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많이 읽던 시기에, 가장 무리하게 도전했다가 실패한?
책을 두권 꼽으라면, 아마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 또한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라고 말할 수 있다. 제반 지식이 없이는
읽어도 이해가 잘 안 될 뿐더러, 원본의 경우는 당시에 현재와
다른 지명과 이름까지 등장하기에, 전쟁사를 충실히 공부한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링크된 '300'이라는 스파르타에
관한 영화를 보았고 그냥 몇 자 안 찌그리고 넘어가기
힘든 성격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그냥 비타300....
전문적으로 고대 전쟁사를 연구한 사람들에게는
오류가 많은 글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글보다도
히스토리 채널에서 이 300에 관련된 전투와 다른
스파르타 기고 프로그램 3편 정도를 본 것 같다.
(문제는 히스토리 채널 조차도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는 것.....)
1. 스파르타는 항상 용감했다?
올바르게 말하면 스파르타는 식민국가였다. 정식 스파르타인은
들판에서 밀을 수확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파르타가
굴복시킨 주변의 나약한 도시국가와 땅을 위성국가로 만들어
상납하게 만들었고, 스파르타에 산 다고 모두 스파르타 국민이
아니었다. 철저한 신분에 차등을 두었고 노예들이 제반 노역을
강요 당한 나라였다. 즉, 정식 스파르타 시민을 특별히 노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또한 스파르타의 군이 (내 기억에) 1만 명은 넘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것은 스파르타가 너무 작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라는
척박한 땅에 원래 인구가 많은 곳이 아니란 뜻이 되겠다. 그러므로
그리스군은 연합해서 싸우지 않으면 도시국가 자체로는 보통 다
빈약했다. 그러므로 트로이 전쟁때도, 이슬람의 대규모 그리스
침공때도 뭉치지 않으면 어차피 질 땅과 인구규모였다.
또한 이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에서도 가장 정치적으로 행동한
것이 스파르타였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적에게는 전면대응을 하지 않았고, 영화 300에서 보이는 모습
보다는 이슬람 침공군과의 전쟁에서도, 미온하게 행동하여
실망을 남겨주고 굉장히 자국의 이익에 따라서 군대를 출동
시켰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매우 강했다.
2. 스파르타가 그렇게 생각보다 정치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스파르타는 생각보다 매우 작은 국가이다. 그러나 계속 작도록
그들이 생각을 제한 시켰다. 로마가 강성해진 이유는 점령지를
로마시민으로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을 벌여 어떤 곳을 점령해도 스파르타 시민으로 인정
해주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파르타
보다 약소하여 복속된 곳은 철저하게 하등민족으로 생각하고
노예로 삼거나 하등계급으로 취급하였다. 이것이 스파르타가
망한 대표적인 이유이다.
3. 스파르타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는가?
히스토리 채널에서도 약간 과장되게 그렸지만, 이 스파르타는 가정이
파괴되고, 국가 전체를 유기적인 가정으로 생각한 나라이다. 일반적인
스파르타 성인이면서 군인인 경우 (스파르타에서 군인의 지위는 매우
높다) 막사에서 기거했으며 아내와의 성관계는 출산에 대한 예비조건
이었고, 밤에 왔다가 부부관례를 하고 막사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전사용 공동생활을 해 왔기에
그것이 더 친숙했던 곳이고, 결혼한지 3년이 지나도 밤에만 왔다 갔기에
아내의 얼굴을 몰랐다는 히스토리 채널의 다소 과정된 표현까지 나왔다.
현대적 의미로 따지면 북한보다 더한 곳이다.
4. 스파르타 군인들은 도덕적이었다?
도덕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파르타인들 서로간에만 도덕적이었을
뿐이다. 스파르타에서 복속인종이나 복속국가 사람들은 심각한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례로, 스파르타 군인들이 성인이 되면 그
증거로 노예상태에 있는 인부 등을 시험삼아 죽이는 일이 유행이나
관습처럼 이루어졌다. 특히나 과거 도시국가의 인텔리였다가 끌려와
노예가 되어서 일을 하는데, 똑똑하거나 잘생겼거나 신체적으로 강건
하거나 하면 이러한 야반살해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것은 질풍노도
의 시기에 풍습처럼 아무도 뭐라지 않았고 사법처리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스파르타로 끌려간 노예들은 그 생활 자체가 죽음과 삶의
중간선상임을 알아야 했다. 매우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당시 시대의 정복과 굴욕의 강요가 평범하게 이루어지던 시대라서 그
당시 특히 아주아주 심각하게 특이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다른
그리스 국가중에서도 그런 점이 과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전사의 준비과정에 있는 소년이나 청소년들이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을 야반에 습격하여 죽이는 것은 풍습
처럼 인정되었다. 즉, 굉장히 배타적 경향의 국가였다.
5. 스파르타인들은 체구가 크고 건장했다.
그 반대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와
비교를 할 때, 좀 더 작고, 많이 출토되는 그들의 병기구를
볼 때, 160센치미터 이하의 사람들도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현대인과의 체구차이는 원래 크다). 이것은 병사들에게
강한 훈련과 함께 금욕을 시킨 이유에도 연유한다. 아시다시피
스파르타의 건장한 병사들의 대표적인 식사는 질 낮은 곡물로
끓인 '검은죽' 한 사발이었다는 것은 어디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의 병기 중 머리에 쓰는 투구는 좀 다른
국가들의 것에 비하여 높은 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전장
에서 스파르타군을 목격한 상대군 (그리스군이 아닌)들은
종종 스파르타 군이 굉장히 큰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큰
투구와 커다란 방패, 그리고 기다란 창을 썼기 때문인데,
역설적으로 그 작은 체구의 그사람들이 그런 큰 장비들을
장비하고 있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훈련양과 인내가
요구된다고 여겨진다.
6. 그러면 스파르타인은 모두 다 개허접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 이름이 힘을 발휘하고 지금까지 인상이
각인되는 이유는 분명히 가지고 있다. 스파르타는 국가
전체가 엄격한 금욕사회였고, 욕심과 욕망으로 인한 국가적
배신이나 사고는 적은 편이었다. 또한 개인적인 욕심이 매우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질타와 모욕을 받을 정도였고,
그것이 상급정치인 경우 실각의 이유까지 되었다.
또한 그들의 지도자는 특별히 큰 왕궁을 짓거나 하지도 않았다.
300에서 잘 그린 것중에 하나는 스파르타의 왕이 거의 평민과
같은 남들과 똑같은 집에서 살고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정설로 내려지고 있다.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옷만 보고 왕을
다른 나라의 사신이 구별을 못한 경우도 있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이 큰 명예이기는 하지만
매우 곤란한 자리기도 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하니 조금이라도
민감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거나 우를 범하면 전체회의를 통해서
언제든지 내쫓거나 실각시킬 수 있었다. 그들의 가장 큰 벌은
스파르타 영토 밖으로의 추방이다. 스파르타 시민권을 박탈
당하면 국외에서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이것 또한 역설적인 것으로, 약간은 사회주의적인 경향의 스파르타
였지만, 같이 언급되는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하고 있었으나, 거꾸로
힘의 우위와 세력의 결집이 없이는 현대와 같이 능력이 있어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정당이나 분파들에 속하지
못하면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가 되기 힘들다는 그런 말.....스파르타
에서는 그러함으로 인해서 권력자는 왕이 되는 것에 목숨을 걸거나
하는 일이 인생의 목표가 되지는 않았다. (이후 공산주의가 이것을
실천해보려고 했지만 모두 깡그리 싸그리 몽창 실패했다)
7. 이렇게 그리스를 귀중하게 서양국가들이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유럽문명 더 나아가서 서구문명의 발원지이자 메카
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라는 국가는 현재 약간 좆밥에 가깝지만
그리스 고대 문명은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는 번영하고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하고 복속시켰지만, 오히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점령당했다. 그리스를 쳐들어가서 로마군이 느낀
문화적인 열등감은 대단해서, 점령한 이후에도 로마의 그늘 밑에
있었지만 다른 곳과는 달리 매우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특히
로마의 귀족층은 그리스 문화를 모르면 이상할 정도....
서구문명의 코카서이드 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적 역사적 근원을
아주 친절하게 제공하고 있다. 즉, 뼈대가 있는 문화권이라는 근거.
다만, 이 지구에서 그러한 근원을 찾는다는 것이 웃기지만, 그래도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에 비하여 우수한 종속에 속한다는 그런
생각?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이러한 경향도 별로 없다. 독고다이.
우리는 어렵사리 일리어드 오딧세이를 시간을 내서 읽지만 이
책은 서양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잠들기 전에 부모가 읽어주는 책에
하나다. 사실 오딧세이는 약간 동화틱도 하고....
대표적인 역사적 낱말
비너스(로마)-아프로디테(그리스)
박커스(로마)-디오니소스(그리스)
알다시피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많이 베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베껴서 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8. 그리스란 나라가 쪼까 힘들었던 이유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가는 길의 중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가는 직항로, 마케도니아로 대변
되는 북쪽 우회로 모두 그리스 영토에 걸린다. 그리스 위쪽을
통과하려면 이슬람 못지 않은 도라이들이 살고 있는 드라큘라
산림지대를 지나야 한다. (반달족 부류의 좀 강한 놈들....)
그러므로 트로이 전쟁도 보통은 트로이 왕자가 그리스의
미모에 헬레나를 납치해서 전쟁이 났다고는 하지만, 이는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일 뿐, 주기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건너편
을 조금 혼내주지 않고 견제하지 않으면 또 크게 일어나서
서쪽으로 밀고 들어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역사책들은 바빌론으로 대변되는 중동땅의 문명을
애써 격하하지만, 만약에 그들이 거대한 정복의 꿈이 있었다면
현재 세계가 다 터반을 쓰고 있을 지 모를 정도로 매우 문화적으로도
훌륭하고 강건한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매우 많이 존재했다는 것...
(그 중심지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인 이라크란 것은 다 아시죠?)
그 중동지역의 문명권은 맨날 개무시하다가 현재는 유럽문명
저리가라의 고도문명이었다는 것이 많은 자료 등으로 입증이
되고 있죠. 성경만 읽은 분들은 바빌로니아 유수 때문에 완존히
어떤 거지 같은 놈들이 사는 나라라고 인식을 하지만 (너무
가볍에 유대인 입장에서 가볍게 기술 했기에), 그 문명권을
접해보면 당시 유대땅의 민족은 정말로 아주 작은 약소민족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는 동방문화권 침입의 파수지역이었다.
9. 그들의 조상? 알렉산더와 도시국가 그리스의 차이점은?
알렉산더는 나중에 로마에서 쓰는 룰을 적용했다. 다시 말해서
항복하는 국가는 평화적으로 받아줬고, 반항하는 국가는 씨를
말리며, 또한 국적을 불명하고 알렉산더의 군대에 합류하고자
하는 자는 진심으로 받아주었다. 다시 말하면 이미 그리스를
떠난지 좀 되고 나서는 거의 다국적군에 가까웠다. 이는 나중에
로마도 그렇고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할때도 똑같은 룰을 적용한다.
10.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트로 구분되는가?
그것은 시대적으로 아주 적은 시기의 맞다이 국가였을 뿐이다.
아테네는 해양력이 강했고 스파르타는 육군이 강했다. 문제는
스파르타가 육군이 강하기는 했어도 동원할 병력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는 것, (최대인원 7천명으로 규정한 학자도 있다) 이것은
그들이 자초한 것으로 스파르타의 정식 시민이 자식이 아닌 경우
스파르타 군대에 입대가 불가능했다. 또한 입대란 것이 소년
때부터의 살인병기 보이스카웃 활동부터이니 이미 갈라진 자격은
회복이 되어도 군인이 될 수 없었다. 그 보이스카웃그룹에 나중에
얼레벌레 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그리스의 전쟁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필로폰네소스
전쟁이 흥미를 끌고 하는 것은, 그 기간동안에 각 도시국가 간의
동맹과 배신이 수도 없이 반복하는 매우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로폰네소스에서 일어나 전쟁이름이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처럼 한번에 들판에 모여서 회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전투와
소강상태와 정치적 타협이 반복되는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끈 전쟁
이었다.
자신이 약해지면 협정을 맺고 강해지면 바로 쳐들어간다....
아테네 역시 이러한 야합과 배반의 역사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11. 왜 300명 밖에 안보냈는가?
영화 300의 전투는 스파르타만 부각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리스군이
7천명 정도에 스파르타 군은 300명 정도였다는 것이다. 동방에서 온
정벌대는(그들은 그리스를 정벌하러 왔다. 그리스가 그들을 조금 깔
이유도 있음), 육상군은 북쪽으로 돌아서 왔고 해상에서 함선들이
그들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함대는 나중에 아테네 연합군의
함선에 의하여 피해를 받고 지원을 중단단다. 이것이 이 전쟁에서의
진짜 승패를 가른 것이다.
300인 전투 마지막 2일 전에 그리스군은 퇴각하고,
일부만 남는데, 그때 스파르타 300인만 남은 것이
아니라 다른 도시국가의 그리스군 1천 명이 같이
남았다. 즉, 최후의 전투에서 남은 것은 1천 300명이다.
(영화 300에서는 같이 싸운 아테네 계열 군대의
활동을 격하시키거나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300인 전투 후에 그리스는 지연전을 펼치면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참으로 멋있게 전투를
그리고 있지만, 당시 전투와는 거리가 멀다. 로마영화의 전투도
비슷하게 너무 멋있게 그린다. 그런 전투는 마구잡이로 까는 그런
전투가 아니다. 전면에 양쪽의 중보병이 긴 창을 들고 대열을 유지
하며 충돌한 다음에 밀리면 졌다고 생각하고 후퇴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스파르타인 300명이 유명해 진 것은 그들이 끝까지 그 대열을
유지하고 대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긴창과 방패를
통한 힘의 승부가 아닌 영국식의 들판에 칼 창 활로 일격에 승부
하는 그런 전투였다면 전투를, 그들이 좁은 협곡의 유일한 길을
막고 있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바로 끝장 났을 것이다.
또한 그 수만 대군 앞에 기천명을 대적시킨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는 그 병력을 북쪽의 좁은 협곡에 보냈지만
그들이 이긴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리스
본토/반도로 내려오기 전까지 약간이라도 대비할 시간을
끌고자 그들을 보낸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성공했고, 부수적으로
그리스 인들이 적극 항전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어 오히려
심리적인 충격을 주게 된다....(그들은 침공 전에 그들의 병력
수를 믿고 그리스를 깔 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체지휘관이 스파르타인이 아니었다는
점도 꼭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 중요한 목을 막는 결정을
내린 것은 아테네쪽 지휘관으로 기억하고 있다.
<트로이의 목마에 대한 썰>
그리스 연합군이 공성전 10년에 지칠대로 지쳐서 결국 목마를
남기고 퇴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략이었고 트로이가 전승
행사를 하고 잠 든 사이, 목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 트로이를 함락하고 불태웠다....
썰도 이런 썰이 있나....
현대적인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트로이의 목마가 실존하는 가에
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했다. (물론 그들의 컴퓨터에는 트로이의
목마가 종종 존재한다굽쇼)
최근에 나온 가장 유력한 학설은 바로 트로이의 목마와 비슷한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목마가 아니라 일종의
공성장비(성을 공격하는 장비)였는데, 이는 매우 높아서 성의
높이 보다 보통 약간 높게 제작되었다. 그래서 공성장비의 맨
윗쪽에서는 성에 대면하고 있는 상대에게 활을 쏘고, 그 공성
장비의 2/3 지점에 성 높이와 같은 곳에 출구가 있어서 병사
들이 그곳을 통해서 성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학자들이 고대문원에 나온 공성장비들을 자세히 분석
하고 재구성해 본 결과......약간 말과 비슷한 모양으 공성장비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을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만들다보니 말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말대가리/턱주가리에
해당 되는 것이 바로 공성장비의 맨 윗 쪽에, 성 위쪽에 있는
적군에게 아래쪽을 향하여 활을 쏘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결론적으로 유추하면, 트로이가 목마에 함락당했다는 썰은
충분히 만들어 질 수 있으며, 이는 그 목마와 비슷한 형태의
공성장비를 통해서 성이 함락되었다는 가정이고, 이것이
현재까지 나온 학설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다. 나머지는
역사가들이 야매로 좀 살을 더 넣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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