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불전쟁 (普仏戦争,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 - 1870년 ~ 1871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갈등과 전쟁준비
보불전쟁의 원인은 독일 통일을 둘러싼 여러가지 사건을 그 근원으로 본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주도권을 걸고
싸웠던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1866년)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결과, 프로이센은 많은 영토를 병합하고 북독일과
라인강 유역에 세력을 떨쳐 독일 제후국을 연합하여 북독일 연방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강한 세력이 생겨난 것은 나폴레옹 전쟁 후의 빈 회의(1815年)에서 결정된 유럽의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에 있어서 전략적인 요지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벨기에와 라인강 좌측 연안의
영지보상을 요구했지만 프로이센의 재상이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두말 없이 이를 거부했다.
이것은 라인 강 유역 근처의 프랑스에게 있어서 직접적인 위협인 셈이기도 했다. 이어서 프로이센은 독일 남부로 눈을 돌려
독일 남부의 여러 왕국(바이에른 왕국, 뷜텐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통일독일 국가의
안에 편입하는 것을 획책했다.
프로이센이 남독일의 왕국들을 병합하면 프로이센의 군사력은 강대해지기에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남독일 병합을 극력 반대했다.
프로이센으로서는 큰 통일독일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독일 남부의 각국에 있는 독일민족으로서의 민족주의를 각성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겨 프랑스와의 전쟁은 불가피하고 불가결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노림수는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의 말에도 나타난다. <통일독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전에 프랑스와 싸워야한다는
것은 잘 알것이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남독일 각국을 프로이센측으로 끌어들여 이로 인해 독일측의 수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프랑스가 침략자로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또, 많은 독일인은 역사적으로 프랑스가 유럽을 불안정화시킨다고 보았기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힘을 약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1868년에 공석이 된 스페인의 왕위에 프로이센 왕의 친척(호엔촐레른 가문)이
추대된 일이었다.
프로이센은 스페인이 호엔촐레른 가문의 나라가 된다면, 프랑스는 동서로 끼이는 형국이 되기 때문에 프랑스는 강력히 반발했다.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호엔촐레른 가문의 추대는 취소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개전준비를 진행하던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는 이 문제를 획책하여 프랑스측으로부터 선전포고를 당하는 것을 노렸다.
이에 이 사건을 둘러싸고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전보를, 프랑스 대사의 무례한 요구에 화가 난 프로이센 국왕이 프랑스 대사를
강하게 질책하여 만나보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개삭하여 비스마르크는 7월 14일에 각국의 보도기관에 이를 발표했다. 빌헬름 1세가
당시 바트 엠즈에서 온천휴양중이었기에 이 사건을 엠즈 전보사건이라 부른다.
엠즈 전보사건에 자극받은 프랑스의 여론에 맞추어 나폴레옹 3세는 다음날인 7월 15일에 동원령을 발령했다. 16일에는 프로이센도
동원령을 발표했다. 동원령이 내려진지 4일 후인 1870년 7월 19일, 엔즈 전보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빠른 시점에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선전을 포고했다.
외교적인 문제에 더해 나폴레옹 3세와 수상인 에밀 올리비에는 국내적으로도 정치문제의 해결을 의한 필요성에서 선전을 포고했다고
여겨졌다. 프랑스의 선전포고에 남독일의 각 국가들은 바로 프로이센측으로 돌아섰다. 당시 프랑스군은 약 40만의 상비군으로 구성되어
크림전쟁, 알제리 전쟁,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와 전쟁, 멕시코 출병 등으로 경험이 풍부한 고참병들이었다.
프랑스군 보병은 당시 세계에서 양산되었던 화기로선 최신식이던 후장전식 샤스포 총을 장비했다. 가스누출 방지의 고무링과
작은 탄환을 사용하여 샤스포 총의 최대사정거리는 약 1,500m였으며 장전시간도 짧았다. 포병은 나선강을 가진 전장식 라이트4 포
(포탄중량 4kg)를 장비했었다. 이에 더해 프랑스군은 기관총의 선구라고 여겨지는 미트라이유즈 포도 장비했다.
미트라이유즈는 대량의 화력을 집중가능한 강력한 병기였지만 사거리가 짧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것이 약점이어서 쉽게 파괴당했다.
미트라이유즈는 포가 위에 부착되어 야포처럼 포병대가 손으로 조작했다. 프랑스군은 명목적으로 나폴레옹 3세가 프랑소와 아실
바제느,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루이 쥬르 트로슈 같은 원수들과 함께 지휘를 담당하였다.
프로이센군은 상비군이 아닌 징병으로 구성되었었다. 병역은 징집연령의 남자 전원을 의무로 여겨 이에 프로이센, 북독일, 남독일의
동맹국은 전장에 약 120만명의 병사를 동원했다. 이만한 병력을 이용하면 이론상 적군을 포위섬멸하는 것도 가능했다. 프로이센군은
케니히 그레츠 전투에서 명성을 쌓은 스파이크가 달린 드라이제 총을 장비했는데 이 총은 이미 설계당시부터 25년이 지난 낡은 총이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의 포병대는 강철제의 후장식 크루프 C-64 야포(포탄중량 3kg)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드라이제 총의 불리함을
보완할 수 있었다. 아연괴와 폭발물을 섞은 접촉뇌관식의 포탄을 발사하는 크루프포는 사거리 4,500m로 프랑스의 청동제 전장포에
비해 맹렬한 발사속도를 자랑했다. 프로이센군은 헬무트 폰 몰트케 원수와 프로이센 참모본부가 군을 지휘했다.
프로이센 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참모본부를 가진 점이 특이했다. 참모본부의 임무는 작전행동을 지휘하는 것으로
병참 및 통신을 조직하며 전쟁 전체의 전략을 세우는 것이었다. 실무면에서도 프로이센 육군에서는 다른 나라의 육군보다도
참모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참모장은 직속상관과 의견이 다를 경우 그 위의 사령부에 직접 상소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예로, 프로이센 왕태자도 그의 참모장이던 레온하르트 폰 브루멘탈 소장의 조언에 반대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참모장이(이 경우 왕태자의 상관인) 부왕인 국왕에게 직접 상소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겉으로는
강력한 상비군을 가지고 실전경험이 풍부해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술은 샤스포 총을 사용한 참호전 등 방어전을 중시했는데, 독일의 전술은 포위를 만들어 가능한 한 포병으로
화력을 집중하는 공격적인 방식을 중시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동원령으로 병력을 충원하려면 적어도 몇 주는 걸린다고 보았기에
싸움준비에 느긋했다.
전쟁을 예측했던 프로이센은 보불전쟁에 앞서 정보장교를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프랑스의 동북부에 침투시켜 정찰하여 만들게 한
지도를 입수하여 만전을 기했다. 또 독일 연방국가들에게는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면 참전에 협력한다는 조건을 내 걸고
참전을 독려했다. 이 외에도 타국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에 사전 공작을 벌였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멕시코 제국계획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멕시코 파병 프랑스군이 합스부르크가문이 영입했던 황제 막시밀리앙을
버리고 철수해버려 오스트리아로부터 강한 원망을 사서 국외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몰트케는 프랑스와의 작전계획서만 10번을 고쳐
쓸 정도로 매우 고심했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침공과 프로이센의 진격
1870년 7월 28일에 나폴레옹 3세는 메스를 향하여 파리를 출발했다. 나폴레옹 3세는 새로 편성한 라인군의 총사령관이었다.
라인군은 병력 202,448명으로 프랑스군의 동원이 진행되면서 병력은 더욱 증강될 예정이었다. 마크마옹 원수는 제 1군(4개 보병사단)
을 거느리고 뷔상브르, 캉로베르 원수는 제 6군(4개 보병사단)을 거느리고 북프랑스의 샤론 앤 샹파뉴로 향했다.
제 6군은 예비병력의 역할을 담당하여 벨기에에서 프로이센군의 침입을 경계하는 역할도 맡았다. 프랑스군의 전쟁계획은
전쟁 전에 고(故) 아돌프 닐 원수가 묘사했던 것 처럼 티옹빌에서 트리아로 향해 강력한 공세를 진행하여 그곳에서 프로이센의
라인란트로 침입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방어적인 작전을 지향하는 프로사르 장군과 루블랑 장군에 의해 폐기되었다. 그들은 라인군을 독일 국경부근에서
방어태세로 취한 후 프로이센의 공격을 격퇴하는 계획을 구상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뷔르텐베르크, 바덴 등과 함께
프로이센으로의(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대한) 보복전쟁에 참가할 것으로 보았었다.
이에 제 1군은 프팔츠 선제후령에 침공해 그곳에서 남독일의 제후국을 자유롭게 통과시킨 다음 오스트리아 헝가리군과 협조하여
진격해 제 6군이 필요에 따라 응하면서 지원하는 형태를 취할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프로사르 장군의 계획에는 빈틈이 많았다.
프로이센군의 동원은 프랑스의 예상보다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은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상대로 패배한 아픔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며 남독일의 제후국이 프랑스에 협조적인 입장을 보일때만 참전한다는 방침이어서 주의 깊게 사태를 바라보아야 했다.
결국 남독일의 각국이 프로이센측에 서면서 프랑스에 대해 군을 동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프랑스측에
참전한다는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는 몰트케가 전군의 동원 및 배치를 완료하기 전에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국내의 큰 압력에 시달렸다. 프로사르 장군에
의한 정찰에서 라인군의 바로 전방에 있는 국경마을인 자르블륑켄을 경비하는 프로이센 제 16 보병사단이 확인되자 이에 라인군은
자르블륑켄의 점령을 계획하여 7월 31일에 자르 강을 향해 진군했다.
프로사르 장군의 제 2군과 바제느 원수의 제 3군은 8월 2일에 독일과의 국경을 넘어 자르블륑켄의 프로이센 제 16 보병사단
제 40연대에 일련의 직접공격을 시작했다. 자르블륑켄의 주변에서 이루어진 소규모 경합에서 프랑스의 샤스포 총이 프로이센의
드라이제 총에 대해 우위를 가져 프랑스의 소총수는 프로이센 소총수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공격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군은 완강히 저항하여 양군의 피해는 프로이센이 83명, 프랑스가 86명이었다. 자르블륑켄은 병참면에서도
큰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르블륑켄에서 이어진 철도만이 독일의 배후지역으로 갈 수 있었는데 자르블륑켄은 한 부대로
쉽게 수비가 가능하여 이 지역의 유일한 하천은 국경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 공격은 라인란트, 그리고 베를린을 향한 첫 공격이었다. 프랑스 본국에서 시끄러울때 르보우프 장군과 나폴레옹 3세는 외국의
뉴스미디어에서 프로이센군과 바이에른군이 자르블륑켄의 남동방면에 집결하면서 북방과 북동에서도 군을 집결하고 있어
경계해야 한다는 보고를 듣게 되었다.
실제로 몰트케는 이들 세 지역에 군을 집결시켰다. 즉 자르루이 방면에 카를 폰 슈타인메츠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제 1군 5만명,
폴버크에서 스피슐란까지의 방어선에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의 프로이센 제 2군 13만 4천명, 그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태자의
프로이센 제 3군 12만명을 뷔상블에서 국경을 넘을 준비를 마치게 했다.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모습. 개인화기는 우수했지만 집단화기는 프로이센보다 약세였다.
포로가 된 프로이센 병사와 지역 경찰서장에게서 들은 정보로 인해 프로이센 왕태자의 제 3군이 자르블륑켄에서 약 48km 남쪽의
뷔상블 마을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르보우프 장군과 나폴레옹 3세는 방어적인 위치까지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프로사르 장군은
급히 독단으로 자르블륑켄으로 진출시켰던 라인군의 일부를 스피슐란과 폴버크까지 퇴각시켰다.
이 시점에서 뷔상블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마크마옹 원수는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그의 4개 사단을 약 32km의
간격을 두고 산개시켰다. 이 포진을 취한 이유는 보급부족 때문이기도 했다. 각 사단은 보급부대와의 연락이 제대로 취해지지 못해
필요물자를 구하러 보급부대를 수색할 수 밖에 상황이었다.
더욱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마크마옹 군의 제 1사단장인 듀클로 장군의 발언이었다. 듀클로는 8월 1일에 마크마옹 군의 제 2사단장인
아벨 듀에 장군에 대해 <내가 가진 정보로는 적의 전초부근 병력은 많지 않으며 적은 공세에 나설 의지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틀 후, 듀클로는 마크마옹에게 <적의 전초부대는 발견할 수 없었다. 내게 바이에른군의 위협은 단순한 장난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듀클로는 독일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지만 마크마옹은 어쨌든 지휘하의 각 사단에 대해 주의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보불전쟁에서 최대의 본격적인 전투는 1870년 8월 4일에 일어났다. 제 1군의 듀에 사단(제 2사단)과
이와 동행한 몇 개의 기병대는 지원이 없는 상태로 국경감시의 배치에 나섰는데 독일 제 3군으로부터 압도적인 공격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1개 바이에른군과 2개의 프로이센군이 속속 전투에 참가하면서 여기에 프로이센군의 포병지원도 더해지자
뷔상블 마을의 방어진지는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샤스포 총의 정확한 장거리 사격덕택에 듀에는 매우 유리한 진지를
점령했지만 진지가 허술하여 전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
듀에는 낮에 미트라유즈 사단의 폭탄이 부근에서 폭발하면서 전사했다. 그 후 지휘를 이어받은 부하들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프랑스 제 2사단은 위기에 몰렸다. 뷔상블에서의 전투는 매우 격렬하여 근접전투의 양상으로 흘렀다. 프로이센 보병의 거침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제 2사단은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뷔상블의 프랑스군 병사들은 결국 독일에 항복했다. 항복하지 않은 병사들은 남은 탄약을 챵겨 서쪽으로 퇴각했다. 프로이센군은
이 전과에 편승해 다음 작전의 구상에 나섰는데, 프랑스군은 비참한 패배 끝에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인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만 8월 5일에 일어난 스피슐랑 전투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의 세 차례에 걸친 결정적인 패배 가운데 2번째로 큰 패배였다.
몰트케는 처음에 자르 강의 바제느 원수군에 대해 제 2군으로 적 정면, 제 1군으로 적 좌익을 공략하며 제 3군으로는 적 후방으로 돌아
퇴로를 차단하여 바제느군을 현지 위치에 묶어둔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노장이던 카를 폰 슈타인메츠 장군은 예정에서 벗어난 돌출행동을 취해, 수비배치에 있던 모젤에게서 제 1군을 빼내
바로 스피슐랑 마을로 향해 남진했다. 그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카를 왕태자군의 본대와 그곳에서 전방으로 나섰던 기병대와의
간격에 틈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랑스군에게 있어선 뷔상블에서 받은 피해를 되갚아 줄 기회였다. 르보에프 장군은 노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진 채 자르 강을
건너 공세를 취해 피해를 만회한다는 것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군감찰관인 보르프 장군이 자르 강을 건너면 보급이 어렵다고
진언하여 르보에프 장군의 감정과 자존심보다 현실에 입각한 작전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방어태세에 나서 독일군의 공격이 예상되어지는 지점을 모두 수비하기 위해 포진을 넓게 취했는데, 이는 서로의
연대가 어려운 상태를 계속 만들고 말았다. 마크마옹 원수의 프랑스 제 1군이 독일 제 3군과 보르토에서 싸우고 있을 때, 폰 슈타인메츠
장군의 독일 제 1군은 자르블륑켄에서 서쪽으로 전진해 나갔다.
프리드리히 카를 왕태자의 독일 제 2군에서 돌아온 척후병이 부근에 위협사격을 가하면서 멀리 있던 스피슐량 마을 남쪽의 언덕에
프로사르군(프랑스 제 2군)이 있음을 발견하여 프로사르군이 퇴각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에 다시 몰트케의 계획은 무시되어
독일 제 1군과 제 2군은 스피슐랑과 폴버크 사이에서 방어를 굳게 취하던 프랑스 제 2군에게 공격을 취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될 당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수적 우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독일 제 2군은 그 때까지 총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사르 장군은 근접해 온 독일군의 공격을 단순한 소규모 경합이라 생각하여 다른 부대에 증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규모의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프로사르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예비전력이던 바제느군과 프로사르군 사이의 통신은 매우 단편적이고 늦어서 예비전력이 스피슐랑으로 이동명령을 받았을 때엔
이미 독일 제 1군과 제 2군이 진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예비전력이 도착하지 않았기에 프로사르 장군은 폴버크에서
발견된 폰 글롬 장군의 부대가 자신의 배후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여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고 오해했다.
프로사르는 고지의 방어를 포기하고 일몰 후에 전투가 끝날때까지 남쪽으로 퇴각했다. 샤스포 총의 성능에 의해 독일군의 피해는
프랑스군보다 컸다. 다음날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물러간 것을 알고는 매우 기뻐했다. 프로사르 장군은 버티기만해도 되는 유리한
고지의 진지를 그냥 버렸기에 그럴만도 했다.
마크마옹 원수의 프랑스 제 1군과 프로이센 왕태자의 독일 제 3군은 뷔상블 전투에서 이틀 후인 1870년 8월 6일에 뷔상블에서
16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프로슈빌러 마을의 보르토 부근에서 재격돌했다. 프로이센 왕태자의 제 3군은 참모 폰 브루멘탈 장군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인해 증원을 받아 14만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프랑스군도 증원을 받았지만 프랑스측의 동원은 늦어서 고작 3만 5천명에 머무르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숫자에서는 압도적으로
불리했지만 프로슈빌러 외곽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오후까지 양군 모두 피해는 약 1만명을 넘었는데, 프랑스군은 저항을 계속
했지만 점점 불리해졌다.
프랑스군에게 더욱 불리해졌던 것은 프랑스군 중앙의 언덕지대에 있던 프로슈빌러 마을 독일군이 접수한 것이었다. 승리의 희망이
사라지고 모두가 전사하기 직전에 프랑스군은 전선을 이탈하여 서쪽으로 후퇴해 보쥬 산맥의 반대측에 있던 프랑스군 부대로
합류하려고 했다.
독일 제 3군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쫓진 않았다. 독일 제 3군은 알자스에 남아 부근의 프랑스군 경비부대를 공격해 격파하면서
천천히 남진했다. 보르토의 전투는 보불전쟁에서 가장 대규모의 전투이기도 했는데, 양군을 합하여 10만이 넘는 병력이 격돌했다.
또, 이 싸움은 여러 독일 제후국(프로이센, 바덴, 바이에른, 작센 등)이 공동으로 싸운 전투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보르토의 전장을 <독일의 요람>이라 부르는 역사가도 있다. 하지만 독일에 있어서도 이 전투는 피해가 컸다.
프로이센군의 전사 및 부상자는 10,500명이었는데, 마크마옹의 프랑스군의 상황도 비참하여 19,2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고
포로가 되었다.
출처 : 제임스 윌퍼드 <프랑스 - 독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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