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혁명 - 1910년 ~ 1920년
멕시코 혁명은 1877년 이후 멕시코 대통령의 자리를 지키던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디아스는 1860년대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를 격퇴시킨 영웅 중 한 명이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 정치적으로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반복하고 경제적으로는 무원칙의 외자도입으로 인해 국내 주요산업 대부분을 외국자본에 팔아넘겼다.
외관상으론 이런 외자도입으로 인해 철도부설이 진행되는 등, 산업의 진흥과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반면에 빈부의 차는 극도록 확대되었다. 또, 디아스 정권은 근대적인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토지의 등기제도를 추진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원주민은 원래 토지소유란 개념이 없고, 거의 모든 농민은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마을 공동지에서 경작했다.
디아스는 토지제도의 <근대화>란 명목으로 이러한 소유권이 애매한 토지를 정부가 접수한 후 외국자본과 대농장주에게 매각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멕시코 농민의 99.5%가 토지를 잃고 페옹이라 불린 농업노동자로 전락했다. 토지를 되찾기위한 원주민들의 싸움은
정부군 및 대농장주가 고용한 사병들에 의한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1907년 미국에서 불황이 발생하자 멕시코도 그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데, 발전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멕시코 경제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농장주 가운데는 경영이 악화되어 도산하는 자도 나와서, 많은 농업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광산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쟁의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는 1910년의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다. 이에 대해 디아스의 재선반대를 외치며 입후보한 사람이 신흥
대농장주였던 프란시스코 이그나시오 마데로였다. 마데로는 정치적인 수완보다는 농민측에서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인기가 있어서
30년간 이어진 독재정치로 부패가 극에 달한 디아스 정권에 혐오한 멕시코인들 사이에서 급속히 지지를 넓혀나갔다.
이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디아스 대통령은 <민주적인 선거>라는 근대국가의 체면을 집어던지고 말아, 마데로를 체포하여 투표일을
산 루이스 포토시 감옥에서 맞이하게 했다. 선거가 끝나고 디아스가 대통령에 재선되자, 마데로는 풀려났지만 그는 미국으로 도망해
10월 25일에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을 발표했다.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은 무력에 의해 디아스 정권을 타도하자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미국에 있던 마데로의 주위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이 집결했는데, 그 사이 멕시코 국내에선 마데로에게 동조하는 운동이 차례로 일어났다. 11월 18일에 마데로의 동지였던
아킬레스 세르당이 푸에블라 시에 있던 저택에서 무장봉기의 준비가 발각되면서 경찰에게 구타당한 후 총에 맞아 죽었다.
이를 계기로 멕시코 시의 남쪽 모렐로스 주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무장본기를 일으켰고, 북부 일대에선 프란시스코 비야
(판초 비야), 파스쿠알 올로스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알바로 오브레곤 등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디아스 대통령은 80세를 넘겨
그 정치적 수완은 이전에 비해 떨어져 있어서 측근이 정치를 보좌하는 형국이었다.
반란군이 미국과의 국경 요충지인 시우다 팔레스를 점령하자 디아스의 측근들은 마데로와 거래에 나서, 디아스 한 명을 제물로 하여
체제유지를 획책했다. 마데로도 이 거래에 응하여 곧 전투를 중지하고 정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하는 한편, 디아스는 측근들에게
설득당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1911년 5월에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독재정치로 축출당해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사망한 포르피리오 디아스(좌),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프란시스코 마데로(우)였지만
역시 무능과 사회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벌인 군사정권에 의해 피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마데로 대통령은 농민들 사이에선 인기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농장주 출신의 정치가여서, 멕시코에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여
근대국가의 외형을 만드는 것에 열심이었지만 빈부차의 해소와 토지개혁 등,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개선에는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반란에 참가한 농민들은 빵과 농지를 위해 싸운 것이었다.
혁명에 참가했던 농민들은 마데로의 정책에 실망했다. 그 한편으로, 보수파도 그에 대해 환멸하였는데 기본적으로 마데로는 디아스
같은 정치적 수완이 결여되어 있었다. 최초로 마데로와 결별한 것은 모렐로스 주에서 싸웠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였다. 사파타는
<강탈당한 토지, 삼림, 수리 등의 재산은 정당한 권리를 가진 마을 및 국민들이 바로 소유해야 한다>고 하는 <알라야 강령>을
발표하여 마데로 정권에 반란을 선언했다.
이어서 북부에선 혁명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지만 높은 지위를 가지지 못했던 것에 불만을 가졌던 파스쿠알 올로스코 장군이
보수파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 두가지 반란의 진압에 출동한 자가 디아스 정권에 이어서 군대의 실권을 장악했던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이었다.
1913년 2월 9일에는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 보수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우에르타 장군은 마데로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반란진압에
나섰지만 실제론 진압하는 시늉만 내면서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부대에겐 반란군을 향하여 무모한 돌격명령을 내려 큰 희생을 초래하게
한 후 그 힘을 소진하게 했다. 실은 우에르타는 미국 대사관의 중개로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2월 18일에 우에르타 장군은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 마데로 대통령과 수아레스 부통령을 체포 후 투옥했다. 우에르타 장군은 마데로를
협박하여 목숨은 살려줄테니 대통령직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마데로는 이를 수락하여, 우에르타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약속을
어기고 2월 22일에 마데로와 수아레스를 살해했다.
마데로를 살해하고 대통령직에 오른 군부출신의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하지만 그의 집권은 다시 멕시코에 혼란을 불렀다.
정치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카리스마적인 인기가 있던 마데로 대통령을 살해한 우에르타 장군이 정권을 잡자, 마데로 지지파와
반대파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혁명파가 일제히 우에르타 정권타도를 위한 봉기를 일으켰다. 모렐로스 주에서는 사파타가 다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북부 일대에선 카란사, 오브레곤, 비야의 혁명파가 호헌(護憲) 혁명군으로 집결해 카란사를 <혁명의 제 1 통령>
으로 무장봉기를 했다.
가운데서도 가장 활약한 것이 치와와 주에 있던 프란시스코 비야의 호헌혁명군 북부사단이었다. 비야는 1913년 10월에 계략으로
미국과의 국경인 시우다 팔레스를 탈취하여 이어서 주도 치와와 시를 점령해 치와와 주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한 다음 수도를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여 1914년 4월에는 토레온, 6월에는 사카테카스를 점령하는 쾌속진격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 사이, 우에르타 정권타도라는 목표로 합류한 혁명파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호헌혁명군의 <제 1 통령>이던 카란사는
대농장주 출신으로, 혁명 전에는 코아우일라 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그는 마데로처럼 민주적인 제도를 멕시코에 도입하는 것에는
열심이었지만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의지는 없었다.
한편, 군사적인 공로자였던 비야는 극빈한 생활로 마적이 되었다가 이윽고 혁명군에 참여한 이른바 <비천한 출신>으로 사상적인
배경은 강하지 않았지만 대농장주에 대한 강한 적의에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호헌혁명군과 별개로
독자적인 입장에서 싸웠는데, 그도 일관되게 농지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양자의 대립은 혁명군이 멕시코시티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혼란스런 상태로 변했다. 두 파의 사이에서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한 자가
호헌혁명군의 북서사단을 이끈 오브레곤 장군이었다. 그도 대농장주였지만 카란사와 마데로처럼 대대로 대농장주는 아닌, 가난한
생활에서 자수성가하여 부를 쌓은 인물로 생각이 유연하여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개선과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잘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조정 노력은 불발로 끝나, 두 파의 관계는 회복이 불능하게 되자 오브레곤은 카란사파에 접근했다. 카란사는 비야에게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거나, 철도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비야의 전법을 막기 위해 석탄 공급을 하지 않는 등, 그를 얽매었다.
그러던 사이인 1914년 8월에 오브레곤과 함께 수도인 멕시코시티로의 입성을 거두었다. 우에르타는 사임 후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판초 비야(좌)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우), 멕시코 혁명의 수뇌들이었지만 생각하는 노선은 달라 충돌로 이어졌다.
혁명군은 승리했지만 비야, 사파타 파와 카란사, 오브레곤 파의 대립은 결정적이었다. 1914년 10월에 혁명군의 대표자를 모아
<아과스칼리엔테스 회의>가 열렸다. 비야와 사파타는 이 회의에서 공동전선을 조직해 다수를 점한 사파타의 세라야 강령을
혁명의 공동강령으로 채택하여 카란사와 비야의 동시퇴진을 결정했지만 카란사는 이를 무시하고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즈로
달아나 비야, 사파타 파와의 전투에 돌입했다.
이 해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카란사, 오브레곤파가 철수한 수도 멕시코시티에 비야와 사파타 파가 차례로 입성했지만 두 사람 모두
멕시코시티에서 정권을 잡을 의지가 없어, 바로 수도를 포기했다. 카란사파는 힘들이지 않고 수도를 탈환하여 다시 비야파를 쫓아
서쪽으로 진격했다.
카란사파와 비야파는 1915년 4월 5일부터 6일, 13일과 14일에 걸쳐 과나후아토 주 세라야에서 격돌했다. 카란사파는 오브레곤이
지휘하는 북서사단 병력 약 11,000명에 화포 13문과 기관총 86정이 있었고, 비야파는 북부사단 병력 22,000명에 야포 30문 이상으로
병력은 비야의 북부사단이 우세했지만 오브레곤군의 기관총 86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4워 5일과 6일 전투에서 일시 오브레곤군이 패배하여 후퇴하는듯이 보였지만 최종적으로는 비야가 자랑하던 기마돌격 전술을
기관총으로 격퇴함으로서 반격에 성공했다. 이어서 13일과 14일의 전투에선 오브레곤이 제 1차 세계대전의 새로운 전법을 도입하여
전장에 참호와 철조망을 치고 비야의 기마돌격을 저지한 후 기관총으로 섬멸했다.
일방적인 살육에 비야군은 붕괴하여 전사 4천명, 포로 5천명을 내고 화포를 모두 상실한 채 퇴각했다. 멕시코 혁명의 마지막 승패를
가린 이 전투에서 카란사파는 주도권을 잡아 5월에 트리니다, 6월에 레온을 점령하고 비야의 북부사단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하지만
6월의 레온 점령당시 비야파가 쏜 대포가 오블레곤의 진영을 때리면서 오브레곤은 한쪽 손이 절단당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지배권을 잡은 카란사였지만 그의 파벌중에서도 새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카란사파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서둘렀는데, 카란사파
진영의 장군들이 제정한 헌법은 카란사의 생각과는 달리 사유재산 절대사상을 부정하고 대토지 소유자에게 국가가 개입해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길을 열고 노동자의 권리보호를 주장하는 등 카란사의 적이었던 비야와 사파타의 주장을 대폭으로 수용한 진보적인 것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을 규합해 군을 실제로 이끈 장군들은 뒤에서 명령만 내린 카란사와 달리, 멕시코의 민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훗날 멕시코 정치체제의 기본이 된 1917년 헌법이다. 혁명정권은 강력한 기반을 가진 카톨릭 교회를 적대시하여
정교분리 정책을 추진했다. 1917년 헌법에선 외국인 사제의 활동과 종교교육 이외의 교육관여가 금지되었다.
카란사는 사실상 이 헌법의 내용을 무시하고 정치를 진행했다. 비야파가 와해된 후 모렐로스 주의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1919년 4월 10일에 <사파타 파로 돌아섰다>며 칭하고 접근해 온 정부군 장교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비명에
가고 말았다.
그 사이, 카란사의 구심력은 급속히 저하되어, 실질적으로 비야파와의 전투를 지휘하고 유연한 사고로 농지개혁 등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던 오브레곤 장군의 인망이 높아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카란사는 오브레곤을 정부에서 쫓아내고, 그런 후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것도 방해하여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 1월에 오브레곤은 고향인 소노라 주로 도망하여 4월에 카란사에 대한 반란을 선언했다. 거의 모든 장군들은 오브레곤에
가담하여 비야파와 사파타 파의 잔당도 오브레곤에 가세했다. 약 한 달만에 카란사 대통령은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 달아나 항구도시인
베라크루즈로 향했지만 베라크루즈 주지사도 오브레곤파여서 카란사는 푸에블로 산 속으로 도망치다가 반란군의 총에 맞아죽고 말았다.
카란사를 몰아내고 혁명의 혼란을 수습한 알바로 오브레곤, 하지만 그도 최후는 암살이라는 피로 얼룩진 인생이었다.
최종적으로 승자가 된 오브레곤은 1920년 6월의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 사이 오브레곤은 비야파와 사파타 파의
잔당과 평화협상을 체결하여 두 파 모두 무기를 놓았다. 허나 판초 비야는 1923년 7월 23일에 비서와 호위를 태운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하던 중에 누군가에 의한 총격을 받고 숨졌다.
거의 같은 시기, 오브레곤의 후속 대통령의 자리를 둘러싸고 그의 충실한 부하로 오브레곤이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임시 대통령으로 일한 적이 있던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재무장관이 반란을 일으켰다. 일시 데 라 우에르타가 우위를 잡았지만
마지막엔 오브레곤이 승리했다. 이 반란을 끝으로 멕시코 혁명의 전란은 이후 크리스텔로의 반란 등 약간의 전투 외엔 거의 종결되었다.
1928년에 오브레곤은 대통령의 재선거 금지를 규정한 1917년 헌법을 강제로 개정하여 2번째로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다. 대립후보를
차례로 말살한 디아스와 같은 수법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오브레곤은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 카톨릭 교도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이를 전후로 하여 1927년부터 1929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카톨릭 교도에 의한 반란이 줄을 이었다. (크리스텔로 반란) 한편 이후
멕시코 헌법은 다시 개정되어 대통령은 재선거 금지가 원칙이 되어 이후 대통령은 두 번 집권한 자는 없다. 오브레곤의 사후,
권력을 잡은 자는 가난한 교사 출신으로 자칭 <사파타 파>인 카예스였다.
카예스는 오브레곤이 두 번째 대통령직에 당선되기 전에 그의 괴뢰로서 대통령으로 일했지만 오브레곤의 사후, 그가 역대 대통령의
괴뢰로서 정치의 부패가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은 1934년에 라사로 카르데나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라사로 카르데나스는 강력한 좌파정책으로 민중의 인기를 샀지만, 소련과 친교하고 석유의 국유화 등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적대하여 멕시코의 대외적 갈등을 유발했다는 비난도 받고있다.
1934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카르데나스도 카예스가 괴뢰로 선택한 인물이었지만 당선된 이후 카예스와 부패한 혁명정권의 흑막,
노동군주로 군림한 조합간부를 차례로 추방하고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부패했던 기존 노동조합을 대신하여 공산주의자였던
롬바르트 트레다노를 지원하여 새로운 노동조합 멕시코 노동자 연합 CTM을 조직했다.
또, 1917년 헌법의 규정에 따라 진행이 더디었던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외국자본하에 있던 철도와 석유산업의 국유화에
착수했다. 석유산업의 국유화는 미국의 맹렬한 반발을 샀지만 카르데나스는 이를 단행했다. 1936년에 스페인에서 내전이 시작되자
카르데나스 정권은 스페인 공화국의 인민전선 정부와 국제여단을 소련과 함께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 후에는 패배한 인민전선의 망명자 1만 명 이상을 받아들였다. 1940년에 카르데나스의 임기가 끝남과 함께 멕시코의 혁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출처 : 안나 마르시아스 <멕시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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