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루 전쟁 - 1879년
영국과 줄루 왕국의 충돌
줄루 왕국은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크와줄루 나탈주에 살던 반투어 계열 민족의 국가였다. 19세기 초에는 위대한 줄루족의
왕인 샤카에 의해 건국되어 혁신적인 군사 시스템 등도 도입하였다. 1817년부터 1819년에 일어난 줄루 내전에서 샤카 왕은
은두완데 왕국을 격파했다.
1822년에 샤카 왕이 이끈 줄루인은 크와줄루 나탈주에 살고있던 소더벨인을 공격하였는데, 소더벨인은 현재의 트란스발 중앙부와
프레토리아 근교로 달아났다. 샤카 왕은 주변 부족을 정복하여 줄루 왕국의 영역을 튜겔라 강에서 퐁골라 강 유역까지 확대하였다.
하지만 1828년에 폭군이었던 샤카는 암살당하였는데, 암살자 중 한명이었던 동생, 딩가네 카셍장가코나가 왕이 되었다.
이 때,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에서는 보어인(네덜란드계 이주민)이 영국의 통치에 혐오하여 집단으로 북상을 시도했다. 1835년부터
시작된 이 그레이트 트레킹(내륙 대이동)에서 보어인들의 집단은 이주지를 구하기 위해 원주민 부족과 충돌을 반복했다. 1838년
2월 17일에 화가 난 딩가네는 위넨 학살로 250명의 보어인을 죽였다.
12월 16일에 폴트렉커스는 브랫 리버 전투에서 줄루족을 격파하고 그 자리에 나탈 공화국을 건국했다. 싸움에 패한 딩가네 왕은
위신이 추락하여 1840년에 퇴위해, 무판데 카셍장가코나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영국은 보어인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아
나타 공화국으로 군대를 보내어 1845년에 이를 케이프 식민지로 합병했다.
불만을 품은 보어인들은 북동으로 이동해 1852년에 바르 강 이북에 트란스발 공화국(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건국했다.
오렌지 강 이북에도 오렌지 자유국이 건국되었다. 내륙의 통치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기에 이를 싫어한 영국정부는 두 나라를
인정하였다.
1856년에 줄루 왕국에서는 무판데 왕의 아들인 무브야지와 세테와요가 내전을 일으켰는데, 세테와요가 승리하여 정식으로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1872년에 무판데 왕이 사망하면서 세테와요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줄루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한 세테와요는
숙부였던 샤카 왕의 전술을 가능한 한 부활시켜 몇 개의 부대엔 총기로 무장시켰다.
세테와요는 트란스발 공화국과의 분쟁중에 트란스카이의 코사 족에게 반란을 부추기기도 했는데, 세테와요는 나탈 원주민 고문담당
장관이던 테오피르스 솁스턴과 친교가 있어 영국과의 관계는 비교적 평온했지만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의 활동은 세테와요에게 있어선
불쾌한 것이었다.
세테와요는 선교사들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몇 명의 개종자들은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으로 선교사들은 영국에 줄루 왕국이
기독교도를을 학살했다면서 진정을 했는데 스플루더 주교는 편지에서 <세테와요는 유능한 사내지만 냉혹하고 자만심이 강하며
잔인하고 불성실하다. 이제까지의 왕 중에서 가장 최악이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줄루 왕국의 사이는 나빠지고 말았다.
당시 줄루 왕국의 국왕이었던 세테와요 캄방데
1874년에 성공리에 캐나다 연방을 성립시킨 영국의 헨리 허버트 카나본 식민지 장관은 같은 모양새로 남아프리카에서 식민통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이 계획을 위해 버틀 플레어가 고등변무관으로서 남아프리카로 보내졌다. 영국의 식민지 계획에서 가장 장애가
된 것이 트란스발 공화국과 줄루 왕국의 존재였다.
1876년 9월에 줄루 왕국에서 여자의 대량학살(원인은 다른 연령의 남자전사와 결혼하라는 세테와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동년의
남자들과 결혼했다는 이유로)에 대해 나탈 행정부가 강하게 항의했지만 현지 행정부는 관할인 아프리카 각국의 문제에 대해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세테와요와 트란스발 공화국은 국경문제로 여러 번 일으켰다. 세테와요의 친구였던 나탈 원주민 고문담당 장관인 테오피르스
셉스턴은 국경문제에서 그를 지지했다. 1877년에 셉스턴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트란스발로 건너 가 보어인들에게 독립을 폐기하라고
설득하여 이에 응한 트란스발은 영국에 병합되었다.
트란스발의 행정관이 된 셉스턴은 입장을 바꾸어 보어측의 이익을 앞세워 국경문제를 담당했다. 그는 한 술 더 떠 줄루 왕국이야말로
영국의 위협이라고 고등변무관인 플레어에게 보고했다. 플레어는 줄루족과의 전쟁은 연방화를 위해선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여 영국군
남아프리카 최고사령관이던 첼름스퍼드 중장도 이같은 생각에 동의했다.
허나 1878년에 카나본을 대신하여 식민지 장관이 된 마이클 힉스 비치는 줄루족과의 분쟁은 협상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 영국군이 아프간 전쟁에 동원되었던 사정도 있었다. 식민성에서는 인도와 근접한 아프가니스탄 쪽이 남아프리카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군 남아프리카 최고사령관이었던 첼름스퍼드 남작 프레드릭 테시어 중장.
1878년 2월에 트란스발과 줄루 왕국과의 국경문제에 대한 보고위원회가 나탈 총독인 헨리 브루워에 의해 임명되었다.
보고서는 7월에 제출되었는데 이는 줄루측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 보고를 <이방적이고 보어에 대한 부정이다>라고
생각한 플레어 고등변무관은 줄루족과 과년된 토지에서 보어인이 퇴거하려면 보상을 해야 하며 만약 잔류시엔 보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세테와요는 영국측의 도발적인 태도에 신경이 쓰여, 트란스발 및 나탈 국경에서 줄루족에 의한 위법행위를 인정했다.
플레어를 지지하는 첼름스퍼드 중장은 1878년 2월에 최고사령관이 되어 코사족과의 국경분쟁에서 승리했다. 첼름스퍼드는
크림 전쟁과 인도에서 싸운 전력이 있었으며 원래가 참모장교 출신이었기에 야전 지휘관의 경험도 풍부했다.
플레어는 나탈의 모든 부대를 동원했다. 영국 본국정부는 예상된 줄루족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방침을 승인했다.
11월 11일에 첼름스퍼드는 브루워 총독으로부터 7,000명의 아프리카인 모집허가를 받고 아프리카 병사들로 구성된 보조부대를
편성했다.
1878년에 플레어는 두 명의 줄루족 전사가 두 명의 나탈 여성과 눈이 맞아 넘어갔다는 세세한 국경침범을 구실로 하여
줄루족에 대해 배상으로 소 500마리를 요구했다. 세테와요는 이에 50파운드에 상당하는 금을 보냈다. 그런데 두 명의 측량기사가
줄루족에게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플레어는 보다 많은 배상을 요구했지만 이번엔 세테와요는 이를 거부했다.
플레어는 다시 사신을 보내 요구를 전달했는데, 트란스발이 영국의 통치하에 들어가 있고 남아프리카 연방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줄루 왕국뿐이라는 확신에 플레어는 줄루 왕국과의 협정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플레어의 이러한 행동이 본국정부에서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감안하여 예기된 사건의 상세한 보고도 늦추어 12월 11일에 줄루측 대리인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최후통첩을 보내며 31일까지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최후통첩의 13개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측량기사를 잡은 범인을 나탈 재판소에서 재판하도록 건넬 것.
2. 상기의 범행 및 세테와요가 재판소 명령에 따르지 않은 배상으로 소 500마리를 지불할 것.
3. 측량기사에 대한 위법행위에 대한 배상으로 소 100마리를 지불할 것.
4. 스와지 족장 소빌리나이를 트란스발 재판소에서 재판하도록 인도할 것.
5. 즉위시의 약속을 엄수할 것.
6. 줄루군은 해산하여 남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낼 것.
7. 기존 줄루군 제도는 폐지하고 영국과 상담하여 별도의 군제를 채용할 것.
8. 집으로 돌아간 남자들은 결혼시킬 것.(실질적인 징병금지)
9. 1877년에 이전 줄루에 거주하던 모든 선교사와 개종자들을 그들의 요망대로 귀환시키며 원래 주택을 제공할 것.
10. 선교사들의 설교를 허락하며 가르침을 열망하는 줄루족은 자유롭게 입신하게 할 것.
11. 상기의 조건을 감독하도록 영국인 대리인의 주재를 허가할 것.
12. 선교사 및 유럽인에 관한 모든 분쟁은 변무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왕이 공개적으로 청취한다.
13. 변무관의 동의없이 줄루 왕국에서의 추방형은 실시하지 않는다.
플레어는 줄루족과의 분쟁을 이끌어 내길 내심 바랬는데, 결국 그 목적은 달성되었다. 세테와요는 12월 11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연말까지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1879년 1월 11일에 영국 본국정부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영국군의 승리와 줄루 왕국의 굴복
세테와요가 답변을 하지 않자, 1879년 1월 11일에 첼름스포드 중장이 이끄는 영국군은 본국정부의 허가를 받지도 않은 채
줄루 왕국으로 침공했다. 영국군은 유럽계 병사 11,300명, 아프리카계 병사 5,800명으로 5개의 종대를 편성하였는데
제 1종대는 찰스 피어슨 대령의 4,750명, 제 2종대는 앤서나 댄포드 중령의 3,871명, 제 3종대는 리처드 그린 대령의 4,709명,
제 4종대는 에블린 우드 대령의 1,656명, 제 5종대는 휴 로렌스 대령의 2,278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제 2종대는 나탈 방어에 보내졌고 제 5종대는 유트레히트 지구에 주둔했다. 제 1, 3, 4종대는 줄루 왕국으로 침공했는데
피어슨 대령의 제 1종대는 튜겔라 강 하류를 도하하여 해안을 따라 진군해 에쇼베를 목표로 했다. 에블린 우드 대령의 제 4종대는
유트레히트 지구를 출발해 브래트 강을 도하하여 북서부를 진군해 캉블라로 향했다.
가장 강력했던 제 3종대는 명목상 그린 대령의 지휘였지만, 실제로는 첼름스포드 자신이 이끌었다. 3종대는 수도인 울룬디를
목표로 했다. 줄루군은 약 4만의 병력이었는데 이는 1,500~4,000명의 연대로 구성되었다. 전사집단은 그 규모에 관계없이
임피(IMPI)라 불리웠는데, 줄루 왕국의 건국자인 샤카 왕은 <들소의 뿔>이라 불린 전술을 고안했다.
임피는 3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뿔>집단은 젊고 경험이 적은 전사들로 구성되어 적을 주로 포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슴>은 최대의 집단으로 적의 정면에서 공격하는 부대였으며, <사자>는 예비부대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베테랑
전사의 집단이었다.
줄루족 전사는 긴 창을 장비하여 전쟁 초기엔 총기를 소지한 전사는 극히 일부였다. 그리고 총도 구식의 뇌관식인 머스켓 총으로
줄루 국내에서는 정비할 수 없어서 총기상태도 최악이었다. 세테와요는 총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878년에 명중률을 올리기 위해
훈련을 명령했다. 개전 이후에는 영국군으로부터 포획한 최신총기를 사용했다.
줄루군은 병력 숫자와 사기, 지도력과 기동성에서 병기의 열세를 커버했다.
초기 줄루족 병사들은 창과 방패로 무장했지만 전쟁 이후 총기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졌었다.
영국군 3개 종대는 아무런 방해없이 진군하여 1월 22일에 제 3종대는 이산들와나 근교에 야영했다. 이 날 아침, 첼름스포드 중장은
정찰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분할하여 출동했다. 첼름스포드가 야영지를 떠난 후엔 헨리 플레인 중령이 야영지의 지휘를
맡았다.
댄포드 중령의 제 2종대의 일부인 500명이 도착하여 야영지의 병력은 유럽병 800명, 아프리카병 900명이 되었다. 허나 첼름스포드는
지면이 굳은 관계로 야영지의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줄루군의 근접 정보도 무시해버렸는데 이것이
화를 불렀다.
오전 11시 30분에 줄루군 2만이 이산들와나의 야영지로 돌격을 감행해왔다. <들소의 뿔>이라 불린 줄루군의 세 방향에서의 맹공을
영국군은 막을 수 없어 유럽병 806명, 아프리카병 471명이 전사하면서 전멸했다. 줄루군도 3,000명이 사상했었지만 이산들와나 전투는
줄루군에 있어서 최대의 승리였다.
23일 새벽에 이산들와나에서 15km 지점의 록스 드리프트 전도사 자리에 지어진 영국군 요새에 줄루군 4천명이 기습해왔다.
존 차드 중위의 수비대는 아프리카 병사들이 도망해버려 영국병사 139명 뿐이었다. 40대 1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분전해
이틀간을 버티어냈는데, 이산들와나에서 퇴각해 온 첼름스포드의 부대가 접근하자 줄루군은 후퇴했다.
당시 희생자는 영국군이 전사 13명에 부상자 14명, 줄루군이 전사 351명이었다. 이 공적으로 차드 중위 이하 수비대 장병 11명은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이산들와나의 패배소식은 백인 이민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번져나가 이들은 방어를 강화하거나
보다 안전한 피터 마리츠버그나 더반으로 달아났다. 영국은 나탈침공을 우려했지만 줄루군은 이미 5천명을 상실하여 여력이 없었다.
첼름스포드의 제 3종대가 교전하던 사이, 해안선을 따라 진군하던 찰스 피어슨 대령의 제 1종대는 튜겔라 강을 넘어 냐잔 강에서
습격을 시도하던 줄루군과 소규모의 경합 후에 전진을 계속하여, 에쇼베의 전도소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여기서 이산들와나의
참패소식을 들은 피어슨은 튜겔라 강까지 후퇴를 계획했지만 실행을 주저하는 사이 줄루군이 보급선을 끊어 에쇼베에 포위되고 말았다.
한편, 유트레히트를 출발한 에블린 우드 대령의 제 4종대는 줄루 왕국의 북서부에서 줄루족을 제압하면서 수도 울룬디 점령을 목표로
중앙종대의 전진을 확보하는 것이 본래 임무였다. 이 목적을 위해 우드는 줄루군 4천명이 포진한 프로벤 산에서 남쪽 10마일 지점의
틴탄즈 마을에 야영지를 구축했다.
그는 1월 24일에 공격을 계획했지만 이산들와나의 패배소식을 듣고 후퇴했다. 그 결과, 영국군은 침공개시 후 고작 한 달이 지났지만
제 4종대 외엔 전력을 잃고말아 계속 작전을 수행하기엔 무리였다. 하지만 이산들와나 전투의 패배는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영국 본국에서는 보복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하지만 영국정부의 전쟁에 대한 태도는 불명확한 것이었다. 플레어와 첼름스포드가 공명심에서 일으킨 전쟁에까지 정부는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이 때문에 비치 식민성 장관은 플레어에게 줄루 왕국의 병합을 금지하고 다시 협상하여 해결하도록 명령했다.
세테와요는 즉각 협상에 임했지만 플레어와 첼름스포드는 본국과의 연락에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고는 이를 무시했다.
한편 영국군 내부에서는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첼름스포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더하여
록스 드리프트의 장병 13명에게 최고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수여된 것도 너무 과하다는 불만의 의견도 있었다. 그 한편으로
대영제국의 위신을 지키며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줄루에 대해 확실한 승리를 거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정부는 첼름스포드가 이전부터 요구한 보다 많은 증원부대의 파견을 결정했다. 첼름스포드는 약 2개월 동안
부대 재편과 새로운 침공군의 편성에 공을 들여, 먼저 엥쇼베에 포위된 피어슨 부대의 구출을 계획했다. 본국정부는 2개 포병중대를
동반한 7개 연대를 급히 나탈로 보냈다. 이에 3월 7일에 증원 제 1진이 더반에 도착했다.
그 사이인 3월 12일, 룬즈부르크로 행하던 보급부대가 인톰베 강에서 줄루족의 습격을 받아 전멸하고 보급물자를 뺏기고 말았다.
첼름스포드는 유럽병 3,400명, 아프리카병 2,300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에쇼베의 구출로 향했다. 이번에는 지난 번의 과오를
거울삼아 매일 밤마다 진지를 구축하면서 전진했다.
첼름스포드는 우드의 부대(675명)에게 플로바네에 있는 줄루족 요새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3월 28일에 일어난 플로바네 전투에서
레드버스 블러 중령이 플로바네를 공격했지만 줄루군 본대 2만 6천명이 내습하여 영국군은 격퇴당하고 줄루군이 승리했다. 이 때
아프리카인 부대를 상실한 것에 더해 400명의 유렵병사 중 100명이 사상당했다.
다음 날, 2만 5천명의 줄루족 전사가 캉블라의 우드군 야영지(2,068명)로 습격해 왔다. 영국군은 캉블라 전투에서 미리 진지를 구축한
덕택에 5시간의 격전 후 줄루족을 쫓아냈다. 영국군은 26명이 전사했지만 줄루족은 2,000명이었다. 이것은 줄루군에게 결정적인
아픔이 되었다.
우드가 싸우던 사이, 첼름스포드의 종대는 에쇼베로 진군을 계속했다. 4월 2일에 종대는 긴긴도르브에서 줄루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격퇴했다. 줄루군의 피해는 커서 약 1,200명이 전사했다. 한편 영국군은 2명이 전사하고 52명이 부상했을 뿐이었다. 다음날 영국군은
피어슨의 부대를 구출한 후 4월 5일에 에쇼베를 떠났다. 그 후 줄루족은 에쇼베를 불태워 초토화시켜 버렸다.
새로이 영국 남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거넷 우즐리 중장.
영국군 내에서는 무능한 첼름스포드에 대한 비난이 높아져, 결국 5월 22일에 첼름스포드를 해임하고 대신 거넷 우즐리 중장을
후임 남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결정했다. 우즐리는 과거에 식민지 전쟁에서 풍부한 전력을 거둔 적이 있었는데, 당시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새로 획득한 키프로스의 고등변무관이었다. 긔고 1875년엔 나탈의 총독으로 일한 경험도 있었다.
비치 식민성 장관은 될 수 있는 한 분쟁의 빠른 해결을 요망하여, 우즐리에게 무력에 의존하지 말고 협상에 의한 해결도 포함한
전권을 부여했다. 동시 줄루 왕국의 병합도 금지했다. 이에 플레어가 생각한 남아프리카의 연방화 구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즐리는 5월 30일에 영국을 출발했지만 바닷길이 험난하여 임지에 도착하기엔 3주가 걸렸다.
침공의 재개는 영국군에게 있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캉블라, 긴긴드로브, 에쇼베 등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1월에 처음 침공을 개시했던 지점까지 후퇴했다. 허나 첼름스포드는 자신의 군사적 명성을 지키기 위해 우즐리가 도착하기
전에 세테와요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괴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보다 많은 부대가 도착하자 첼름스포드는 부대를 재편해 6월에 침공을 재개했다. 그는 제 1사단(헨리 포드 클리락 소장),
제 2사단(에드워드 뉴디게이트 소장), 별동대(우드 준장)로 군을 편성했는데, 클리락 소장의 제 1사단은 해안을 따라 진군하고
뉴디게이트 소장의 제 2사단과 별동대는 록스 드리프트를 넘어 내륙부로 향하여 캉블라를 경유해 수도 울룬디로 향했다.
초기 전투에서 영국군의 전사자 한 명은 프랑스 황제자리를 청구했던 나폴레옹 우제느 황태자였다. 영국군에 지원했던 그는
6월 1일에 정찰부대에 참가하여 출동했다가 변을 당했다. 세테와요는 새로 증강된 영국군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는
화평조약의 협상을 타진했다.
하지만 우즐리의 도착이 임박해지자 첼름스포드는 협상의 생각이 없었다. 그는 줄루군의 주력을 격파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수도인 울룬디로 전진했다. 7월 4일에 포병대와 개틀링포로 지원받은 제 2사단과 우드의 별동대 5,317명이 울룬디 전방에 도착했다.
영국군은 약 2만 남짓한 줄루군과 충돌해 마지막 결전이 울룬디 전투로 이루어졌다.
영국군은 보병을 2열, 기병과 원주민 보조병을 안쪽에 둔 진을 치고 줄루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진형은 울룬디로 전진하여 오전 9시에
줄루군과 충돌했다. 줄루 전사들의 파상공세는 소총사격 앞에 쓰러졌는데 줄루군이 혼란한 틈을 타서 기병대가 진형에서 출격해
줄루군을 베어넘겼다. 전투는 2시간만에 영국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영국군은 전사 12명, 부상 70명인 것에 반해 줄루군은 1,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줄루군은 패주하여 달아났는데 울룬디는 소각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울룬디에서의 패전으로 줄루군은 흩어져 세테와요도 달아났다. 7월 17일에 현지에 도착한 우즐리 장군이 지휘권을
첼름스포드로부터 인계받은 후 첼름스포드와 우드 등은 영국으로 귀국했다.
부족장들은 영국군에 귀순을 신청해왔다. 8월 28일에 세테와요는 붙잡혀 케이프타운으로 보내졌다. 줄루족에 대해 그의 폐위가
선언되어 우즐리는 줄루 왕국에 새로운 정치방식을 도입했다. 샤카 왕족은 물러나 줄루 왕국은 세테와요의 라이벌이었던 지헤브를
포함한 11명의 줄루족 수장과 백인 모험자로 세테와요의 고문이던 존 댄, 그리고 전쟁에 공헌한 바스트족 수장인 흐루비의 13개 지구로
분할되어 영국에 의한 간접통치 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분할된 줄루 왕국의 옛 땅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1883년에 영국에 체류하던 세테와요의 염원이 받아들여져 그의
복위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지헤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세테와요와 내전을 일으켰다. 지헤브는 울룬디를 공격하여 불태워버렸는데
이에 세테와요는 다시 영국의 비호하에 들어갔다가 이듬 해인 1884년에 사망했다.
이 해, 세테와요의 아들인 디누줄루 카세투슈와요가 보어인의 힘을 빌어 공화국을 세운 후 지헤브에게 승리했다. 보어전쟁 중이던
1885년에 디누줄루의 나라는 보어인의 트란스발 공화국에 합병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줄루 왕국도 1887년에 나탈 식민지에
병합되었다.
디누줄루는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했다. 이리하여 줄루족의 독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06년에
밤바사 폭동이 발발하여 줄루족이 봉기했지만 이는 곧 진압당하고 말았다. 1910년 5월 31일에 줄루 왕국의 땅에는 영국의 자치령인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하였다.
출처 : 이안 나이트 <줄루 전쟁>,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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