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포에니 전쟁

구름위 2013. 12. 1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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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포에니 전쟁 -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기원전 3세기 중반, 로마는 세력을 대내외로 확장했다. 내란과 격동의 수세기를 거쳐 로마는 모든 이탈리아 반도 전역의

영토를 수중에 넣었다. 로마는 라틴동맹과 삼니움같은 적들을 정복하고 이피로스의 침입을 격퇴했다. 이로서 로마인들은

스스로의 정치제도와 군사력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테르니아 해와 현재 튀니지의 영토 일부에 해당하는 시칠리아 해협을 낀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상업항로의 대부분을 장악해

막강한 해군력과 상업자본으로 북아프리카 대륙연안과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까지 지배권을 넓혔다. 이것은 대외로 팽창하던

로마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북상하던 카르타고와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기원전 288년, 캄파니아 출신의 이탈리아인 용병부대인 마메르티니(군신 마르스의 아들이라는 뜻)가 시칠리아 북동쪽에 있던

메시나 마을을 점령했다. 이들은 남자들을 살해하고 여자들을 욕보인 뒤 첩으로 삼아 끌고갔다. 마메르티니 부대는 메시나를

근거지로 하여 국경일대를 휘젓고 다녀 자치도시인 시라쿠사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었다.

 

시라쿠사의 지배자인 히에론 2세는 기원전 265년에 자신의 옥좌를 걸고 마메르티니와 대결해 메시나를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마메르티니는 로마와 카르타고 양쪽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로마인은 마메르티니군이 메시나의 마을을 본래의 소유자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았다고 생각하여 그다지 도울 생각이 없었다.

 

또 로마는 근래에서야 에피로스의 침공을 막아낸 후 각지에서 일어난 용병 폭동을 진압하기에 바빠 이 분쟁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마메르티니에게 지원군을 보낸 것은 카르타고가 빨랐다. 이를 본 로마는 카르타고의 세력이

시칠리아로 확대되는 것과 이탈리아 반도의 견제를 우려하여 이를 막기위해 마메르티니와 동맹을 체결했다.

 

기원전 264년, 로마군단이 시칠리아에 배치되어 무력으로 시라쿠사를 억지로 동맹에 끌어들였다. 

그 후 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대립으로 바뀌어 이것이 시칠리아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붉은색)와 카르타고(보라색)의 당시 세력도, 녹색이 분쟁의 발단이 된 시라쿠사다.

 

 

 

 

 

  

시칠리아는 구릉지대가 많은 섬으로, 지리적인 방해와 통신망을 확보하기 어려운 지형이 많다. 이것이 원인으로

제 1차 포에니 전쟁에선 육상전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육상행동은 소규모의 기습과 작은 전투만으로 제한되어

큰 회전은 없었다. 정규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작전은 공성전과 육상봉쇄였다.

 

육상봉쇄의 목표는 중요한 군항들이었다. 이것은 교전중인 양 군 어느쪽도 시칠리아엔 본거지가 없었기에 본토에서

보급과 정보교환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한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대규모의 육상전은 적어도

2번 있었다.

 

기원전 262년, 로마는 아그리젠트 마을을 공격해 포위했다. 이 전투에선 집정관 2명의 군단 양쪽(로마군 4개 군단)이 투입되어

종결까지 약 수 개월이 걸렸다. 아그리젠트 수비대는 원군을 불렀기에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의 구원군이 왔다.

로마군은 시라쿠사에서의 보급이 차단되어 포위공격중이던 로마군 자신이 포위되고 말았다. 하지만 몇 번의 소규모 전투결과

아그리젠트 마을은 로마군에게 함락되어 카르타고군은 물러났다.

 

이 승리에 분발하여 로마는 대규모 상륙작전에 도전했지만(기원전 256년) 이번엔 결과가 달랐다. 몇 번의 해전 후 로마는

이 싸움을 빨리 매듭짓고 싶었다. 이에 카르타고와의 강화를 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있던 카르타고의 식민지들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병사와 기재를 운반할 수송선과 방어를 위한 전함 등 대함대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로의 로마군 상륙은 방지했지만 에크노모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프리카에 상륙해 카르타고 변경의 침략전을 개시했다. 레굴루스는 처음에는 승리를 거듭하며

카르타고에 대해 강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강화조건이 일방적이었기에 교섭은 실패하여 카르타고는 스파르타인 용병들인

크산티포스를 고용하여 군대를 재편했다.

 

크산티포스는 카르타고의 해상우위를 탈환하고 로마군을 본거지에서 차단하는데 성공해 튀니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여

레굴루스를 붙잡았다. 전쟁이 종결(기원전 249년)에 가까워지자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한니발의 아버지)을 시칠리아로

보내 시칠리아에서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로마는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필사적이어서 독재관의 선출까지 실시했다. 그렇지만 육상전보다도 해상전이

결정적인 것이 되어 시칠리아에서의 카르타고의 성공은 의미를 잃었다. 하밀카르는 시칠리아에선 무적이었지만

기원전 241년에 에가디 제도 해협의 해전에서 로마군에게 패했기에 고립된 시칠리아 섬의 정복은 무의미했다.

 

시칠리아 섬에서의 고립으로 인해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그 무대를 점차 해상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로마 및 카르타고는

함대건설에 필요한 자금과 보급을 시민들에게서 차출했기에 두 진영의 전력은 자본력의 한도에서 제한되어 이것이 전쟁의

행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의 개전 당시에 로마는 해상에서의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편 카르타고는 과거 몇 세기에 걸쳐

해상무역을 실시한 덕택에 풍부한 해전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발전을 거듭한 공화정 로마는 전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중해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로마는 기원전 261년에 아그리젠트의 승리 이후, 최초의 대함대를 건설했다. 일부 역사가는 로마가 가진 선박기술력은

낮았다고 생각하여 전함의 설계는 포획한 카르타고의 삼단도선과 오단도선을 그대로 본따 만들었다고 추측한다. 또다른

일부 역사가들은 해적으로부터 해안을 경비하기 위해 로마가 선박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지적한다.

 

하지만 어느 가설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개전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선박기술을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로마가

단기간에 수백 척의 함대를 취역시킨 것과도 의미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군은 해전경험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

표준화된 육상전술을 해전에도 적용하기 위해 적선에 돌입하기 위한 새로운 승선도구인 코르부스 장치를 장비했다.

 

당시 해전은 뾰족한 함선 선두를 적선에 부딫치게 하여 파괴하는 방법이 상식이었는데, 코르부스 선은 선체를 적선의

측면에 붙이면 까마귀 발톱같은 쇠갈퀴로 적선을 걸어 고정시킨 후 병사들이 적함에 뛰어들어 난입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 신무기의 효과는 해전에서 로마가 최초로 승리한 밀레 해협의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그 후 몇 년간을 걸쳐 이 장치는 발전을 거듭하여 해전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코르부스선의 출현에 의해 카르타고는

군사전술의 개발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유효한 전술을 체득하지 못해 해상에서 로마군에게 우위를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코르부스 장치는 군선의 조작성능을 떨어뜨렸기에 후에 해전경험이 풍부해진 로마군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의 시기에 공화정 로마는 많은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폭풍과 전투로 인해 함선과 병사들을 대거 상실했다. 기원전 255년과

253년엔 모든 함대를 폭풍우에 상실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함수의 코르부스 장치가 매우 무거운 탓에 선체가 불안정하여

폭풍우에 로마의 군선은 쉽게 침몰하고 말았다.

 

전쟁 종반에 이르자 로마는 고가의 함대를 새로 건조할만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다시 카르타고의 해상우세로 돌아섰다.

그렇지만 카르타고 내부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다. 기원전 244년에 대지주 귀족인 한노가 카르타고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그는 전쟁의 종결을 고려해 함대를 해산하기 시작했다.

 

이에 의해 로마는 다시 해상에서 우위를 탈환할 기회를 얻었다. 로마는 유복한 시민으로부터 기부받은 자금으로 새로운

함대를 건조해 에가디 제도 해협의 해전에서 승리해 제 1차 포에니 전쟁의 결말을 지었다. 이 해전에서 집정관인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드르스가 이끌던 새로운 로마함대에 의해 카르타고는 거의 모든 함대를 상실하여 경제적으로도 새로운 함대를 건조할 여유를 잃었다.

시칠리아에 머무르던 하밀카르 바르카도 카르타고의 함대상실로 인해 고립되어 항복할 수 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23년간에 걸친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로마는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재정이 바닥나고 민심이 피폐해져 있었다. 영토는 지중해를 직선으로 하여 히스파니아, 코르시카 섬, 사르디니아 섬과 아프리카는

카르타고로 남겨졌고 그 이북은 로마로 인도되었다.

 

로마가 승리한 요인은 패배에 굴하지 않고 승리를 추구한 강한 정신력과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로마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본과 힘을 제공하여 애국심 면에서도 카르타고보다 앞섰다.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유재산을 내 놓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또 제 1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는 해군이 정식으로 탄생해 훗날 로마가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큰 힘이 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시칠리아 섬의 소유권과 포로들의 배상금으로 2,200타란트를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용병의 불허용과 로마의 동맹국 불침공 협정으로 카르타고는 사실상 군사력도 상실했다. 한노 보밀카르는

해산한 군대의 봉급지급을 거부했기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는 내란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하밀카르 바르카와 한노 보밀카르의 협력으로 반란군은 진압되었는데 로마가 방심한 틈을 타 하밀카르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디니아 섬을 탈환했다. 하지만 로마에게 있어서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의 패권장악과 영토확장에 기념비적인

승전이었다. 시칠리아는 최초로 로마의 속국이 되었는데, 시칠리아가 곡창지대였기에 로마는 중요한 보급산지를 얻은 셈이여서

산악지인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의 재함락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 기원전 219년~기원전 210년

 

 

 

 

제 1차 포에니 전쟁 후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을 로마에게 할양하고 지중해에 걸친 해상패권력을 크게 상실했다.

카르타고는 이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의 정복에 매진했다. 하밀카르 바르카에 의해

히스파니아의 정복과 식민화가 시작되어 그의 사후 사위였던 하스도르발이 사업을 이어받었다.

 

기원전 226년에 하스두르발은 로마와 에브로 강 이북으로는 진출하지 않는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기원전 221년에 하스두르발이 암살당하자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던 한니발이 후계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몰락과

고모부의 죽음이 로마인의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한니발은 어릴적부터 로마에 대한 증오심이 매우 컸다.

 

기원전 219년에 한니발은 사군틈을 공격했다. 사군틈은 에브로 강 이남의 도시였지만 로마와 동맹을 체결중이었기에

로마는 공격중지의 사절단을 카르타고로 파견했다. 그러나 로마의 사자가 협상을 시작할 사이 사군틈은 함락되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사절단을 대표하여 선전을 포고하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

 

 

 

 

 

 

로마를 굴복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본토로 직접 침공을 해야했다. 그러나 제해권을 로마에게 장악당한 카르타고는

해상에서의 침공은 불가능했다. 더우기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침입을 예상하여 이탈리아 서부와 남부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군의 방비가 허술한 북쪽으로 침공한다는 전대미문의 작전을 세우게 된다.

 

기원전 218년 5월에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의 통치를 동생인 하스두르발 바르카에게 맡기고 원정에 나서 남프랑스를 따라

진격하여 9월에 그는 약 40,000명의 병사와 30두의 전투 코끼리를 앞세우고 알프스를 넘는 것에 도전했다. 이 때 카르타고군이

월경한 루트는 현재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당시 9월의 알프스는 겨울철로 접어드는데다가 켈트족의 방해로 인해 대군이 산을

넘기란 매우 곤란을 겪어 한니발이 이탈리아로 넘어왔을 때 카르타고군의 병력은 26,000명에 전투 코끼리는 3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카르타고군이 이탈리아 북부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는 큰 충격에 빠졌다. 원로원은 집정관인 프빌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2개 군단을 주어 급히 반격하도록 지시했다. 11월에 티키누스 강 부근에서 양군의 지휘관들이 직접 지휘하는

기병끼리의 마찰이 그대로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강력한 누미디아 기병을 거느린 카르타고군은 로마기병을 압도하여 지휘관인 스키피오도 부상을 입고 말았다. 스키피오는

피아첸시아까지 군대를 후퇴시키고 다른 한 명의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그스의 군단합류를 기다렸다.

카르타고군은 그대로 남진하여 트레비아 강을 끼고 로마군과 대치했다.

 

12월에 한니발은 기병으로 로마군을 물가로 유도한 뒤 숲속에 숨겨두었던 동생 마고가 지휘하던 기병으로 로마군의 배후를 덮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승리로 한니발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다. 로마에게 적대적이던 갈리아 부족은 한니발을 지지하여 군에 합류해와

카르타고군은 갑자기 50,000명까지 불어났다.

 

기원전 217년, 원로원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그나에우스 세르윌리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여 새로이 4개 군단 5만명을

동원하여 각각 2개 군단씩을 주어 북상하게 했다. 이들은 서로 분산하여 카르타고군을 기다렸지만 한니발은 이 예상을 뒤엎고

아페닌 산맥을 넘어 남하했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급히 카르타고군을 추격하면서 세르윌리우스와 협공을 노렸지만 한니발은 역으로 이들을 각개격파하여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군을 포위하자 대부분이 항복하고 말았다. 로마군이 포로를 가혹하게 취급한 반면에 한니발은 동맹도시들의

포로들을 정중하게 우대하여 로마로부터의 이탈을 촉구하는 서한을 주어 이들을 돌려보내는 공작을 펼쳤다.

 

3번의 패전을 맛본 로마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해 그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을 피하여 카르타고군의 소모를 노리는 지구전을 펼쳤다. 그러나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전역이 약탈당하자 파비우스의 지구전은 비판을 받고 그는 악평에 시달렸다.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자 원로원은 즉각 결전을 반영하여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스와 가이우스 텔렌티우스 발로를

집정관으로 선출한 후 80,000명의 군단을 거느리게 하여 한니발과 맞서게 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에 칸나에 근교에서

서로 대치한 로마군은 당일의 지휘관이던 발로가 숫적우세를 바탕으로 바로 결전에 돌입했다.

 

전쟁초반에 카르타고군 좌익 기병대는 로마군 우익의 기병을 격퇴했다. 이어서 로마군 후방을 우회하여 반대측의 진영으로

돌아들어가 우익 기병대와 합세해 로마군 기병을 협공했다. 로마군 중앙은 카르타고군 중앙에 맹공격을 가했지만 전투 전에

한니발이 궁(弓)자 형으로 보병을 배치했기 때문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카르타고군 보병전열 양쪽에 배치된 고참의 아프리카 용병이 호각지세로 쳐들어가자 로마군 중앙은 V자 형이 되었다.

여기에 로마군 기병을 격퇴한 카르타고군 기병이 로마군 후방을 치자 로마군은 완전한 포위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공황상태에 빠진 로마군 병사들은 탈출구를 찾기위해 서로 날뛰다가 압사자가 속출했다.

 

카르타고군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자 돌파구를 찾지못한 로마군은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로마군은 전사 60,000명,

포로 10,000명이라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집정관이던 파울스도 약 80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 포위전투는 한니발의 걸출한 재능을 다시 한 번 증명하게 해 주어 로마인들은 그의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이 승리에 의해 한니발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이탈리아 남부의 캅파,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는 카르타고를 아군으로 한다고

선포해 다시 로마와의 전쟁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로마 동맹도시들의 결속은 붕괴되지 않아 계획에 차질이 생긴

한니발은 곤란한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기원전 217년에 한니발과 동맹을 체결한 마케도니아 왕인 필리포스 5세도 행동을 개시하여 제 1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함대는 이탈리아 반도에 도달하지 못해 직접적으로 한니발을 돕진 못했다. 보급에 곤란을 겪게 된 카르타고군은

수도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카르타고 본국과 연락을 취하기 쉬운 남부도시들의 공격으로 작전을 전환했다.

 

한니발과 맞선 로마장군 스키피오.

 

 

 

 

 

 

한편 로마는 괴멸적인 대패로 절망상태에 빠졌다. 로마인들은 광신적으로 신을 찾아 결국 인신공양을 하기에 이르렀다.

몇 명의 노예가 살해되어 광장에 묻혔는데 이것은 로마에서 마지막 인신공양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지구전이 옳았음을 깨닫고는 파비우스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케르스를 집정관으로 임명해 사태해결에 노력했다.

 

파비우스는 지구전을 채택하여 한니발과의 결전을 피하는 동시에 공격대상을 시칠리아 섬과 히스파니아 등 카르타고의

주변지역으로 돌려 이를 붕괴시킨 후 전쟁물자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 센플로니우스 그라쿠스에게

<노예군단>을 조직시켜 마르케르스와 함께 한니발의 포위망을 담당하게 하며 우세한 해군력으로 카르타고 본국의 해상로를

차단해 보급을 단절했다.

 

한니발의 본거지였던 히스파니아엔 기원전 218년에 그나에우스 코르네리우스 스키피오 카르우스가 이끄는 군단이 파견되었다.

이어서 그의 동생인 프블리우스 코르네리우스 스키피오의 군단도 파견되었다. 증강된 로마군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에서 서서히

세력을 뻗쳐나가 기원전 211년엔 개전의 원인이 되었던 사군틈을 제압했다.

 

로마군의 위세에 의해 하스두르발은 이탈리아의 한니발에게 원군을 파견할 수도 없게 되었다. 로마군은 이 때 2년에 걸친

포위 끝에 캅파와 시라쿠사를 제압하는데도 성공했다. 시라쿠사 함락당시 이름높았던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문제풀이에

열중하다가 로마병사가 숫자가 그려진 바닥을 밟으려하자 이를 제지하다가 창에 찔려죽고 말았다.

 

하스두르발은 전황의 정체를 기다려 동생인 마고가 카르타고 본국에서 보내 온 증원으로 전력을 정비했다. 로마군 내부에서는

히스파니아 출신 병사들의 탈주가 잇달았는데 하스두르발은 이를 기회로 여겨 반격을 개시해 바에티스 강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찌르고 코르네리우스 형제들을 전사시켰다. 단 로마의 전력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스두르발은 공격을 중지하고

군을 세 부대로 나누어 영토보존에 힘썼다.

 

기원전 210년 프블리우스 코르네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아버지와 동명)인 스키피오는 새로운 사령관으로 히스파니아에 도착했다.

지휘관의 전사로 의기소침했던 로마군은 스키피오의 탁월한 수완으로 재정비되어 다시 영토확장을 이루어 나갔다. 기원전 209년에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의 수도였던 카르타고 노바(현재의 카르타헤나)를 제압했다. 그리고 직공을 고용해 신병훈련과 보급물자

생산 및 공급에 박차를 가했다.

 

기원전 208년에 하스두르발은 반격을 위해 분산되었던 마고의 군에게 합류를 명령했다. 이를 탐지한 스키피오는 합류전에

각개격파를 실시하여 바에클라 전투에서 하스두르발의 군을 격파했다. 이로서 히스파니아에서의 카르타고 지배력은 저하되었다.

하스두르발은 히스파니아의 포기를 결정하고 한니발에게 마지막 원군이 되기 위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한니발처럼 알프스 산을 넘어 침공하려던 하스두르발은 이번엔 미리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에게 막혀 기원전 207년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틀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메타우르스 전투에서 격파당하여

하스두르발은 전사하고 그의 목은 한니발의 진중으로 던져졌다.

 

기원전 206년에 스키피오는 이리파 전투에서 하스두르발의 카르타고 잔존병을 격파하고 히스파니아를 정복했다.

마케도니아는 카르타고의 패배를 눈여겨보고는 기원전 205년에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로마와 강화를 체결했다.

이때까지 연전연승하던 한니발은 동생의 죽음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 남단에 고립되고 말았다.

 

로마로 귀국한 스키피오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스키피오는 집정관에 임명될 나이를 채우지 못했지만 특례가 주어져서

기원전 205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의 끝을 보기위해 스키피오는 적 본토로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했지만 원로원은 난색을 표시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귀족들은 반대파의 선봉이 되었기에 원로원은 스키피오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시칠리아 섬으로 급파되어 그곳에서 군대를 조련하게 되었다. 기원전 204년에 스키피오는 전직 집정관의 위세로 군단을 거느리고

북아프리카의 우티카로 상륙했다.

 

카르타고군은 누미디아군과 협동으로 반격에 임했지만 스키피오는 이를 일축하고 여세를 몰아 누미디아로 침공해

누미디아의 왕인 슈파크스를 끌어내리고 그의 아들인 마시닛사를 즉위시켜 로마의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강력한 기병을 카르타고에 더 이상 제공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의 한니발을 본국으로 불러들여 전력을 재정비하는 한편으로 로마에게 휴전의사를 타진했다.

로마의 원로원은 즉각 신청을 승인했지만 나중에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한니발에게 약 50,000명의 병사와

80두의 전투 코끼리를 주어 파견했는데 스키피오도 약 40,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누미디아에서 카르타고로 진격했다.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두 장군의 군대는 자마의 서쪽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한니발은 먼저 전투 코끼리로 돌격했지만

스키피오는 이를 예측하여 부대를 배치했기에 돌격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어서 한니발은 기병을 거짓후퇴시켰다.

누미디아의 협력을 얻은 로마군은 기병전력에서 카르타고보다 앞섰기에 이를 전장에서 빼내기 위한 한니발의 계략이었다.

 

이 책략은 성공하여 양군 보병은 서로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카르타고군은 보병을 3열로 배치하여 앞 2열과 싸워

소모된 로마군을 마지막 열의 정예 고참병을 예비군으로 두어 진압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의 2열 병사들은

훈련이 부족하고 전의가 낮아 강력한 로마군 보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니발은 예비군을 투입했지만 로마군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카르타고 기병군을 쫓았던 로마의 기병대가 돌아와서

카르타고군은 포위망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카르타고군 보병 절반은 항복했지만 다른 절반은 모두 참살당했다. (자마 전투)

자마 전투의 결과 카르타고의 군력은 거의 소진되어 한니발의 무적신화도 깨져 버렸다.

 

전의를 상실한 카르타고는 로마에 화평의 사자를 보냈다. 로마의 전권대표였던 스키피오는 이에 다음과 같은 조항을 달았다.

 

 

1) 로마는 카르타고의 독립을 인정하며, 동맹을 체결한다. 단 종속이 아닌 대등한 관계로 로마는 자치권을 빼앗지 않고

    주재군도 두지 않는다.

 

2)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히스파니아 등의 해외영토를 폐기한다. 단 전쟁 이전의 아프리카령 카르타고는

    보존을 인정한다. 

 

3) 카르타고는 지배하의 누미디아령을 모두 마시니사 국왕에게 인도하고 누미디아의 독립을 인정한다.

 

4) 카르타고는 10,000 탈란트의 배상금을 50년간에 걸쳐 로마에 배상한다. 

 

5) 카르타고가 포로로 잡은 로마인은 모두 로마로 돌려 보낸다.

 

6)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가없는 전쟁을 할 수 없다. 

 

7) 카르타고는 군선 10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과 전투 코끼리를 로마로 인도한다. 또 이후 군선건조 및 전투코끼리 육성을 금지한다.

 

8) 카르타고는 14세 이상, 30세 미만의 자제 100명을 인질로서 로마로 보낸다. 인질선택은 스키피오가 결정한다.

 

9) 이상의 조건이 원로인이 승인한 것으로, 카르타고에 머무르고 있는 로마군의 경비는 카르타고가 부담한다.

 

 

이 조항은 얼핏보면 동맹으로 우대하는 조건처럼 보였지만 군비보유가 제한당하고 전쟁이 금지되어 사실상 종속관계였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카르타고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막을 내렸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상실하고 군사력도 대폭으로 감퇴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본국은 건재했기에 잠재적인 국력은 낮아지지 않았다. 이것은 로마가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의도였기 때문이었다. 또 로마인들은 한니발에 대해 공포심도 여전해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가 복수하기 전에

완전히 싹을 짓밟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막 전쟁을 끝내고 배상금을 받은터라 이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기원전 200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일류리아에 개입한다는 구실로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침공해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로마군의 우세로 기원전 196년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항복한 후 카르타고처럼 종속되고 말았다. 이어서 발생한

제 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다시 패배한 마케도니아는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어 왕국은 소멸했다. 그리고 제 4차 마케도니아

전쟁결과,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한니발은 시리아군의 참모로서 마케도니아를 편들다가 결국 로마군이 시리아로 압박해오자 이를 두려워한 시리아 왕이

한니발을 체포하여 로마로 넘기기 직전인 기원전 183년(182년이라고도 함)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그의 라이벌이던 스키피오도 한니발이 사망한 기원전 183년에 사망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후 약 50년이 경과한 뒤에 누미디아가 카르타고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해결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양성하자 로마는 조약위반이라며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 3차 포에니 전쟁 - 기원전 149 ~ 기원전 146년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종결에서 제 3차 포에니 전쟁에 이르기 전까지 로마는 동쪽으로는 헬레니즘 각국을 정복했다.

이에 마케도니아, 일류리아, 안티오고스는 로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또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로 원정하여

히스파니아 일대를 점령했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로마에게 내 주고 말아 매년 200 탈란트의 은화를 배상금으로 50년동안 바친다는 과중한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넣었는데 일부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아예 없애버려아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배상금이 목적이던 로마인 대다수에 의해 나라는 존속되었다.

 

한편 카르타고는 무역으로 다시 부흥에 나섰기에 로마인들은 부흥한 카르타고가 다시 습격해 올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주전파였던 마르쿠스 카토는 원로원 연설에서 <반드시 카르타고는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온건주의자들은 로마를 중심으로 동맹국들을 종속하길 바랬기에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크름은 카토의 주장에 반대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결과 체결된 강화조약으로 인해 카르타고의 방위는 로마 원로원의 조정을 받기로 결정되어 카르타고는

시민을 무장한다거나 용병을 고용함에 있어서 로마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그 결과 제 2차 포에니 전쟁 후 약 50년간 카르타고는

로마의 또다른 동맹국인 인접국가 누미디아와 국경분쟁에 시달려야 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원로원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내려지는 결정은 늘 누미디아에 유리한 판정뿐이었다. 기원전 151년에

카르타고는 두 차례의 전쟁으로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고액의 배상금을 변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과거의 라이벌이던 카르타고가 다시 성장하자 로마는 다시 카토를 중심으로 한 주전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누미디아의 왕인 마시닛사가 몇 번에 걸쳐 카르타고의 영토침탈과 월경을 거듭 반복하여 마을을 습격하자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25,000명의 군단)를 소집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누미디아와

사이에선 카르타고는 다시 50년간 배상의무를 지게 되었는데 로마의 승인이 없는 군대소집으로 인해 주전파의 로마는

조약위반을 들어 카르타고의 정벌을 선언했다.

 

이에 카르타고는 저자세로 나서 귀족의 자식 300명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국토와 자치를 보장받는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인질송환이 끝나자 이번엔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무장일체를 넘겼지만

로마는 다시 요구를 거듭해 카르타고의 모든 시내를 불태우고 주민들은 적어도 10마일 떨어진 내륙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카르타고의 소멸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르타고는 당시의 도시국가들 중 수백년에 걸쳐 번성한 도시여서

해상무역의 원천이기도 했다. 이를 없애라는 로마의 요구는 카르타고인들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기에 이를

카르타고가 거부하자 로마군의 침공이 시작되어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과 동시에 카르타고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했던 카르타고는 기원전 146년 봄까지 버티어냈다.

그러나 포위가 장기화되면서 음식과 물자가 떨어지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쟁 후반에 많은 카르타고인들이 농성도중에 굶어죽었다. 또 최후의 전투가 일어난 6일간, 많은 사망자를 냈다.

전후 살아남은 카르타고인은 고작 5만 명 정도로 크게 줄어들어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나갔다. 카르타고의 마을들은

10여일에 거쳐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마을성벽과 건물, 항구는 파괴되고 주변토지는 작물이 자라날수 없도록 소금을 뿌렸다고 한다.

 

카르타고의 영지는 로마에 흡수되어 로마의 아프리카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한편 페니키아인에 의해 설립된 카르타고 시는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카르타고의 유적은 후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한

식민도시 시절의 유적이라 한다.

 

1985년 1월에 로마시장이던 유고 베텔레는 튀니스의 시장인 체드리 쿠리빈과 만나 2,200년이 경과한 후에서야

<공식적>으로 전쟁의 종결에 서명했다.

 

 

 

 

출처 : 아드리안 골스워티 <더 포에니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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