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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통일전쟁 - 1858년 ~ 1861년

구름위 2013. 12. 1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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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통일전쟁 - 1858년 ~ 1861년

 

 

외세의 간섭과 분열된 이탈리아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라 불리던 지역, 즉 이탈리아 반도와 그 부근의 알프스 이남 대부분,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 등의 섬들은 게르만인과 동로마 제국, 이슬람 세력 등의 외래세력에게 분할되어 통치되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선 차례로 도시국가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 도시국가 체제는 르네상스 시대에 절정을 맞이했는데,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의 이탈리아는 심각한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쇠약에 내몰리기 시작했다. 교황령을 포함한 이탈리아 각국은 열강국(이른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제국,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프랑스)의 대리전쟁의 장소로 변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계몽사상이 높아졌는데 피에몽테 공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각국에서도 계몽주의

개혁이 실시되었다. 특히 토스카나 대공국에서는 유럽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개혁이 실시되어졌다. 18세기 말의 시점에서

이탈리아는 여러 개의 공국과 공화국으로 나뉘어져 통치되고 있었다.

 

사르디니아 왕국, 제노바 공화국, 트렌토 사교령, 파로마 공국, 모데나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루카 공화국,

산 마리노 공화국, 교황국가(교황령)와 나폴리 = 시칠리아 왕국이 분립되어 있었는데, 구 밀라노 공국 등 일부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발발은 이탈리아의 지식인 층에도 영향을 주어 혁명운동을 활발화시켜 혁명가들은 쟈코비노(쟈코뱅주의자),

바트리오트(애국자)라 불렸다.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로 침공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 및 이탈리아 각 군들을 격파하고

반도 부분을 점령한 다음 피에몽테, 토스카나, 로마를 프랑스에 병합했다.

 

또 북동부에서 중부에는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시켜 양자이던 외젠 드 보아르네를 왕으로 임명하고 남부의 나폴리 왕국에는

친척 형이던 조제프 보나파르트, 이어서 처제의 사위이던 조아생 뮈라를 국왕으로 봉하고 프랑스 제국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 패권하의 이탈리아에선 구 체제(앙시앵 레짐)를 철폐하고 행정 및 제도개혁이 이루어져 나폴레옹 법전이 도입되었다.

 

이 경험에서 이탈리아 지식인들 중에는 통일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한편으로 부르주아층이 이끈 사회개혁은 농민을 비롯한

대중의 권익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어서, 강한 저항을 일으키고 말았다. 1813년부터 1814년의 나폴레옹 체제의 붕괴와 함께

내셔널리즘 감정을 이용하여 왕위를 유지했던 프랑스의 위성국가에선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었다.

 

1814년에 나폴리 국왕이던 조아생 뮈라(조아키노 1세)는 나폴레옹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이탈리아 왕으로 봉해졌던

외젠 드 보아르네와 적대했다.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외젠은 영토를 오스트리아에 넘기면서 이탈리아 왕국은 무너졌다. 이듬 해인

1815년에 백일천하로 나폴레옹이 복위하자 뮈라는 나폴레옹측에 서서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자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외세를 몰아내고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이에 응하는 자가 적고 무자비한 진압으로 처형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빈 회의(1814~1815년)에서는 유럽대륙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에는 나폴레옹 이전의 각국이 재건되어

열강국(특히 오스트리아)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빈 체제하의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북동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 베네트 왕국, 북서부의 피에몽테와 사르디니아 섬을 지배하는 사보이 가문의 사르디니아 왕국이 세워졌다.

 

중부 이탈리아에는 교황국가,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공국, 파르마 공국, 마사캇칼라 공국(1829년에 모데나 공국에 합병), 루카 공국

(1847년에 토스카나 대공국에 합병), 산 마리노 공화국,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에는 부르봉 왕가의 양 시칠리아 왕국이 성립했다.

1859년까지 이 체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이러한 복고정부는 나폴레옹 체제하의 행정과 법령을 거의 이어받았지만 사르디니아 왕국과 모데나 공국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왕정체제의 복고정치를 실시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통일전쟁 대상은 주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는 북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이탈리아 통일의 가장 큰 장해였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국의 다른 속령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내셔널리즘을 철저히 탄압했다. 빈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이탈리아란 말은 단지 지리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명했을 정도였다.

 

초기의 혁명투쟁

 

 

통일운동 초기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혁명가 단체는 19세기 전반기에 이탈리아 남부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인 카르보나리

(숯제조업자를 가리키는 말, 일명 목탄당)였다. 평등과 민주주의를 표방한 이 단체의 멤버들은 중산계층과 지식인이 중심이었지만

다른 계층도 참가했다.

 

카르보나리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도 세력을 확대하여 당원만 30만에 이르게 되었다. 이 비밀결사는 통일운동 초기투쟁시

핵심세력이 되어 통일운동의 혁명가 대다수가 카르보나리 멤버였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한편, 당시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나폴리 왕국은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한 프랑스의 위성국이었지만 시칠리아 왕국은 영국의 비호아래 부르봉 왕조가 지배권을

보유했다. 나폴리 왕국에서는 봉건제가 철폐되어 근대적인 관료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여러가지 문제가 많이 발생했지만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시칠리아 왕국에서는 영국의 영항아래 입헌주의가 채용되어 봉건제의 철폐와 헌법의 제정, 의회의 설치가 이루어졌다.

빈 체제 하에서 나폴리 왕국에 부르봉 왕조가 부활하자 두 나라를 통합해 양(両) 시칠리아 왕국이 만들어져 이에 수반해

시칠리아 왕국의 헌법도 폐기되고 말아 법령체제도 나폴리 왕국의 것이 시칠리아에 적용되면서 시칠리아인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1820년 1월에 스페인에서 입헌혁명이 발생하여 봉기한 혁명군인들이 스페인 국왕인 페르난드 7세에게 1812년 헌법의 부활을

이끌어 냈다. 7월에 스페인 혁명에 자극받은 카르보나리 당원이던 루이지 미니키르 사제가 이끄는 양 시칠리아 왕국 기병연대가

봉기하여 여기에 그리엘모 페페 장군의 사단이 참가하면서 각지에서 카르보나리가 봉기해 반란은 확대되었다.

 

그 결과, 국왕인 페르디난트 1세는 스페인 헌법과 동일한 헌법의 포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무혈 쿠데타를 성공시킨 혁명파는

신정부를 조직하여 왕국의 반도부분을 제압했다. 반란은 시칠리아 섬으로 번져나가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민중폭동이 발생했다.

시칠리아의 반란세력은 독자적인 통치위원회를 설치하고 나폴리에서 분리를 요구했지만 내부분열로 인해 통일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여 단기간에 나폴리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를 위협이라고 판단한 신성동맹의 회의가 열려, 회의에 소집된 양 시칠리아 국왕인 페르디난드 1세가 신정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개입을 요청하면서 오스트리아가 무력간섭을 결정했다. 나폴리의 혁명정부에는 내부대립이 일어나 나폴리 정부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대항할 수 없어 괴멸되고 말았다.

 

페르디난드 1세는 헌법과 의회를 폐지하고 혁명가들을 박해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리는 쇠퇴하여 역사가였던 미켈레

아마리를 포함한 시칠리아의 혁명 지지자들 다수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한편 사르디니아 왕국은 빈 회의로 인해 구 제노바

공화국령을 병합하고 영토를 확장했는데, 그 중심지는 살데냐 섬이 아니라 대륙부의 피에몽테 지방의 토리노여서 피에몽테

국가로도 불렸다.

 

보수 귀족층이 지배하는 사르디니아 왕국에서는 복고정부의 상립 이후, 반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1821년 3월에 피에몽테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한 산토레 디 산타로사를 지도자로 한 자유주의 장교단은 헌법제정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배제를 목표로 했다.

 

이 혁명에는 필리포 부온나로티의 비밀결사가 관여했다. 이 봉기에서 병사들은 치살피나 공화국(나폴레옹 체제하에서 단기간 존재했던

공화국)의 녹색, 백색, 적색의 3색기를 사용했다. 국왕인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1세는 카를로 알베르토 공을 섭정으로 지명한 후 퇴위해

카를로 알베르토는 혁명파 장교에게 양보하여 헌법제정에 동의했다.

 

허나 첫번째 왕위계승자였던 카를로 펠리체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군대를 동원하면서 신성동맹에 원조를 구했다. 오스트리아군이

피에몽테로 침공하자 일반대중의 지지를 잃은 혁명은 한달 만에 진압되었다. 산타로사를 비롯한 피에몽테 혁명가들은 망명하여

왕위에 오른 카를로 펠리체는 더욱 자유주의 체제를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양 시칠리아 왕국, 그리고 피에몽테에서 혁명이 와해된 후, 이탈리아에는 억압의 시대가 찾아와 혁명이 일어났던 양 시칠리아 왕국 및

사르디니아 왕국은 물론, 교황령, 그리고 모데나 공국, 오스트리아 지배하의 롬바르드 베네트 왕국에서는 카르보나리를 비롯한

혁명운동에 가혹한 탄압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1830년에는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하는 혁명의 기운이 깨어나, 일련의 봉기로 인해 이탈리아 반도에 하나의 국가를 만들자는

기초가 마련되어졌다. 혁명사상을 탄압했던 모데나공 프란체스코 4세는 사르디니아 왕위획득을 희망했다. 야심가인 모데나공과

카르보나리였던 엔리코 미즈리가 결탁하면서 모데나공은 혁명파의 기대를 모아 북부 이탈리아의 왕이 되려는 생각에 혁명파를

지원했다.

 

1830년에 프랑스 7월혁명이 발발하자 프랑스왕이 혁명가들에 의해 폐위되어 루이 필립에 의한 7월 왕정이 성립했다. 파리로

망명중이던 혁명가들은 루이 필립과 접근하여 모데나공을 옹립하는 혁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위한 로비에 분주했다.

망명자 그룹의 주도권은 필리포 부온나로티가 장악하여 이탈리아 전역에서 혁명을 지향했지만 중부 이탈리아만은 혁명을 계획했던

국내 그룹과 생각의 차이가 발생했다.

 

한편 국내파였던 치로 메노티는 피렌체로 망명했던 루이 보나파르트와 접촉하여 보나파르트주의자(나폴레옹주의자)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일은 루이 필립을 경계하게 만들었는데, 메노티는 봉기의 준비를 진행했지만 오스트리아의 경고를 받은 모데나공이

움직이지 않았다.

 

1831년 2월에 모데나공은 궐기직전에 카르보나리의 지지자들을 배반하여, 메노티를 비롯한 음모자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직후에

볼로냐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겁에 질린 모데나공은 빈으로 도망했다. 같은 시기, 교황령 북부지구인 볼로냐, 포를리, 페라라,

라벤나, 이모라, 페자로, 그리고 우르비노에서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교황기로서 삼색기를 채용한 일련의 무장봉기는 교황령 전역으로 번져나가 새로 수립된 지방정부는 통일 이탈리아 국가의 수립을

선언했다. 모데나 공국과 교황령에서의 반란은 파르마 공국으로 확대되어 여기서도 삼색기를 사용했다. 파르마 여자대공이던

마리아 루이자(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전 황후)는 소란에서 달아나기 위해 마을에서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봉기한 각 주는, 각각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제정을 중비하여 <이탈리아 통합주>의 수립을 계획했다. 메테르니히는 루이 필립에게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소란을 방치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루이 필립은 군사원조를

보류하면서 프랑스 국내의 혁명가를 구속했다.

 

1831년 봄이 되자,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 반도로 침공했다. 이 혁명도 대중의 지지가 결여되고 지역마다 사로 연대가 되지 않았기에

반란을 일으킨 각 주는 차례로 진압되었다. 3월에 볼로냐가 제압당하면서 혁명은 와해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초기의 혁명운동

대부분은 진압되어 메노티를 포함한 다수의 급진혁명주의자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강경투쟁과 온건투쟁

 

 

카르보나리 및 그 외 비밀결사에 의한 혁명전쟁은 지도계층의 무능과 대중과의 괴리를 노출하면서 좌절했다. 대신 주세페 마치니의

그룹이 민주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 1827년에 마치니는 22세에 카르보나리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1830년에 투옥체포되었다.

마치니는 사보나의 옥중에서 이탈리아의 통일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확신을 가져 로마를 수도로 하는 자유독립공화국을 구상했다.

 

1831년에 석방된 마치니는 마르세이유로 망명했다. 마치니는 카르보나리의 지도원리가 불명확하고 조직의 결함을 비판한 후

결별해 망명자를 중심으로 한 <청년 이탈리아>를 결성했다. 이후 혁명가로서 활동한 마치니의 사상은 종교적인 요소를 강하게 가져

새로운 종교관념에 근거해 인간의 <의무>를 강하게 주장했다.

 

마치니는 자유로서 평등한 민중들로 의해 조직된 인류애의 달성을 신에게 부여받은 인간의 사명으로 여겨, 그 사회는 민주적인

공화정체가 되어야 하며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 스스로가 지도적인 민족이며 위대한 역사를 가진 로마를 중심으로 세계를 통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분열하고 퇴락한 이탈리아에 혁명으로 통일해 국민주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니의 신사회 구상은 이탈리아를 넘어 인류애적인 <유럽 합중국>, 즉 <시민들에 의한 공화국 동맹>의 수립을 인류의 사명으로

하는 최종목표를 슬로건으로 내 걸었다. <자유, 평등, 인류, 독립, 통일>을 기치로 하는 청년 이탈리아는 공화주의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하여 무력투쟁을 통한 대중의 교육, 조직화를 표방했다.

 

청년 이탈리아는 1833년에 피에몽테에서 봉기를 계획했지만 당국에 알려져 실패해 역으로 탄압을 초래했다. 1834년에는 제노바와

사보와에서 봉기를 계획했지만 이것 역시 실패했다. 제노바에서의 봉기계획에는 니스(당시엔 사르디니아 왕국령)출신의 주세페

가리발디가 가담했는데 그는 결석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남미로 도망했다.

 

가리발디는 남미에서 14년을 보낸 후 여러 전투에 참가하면서 전투경험을 축적한 뒤 1848년에 이탈리아로 귀국했다. 이러한 실패로

청년 이탈리아는 사실상 와해되어 마치니는 국제연대로 활로를 변경해 <청년 유럽>, <청년 폴란드>, <청년 독일>, 그리고 <청년 스위스>

를 차례로 결성해 나갔다.

 

당시 마치니파와 별개로 카르보나리적인 비밀결사에 의한 무장봉기와 투쟁계획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역시 실패하여 당국의 혹독한

탄압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한편 이탈리아 정재계에선 온건파 내셔널리즘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온건파는 이탈리아 통일을 필요로

하지 않고,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오스트리아에서의 독립과 현실적인 개혁추진을 생각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경제적 자유주의와 연방제를 역설했던 경제학자인 카를로 카타네오, <이탈리아의 희망>의 저자인 사르디니아

왕국의 역사가이며 정치가였던 체자레 발보(사르디니아 초대수상, 1848년 재임), 그리고 국왕에 온건한 민주개혁을 설파했던

사르디니아 왕국의 정치가인 마시모 다젤료(사르디니아 수상, 1849~1852년 재임)이 있었다.

 

1839년에 자유주의 지식인에 의한 제 1회 과학자회의가 개최되어 이후 1848년까지 매년 열렸다. 지식인들이 과학기술과 사회문제에

대해 국경을 초월하여 의논을 한 이 회의는 이탈리아 의식형성에 일조했다. 이 회의에서 노동자의 빈곤구제를 목적으로 한 상호원조

협회가 설립되었다. 노둥자들에 대한 자선과 계발을 목표로 한 상호원조협회는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진 않았지만 후에 노동조합 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예술과 문화분야에서도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해졌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마시모 다젤료의 <에토레 피에라모스카>와

알렉산드로 만조니의 역사장편소설 <I Promessi sposi>가 있다. <I Promessi sposi>의 초판은 밀라노의 지역어로 쓰여졌지만

1842년판은 피렌체어로 출판되어 독자들이 이 말을 표준 이탈리아어로서 공유하는 의식적인 노력에 기여했다.

 

피에몽테의 성직자였던 빈첸조 조베르티는 1843년에 출판된 저서 <이탈리아인의 윤리적, 시민적 우위에 대하여>에서 교황을

맹주로 하는 연방국가를 제안하여 성직자를 비롯한 보수적인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846년에 선출된 교황인 피우스 9세는

교황국가의 개혁을 단행하여 자유주의적 교황이라 불렸는데 교황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개혁의 기운이 높아졌었다.

 

이에 대해 혁명가들의 대다수는 공화제를 지향했지만 최종적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한 세력은 온건적인 입헌군주제였다. 허나

이러한 통일의 기운은 로마 교황청의 반대와 직면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해당지역에 대한 권력의 포기는 이탈리아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로 이어지는 것에 두려워했다.

 

실제로 민주주의자들은 카톨릭 교회에 대해 혐오감을 피력하여 마치니 또한 신의 대변자는 교황이 아니며, 민중들을 내세워 말하는

교회를 공격해야 하며 이탈리아 통일 후에는 가리발디가 교황직의 폐지를 주장했을 정도였다.

 

 

 

제 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1848년에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국왕이던 루이 필립이 도망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혁명의 불길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에도 파급되어 빈 체제의 종언을 고하게 했다. 빈 체제 이후, 롬바르디아 지방과 베네트 지방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롬바르디아 베네트 왕국이 되었었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통치시대의 각종 개혁을 계승하여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과 비교시 비교적 근대적인 제도를 정비했지만

외국지배에 대한 반감은 여전했다. 또 르네상스기에 영화를 누린 베네치아는 이미 쇠약해져 있어서 인구는 감소하고 빈곤자가

3분의 1을 차지한데다 오스트리아가 무역항으로서 트리에스테를 중시했기에 조선업도 쇠락하고 말았다.

 

1840년대에 베네치아는 겨우 정비가 이루어져 관광객을 위한 철도도 놓이게 되었다. 1848년 1월 1일에 롬바르디아의 시민이

오스트리아 정부의 수입원이던 담배구매를 거부하는 불복종 운동의 형태로 소동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받은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페르난드 2세는 1821년과 마찬가지로 타협하여 양 시칠리아 왕국의 헌법을 발포해 정치범을 석방했다.

 

시칠리아는 분리독립을 요구하여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해 의회를 설치했다. 양 시칠리아의 움직임은 이탈리아 각국에 파급되어

2월에는 토스카나 대공국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이는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드 2세의 헌법반포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까지

절대주의 정책을 고집하던 사르디니아 왕국도 3월 4일에 헌법을 제정해 3월 15일에는 교황 피우스 9세가 교황국가 헌법을 발포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군주에 의해 발포된 흠정헌법으로, 헌장(憲章)이라 불리며 주로 모델이 된 것은 프랑스의 1830년 헌법

이었다. 그리고 1814년 헌법과 1831년 헌법도 참고했다고 한다. 한편 오스트리아 통치하의 롬바르디아에서 긴장이 높아져 3월 13일엔

빈 봉기가 일어나 재상인 메테르니히가 파면되었다는 보도가 들어오자 3월 18일에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밀라노에선 3월 8일부터 22일까지 격렬한 시가전이 일어났는데, 반란세력은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퇴각시키고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베네치아에서는 다니엘레 메닌의 주도하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흥을 선언했다. 밀라노에선

사르디니아군의 선봉대가 입성하여 임시정부와 협정을 체결했다.

 

한편 마치니를 비롯한 민주파도 밀라노에 집결했다. 온건파는 사르디니아 왕국의 개입을 요청하여, 이에 대해 카를로 카타네오,

주세페 페라리 등 공화국 수립을 요망하는 민주파는 프랑스의 개입을 획책해 마치니의 협력을 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여

민주파는 빠르게 분열되었다.

 

사르디니아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국내여론이 높아지고 롬바르디아 획득의 생각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다.

사르디니아 왕국의 참전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교황국가에서 의용군이 파견되어 나폴리 정부와 토스카나 대공국도 참전을

결의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전면대결을 싫어했던 교황 피우스 9세는 4월 29일에 카톨릭과 민주주의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표명하면서

전쟁에서 이탈했다. 교황의 선언은 큰 실망을 불러 교황의 혁명세력 참가를 기대하던 사람들을 좌절시켰다. 나폴리 정부에서도

시칠리아의 반란진압을 위해 철병하여 오스트리아의 페르난드 2세는 다시 반격에 나섰다.

 

사르디니아군은 고이트와 페스키에라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7월 24일에 쿠스토자 전투에서 라데츠키 장군에게 대패했다. 라데츠키

장군은 밀라노를 탈환하고 8월 9일에 정전협정을 체결시켰다. 라데츠키 장군이 롬바르디아의 지배를 굳히면서 카를로 알베르토가

패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10월에 토스카나 대공국에서는 민주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11월에는 교황국가 수상이던 벨레그리노 로시가 암살되면서

교황 피우스 9세가 가에타로 도망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849년에 처음으로 교황국가 내에서 제정의회를 위한 선거가 진행되어

2월 9일에 로마 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2월 2일의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정치집회에서 젊은 성직자였던 알듀이니 신부는 속세에 대한 교황의 권력은 <역사적 사기이며

정치적 사기이기도 하며 그리고 종교적 부도덕에 해당한다>라고 선언했다. 3월 초순에 마치니가 로마에 도착해 정부에 참가했다.

로마 공화국 헌법에선 제 7조에 신앙의 자유가 정해지고, 제 8조에는 카톨릭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황의 독립을 보증하였다.

 

제 5조는 사형폐지, 그리고 제 8조는 무료 공교육의 실시가 정해졌다. 공화파의 고양에 행동의 필요성을 느낀 사르디니아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망명 폴란드인 장군인 알베르토 슐자노스키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재개했다. 허나

사르디니아군은 1849년 3월 23일의 노발라 전투에서 라데츠키 장군에게 패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카를로 알베르토는 퇴위했다.

 

이에 아들인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즉위했다. 사르디니아의 이탈리아 통일 혹은 롬바르디아 정복의 야망은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다.

8월 9일엔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노발라 전투에서 며칠 후 브레시아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오스트리아군에게

10일만에 진압되었다. 4월 하순엔 토스카나도 오스트리아군에게 제압당했다.

 

혁명세력은 로마 공화국과 베네트 공화국만이 남겨졌다. 4월에 샤를르 우디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로마로 파견되었다.

원래 프랑스군은 교황과 공화정부의 중재를 요망했지만 공화정부는 철저항전을 주장했다. 프랑스군은 로마를 포위하고

가리발디가 이끄는 공화국군은 철저히 맞섰지만 두 달간의 포위전 후 6월 29일에 로마는 항복하여 교황이 복귀했다.

 

가리발디와 마치니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는데, 1850년에 가리발디는 뉴욕에 도착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를

포위하고 1년 이상의 포위전 끝에 8월 24일에 점령했다. 독립파 투사들은 벨피오레에서 공개 교수형을 당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중부 이탈리아의 질서를 회복시키면서 혁명은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이에 1848~49년 혁명이 좌절된 후인 10년간을 <준비의 10년>으로 부르는데, 민주파 사이에선 무장봉기를 주장하는 마치니와

연방제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그룹으로 논쟁이 일어났다. 무력투쟁방침을 견지했던 마치니는 1853년에 밀라노에서 봉기를 계획하다

실패하여 마치니파는 용합파와 분쇄파로 분열되었다. 마치니는 분쇄파에 참가하여 <행동당>을 만들었다.

 

1857년에는 카를로 피카사가 양 시칠리아 왕국과 이탈리아 본토와의 동시봉기를 계획했지만 양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던 피카사의

그룹은 기대했던 농민들의 호응이 없어 참패해 제노바와 리보르노에서의 봉기계획도 좌절되었다. 무모한 봉기를 거듭한 마치니의

행동은 비판을 불러 조직을 더욱 분열시키고 말았다.

 

양 시칠리아 왕국, 토스카나 대공국, 그리고 교황국가 등 혁명의 시기에 헌법을 제정했던 이탈리아 각국은 이를 폐기했지만

사르디니아 왕국만은 헌법을 유지했다. 1852년에 코뉴비오라 불린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연합으로 인해 수상으로 취임한

카밀로 카보르는 우수한 의회조종술로 정치기반을 장악하여 사르디니아 왕국의 개혁을 추진했다.

 

1854년에 카보르는 수도원을 폐지하는 법안을 국왕과 보수파, 교회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통과시켜 교회의 영향력을 약체화시켰다.

그리고 국왕에 대한 의회의 우위를 확립하여 카보르는 통상협정을 영국, 프랑스, 독일 관세동맹,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맺고 산업육성과

은행업의 확대, 철도 및 해운 등 사회기반의 정비에 나서 그의 치세에 사르디니아의 경제는 대단히 발전하게 되었다.

 

또 사상적으로도 민주파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마치니에서 떨어져 나온 다니엘레 메닌이 1857년에 결성한 <이탈리아 국민협회>를

지원했다. 제 1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 사르디니아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도박엔 실패했지만 롬바르디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카보르도 아직 확장주의의 야망을 지니고 있었는데, 카보르는 독자적인 힘으로 롬바르디아를 획득하긴 어렵다고 판단하여,

오스트리아와 대항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원조를 기대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을 얻기 위해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했지만

이는 실패하여 파리 강화회의에서 이탈리아 문제는 무시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여러 목적은 달성했다. 전쟁 중에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진영을 저울질하던 오스트리아는 위험시

고립되고마는 입장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제 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1858년 1월 14일에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였던 펠리체 오르시니(카르보나리 멤버)가 프랑스 황제이던 나폴레옹 3세의 암살을

꾀했다. 오르시니는 옥중에서 암살미수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폴레옹 3세에 대해 황제의 예우에 충실하였기에 사형을

하는 대신,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 후 나폴레옹 3세는 협의문을 공개해 신문에선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해방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청년시절 카르보나리의 운동에 참가한 적이 있던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해방운동에 호의적이어서 청년시절의 이상주의,

백부인 나폴레옹 1세의 이탈리아 정복 등 위대한 업적달성의 야망, 그리고 프랑스의 국익 등 복합된 사상에서 이탈리아에 개입하게

되었다.

 

1858년 여름에 카보르는 프롱비에르에서 나폴레옹 3세와 회담하여 두 사람은 프롱비에르 밀약을 체결했다. 카보르와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싸우는 것에 합의했는데, 이 협정에서 사르디니아 왕국은 오스트리아령의 롬바르디아 베네트 왕국, 파르마와

모데나의 두 공국, 거기에 교황국가인 레가치오네를 합병하기로 했는데 이에 사보아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하기로 했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은 교황령의 일부를 더한 뒤 중부 이탈리아 왕국으로서 군주를 합스부르크가에서 프랑스 황제의 종제(従弟)인

프린스 나폴레옹으로 교체하고 남부의 양 시칠리아 왕국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프랑스가 침략자의 비난을 받을 일 없이 간섭하기 위해

카보르가 모데나의 혁명운동을 사주하여 오스트리아를 도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에 일은 계획한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모데나의 폭동은 미수에 그쳐 밀약내용이 외부로 누설되면서 영국이 전쟁반대의

의사를 명확히 했다. 1859년 3월에 사르디니아 왕국은 군의 동원과 의용병 모집을 개시해 오스트리아는 사르디니아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긴장이 높아지던 가운데, 러시아가 이탈리아 문제를 둘러 싼 5개국 회담을 제안하자 나폴레옹 3세가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여 카보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허나 빈 궁정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겨 사르디니아 왕국에 대해 강경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를 호기로 여긴 카보르는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오스트리아를 침략자로 규정한 후 프랑스가 개입하도록 했다.

 

전쟁 자체는 던기간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의 실책에 편승한 프랑스, 사르디니아 연합군은 6월 4일의 마젠타 전투에서 페렌츠 쥴라이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은 로바르디아의 대부분에서 철수하여 나폴레옹 3세와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밀라노에 입성했다.

 

양군의 결전은 6월 24일에 솔페리노에서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3세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진두에 선 결전은 두 황제의

무능한 전략으로 인해 양군 모두 3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지만 최종적으로 프랑스, 사르디니아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의 배후에 있던 사각요새지대로 후퇴했다.

 

프랑스는 이 시점에서 강화를 모색했다. 솔페리노의 전장을 시찰한 나폴레옹 3세는 희생자가 너무 많았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베네치아를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유혈을 우려하였고, 또 국내의 반대, 프로이센의 개입 가능성에 전쟁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르디니아 왕국의 집념에 진절머리가 나 전쟁에서 손을 빼려고 했다.

 

7월 11일에 나폴레옹 3세는 동맹국인 사르디니아 왕국에 연락없이 프란츠 요제프와 개인적으로 만나 전쟁중지에 합의했다.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유지했지만 롬바르디아는 프랑스에 할양하고 프랑스가 즉석에서 이를 사르디니아 왕국에 양도하게 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가 사르디니아에 직접 영토를 할양하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의 이탈리아 국경은 현재상태로 유지하게 했다. 전쟁발발과 함께 군주가 추방당하여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던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모데나, 그리고 파르마는 각각 복귀시키고 교황령의 지배도 회복하게 했다. 허나 나폴레옹 3세가 카보르와의 약속을 어겼기에

사보이와 니스를 할양받을 순 않았다.

 

사르디니아 국민들은 이 배반에 격노했다. 카보르는 전쟁수행을 주장했지만 빅토리오 엠미누엘레 2세는 감수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 판다나였기에 사직했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합의는 이를 공식화한 취리히 조약이 11월에 체결될 시점에서 사실상

효력을 잃었다.

 

12월에 토스카나, 모데나, 파르마, 그리고 교황령은 <중앙통치 연합주>로 통일되어 영국의 추천도 있어, 사르디니아 왕국과 합병을

표명했다. 프랑스는 강화에 반대하기 위해 이 움직임에 압력을 행사했지만 1860년 1월에 카보르가 수상으로 복귀하면서 협상이 이루어져

나폴레옹 3세는 사보이와 니스의 할양을 조건으로 사르디니아 왕국에 의한 중부 이탈리아 병합을 승인했다.

 

1월에 교황 피우스 9세는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비롯해 교황령 침범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문하고 영토반환을 명령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각국에선 주민투표가 이루어져 3월 20일에 합병이 실시되었다. 이 시점에서 사르디니아 왕국은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천인대(千人隊)의 원정

 

 

1860년에 이탈리아는 4개국만이 남았다. 공공연히 베네트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 제국, 지배지를 상실한 교황령, 확대된

사르디니아 왕국,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의 양 시칠리아 왕국이었다. 이 시점에서 카보르가 이탈리아의 남은 부분을 사르디니아

주도로 통일을 구상하기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들 지역은 경제적인 가치가 별로 없었고, 오히려 재정부담만 가중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그의 의도를

넘어 발전하게 되었다. 양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인 프란체스코 2세(일명 포격왕이란 별명으로 악명높았던 페르디난드 2세의 후계자)

는 15만의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부왕의 전제정치의 결과, 국내엔 다수의 비밀결사가 생겨났는데 더우기 스위스 정부가 자국민이 외국의 용병이 되는 것을

법률로 금지했기 때문에 왕국의 스위스인 용병이 갑자기 귀국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프란체스코 2세에겐 그다지

신뢰하기 어려운 부대만이 남았다.

 

이것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결정적인 기회였다. 1860년 4월에 역사적으로 나폴리의 지배에 저항했던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와

팔레르모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왕국군에 의해 간단히 진압되었다. 1848~49년 혁명의 좌절 이후, 민주파의 일부는 공화제를

고집하는 마치니에게서 떨어져 나가, 사보이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통일로 치우치는 <이탈리아 국민협회>를 결성했었다.

 

가리발디도 여기에 참가하여 1859년의 제 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선 알프스 수렵병대를 조직해 오스트리아군과 싸웠었다.

허나 이 때 가리발디는 출신지였던 니스가 프랑스에 할양된 것에 깊이 실망하여 이후 카보르에 강한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지지자들과 함께 마을을 탈환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었다.

 

마치니 등 민주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에게 쥐여진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주도권 쟁탈에 나서 시칠리아 원정을 기획해

그 사령관으로 가리발디에게 출마를 요청했다. 1860년 5월 6일에 가리발디와 약 1천명의 동지(천인대)는 제노바 근처의 쿠아에서

출항해 5월 11일에 타라모네에 정박한 후 시칠리아 섬 서해안의 마르살라 근처에 상륙했다.

 

살레미 근처에서 가리발디의 부대는 흩어졌던 반정부세력을 모은 후 5월 14일에 가리발디는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이름 하에

스스로 시칠리아의 독재권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다음날인 5월 15일, 가리발디는 칼라타피미에서 적군을 격파했다. 이 싸움 자체는

소규모였지만 정부군에 대한 승리는 섬 전체에 큰 반향을 불러 천인대에 호응하는 농민반란이 확산되었다.

 

가리발디는 시칠리아의 수도인 팔레르모로 진군했다. 5월 26일에 나폴리 정부군의 페르디난드 란차 장군이 지키던 팔레르모를

포위했는데 시내에선 폭동이 발생하여 시가전이 되었다. 팔레르모 시민이 반란파라고 판단한 나폴리 정부군의 란차 장군은

맹렬히 마을을 포격해 거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영국해군의 중재로 정전이 성립되어 나폴리 정부군은 메시나로 철수하고 마을은 가리발디와 그의 소부대에 항복했다.

가리발디는 사전에 시칠리아에 잠입했었던 민주파 활동가였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와 협력하여 시칠리아의 통치에 나섰는데,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1848년 혁명의 조치부활과 제분세의 폐지, 공유지의 분배에 나섰는데, 농민들은 그의 의도를 넘어 서

귀족과 관리들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농민반란을 탄압했다.

 

천인대의 원정소식은 유럽각국의 신문에선 영웅적인 모험담으로 취급되어 가리발디의 명성은 높아졌는데 알렉산더 뒤마 페르와

빅토르 위고 등 문예가들은 그를 칭찬하는 비평을 내기도 했다. 한편 프란체스코 2세는 이전의 헌법을 재공포하면서 나폴레옹 3세의

개입을 요청하여 사르디니아 왕국과의 동맹까지 제안했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부르봉 왕가의 쇠약을 막을 순 없었다.

 

팔레르모의 항복에서 6주가 지난 후 가리발디는 메시나를 공격했다. 7월 20일에 메라치오에서 결전이 벌어져 원정군이 승리해

나폴리 정부군은 메시나에 갇혀버렸다. 시칠리아 섬을 정복한 가리발디는 나폴리 함대를 이용해 메시나 해협을 건너 본토로 전진했다.

렛죠 칼라브리아의 수비대는 신속하게 항복하여 가리발디는 북쪽으로 진군했는데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나폴리군의 저항은 약해져 8월 18일과 21일엔 바질리카타와 풀리아의 주민은 자발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을 선언했다. 8월말에

가리발디는 살레르노 근처의 에보리에 도착해 9월 5일에 코젠치아에 다다랐다. 한편 나폴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9월 6일에 국왕은 충실한 4천명의 병사와 함께 볼투르노 강까지 후퇴했다.

 

다음날 가리발디는 열차에 올라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나폴리에 입성해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가리발디의 성공은 카보르 등

사르디니아의 온건파에겐 악몽이었다. 원래 카보르는 남부를 포함한 반도 통일은 생각하지 않았으며 북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이

목표였는데 민주파에 주도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카보르는 방침을 전환했다.

 

시칠리아의 병합을 획책했지만 가리발디의 반대도 있어 성공하지 못하고 이어서 나폴리에 공작원을 보내어 가리발디가 도착하기 전에

온건파에 의한 봉기를 획책했지만 이것도 실패했다. 한편 쉽게 양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를 탈환한 가리발디의 군대는 3, 4만으로 불어나

남부군단이라 칭했다.

 

하지만 나폴리 정부군은 5만의 병력을 유지하며 볼투르노 강의 전선을 유지했기에 가리발디의 남부군단은 카푸아와 가에타의 요새를

공략하진 못했다. 가리발디는 교황인 피우스 9세의 정치적 의향을 무시하고 <이탈리아왕국 수립선언>을 로마에서 발표할 의도를

표명했다.

 

카톨릭 교회의 지배지역에서 위기를 감지한 교황 피우스 9세는 가리발디를 지지하는 모든 자를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가리발디에 의한 로마 공격을 우려한 세계의 카톨릭은 교황군에 자금과 의용병을 보내고 망명 프랑스인인 루이 라모리셰르가

군의 지휘를 맡았다.

 

카보르는 가리발디를 누르기 위해 사르디니아군의 남부 파견을 결정했지만 그러기 위해선 반도 중앙부에 걸친 교황령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도의 이러한 상태해결은 나폴레옹 3세에게 주어졌다. 만약 프랑스 황제가 가리발디의 생각을 인정하면 교황의

세속주권은 종언을 고하고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가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는 카보르와 협의하여 로마와 <성 베드로의 전통>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폴리, 우르비노, 그 외의

지역을 사르디니아령으로 하는 것에 조정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판티와 차르디니가 이끄는 사르디니아군 2개 군단이 교황령으로

침입하였는데, 그 목표는 로마가 아닌 나폴리였다.

 

라모리셰르의 교황군은 차르디니 군단에 대항했지만 9월 18일에 카스테르피다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안코나의 요새에서 포위되어

9월 29일에 항복했다. 10월 9일에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도착하여 전군의 지휘를 맡았는데 그에게 대항하는 교황군은 거의

사라지고 말아 사르디니아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남하했다.

 

10월에 사르디니아 의회는 시칠리아와 남 이탈리아의 병합을 결의했다. 이에 대해 시칠리아에선 의회가 소집되었는데, 나폴리에서도

만치니 등 민주파가 집결해 의회소집과 헌법제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온건파가 사르디니아와의 합병을 두고 주민투표를 강하게 요구해

가리발디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실시된 주민투표의 결과, 압도적인 다수로 사르디니아 왕국과의 합병이 결정되었다. 11월에는 사르디니아군이

점령했던 마르케와 우르비노에서도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사르디니아 왕국과의 합병이 결정되어졌다. 가리발디는 출신지인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했던 현실주의자인 카보르를 신용하진 않았지만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지휘권을 받아들였다.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세사 아우른카에 입성했을 때, 가리발디는 국왕에 대해 스스로의 독재권을 반환한다고 고지했다.

10월 25일에 가리발디는 테아노에서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맞이하였는데, 이 장면은 <테아노의 악수>라 하여 이탈리아의

애국적인 신화가 되었다.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좌측)와 주세페 가리발디(우측)

 

 

 

가리발디가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게 정복한 이탈리아 남부지역을 헌상한 것은 미담이 되었지만, 실제 회견은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르디니아군의 장교는 냉담하게 접견하여 국왕은 가리발디에게 정규군에 종사하라는 짧은 명령만 내렸을 뿐이어서

가리발디는 국왕에게 충성이 아니라 합병만을 결정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주민투표 결과만을 받아들여 이에 따랐을 뿐이었다.

 

11월 7일에 가리발디는 국왕과 나란히 나폴리에 입성했다. 그는 반도통일의 나머지 사업을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게 맡기고

자신은 카프레라 섬에서 은퇴했다. 사르디니아군의 진격으로 인해 프란체스코 2세는 강 연안의 방어선을 포기할 수 밖에 없어,

최종적으로 그는 정예부대와 함께 가에타 요새에서 농성했다.

 

당찬 젊은 왕비였던 마리아 소피아를 의지했던 프란체스코 2세는 3개월간 강하게 저항했지만 유럽의 동맹각국은 원조를 거부하여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고 역병마저 창궐하자 수비병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코 2세의 충실한 나폴리인

몇 개 부대가 빈약한 무기와 식량으로 수년 간 이탈리아 정부에 대한 저항을 계속 해 나갔다.

 

가에타의 함락으로 통일운동의 목표는 거의 달성되어 로마와 베네트만이 남았다. 1861년 2월 18일에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토리노에서 제 8기 사르디니아 의회를 소집했다. 3월 14일에 의회는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 왕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3월 27일에는 로마를 수도로 선언했다. (아직 국왕의 통치하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 석달 후, 생애의 사업을 마친 카보르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이탈리아는 만들어졌다. 모든게 안심이다>였다.

 

 

제 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과 로마의 점령 

 

 

이탈리아의 통일은 마치니 등 민주파가 희망했던 시민혁명이 아니라, 사르디니아 왕국에 의한 이탈리아 각국의 흡수합병이라는

형태로 완성되어갔다. 그리고 <알프스에서 아드리아해까지의 자유>를 내 걸었던 통일운동은 남아있던 로마와 베네트를 거점으로

모였다. 하지만 문제는 교황의 세속주의에 대한 도전은 세계의 카톨릭 교도들로부터 큰 불신에 봉착했고 프랑스군이 로마에 들어왔다.

 

로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신생 이탈리아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나뉘었는데, 보수파는 로마병합에 반대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도 베네트 지방회수에 우선한다는 방침이었지만 생전에 카보르가 빠른 합병을 주장하여 교황청과 프랑스와 협상에 나서 카보르의

후계자였던 베티노 리카솔리 수상, 그 뒤를 이어 우르바노 라타치 수상도 로마합병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마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일치하지 않았지만 지금 국민적 영웅이 된 가리발디는 자신이 행동하면 정부가 지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1862년 6월에 가리발디는 제노바를 출항해 다시 팔레르모로 상륙하여 <로마인가, 죽음인가>를 기치로 내 걸며 의용병을 모집했다.

국왕의 명령에 충실했던 멧시나의 수비대는 그들의 본토로 도항하는 것을 금지했다.

 

2,000명이 넘는 의용병 집단은 남쪽으로 향하여 카타니아에서 출항했다. 가리발디는 승자로서 로마의 문을 두드리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성벽 아래에서 죽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8월 14일에 메리토에 상륙해 칼라브리아 산맥을 행군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세력을

지지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차르디니 장군은 의용병 집단에 대해 팔라비치노 대령이 지휘하는 정규군 집단을 보냈다. 8월 28일에 양군은 아스프로몽테에서

대치했다. 의용병이 우발적으로 발포하자 이어서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왕국의 동료에 대해 응전하는 것을 금지했다. 의용병 중에서 몇 명의 희생자가 나오고 가리발디 자신도 부상을 당하며 다수가 포로가 되었다.

 

가리발디는 증기선 바리냐노호에 수용되어 정중히 대접받는 포로가 되었지만 가리발디를 옹호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결국 석방하였다.

한편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교황령의 안전한 획득수단을 모색했다. 그는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철수하는 것을 조약을 통해

실현하기로 하여 1864년 9월에 나폴레옹 3세와 만나 9월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으로 인해 프랑스 황제는 이탈리아가 로마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년 이내에 프랑스군을 로마에서 철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 협정에는 로마 교황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비밀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 다루어질 경우 카톨릭계의 격렬한 항의가 벌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1865년에 정부소재지는 구 사르디니아 수도였던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옮겨져 여기서 최초의 국회가 소집되었다. 1866년 12월에 교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프랑스군이 로마를 떠났다. 프랑스군의 철수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외국군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전인 1866년 6월에 독일의 주도권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전쟁을 일으켰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던 베네트 지방을 획득하기에 좋은 기회로 여긴 이탈리아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지켜주면 베네트 지방을 양도하겠다고 이탈리아 정부를 설득했다. 4월 8일에 프로이센은 이탈리아가 베네치아를 획득하는 것을 지지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6월 20일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선전을 포고했다. 이 전쟁을 제 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라 부른다.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베네트 지방을 획득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출진했다. 한편 가리발디는 알프스 수렵병대를 거느리고

티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다. 6월 24일의 쿠스토자 전투에서 이탈리아 육군은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했다.

그리고 7월 20일에는 릿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함대가 오스트리아 함대에게 대패를 맛보았다.

 

하지만 그 후 가리발디의 의용병들이 베첸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트렌토로 진군했다. 프로이센군은 우세하게 전투를

진행하여 사실상 결전이 되었던 7월 6일의 케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로이센 수상이던 비스마르크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하여 7월 27일에 오스트리아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이탈리아는 8월 12일에 공식적으로 무기를 내려놓아 가리발디도 사령부의 철수명령을 따랐다. 이탈리아군은 이 전쟁에서 빈약함을

노출하고 말았다. 북방에선 프로이센군이 승리함으로서 오스트리아는 베네트 지방의 할양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12일에

체결된 빈 조약의 조항에 기초하여 오스트리아 황제는 1859년의 전쟁처럼 먼저 프랑스에 베네트를 양도한 뒤 다시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베네트를 넘기는 방식을 취했다.

 

10월 19일에 베네트 지방은 이탈리아로 영도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리아인의 토지와 주장하는 영토 전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남티롤과 구 베니치아 공화국 내의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영내에 남았다. 빈 조약에서 베네트 지방의 귀속은 주민투표로

결정되어져 10월 21일과 22일에 실시되어진 주민투표에서 베네트 지방의 주민은 압도적인 다수로 이탈리아와의 합병을 선택했다.

 

이 때 약 0.01%(유권자 647,236명 가운데 69명)만이 합병에 반대했었는데, 역사가들은 베네치아에서의 주민투표가 군대의 압력 하에

실시되어진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베네트와 베네치아 마을로 입성하여 산 마르코 성당을 참배하였다.

한편 교황령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게 빼앗기고 로마까지 위협받자 교황 피우스 9세는 1864년에 오진표(syllabus errorum)를 공포했다.

 

이것은 자연주의, 합리주의, 종교적 관용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근대적인 자유주의는 근대적인 사상과 문화를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라 비판하여 교황청은 근대사회와 대결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때 가리발디의 반교황주의는 더욱 과격해져 의회선거 연설에서

교황을 <강탈자>, 교황청을 <독사의 소굴>이라 비난하고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서 반카톨릭 언행으로 격렬한 반발을 살

정도였다.

 

가리발디에 의한 로마 공격이 임박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정부에 압력을 넣었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무성의한 태도를 취해

가리발디를 완전히 억누르지는 않았다. 1867년 10월에 가리발디는 7,000명의 의용병을 거느리고 로마를 점령하기 위해 두 차례의

군사적 모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로마 시내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공작은 실패하였고, 빈약했던 무장의 의용병은 다시 파견된 프랑스군 부대가 가세한 강력한

교황군에 의해 멘타나 전투에서 격파당하고 말았다. 그 후 프랑스군은 로마에 주둔을 계속했다. 1869년에 교황 피우스 9세는 300년만에

제 1차 바티칸 공회의를 소집했다.

 

공회의에서 교황수위설, 교황비교불가설 등이 선언되어 근대사상과 문화를 배척하는 자세를 취했는데 보불전쟁이 발발하면서 공회의는

중단되었다. 1870년 7월에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개전했다. 나폴레옹 3세는 8월에 로마 주둔군을 불러들여 교황령의 방어는 약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세당 전투에서 제 2 제정이 붕괴되기 전까지 행동을 자제했다. 나폴레옹 3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구스타보 폰치아 디 산 마르티노 백작을 교황인 피우스 9세에게 보내어 교황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군을

로마에 입성하는 것으로 교황의 체면을 유지해 주겠다고 했지만 피우스 9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교황은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편지를 내 던지면서 <멋진 충성이구만! 그대들은 나를 위선자라 욕하고 우리들을 독사의 소굴이라

욕한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신앙심이 있을리 있나>하며 비난했다. 산 마르티노 백작은 얼굴이 붉어져 다음날 교황청을 떠나고 말았다.

9월 11일에 라파엘 카드르나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군이 교황령의 경계를 넘어 교황과 협상해 평화적인 입성을 요구하며 진군했다.

 

9월 19일에 이탈리아군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앞에 도착하여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패배는 필역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교황청은 무법적인 폭력 앞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을 세계에 표시하기 위해 남은 병사들에게 상징적인 저항을 하도록 명령했다.

9월 20일에 3시간의 포격 후, 베르살리에리가 피아 성문을 깨고 시내에 들어섰다. 후에 그 장소는 <9월 20일의 거리>로 개명되었다.

 

이 때 벌어진 전투에서 이탈리아 장교 4명과 병사 49명, 교황군 병사 19명이 전사했다. 10월 2일에 로마와 라티움에서 이탈리아 왕국으로

합병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주민투표의 결과 10월 9일에 합병이 이루어졌다. 1871년 7월 1일에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이동했다. 이로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의 문제 

 

 

이탈리아의 통일은 민주파의 이상과는 먼 <전 국토의 사르디니아 왕국화>란 형태로 이루어졌다. 헌법과 행정, 관세제도는
사르디니아 왕국의 체제가 전국에 통용되었고, 관료와 군의 고급사관들도 사르디니아 왕국 출신자들로 채워졌다. 통일시에
이탈리아 경제는 공업화가 이루어진 서유럽 국가보다 뒤쳐져 문맹률도 매우 높았다.
 
특히 남부에선 역병이 창궐했는데, 이에 더해 초기 정부재정도 파탄상태여서 세금이 여러 번 중첩되었다. 자유관세무역이
전국에 적용됨으로서 빈약했던 남부의 제조업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사르디니아의 무상 공교육 제도를 남부에도 적용했기 때문에
빈약한 남부 자치주에선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는 등 문맹률이 높아지는 사태를 야기했다.
 
이러한 남북의 경제규모 차이로 인한 문제는 완전하게 해결되지 못해, 현재도 이탈리아 내 지역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편, 옛 양 시칠리아 왕국의 남부에서는 1860~1861년의 가리발디에 의한 정복중, 부르봉 왕당파 및 불만을 가진 민중들에 의한

폭동이 빈발했는데 이탈리아 신정부는 이들 반란세력을 산적(Brigante)이라 불렀다.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실체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바질리카타,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아블치오의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하면서

관리와 지주를 습격해 이탈리아 정부에 대하여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산적의 구성원은 구 양 시칠리아 왕국군의 병사와 농민들로

이름난 지도자로는 카르미네 크로코, 니콜라 나폴리타노, 그리고 여산적인 미켈리나 데 체자레가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1863년에 행정관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피카법을 제정하여 정부군의 3분의 2를 남부에 주둔시키고 철저한

탄압에 나서 산적들의 활동을 진압했지만 정부군에 의한 학살행위도 반감을 불렀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시작되자

남부의 군대를 불러들였기 때문에 시칠리아에서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반란은 이탈리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정부는 산적과 마피아, 그리고 성직자에 의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부와

남부 주민들과의 악연으로 인해, 북부 사람들은 남부를 <미개하고 빈곤한 땅>으로 보는 차별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령한 로마역시 문제가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점령되어 합병된 로마에서 세속권력을 잃은 교황 피우스 9세는 자신을 <바티칸의 죄수>라 칭하면서

대결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871년 5월에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보호령을 제정하여 교황직의 보증, 연금 지급, 그리고 바티칸

지역의 교황청 통치와 독립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피우스 9세는 즉석에서 거절한다는 회칙을 발표했다. 1874년에는 <논 엑스페디트, 어울리지 않다>를 선언하며 이탈리아

전역의 카톨릭 교도에 대하여 국가선거에 입후보와 투표를 금지하라고 명했다. 교황과 단절된 이탈리아 정부였었지만, 이익도 있어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탈리아 전역의 수도원, 중교단체 폐지법을 실행했으며 교회토지를 몰수하여 매각대금을 챙겼다.

 

이들 토지들은 지주층이 구입하였지만, 농민에게 분배하지 않았다. 교황청과 이탈리아 왕국의 단절은 1929년에 교황청과 파시스트

정권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어질 때 까지 약 50년 이상 계속되었다. 또 이탈리아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국경 바깥에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상황은 민족통일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이탈리아인과 이탈리아에 종속되길 원하는 민족을 통일하자는 운동이었는데, 이 같은 애국사상은 19세기 유럽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통일 후의 시대에 일부 사람들은 이탈리아 왕국의 현상에 대해 불만을 가져, 민족통일주의는 외국의 지배하에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 모두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 걸게 되었다.

 

이들이 주장한 지역은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달마치아, 이스트리아, 골리츠어(이상 오스트리아령), 티치노(유고), 니스, 코르시카 섬

(이상 프랑스령)과 말타(영국령)도 포함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와 삼국동맹을 체결했는데

이 동맹의 참전요건이 가맹국이 먼저 공격받을때만이란 것을 이유로 중립을 유지했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중립을 희망했지만, 삼국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은 참전을 요청했다. 1915년 4월에 체결된 런던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프리울리, 트렌티노와 달마치아 같은 미회수 지역의 소유를 조건으로 중앙동맹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다. 당시 이탈리아

의회 대부분은 중립파였지만 살란드라 수상은 참전을 이용한 협박적인 수단으로 중립파 의원을 굴복시켜 전쟁을 일으켰다.

 

종전 후 생 제르망 조약으로 인해 이탈리아는 이스트리아와 남 티롤의 합병에 성공했지만 제 1차 세계대전에서 141만명의 사상자를

내어 전후엔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져 정국이 불안정해지면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게 만들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한 후 이탈리아는 달마치아 행정구를 창설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왕국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스플리트, 코틀 같은 달마치아 연안의 대부분을 합병했다. 또 프랑스령의 사보와,

코르시카, 니스를 이탈리아군을 보내 점령케 하여 민족통일주의는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파시스트 정권의 패배로 인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획득한 회수지는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민족통일주의는 이탈리아 정치에서 소멸했다. 1947년의 파리 강화조약으로 트리에스테 자유지역을 제외한

이스트리아 반도가 유고슬라비아에 할양되어졌다. 이 때 아스트리아와 달마치아의 이탈리아계 주민들은 수 천명만을 남기고 

약 30만명이 이탈리아로 피난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통일의 목적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끝맺음에 있었기에,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도

반대자는 존재하여 (특히 합병당한 지역의 지배층) 이 지역주의로의 지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당활동을 대표하는

두 가지의 주요한 분리운동이 존재하는데, 북부의 북부동맹과 남부의 시칠리아 독립운동(M.I.S)가 바로 그것이다.

 

남부의 분리운동은 주로 왕국정부에 대한 민중봉기에서 유래한다. 북부동맹은 국회에 의원을 보내어 이전에 이러한 운동의

국가선거에서 득표율이 5%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2008년 총선거에서는 전국에서 8%를 획득하며 약진을 보였다. 베네트 지방에선

자치 혹은 독립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2009년 선거에서 이 지역에서의 북부동맹 득표율은 28.4%, 여당인 자유국민당(PDL)은

29.3%였다.

 

PDL의 주도적 의원 가운데엔 이탈리아 국가의 틀 내에서 베네트 지방의 자치권(독립이 아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자도 있다.

볼치아노 자치주에서는 다수 독일계 주민을 중심으로 한 완전자치 혹은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목적으로 하는 분리운동도 있어, 이 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후부터 강해졌다. 분리주의 정당은 현재도 존재하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자치권을 확대하는 형식으로 억제하고 있다.

 

 

출처 : 존 데이비스 <19세기의 이탈리아, 옥스퍼드 대학 2001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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