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바바리 전쟁

구름위 2013. 12. 1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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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바바리 전쟁 - 1801년 ~ 1805년

 

 

 

1800년 경의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체제 하에서 세금을 내는 준 독립지역이었는데, 바바리라 불린 이 지역은

주로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의 세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각각 오스만 제국 본국에서 파견된 파샤(지사, 총독)를 임명하여

통치했었다.

 

바바리 각국은 앞서 무장조직으로서 발바롯사 하이레딘을 배출한 바바리아 해적에게 옹호되어 그 무력을 배경으로 오스만 제국의

보호하에 지중해를 통과하는 상선의 선적국에서 통행료를 칭한 상납금을 징수하는 것 이외에도 상선을 습격하여 획득한 기독교도

포로를 인질로 하여 해당국과 협상하여 몸값을 뜯어내기도 했다.

 

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강력한 해군을 가진 국가는 강력한 호위함대를 수반시켜 통행료를 내지 않았는데 이들은 바바리

해적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상선을 습격하는 상황도 있었다. 한편 1783년에 독립을 달성한 미국은 풍부한 산림자원에 의한 조선건조의

염가로 인해 독립 전부터 해운업이 발달했다.

 

독립 전에는 종주국이던 영국의 상선기를 내 걸며 발바리아 해적의 습격을 면했지만 독립달성 후에는 독립직후의 재정난에 의해

바바리 각국의 파샤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지불하지 않아 이후 바바리 해적의 습격목표가 되어 자주 피해를 입었다. 미국이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자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의 파샤들은 미국에 대해 이제껏 체납한 통행료의 일괄지불과 일년간의 통행료를 빠른 시일내에

지불할 것을 공식으로 연명하여 요구했다.

 

그러나 독립직후의 재정난에 허덕이던 미국으로서는 이 금액은 막대한 것이었고, 국고 만으로는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실질적인 해적에게 자금이 넘어가는 것을 좋지않게 생각한 미국의 해운업자들은 여기에 협력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위로 인해

요구액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을 미국은 윌리엄 베인브릿지에게 주어 통행료 감면의 협상에 나섰다.

 

허나 바바리 각국의 파샤들은 여기에 납득하지 않았다. 이 때 베인브릿지는 처음에 기항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에서

트리폴리로 향하도록 지시받아 성조기 대신 트리폴리 항에 있던 오스만 제국의 국기를 달고 입항하게 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이러한 반응에 위기적 상황이라 보고 분노한 미국은 함대를 조직해 지중해로 파견하였다.

 

그 사이에도 지중해를 통과하던 미국선적의 상선은 바바리 각국의 지배하에 있던 바바리 해적에게 의해 습격이 계속되어 억류된

포로에 대한 미국으로의 몸값요구가 지체되자 몸값대신 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1801년 5월 14일에는

트리폴리의 파샤였던 칼라만리 왕조의 유스프 칼라만리가 트리폴리 주재 미국영사관의 성조기를 꺾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폭거로 국기에 대한 공식적인 모욕을 받은 미국과의 사이에서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러한 가운데 6월 1일에 미해군의

리처드 데일이 이끄는 <프레지던트>, <필라델피아>, <에섹스> 및 <엔터프라이즈>로 구성된 앞서 파견된 함대가 지브롤터에 도착했다.

6월 14일에 트리폴리측이 미국에 대해 개전을 통지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전쟁상태에 돌입했다.

 

이 때 파견된 미해군 함대는 트리폴리측이 약 2만 5천명에 24척의 전투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면공격을 하지 않고 멀찍이 웨어싸듯

트리폴리에 대한 해상봉쇄를 실시하여 지중해를 통과하는 미국선적의 상선을 호위했다. 그렇지만 8월 1일에 미해군의 <엔터프라이즈>와 트리폴리측의 폴락카(3개의 돛을 가진 지벡급)사이에서 첫 전투가 일어났다.

 

이 때 미해군은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어 트리폴리측의 폴락카를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고 무장해제시킨 후 풀어주었다.

1803년 10월 3일에 미해군은 함대사령관을 에드워드 프레블로 교대하고 <컨스티투션>을 기함으로 하는 증원함대를 파견했다.

1801년 8월 1일의 전투 이후 소규모 경합은 있었지만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프레블은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 함대 근거지를 구축하고 지휘를 시작했다. 그러나 작전행동을 계획중이던 1803년 10월 31일에

파견함대의 핵심이던 <필라델피아>가 트리폴리측의 소형함을 추격하다가 좌초되어 결국 트리폴리측의 포함에게 나포되면서

윌리엄 베인브릿지 함장이하 수병 307명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태를 중하게 여긴 프레블은 포로가 된 베인브릿지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제안받은 것도 있어 포획당한 <필라델피아>가

트리폴리측에 의해 전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전 회의에서 <필라델피아>파괴작전을 희망한 스티븐 디케터에게 <필라델피아>의

파괴를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디케터는 <인트레피드>라 개명한 트리폴리측에서 포획한 케치급 어선에 수병을 태워 야음을 틈타 <필라델피아>를

파괴하는 작전을 수립하여 1804년 2월 16일에 작전을 실행했다. 현지 어선으로 위장한 후 모집한 지원자 76명을 태운 <인트레피드>는

함내에 수용되지 못한 약 10명을 갑판 위에 태운 채 트리폴리측의 의심없이 요새의 포대아래 계류된 <필라델피아>에 접근했다.

 

<인트레피드>는 <필라델피아>의 좌현에 강행접근한 후 수병들이 칼을 들고 뛰어들어 단시간의 백병전 후에 <필라델피아>를 제압하고

<인트레피드>에서 가져 온 화약과 기름에 불을 붙여 방화한 후 퇴각했다. 당시 툴롱 항에서 해상봉쇄작전에 종사중이던 호레이쇼 넬슨은

이 작전의 성공을 보고 <당대에서 가장 대담하고 용맹한 행동이었다>고 칭찬했다.

 

<필라델피아>를 처분하고 후환을 없앤 미해군은 본격적인 작전행동에 개시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의 사건으로 트리폴리 연안에서

대형함으로 이동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드러났기에 미해군의 프레블 제독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인 페르디난트 3세에게 포함

6척과 무장케치선 2척을 빌려 전력을 정비하고 1804년에 몇 차례에 걸쳐 트리폴리 시내와 요새에 대해 함포사격을 시도했다.

 

특히 1804년 8월 3일의 함포사격은 응전하기 위해 출동한 트리폴리측 함대와 해전이 발생해 트리폴리측 포함이 격침되었다.

그러나 육상에 효과적인 포격이 가능한 포함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트리폴리의 시가지와 요새에 효과적인 피해를 주지 못하여

이후 이루어진 몸값 4만달러로 포로가 된 <필라델피아>의 수병해방 협상은 불발로 끝났다.

 

이 때 유스프 칼라만리는 몸값으로 2십만 달러를 요구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미해군의 프레블 제독은 차선책으로서

<인트레피드>에 대량의 폭약을 탑재한 후 결사대에 의해 트리폴리측의 정박지에 침입해 폭발시켜 적함을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9월 4일에 실시하게 했는데 <필라델피아> 사건이후 경계를 강화했던 트리폴리측에게 발각되어 요새포의 공격을 받은 <인트레피드>는

적재화약이 폭발하면서 함장이하 수병 12명 전원이 사망하고 말았다.

 

1804년 9월 10일에 사무엘 바론이 이끄는 미해군 증원함대가 시라쿠사에 도착해 함대사령관도 프레블에서 바론으로 교체되었다.

바론은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고 이전의 원거리 해상봉쇄 작전의 방침을 변경하였다. 이는 해상봉쇄에 의해 트리폴리측의 근거지 제압을

시도한 트리폴리항 전투에서 함대 수 부족과 요새포의 반격으로 그다지 성과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전부터 트리폴리측의 지배계급의 불화를 알고있던 전직 튀니스 미국영사였던 미육군의 윌리엄 이튼 장군은 보다 직접적인

해결을 위해 함대에 동행한 미해병대의 분파대를 육로로 파견하여 트리폴리측의 근거지를 점령하는 것 외에 이전 파샤이며 동생이던

유스프 칼라만리에게 지위를 빼앗기고 이집트로 망명한 하메드 칼라만리를 옹호하여 정권전복을 획책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이 때 이튼 장군은 100명 정도의 미해병대 파견을 파견함대 사령관이던 사무엘 바론에게 제시했지만 7명 밖에 파견이 인정되지 않았다.

1804년 11월에 미해군 바론 제독의 명령에 의해 파견된 프레슬리 오베넌을 대장으로 하는 7명의 미해병대 파견대는 이튼 장군과 함께

이집트의 항구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다.

 

미해병대는 하메드 칼라만리를 찾아낸 후 그의 인망과 노력으로 약 500명의 기독교도 및 이슬람 교도들로 조직된 용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1805년 4월 27일에 45일간의 행군 끝에 트리폴리측의 근거지인 다네에 도달한 미해병대는 용병대와 함께 공격을 개시했다.

미해군 함대의 함포사격 지원아래 미해병대와 용병대는 시내로 돌입하여 다네를 점령했다.

 

이 때 프레슬리 오베넌은 자신의 위험도 무릅쓰고 점령한 요새 위에서 성조기를 흔들었다. 그 후 오베넌의 부대는 4월 28일에 도착한

트리폴리측 원군의 반격을 받았지만 후발대인 이튼 장군 외 2명이 이끄는 약 800명의 용병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버티어 내면서

5월 13일에 트리폴리군을 격퇴한 다음 다네를 완전히 제압했다.

 

다네 전투가 미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군에게 트리폴리측 최대 근거지인 다네가 넘어가자 위기에 몰린 트리폴리의 파샤인

유스프 칼라만리는 강경자세에서 벗어나 트리폴리 항내에 계류한 함선과 미국수병들의 몸값을 6만 달러에 교환한 다음

미국측 선박에 대해 통행료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면서 1805년 6월 10일에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트리폴리가 오스만 제국의 준 독립주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아 미국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중해에서 손댈 수 없는 공포였던 바바리 해적에게 상납금을 냈던 유럽 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아 이후

미국의 북아프리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한 외교정책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또 미해병대로는 다네 전투에서 처음 해외파견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기에 미국 역사에서 해외 점령지에 첫 성조기를 계양한

프레슬리 오베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해병대 찬가의 가사에 <To the shores of Tripoli>를 반영하여 오늘도 전해지고 있다.

한편 1815년에는 이 전쟁의 강화조약이 트리폴리 단독으로만 체결되었기에 해적행위를 계속 한 다른 바바리 국가들의 하나인

알제에 대해 제 2차 바바리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제 2차 바바리 전쟁 - 1815년 

 

 

 

제 1차 바바리 전쟁 후 미국은 영국과 악화관계였는데 트리폴리의 바바리 해적들은 제압당하였지만, 튀니스와 알제의

바바리 해적들은 여전히 지중해에서 상선의 약탈과 선원들을 인질삼아 몸값을 요구하는 일이 여전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인해 제대로 단속되지 않은 이들 바바리 해적들은 튀니스와 알제의 비호아래 더욱 기승을 부렸다.

 

여전히 미국상선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자 미국의회는 1815년 3월 3일에 다시 알제의 해적소탕을 위하여 스티븐 디케이터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함 10척으로 다시 정벌에 나서게 했다. 5월 20일에 준비를 마친 미국함대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지브롤터를 통과한 후 알제로 향했는데 7월 3일에 디케이터의 함대는 알제 바바리 해적의 함대와 가타 갑에서 조우했다.

 

바바리 해적은 기함 <메두사>를 앞세우고 미국함대를 알제 만으로 유인하려 했는데, 이에 속지않은 미국함대는 바로 공격을

가하여 해적 53명을 살상하고 대소선박 486척을 나포했다.  이에 반해 미군의 사상자는 단 4명에 불과했다. 미국함대는 다시

알제 해안가에 접안 후 함포를 발사하며 위협을 가했는데 이에 놀란 알제의 술탄이 협상을 제의해왔다.

 

이에 미국함대에서 진행된 협상에서 포로 500명과 배상금 1만달러의 지불을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미국함대는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1816년에는 영국의 어선이 시칠리아에서 알제와 튀니스의 해적에게 피해를 입자 영국정부가 피해보상을 요구했는데

튀니스는 이를 따랐지만 알제가 말을 듣지않자 다시 영국해군이 8월 27일에 공격에 나서 알제의 항복을 받아내고 배상금과 포로를

돌려받았다.

 

이후 트리폴리는 1835년에 오스만 제국에 반환되었지만 알제와 튀니스는 1830년, 1881년에 각각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힘이 쇠약해진 지중해에서 유럽국가들이 판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유럽국가에 의한 지중해 장악은

20세기 초반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출처 : 프랭크 램버트 <바바리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