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보어전쟁 - 1880년 ~ 1881년
제 1차 보어전쟁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영국이 병합하려한 전쟁을 가리키는데, 이 때문에 트란스발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19세기 당시, 17세기부터 케이프 식민지로 이민 온 네덜란드계 이민의 자손인 보어인들은 아프리카 남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격렬히 대립했다.
영국의 케이프 점령과 네덜란드의 식민지 양도로 인해 보어인은 신천지를 구하며 아프리카 대륙 내부로 이민을 개시하여
줄루족을 몰아내고 1839년에 나탈 공화국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1843년에 영국군의 침입으로 소멸했다. 보어인들은 다시
내륙으로 이동해 1852년에 트란스발 공화국, 1854년에 오렌지 자유국을 설립했다.
아프리카 내륙까지 다스릴 여유가 없던 영국은 두 나라를 승인했다. 그런데 1860년대 이후 트란스발 동부에선 금광, 오렌지 자유국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백인 광산기술자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영국은 자국 기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렌지
자유국을 영유화하였다.
내륙에 있던 트란스발 공화국은 바다를 찾으며 줄루왕국 방면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하던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병합을 선언했다. 이에 저항한 보어인들은 1880년 12월 16일에 폴 크루거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영국에 선전을 포고했다.
이에 두 나라는 전쟁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 전쟁시 보어인은 카키색의 농업용 작업복 차림이었던 것에 비해 영국군의 군복은 선홍색이었기 때문에 보어인 저격수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1881년 2월 27일에 마주바 힐 전투에서 보어인들에게 참패한 영국군은 3월 23일에 프리토리아 협정을
맺고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다시 승인해주었다.
이로서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대영제국의 위신은 땅에 추락하고 말았다.
제 2차 보어전쟁 - 1899년 ~ 1902년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풍부한 금광맥이 발견되자 영국의 광산기술자 수 천명이 케이프 식민지에서 유입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밀려들면서 광산 근처에 터를 잡자 요하네스버그의 거리는 슬럼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부인들의 유입은
보어인보다 많았지만 전체로 보면 트란스발 공화국의 소수파였다.
보어인들은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금 채굴에 관해선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외국인 및 영국인 광산주들은 보어인
정부에 대해 타도의 기운을 높여갔다. 1895년에 세실 로즈는 제임슨 리드에 의한 무장 쿠데타를 기획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영국인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는 케이프 식민지로 군사력의 대폭적인 증강을 정당화 하기위한 좋은 구실이 되었다.
영국 식민지의 중요한 리더들 가운데에서도 보어인 공화국의 합병을 지지하는 자가 많았다. 그 선두에 선 자가 바로 케이프 식민지의
지사(고등변무관)였던 알프레드 밀른너 경, 영국 식민지장관인 조셉 체임벌린, 광업자 조합의 오너들이었다. 보어인을 공격하는 것이
간단하다고 확신했던 이들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갈등이 확산되자 오렌지 자유국의 대통령이던 마르티누스 스테인은 1899년 5월 30일에 블룸폰테인에서 트란스발 공화국의 대통령인
크루거 및 밀른너 경과 회의를 개최했지만 소득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1899년 9월에 체임벌린은 트란스발 공화국에 대해 대영제국
신민(臣民)으로의 완전하고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고를 보냈다.
허나 크루거 대통령도 체임벌린의 최후통고를 받기 전에 먼저 자신편에서 최후통첩을 했다. 그 내용은 48시간 이내에 트란스발 공화국 및
오렌지 자유국 전역에서 영국군과 영국인의 퇴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1899년 10월 12일에 선전이 포고되면서 보어군은 1900년 1월까지
케이프 식민지와 나탈 식민지에 첫 공격을 개시했다.
보어군은 레디스미스, 마피켕 및 킴벌리를 포위했다. 포위에 의한 농성은 수 주간 이어지면서 이들 도시의 병사와 시민들은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포위된 이들 도시는 연속적으로 포격당하여 도로는 위험지대로 변했다. 1899년 12월 중순은 영국군에게 매우 곤란한 시기로,
특히 1899년 12월 10일부터 15일은 <암흑의 일주일>로 불리웠다.
이 일주일 동안 영국군은 마게르스폰테인, 스톰베르그, 콜렌소에서 파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2월 10일에 일어난 스톰베르그 전투에서
영국군의 사령관이던 윌리엄 가터클 장군은 오렌지 강의 50마일 남쪽에서 철도 합류점에서 모이던 중이었는데, 오렌지 자유국군의
저항으로 인해 사상자 135명, 포로 600명의 큰 피해를 냈다.
영국군을 포함해 당시 세계의 정규군대에선 보병이 밀집하여 횡대진형을 꾸린 후 공격전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스타일이었다.
이에 반해 보어군의 주체는 민병부대로 특정의 편제가 없고, 연장식 라이플총을 장비한 기병이 주체였다. 특정 진형을 꾸리지 않고
분산전개하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해 은신하여 명중정밀도가 높은 사격으로 맞섰다.
12월 11일의 마게르스폰테인 전투에선 폴 샌포드 메슈엔 남작이 지휘하던 14,000명의 영국군이 킴벌리를 공략하기 위해 모였다.
보어군 지휘관이던 쿠스 데 라 레이와 피에트 크론제는 영국군의 작전과는 반대로 군사교범에 나오지 않는 곳에 참호를 파고
저격수를 배치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이 의도는 맞아떨어져, 킴벌리, 그리고 마게르스폰테인을 구원하려던 영국군은 전사자 120명, 부상자 690명을 내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암흑의 일주일 가운데, 최악의 날은 12월 15일에 일어난 콜렌소 전투였다. 레디스미스를 구원하기 위해 투겔라 강을
건너던 레드버스 뷜러 장군의 영국군 21,000명은 루이스 보터가 지휘한 8,000명의 트란스발 공화국군의 매복공격을 받았다.
포격과 정확한 사격의 조합으로 인해, 보어군은 강을 건너던 모든 영국군을 몰아냈다. 보어군의 희생자는 40명에 불과했지만 영국군은
1,127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퇴각하던 중에 방치한 대포 10문도 빼앗기고 말았다. 영국군은 레디스미스를 공략하기 위해 스피온 콥
전투에서 다시 패하고, 뷜러 장군은 다시 콜렌소를 공략하려다가 보어군과 격전 끝에 1,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했다.
뷜러 장군은 2월 5일에 다시 보어군을 공격했지만 역시 패배했다. 1900년 2월 14일에 영국에서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로버트 경이
지휘하던 영국군은 주둔군을 구하기 위해 반격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군의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킴벌리는 2월 15일에
존 프렌치 장군의 기병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후 우세로 돌아선 영국군은 2월 27일의 파르데베르그 전투에서 보어군을 격파하고 크론제 장군과 4천명의 보어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로 인해 보어군은 약체화되어, 이윽고 영국군은 레디스미스의 해방을 위한 진격이 가능해졌다. 마피켕 탈환은 영국 전역에서 열광적인
축하가 쏟아졌다.
2월에 전력을 재정비한 영국군은 두 공화국의 공략에 나서 3월 13일에 오렌지 자유국의 수도인 블룸폰테인을 함락하고 6월 5일에는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였던 프레토리아를 점령했다. 모든 영국국민들은 두 도시의 점령으로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보어군은
새로운 거점인 크룬스타드로 이동하여 영국의 보급로 및 통신망을 절단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맞섰다.
이 새로운 방침에 의한 첫 전과는 3월 31일, 크리스티안 데 웨트가 지휘한 1,500명의 보어군이 산나스 포스트에서 영국군이 엄중히
경비하던 상단을 급습하여 155명의 희생자와 428명의 포로, 7자루의 총과 117대의 트럭을 포획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버트 경의
영국군은 프레토리아 근교에서 보어군 잔당을 공격하여 6월 11일부터 12일까지 다이아몬드 힐 전투를 벌였다.
로버트 경의 영국군은 보어군의 잔당소탕에는 성공했지만 162명의 희생자를 냈다. 보어군은 이로서 전면적인 정규전을 끝내는 대신,
산발적인 게릴라전으로 전법을 바꾸었다. 한편 영국군 사령관이던 호레이쇼 키치너는 게릴라전을 버이던 보어군 지배지역에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12만명의 보어인을 수용하고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이 때 많은 농지와 가옥이 불탔는데 열악한 수용소에선 2만명이 사망했었다.
영국은 1900년 9월까지 트란스발 북부를 제외한 두 공화국을 관리하에 넣었다. 하지만 25만의 영국군이 광대한 이들 지역의 모든
제압은 어려운 것이어서, 보어군의 게릴라전에 고심했다. 보어군 특별공격대는 언제든지 영국인에 대한 공격을 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여서 익숙한 지리를 이용해 1901년 9월 이후엔 활발히 활동했다.
1901년 9월 30일의 모에드윌, 10월 24일의 드리에폰테인에서 데 라 레이 장군의 보어군은 영국군에게 공격을 걸었지만 강력한 저항에
막혀 퇴각했다. 하지만 1902년 2월 25일에는 이스터스푸르트에서 영국군을 습격해 많은 포로와 탄약을 노획하여 메슈엔 경이 이끈
영국군을 3월 7일에 트위보쉬에서 습격했다.
혼란에 빠진 영국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메슈엔 경은 부상당한채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군의 강력한 반격을
불러 1902년 3월 후반에 영국 본국에서 대규모의 증원병력이 보내져왔다. 영국군은 4월 11일에 루이와이에서 보어군 게릴라 본대와
조우했다.
영국군 병사들은 산속에 매복한 후 보어군의 기마공격을 충분한 거리를 두고 사격해 반격에 나서, 대부분을 전멸시켰다. 이것은
보어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큰 전투였다. 마지막 보어군이 1902년 5월에 항복하면서 베르니이헝 조약을 체결하여 보어전쟁은
끝났다.
이로 인해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병합했지만 영국군이 큰 피해를 입어 피폐해진데다가 비인도적인 수용소 전략,
초토화 작전 등으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는 등 치루어야 했던 희생이 적지 않았다. 영국은 보어전쟁에서 많은 인원과 물자를 쏟아부어서,
의화단의 난 이후, 만주에서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한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1902년 1월에 고립정책을 버리고 영일동맹을 체결해
1904년에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측이 승리하게 되는 원인의 한 측면을 제공했다.
출처 : 타비타 잭슨 <보어전쟁>
마리츠 반란 - 1914년
1902년에 제 2차 보어 전쟁이 종결되자, 모든 보어인 병사는 강화조약을 준수하는 논지의 계약서에 서명을 요구당했다.
데네이스 레이츠를 비롯한 몇 명의 보어인들은 이를 거부하여 남아프리카에서 추방당했다. 그 후 10년간,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전원이 돌아가자 일자리가 별로 없었다.
보어 전쟁에서 끝까지 싸움을 계속 했던 보어인은 <불굴의 사람>으로 알려졌다. 반란의 이유는 상기 조약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불굴의 사람>으로서 인식되어지게 되었다. 전직 보어인 장군이던 제임스 베리
뮤니크 헤르초크와 인터뷰를 시도한 독일인 기자는 <테크리헤 룬드샤우>지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헤르초크는 보어인에 의한 3년간의 싸움 결과, 영국이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 휘말리면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체에서
그들의 자유가 춤출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말인 <영국의 불행은 아일랜드의 기회>에서 <아일랜드>를
<불굴의 사람>이라 옮기고 <불굴의 사람>들과 그 지지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호기로 여겼다.
(영국의 적이던 독일 제국은 옛부터 보어인들의 지원자였다)
1914년 8월에 유럽에서 전쟁발발은 이전부터 예상된 것으로, 남아프리카 연방정부는 남서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와 경계선을
접하고 있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수상이던 루이스 보타는 런던에 자신이 안전하며 재류 영국군을 프랑스로
보낼 수 있다고 전했다.
영국정부가 보타에게 독일령 남서 아프라카로 침공이 가능한가라고 묻자, 보타는 남아프리카는 언제든지 출진이 가능하며, 그러하다고
대답했다. 1914년 9월 초에 남아프리카 연방군은 헨리 루킨 사령관과 샐먼(매니)마리츠 중령의 지휘하에 양국 국경연안에서 동원되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다른 부대가 뤼데리츠 항을 점령했다.
남아프리카 정부가 독일 식민지 침공을 표명화하자, 남아프리카 국방군 최고사령관이던 크리스티안 베이어스는 이에 반대하여
사임당했는데, 보어 전쟁중에 일어난 잔학행위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전쟁이 독일인의 잔학성에 대해 이루어진 것은 유감이다,
우리들은 용서했지만 남아프리카에서 전쟁중에 우리나라(영국)가 저지른 잔학행위의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의회에서 정부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한 지명 상원의원인 코스 데 라 레이 장군은 베이어스를 방문했다. 9월 15일,
이들은 함께 포체프스트롬의 J.C.G. 켐프 소령을 방문하기 위해 출발했다. 켐프는 대량의 무기와 훈련을 마친 2천명의 부대를
거느리고 있어, 그들 대다수는 반란의 생각에 동조한다고 여겨졌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이들의 포체프스트롬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란에 관한 정부 보고서에서 이들이 반란을
책동한다고 여겼다. 베이어스에 의하면 그것은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군 지도자의 일제사임 계획을 마무리짓기 위해 영국에서
2년 전에 발생한 아일랜드 지방자치법안을 둘러 싼 커러(Curragh) 사건을 본딴 것이었다.
데 라 레이는 반란의 타결을 위해 향하던 도중 포스터 갱(당시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한 범죄조직)을 찾아내기 위해 설치한
바리케이트에 있던 경찰의 총에 우연히 맞아숨졌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보어인들이 정부에 의한 암살이라는 소문을
낳게 하여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한편, 베이어스 사임 후 케이프 주 서부의 독일령 서아프리카와의 국경에 전개한 남아프리카 연방군(지휘관은 매니 마리츠 중령)
에게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가 정부에 다다랐다. 남아공 정부는 바로 콘래드 브리츠 대령을 후임으로 정하였다. 브리츠는
마리츠에게 출두하여 보고를 하도록 전했지만, 마리츠는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다.
브리츠는 벤 바우프 소령을 마리츠에게 파견했다. 바우프와 그의 중대가 마리츠에게 도착하자, 바우프는 자신이 데려온 중대원과
함께 마리츠에게 체포되었다. 마리츠는 바우프만 석방하여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협력을 얻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보여주며 독일군을 남아프리카에 끌어들임으로서 남아프리카를 해방시킨다고 자신했다.
마리츠는 잠정정부를 대신하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실시했다.
<케이프 주 및 나탈을 비롯한 모든 남아프리카 공화국 및 오렌지 자유주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함을 선언하며, 이들 지역에
거주하거나, 혹은 국적을 가진 모든 백인은 스스로 손에 무기를 쥐고 남아프리카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왔던
이상을 실현시킬 것을 이 자리에서 요구한다>
또, 베이어스, 크리스티안 데 뷔트, 마리츠, 켐프 및 베즈이딘호우트가 이 잠정정부의 지도자가 됨을 발표했다. 마리츠의 부대는
케이모스를 점령했다. 데 뷔트가 지휘한 라이덴부르크 코만도 부대는 하일브롬의 시가지를 지배하에 두고 열차를 습격하여
정부의 귀중품 및 탄약을 획득했다.
반란점령지의 시민대표자 일부는 반란 부대에 참가하여 주말에는 3,000명의 부대가 되었다. 베이어스도 마갈리스베르크 산지에서
병사들을 모집해 합계 12,000명의 반란군이 재집결했다. 1914년 10월 14일, 남아공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루이스 보타의 지휘하에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던 얀 스뮈츠를 대장을 삼아 반란진압을 개시했다.
남아공 정예군 앞에 10월 24일, 마리츠는 대패하여 독일령으로 달아났다. 10월 28일에 베이어스의 부대는 남아공 연방군의 공격으로
뿔뿔히 흩어졌다가 후에 켐프와 합류했지만 11월 8일에 발르 강에서 익사했다. 데 뷔트는 체포되었고, 켐프는 칼라하리 사막을 한달간
1,100km를 종단하였는데, 그의 부대는 800명 중 300명을 말과 함께 상실하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마리츠와 합류했지만 약 한달 후
남아프리카로 넘어가 1915년 2월 4일에 투항했다.
마리츠의 반란진압 후, 남아프리카군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침공작전을 수행하여 1915년 7월에 이를 정복했다. 1916년에 이스터 봉기
당시 아일랜드 반란군 주모자들을 처형한 것에 반해, 보어인 반란군 주모자는 6, 7년의 금고형과 2천 파운드 전후의 벌금형으로 마무리
되었다.
2년 후, 루이스 보타는 화해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 이들을 석방했다. 그 후 <불굴의 사람>은 합법적인 할동에 전념하여 국민당을
결성했다. 국민당은 1940년대 후기부터 남아프리카의 정치를 지배하여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추진했다가 1990년 초에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와 더불어 여당의 자리를 잃었다.
출처 : 브라이언 번싱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독립과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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