공식 인정했다. 미국이 아이티를 인정한 것은 1862년이 되어서였다.

 

아이티 혁명은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노예 반란에 영향을 주었는데 서쪽의 큰 수입원을 잃은 나폴레옹은 전도유망한 신대륙에 대한

믿음을 접었고 루이지애나를 포함한 지역에 있던 프랑스의 재산을 매각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 도맹그에서 해방된 노예의 대부분이

뉴올리언즈로 이주하여 이 도시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세기적인 식민지 질서에서 아이티 혁명에 의한 탈식민지와 노예제도 폐지는 첫 번째 근본적인 도전이 되었다. 영국은 1807년에

노예무역을 공식적으로 폐지함으로써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메리카의 많은 노예들이 아이티 혁명의 투생 루베르튀르의 행동을

모방하려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아이티 혁명은 미국의 흑인해방을 위한 설계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백인의 경계심을 불러 카리브 해에서 식민지 지배가 강화되고, 남미에서는 크레올 지배체제가 탄생한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혁명의 영웅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고 지금도 흑인예술 속에 등장하고 있다. 한편 2004년에 아이티는 프랑스에서 독립한지 200주년이 되는 기념행사를 열어 축하했다.

 

 

 

출처 : C.L.제임스 <검은 혁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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