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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普仏戦争,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 - 1870년 ~ 1871년 --2

구름위 2013. 12. 1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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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 (普仏戦争,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 - 1870년 ~ 1871년

 

 

 

프랑스 제 2 제정의 몰락과 공화 신정부의 협상거부

 

 

프로이센군이 맹진격하는 한편으로, 13만의 프랑스군은 전선에서 몇 번의 패배를 만끽한 후 메스의 요새에 몰려있었다.

샤론에 있던 우군과 연대하기 위해, 메스를 벗어나려던 프랑스군의 움직임은 프로이센군의 오스카 폰 브루멘탈 소령이 지휘하던

기병정찰대에게 발견되었다.

 

프랑스군의 퇴각에서 4일 후인 8월 16일에 콘스탄틴 폰 알벤슬레벤 장군의 프로이센 제 2군 제 3병단의 3만 병력은 마르스 라 투르

동쪽의 비옹빌 부근에서 프랑스군을 발견했지만 병력으로는 꽤 열세였다. 병력은 약 4 대 1이었지만 제 3 병단은 모험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대비하지 못한 프랑스군은 후퇴하여 제 3병단은 비옹빌을 점령하고 서쪽으로의 퇴로를 차단했다.

 

메스 요새의 프랑스군은 퇴각이 저지되어, 혈로를 찾을 수도 없었다. 여기서 서유럽에서는 최후로 여겨지는 대규모의 기병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즉각 이루어져 제 3병단은 숨돌릴 틈도 없이 기병돌격을 감행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고 분쇄당하고 말았다.

한편 프랑스군도 같은 정도인 16,000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의연하게 압도적인 숫적 우위에 있었다.

 

8월 16일에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방어를 뚫고 탈출할 수 있는 찬스가 있었다. 프랑스군은 전위를 공격했던 2개의 프로이센 병단을

퇴각중이던 무즈 방면의 프랑스군 후위라고 여겼다. 이러한 오해가 있어 2개의 프로이센 병단은 프랑스군 전군을 약 하루동안 발을

묶게 했다. 병력은 5 대 1이었지만 프로이센군의 빈틈없는 맹공격으로 우유부단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이에 프랑스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 쥘 기회를 잃고 말았다. (마르스 라 투르 전투)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가 이끄는 독일 연합군은 북독일 연방의 프로이센 제 1군과 제 2군으로, 그 병력은 210개 보병대대, 133개 기병대대, 중포 732문에 장병 188,332명이었다. 프랑소와 아시르 바제느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의 라인군은 183개 보병대대, 104개 기병대대, 중포

520문에 장병 112,800명으로, 남측의 로젤류 마을 부근에 좌익을 두고 북측의 상플리바에 우익을 두면서 고지를 따라 참호를 파고

포진했다.

 

8월 18일 오전 8시에 몰트케가 제 1군, 제 2군에게 프랑스군 진지로 전진을 명령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2까지 만슈타인 장군이

제 25사단의 포병과 함께 공동으로 아만베 마을 앞에서 전초전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전날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참호와 사격호의

구축에 시간을 쏟는 한편으로 포병대와 미트라유즈 부대를 복병으로 두었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전진을 알아채고 진군중이던 독일군의 집단에 대해 명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전투초반의 경과는 샤스포 총을

유리하게 활용한 프랑스군의 우세로 보였다. 하지만 크루프 후장전포를 장비한 프로이센의 포병은 우수했다. 14시 30분까지 제 1군

사령관이던 슈타인메츠 장군은 망스 계곡을 횡단하는 형국으로 제 8병단을 일방적으로 전진시켰지만 프랑스군 진지에서 날아 온

샤스포 총과 미트라유즈의 사격으로 계곡 안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15시에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군 제 7병단, 제 7병단의 대포가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공격은 아군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에

슈타인메츠는 제 7병단에게 전진을 명하고는 다시 제 1 기병사단도 전진시켰다. 16시 50분까지 프로이센군에 의한 남쪽에서의 공격은

좌초될 위기였기에 프로이센 제 2군의 제 3 근위보병여단이 카론벨 장군의 지휘하에 있던 상플리바의 프랑스군 진지에 공격을 개시했다.

 

17시 15분에 프로이센 제 4보병여단이 가세하면서 다시 17시 45분에는 프로이센 제 1 근위보병여단도 참가했다. 프로이센 근위여단의

공격은 프랑스군의 사격호와 참호에서의 맹렬한 공격으로 그 자리에 발이 묶였다. 18시 15분에 프로이센 제 1 근위보병사단의 뒤에 있던

제 2 근위보병사단도 상플리바 공격에 가세했다.

 

한편 슈타인메츠는 제 1군 예비 마지막 부대에게 망스 계곡을 횡단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18시 30분까지 제 7병단과 제 8병단의

상당 수는 전선을 이탈하여 르종빌의 프로이센 진지로 퇴각했다. 제 1군의 퇴각으로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는 근위사단의 공격마저

실패하는 것은 막기 위하여 상플리바의 카론벨의 진지에 대해 대량의 포격을 명령했다.

 

19시까지 제 2군 제 2병단의 제 3사단은 계곡을 횡단하여 진격하는 한편, 제 12병단은 근처의 랑쿠르 마을을 초토화한 후 제 1 근위

보병여단의 병력과 함께 폐허가 된 상플리바에 공격을 걸었다. 20시에 프로이센 제 2병단의 제 4 보병사단이 도착하여 프로이센

우익의 망스 계곡전선은 교착되었다.

 

이 때까지, 프로이센 제 1근위보병사단, 제 12병단, 제 2병단은 상플리바를 점령하여 패한 프랑스군은 퇴각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전투에서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프랑스군은 여기서 반격을 노렸다. 하지만 샤를르 데니스 보우바키 장군은

프랑스군 고참 근위대의 예비대에게 공격명령 하달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 때까지 그는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 <패배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22시까지 전쟁터의 총성은 밤늦게서야 조용해졌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의 라인군은 전투로 피곤해진 프로이센군에게 공격을 걸지않고

메스로 후퇴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메스에서 포위당하여 2개월 후 항복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의 피해는 특히 공격측이던 프로이센

군에게 막대했다. 8월 18일의 전투에서 도합 20,163명의 독일병사가 전사하거나 부상, 행방불명이 되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7,855명 전사, 4,420명이 포로가 되어 도합 12,275명이었다. 대부분의 프로이센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샤스포 총에

사망했고 대부분의 프랑스군 병사들은 프로이센의 크루프 포에 사망했다. 프로이센 근위보병사단의 피해는 놀랄 정도여서 18,000명 중

8,000명이 전사했다. 상플리바를 수비하던 프랑스군 부대는 절반 이상을 잃었다. (그라브로트 전투)

 

그라브로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묘사한 그림

 

 

 

바제느 원수의 프랑스 라인군은 그라브로드에서 패배하여 메스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프로이센 제 1군 및 제 2군의 15만 병력은

메스의 프랑스군 요새를 포위했다. 그라브로트 전투의 패배 후, 바제느 원수가 메스에서 농성하는 것을 본 나폴레옹 3세는 마크마옹

원수와 함께 새로이 샤론군을 편성하여 바제느 원수의 구원을 위해 메스로 진군했다.

 

나폴레옹 3세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마크마옹 원수가 측근이 되어 이끌어진 샤론군은 프로이센군을 피해 북동쪽의 벨기에 국경으로

향해 진군하여 그곳에서 남쪽으로 향해 진군해 프로이센군의 좌측면을 돌아 바제느군과 공동으로 프로이센군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프랑스군을 협살할 계획을 세웠다.

 

몰트케는 프로이센 제 1군과 제 2군을 메스 공방전에 남겨두고 여기서 3개 병단을 나누어 작센 왕태자의 휘하에 무즈군을 편성했다.

그런 후 무즈군과 프로이센 제 3군은 북상하여 8월 30일에 보몬에서 프랑스군을 포착했다. 격렬한 전투로 독일군은 5천의 병사와

대포 40문을 잃었지만 프랑스군을 세당까지 달아나게 했다.

 

샤론군은 세당에서 태세를 정비했지만 얼마되지 않아 모여든 프로이센군에 의해 고립당하고 말았다. 나폴레옹 3세는 포위를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 전날 마크마옹 원수는 부상당하여 듀크로 장군이 전선이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1870년 9월 1일에 샤론군은 포위를

실시하던 프로이센 제 3군 및 무즈군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에비대로 대기중이던 프랑스군 제 5 보병단 사령관이던 드 윔펜 장군은 프로이센 제 11병단에 대해 기병과 보병의 합동공격을 실시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1시까지 프로이센의 포병이 프랑스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속속 프로이센 원군이 도착하면서 마르그리테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 기병은 프로이센 제 11병단이 집결중이던 근처의 플로앙 마을에 대해 세 차례의 결사공격을 감행했다.

 

마르그리테 장군은 첫 돌격에서 전사하고 이후 두 차례의 돌격은 큰 피해만 입고 성과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도 탈출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나폴레옹 3세는 공격을 중지했다. 프랑스군은 전사상자가 17,000명을 넘고 21,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프로이센군은

2,320명 전사에 5,980명 부상, 700명이 포로 또는 행방불명 되었다. (스당 전투)

 

다음 날인 9월 2일에 나폴레옹 3세는 항복하여 104,000명의 프랑스군 장병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것은 프로이센측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프로이센군은 샤론군 전부를 포로로 한 것 뿐만 아니라 프랑스 황제마저도 포로로 했던 셈이었다. 스당에서 프랑스군의

패배는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유리함을 결정지었다.

 

그 후 메스에 포위되었던 바제느 원수의 프랑스군 18만도 대부분 저항하지 않고 10월 27일에 항복했다. 이것은 프랑스에게 있어서

큰 악수(惡手)가 되었다. 그렇지만 전쟁은 3개월간 더 이어졌다.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파리에 알려지면서

프랑스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는데 9월 4일에 루이 쥬르 트로슈 장군, 쥬르 파블, 레온 감베타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에 성공한 이들은 프랑스 제 2 제정을 무너뜨렸는데, 쿠데타 세력은 보나파르트파의 제 2 제정을 폐하고 국방정부가 이끄는

공화국을 선언했다. 이것이 훗날 프랑스 제 3공화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독일로 연행되어 이후 해방되었지만

영국으로 망명하여 1873년에 사망했다.

 

스당에서 패배하고 바제느 원수마저 항복하자 프랑스에서는 휴전강화의 요구가 높아졌다. 특히 프로이센의 재상이던 비스마르크는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고 싶어했다. 많은 나라와 인접한 프로이센 같은 나라가 전쟁을 오래 끄는 것은 타국의 간섭을 받을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위험성을 줄이는데 고심했다.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신정부의 인사들을 페리엘르 성으로 초대하여 협상회담에 임하게 했는데, 온건한

강화협상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알자스 등에서의 한정적인 영토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팔츠 주의 라인강 연안의 국경분쟁은

1840년부터 이어졌는데 프로이센이 카톨릭 인구가 많은 광범위한 지역을 획득하기 위해선 쓸모없는 지역의 획득과 확장은 억제해야

한다고 비스마르크는 생각했다.

 

처음에 프랑스 공화정부는 배상금 지불과 아프리카 혹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프로이센에게 할양하는 안도 검토했다. 그러나

9월 6일에 쥬르 파블은 국방정부를 대표하여 <프랑스는 영토 1cm라도, 요새의 돌 하나도 넘길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공화국은

다시 프로이센에 선전을 포고하며 전국에서 병력을 모집한 다음 적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낸다고 공약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독일군은 전쟁을 다시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다해도 독일군 주변의 군사적 저항은 미미했다.

남아있는 프랑스군은 파리 부근에 참호를 파고 포진했기 때문에 독일군 지휘부는 파리를 공격하여 압력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9월 15일까지 독일군은 견고한 요새로 변한 파리 시 외곽에 도착했다.

 

9월 19일에 독일군은 파리를 포위하고 장애물을 구축하여 파리를 봉쇄했다. 이것은 이어지던 메스 공방전과 같은 전법이었다.

보불전쟁의 개전 초기엔, 유럽의 공론은 이탈리아 등의 독립반대 입장의 프랑스로 인해 꽤 독일측으로 기울었었다. 하지만 프랑스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부가 수립하면서 비스마르크가 알자스 반환을 요구하자 이탈리아 등 독립국가의 여론은 싸늘히 변했다.

 

프랑스의 패배와 독일제국의 성립

 

 

1870년 9월 19일부터 1871년 1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파리 포위전은 보불전쟁에 있어서 프랑스 육군의 최종적인 패배를

결정하게 한 싸움이었다. 파리 포위전 중이던 1월 18일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성립이 선언되어졌다.

독일군에 의한 파리 포위에 직면해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각지에서 병력을 긁어모아 군을 편성하도록 명령했다.

 

새로 편성된 군은 파리를 향해 진격하면서 여러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독일군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무장한 프랑스 시민은

독일군의 보급선을 공격하기 위해 이른바 프랭시스 틸레우스(자유의 사수)라는 게릴라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의

진전 때문에 독일 국내에서는 당장 파리 시가지에 포격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렇지만 파리 포위전을 지휘한 레오팔트 폰 브루멘탈 소장은 도의적인 입장에서 파리 시가로의 포격에는 반대했다. 이 점은

왕태자와 몰트케 등 군의 최고지도자들도 찬동했다. 한편 공화국 정부의 밀사로서 파리에서 급파된 레온 감베타는 시내 가스업자의

석탄가스를 이용한 열기구에 올라 독일군의 방어선 상공을 날아 새로운 프랑스군의 징병을 조직했다.

 

독일군이 모두를 학살할 것이라는 진위불명의 소문이 프랑스인을 격앙시키면서 이로 인해 프랑스 시민은 신정부에 지원을 강화해

몇 주만에 총 병력 50만 이상의 5개 군을 신설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독일측도 신경이 쓰여, 새로운 프랑스군이 파리 포위전과

다른 장소에서 큰 위협이 되기 전에 발견하여 공격, 해산시키기 위해 몇 개의 부대를 프랑스 각지에 급파했다.

 

독일군은 프랑스 전역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프랑스 전체를 점령한다면 군대의 배치가 넓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1864년과 1866년의 싸움에 승리했던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짐을 의미했다. 10월 10일에 오를레앙 부근에서

독일군과 프랑스 공화군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처음엔 독일군이 승리했지만 프랑스군이 원군을 보내면서 11월 9일의 쿠르미에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메스 포위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한 후 실전경험이 있던 10만 이상의 독일군 정예부대가 독일군의 <남방군>으로서 가세했다. 그 결과 급조한 프랑스군은

12월 4일에 오를레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최종적으로 르망 전투(1월 10일~12일)에서 프랑스군은 대패했다.

 

르와르 군의 대패소식에 감베타는 루이 페델루브 장군의 프랑스 북방군에 구원을 요청했다. 북방군은 암, 라홀르, 아미앵에서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다. 페델루브군의 부대는 북부 프랑스의 요새지에 머무르면서 수비를 강화했기 때문에 고립된 프로이센 부대에

재빠른 공격을 걸고 빠지면서 요새지대 후방으로 퇴각하는 전법을 썼다.

 

북부군은 무기공장이 있던 릴과 연락을 취하긴 했지만 보급에 꽤 어려움을 겪었기에 병사들의 사기는 낮았다. 1871년 1월에

감베타는 페델루브 장군에게 명하여 요새지를 벗어나 군을 진군시켜 야전에서 프로이센군과 교전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훈련이

안된 병사들은 사기가 저하되고 보급도 문제가 있는 이상에 기후마저 추워지면서 고통을 겪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페델루브 장군도

수십년간 서아프리카 전선을 전전한 결과 건강에 문제가 생겨 진두지휘를 할 수 없는 사태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생 캉단 전투에서 프랑스 북부군은 대패하면서 뿔뿔히 흩어져 수만의 프랑스군이 동부지역으로 향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르와르 방면에서 프랑스군이 괴멸된 후 르와르의 잔존병은 프랑스 동부에 집결해 동부군을 편성했다. 샤를르 부르바키 장군이 이끈

프랑스 동부군은 프랑스 동북부에서 독일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마지막 시도에 나서 벨포르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을 공격해 우군을

구출해냈다.

 

하지만 리제느 전투에서 부르바키군은 아우구스트 폰 베더 장군의 독일군에게 막혀 돌파에 실패했다. 여기에 에드빈 폰 만토이펠

원수의 독일 남부군도 가세하면서 부르바키군은 스위스 국경지대의 산악으로 몰렸다. 전멸의 위기에 빠진 부르바키군은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가 폰탈리에 부근에서 중립국 스위스에 의해 무장을 해제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한편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는 해군을 북독일 연안에 보내어 해상봉쇄를 명령했었다. 북독일 연방해군은 비교적 소규모여서

유효한 반격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가 뚫리면서 해상봉쇄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연료인 석탄보급에 문제가

생긴 프랑스 해군은 빌헬름스하펜의 봉쇄에 실패해 발트해로 진출할 것인가, 아니면 프랑스도 돌아갈 것인가에 대한 명령도 내려지지

않아 혼란에 빠졌었다.

 

결국 북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메스에 상륙한 해병병력은 프랑스군 육군과 합류했지만 메스 포위전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하면서 흩어지고 말았다. 프랑스의 패배가 눈 앞에 현실로 닥치게 되자 1871년 1월 18일에 파리에 본거지를 둔 국방정부는 프로이센과 휴전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파리 시내는 식량이 떨어져 매우 곤궁한 상황이 이어졌으며 감베타의 지방군은 거듭 된 패배로 인해 사실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1월 24일, 프랑스의 외무상이던 쥬르 파블은 비스마르크와 강화협상을 토의하기 위해 베르사이유로 넘어갔다. 비스마르크는

국방정부가 파리 교외의 몇 가지 중요한 요새를 프로이센군에게 양도한다는 조건 하에 바로 파리 포위를 중지하고 식량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요새가 넘어간다는 것은 프랑스군이 더 이상 파리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리의 여론은 프로이센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안될 일이라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국방정부의 인식은 양보하지 않고 전쟁을 이어나가면 파리의 함락은 시간문제이며 이미 감베타의

지방군이 독일군의 진군을 허락한 마당에 파리를 구원하러 온다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생각에 전쟁의 연속에 회의적이었다.

 

1월 25일에 주르 트로슈 수상은 사임하여 쥬르 파블이 그 후임이 되었는데, 이틀 후인 27일에 파블 수상은 베르사이유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여 28일 오전 0시를 기해 휴전이 발효되었다. 파블은 파리로 돌아가는 도중에 눈물을 흘리며 곁에 있던 딸을 부둥켜 안고 통곡

했다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파리에서 총성은 멈추었다.

 

1월 30일에 감베타는 투르에서 파리에서의 통신을 접하고는 정부가 항복했음을 알았다. 그는 분노에 미쳐 항복을 거부하면서 바로

오를레앙의 독일군에게 공격을 걸었다. 하지만 이 공격은 예상대로 실패했다. 2월 5일에 파리 외교부의 대변인이 감베타와 토의하기

위해 투르에 도착하여 다음날 감베타는 사임 후 지방군의 지휘권을 국방정부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국방정부는 바로 프랑스 전역의

휴전을 명령했다.

 

보불전쟁의 강화조약은 1871년 2월에 임시조약이 베르사이유에서 체결된 후 1871년 5월 10일에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동부의 독일계 주민 거주지역이던 알자스와 로렌 지방 3개 현을 내 주었는데 이는 1919년까지

독일제국 직할령 엘자스 로트링겐 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과 함께 프랑스 영내에 진주한 프로이센군은 1873년 9월까지 주둔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보불전쟁으로 통일 독일제국이 탄생하면서 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데, 전후 국제외교는 비스마르크의 생각대로 움직여

1873년에 독일제국은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두 제국과 삼제(三帝)동맹을 체결하는 등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진행했다.

 

또, 전쟁의 여파로 인해 로마 교황령은 프랑스로부터의 군사적인 보호를 잃어 보불전쟁 중이던 1870년 9월 20일에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점령당했다. 국민징병제를 채용한 프로이센이 압승을 거두면서 다른 나라들도 국민개병에 나서게 되었는데 일본과 러시아도 보불전쟁의

결과를 보고 국민징병제를 채용했다.

 

보불전쟁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프랑스 우위는 무너져 독일은 유럽의 패권국으로 나서게 되었다. 2월 17일에 프로이센군은 파리에서

간단한 승전 퍼레이드를 벌인 후, 비스마르크는 휴전을 병행해 식량을 실은 화물열차를 파리로 보냈다. 프로이센군은 파리 시내의

동쪽으로 물러났는데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이 지불되면 바로 철수하겠다고 동의했다.

 

물러 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이 떠난 알자스와 로렌 지방에 집결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약 20만의 파리 시민들이 난을 피해

지방으로 달아나는 대 이주가 진행되기도 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이루어진 독일제국의 성립선언식의 모습, 가운데 흰 제복을 입은 자가 재상 비스마르크이다.  

 

 

 

 

통일 독일제국의 수립은 나폴레옹 전젱 이후, 빈 회의에서 결정되었던 프랑스를 기축으로 한 유럽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독일은 세계최강의 상비육군을 거느린 유럽대륙의 주요 강국으로서 급속히 대두했는데, 당시 세계에선 대영제국이 세계최강의 반열에

있었지만 19세기 후반의 영국은 유럽대륙보다는 해외 식민지에 더 신경을 썼기에 독일은 유럽대륙에서 큰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과 프로이센 왕태자의 결혼 등 몇 가지의 끈으로 이어지면서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서로 인정하는 편으로 흘렀다.

 

이러한 가운데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프랑스에서는 파리 코뮌이란 단기간의 정권이 나왔다. 파리 코뮌은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은 베르사이유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파리 코뮌의 성립은 전화를 입은 노동자들의 불만이 산적된 결과였다. 파리 코뮌은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자 계급이 최초로 정권을 잡은 사례로 인정된다.

 

한편, 프로이센의 포젠 주는 폴란드계 주민들이 많았는데, 이곳은 프랑스의 지지층이 많아 파리가 항복한 후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것은 폴란드인의 민족정신에 불을 붙였는데, 포젠 주의 정세가 1870년 8월 16일에 비스마르크에 전해지면서 반항적인 주에는

징병과 과세를 4분의 1로 줄였다. 이로 인해 보불전쟁은 독일과 폴란드의 갈등을 유발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 그 후 오랫동안

압제적인 통치와 독일화 정책이 시행되어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패배 후, 프랑스의 학교에서 상실한 자국의 영토(검은색 부분)를 학생들에게 주지시키며 프랑스의 굴욕을 잊지않도록 교육했다.

 

 

 

국방정부의 통제 하에 실시된 국민회의 선거결과, 프랑스에는 매우 보수적인 정부가 들어섰다. 파리의 정치가들은 정부를 파리 시내에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겼기에 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아돌프 티에르 대통령의 수반은 베르사이유 안에 정부를 두었다. 이 신정부는

주로 보수적인 중류계급의 지방 정치가로 구성되어 파리 시민들을 화나게 하는 여러가지 법률을 통과시켰다.

 

예로, 반론이 많았던 만기법(満期法)은 1870년 9월 이후에 만기가 돌아올 예정이던 파리 시내의 채권과 1870년 11월 이후 지불이

예정되어 있던 프랑스 전역의 공채를 48시간 내에 이자와 함께 전부 환수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거액의 배상금을

프로이센에 지불하기 위해 특히 공채를 많이 소유했던 파리 시민들의 자본을 빼앗았기에 파리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 때문에 세워진 파리 코뮌의 봉기로 인해 베르사이유 정부군이 진압하는 와중 2만명이 사상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당시 소설가였던

모파상은 20세의 나이로 국민유격대원이었는데, 이 진압전을 화두로 하여 소설 <비계덩어리>를 발표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인해 알자스와 로렌이 독일에게 넘어감은 프랑스 철광의 약 80%와 기계공장이 함께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가 이 지역을 상실하게 된 것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굴욕적인 비탄의 염원이 되어 작가인 알퐁스 도데는 <마지막 수업>이란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나중에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시 알자스와 로렌을 되찾을 것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지지로 이어졌다. 보불전쟁으로 인한 영토상실에서 상실한 이 복수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90년에 이 전쟁의 영향으로 발전한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군 첩보기관의 정보원에 의해 파리 독일대사관의 쓰레기통에서

프랑스의 군사기밀이 발견되어 알자스에서 태어난 유대계 프랑스군 대위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반역죄로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드레퓌스는 1900년에 무죄를 입증하며 석방되었다.

 

 

출처 : 제임스 윌퍼드 <프랑스 - 독일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