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함은 원래 굉장히 불안한 함정으로 저는 인식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래서 어떤 로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세계적으로 뛰어든 잠수함
전투는 결코 좋게 끝난 적이 없습니다. 2차대전 당시
유보트도 제 기억에 독일해군 2-3만 명이 잠수함에서
수장되고 말았죠.
1-2차 세계대전의 잠수함전의 특징
이것은 전쟁 자체의 상황과 연결됩니다. 2차대전 당시
지중해는 치열한 잠수함전의 양상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전장도 아니었던 것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
하면서 진창에 빠져 히틀러가 뭇솔리니를 도와주면서
일이 발생했지, 연합군이 대규모의 병력을 지중해로
보내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따위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죠.
연합군은 그저 프랑스로의 내륙진군을 꿈꾸었을 뿐입니다.
거기다 지브롤털이라는 좁은 지중해의 입구와, 독일 해군
으로써는 특별히 도움을 줄 수 없는 상대가 없는 지중해의
해상전은 문제가 많았죠. 1차대전 때는 터어키가 동맹국쪽
이어서 지중해만 들어오면 도피할 곳이나 있었지만, 2차
대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은 다릅니다. 물론 1차대전에서 북아프리카
는 지중해 전투에서 제외됩니다. 원래 전쟁을 벌일 이유도 없는
곳이고, 기껏해야 유럽식민국가들의 소규모 쟁탈전 정도가 고작
이었습니다.
1차대전에서는 이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2차대전에 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거기다 이탈리아라는 존재가 중간에 연합국
으로 붙어 붙박이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복합한 1차대전 양상을 다
설명드리기에는, 저의 지식도 부족하고 지면도 불필요하게 길어질
뿐인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가 3.1만세 운동하던 당시에도 유럽의 국가들은 보란듯한
잠수함들을 보유하고 싸웠다는 그 전례를 가볍게 읽는다고 생각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1차대전에서 이미 독일
해군은 '무제한 잠수함전'을 선언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잠수함
그러나 이 당시의 잠수함들은 현재 같은 긴 잠항시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일부 전술가들은 잠수가 가능한 어뢰정
정도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상에서 달리는 것이 속도도
빠르고, 잠항을 위한 밧데리 충전을 위해 부상하지 않으면 치명적
이었죠. 잠수함 자체에서 이산화탄소의 비율이 높아지면 승무원
들은 그냥 빈사상태에 빠집니다.
2차대전 후반후에 잠항으로 공기를 받을 수 있는 스노클을 독일이
개발했고, 이는 요즘 잠수함 설계의 원형이 되는 기본들이 많이
나왔지만, 전쟁 후반부라서 일반화되지 못하고 전쟁은 끝납니다.
자, 참호전으로 상징되는 1차세계대전 지중해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한번 인간의 역사 형식으로 읽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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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동맹국의 지중해 잠수함 작전
by Robert Derencin
1차대전 지중해의 전쟁 상대
동맹국 - (Central Powers: 편의상 동맹국으로 함)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안 군주국의 군사동맹을 의미한다.
터어키와 불가리아도 1차 세계대전 기간에 합류했다.
연합국 -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군사동맹을 맺어 ‘엔텐테(Entente)’
혹은 ‘트리플 엔텐테’라고 명명했다. 전쟁 기간 동안에 몇 개국이 이
엔텐테에 더 가입했다. 예를 들어 미국, 이탈리아, 일본이다. 동맹국과
연합국 모두 전쟁 전에 이탈리아를 가입시키려고 했고, 결국 1915년에
이탈리아도 엔텐테에 합류했다.
이 ‘동맹국’의 지중해에서의 해군력을 보면, 오스트로-헝가리안 해군,
독일해군 지중해 사단, 터어키 해군이 되겠다. 1914년, 전쟁이 시작
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독일 해군 지중해 사단은 이스탄불 도착에
성공했고, 이후 터어키 해군과 합류한다. 두 국가는 전함과 승무원들도
연합하게 된다. 독일해군 지중해 사단 사령관 Souchon 제독은 터어키
해군의 지휘관으로도 임명된다.
연합국(the Allies) 쪽에서는, 이 지중해에 프랑스 해군, 영국 왕실해군
과 이탈리아 해군이 있었다. 1917년부터 이 지중해 해군전투에는 미국
해군과 일본 제국해군도 말려들게 된다.
이 지중해에서의 해상 군사력은 전쟁에 관련된 모든 국가에게
절대적인 것이었다. 지중해의 해상 전장은 몇 개로 구분되는데,
A. 발칸,
B. 아시아-터어키 (팔레스타인),
C. 이탈리아 전장이었다.
이 지중해의 해상전투는 모든 서유럽전선(프랑스와 벨기에),
동유럽전선(러시아), 아시아-터어키(카프카스) 전선에 영향을
주었다.
이 글은 ‘동맹국(독일 쪽)’ 쪽의 지중해 전투에서
1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잠수함 작전을 다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이들 해군의 1차 세계대전 작전이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그 조직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군대였다.
그 해군 안에는 잠수함 소함대가 있었고, 그 잠수함들은 상대 연합국이
자신들의 해군구역에 못 들어오도록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다.
이해를 돕고자 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안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에
있었고, 이탈리아 북동쪽의 트리에스테에서부터 코토르까지였다. 이들
해군의 주 근거지는 퓰라(혹은 폴라)에 있었다.
이는 아드리아 해의 이스트리아 반도 남쪽의 도시였다. 이들은 해군을
아주 강한 군대로 조직했고, 현대적인 함대와 모든 종류의 것이 하부로
편성되었다. 항구, 요새, 전함, 아드리아 해 동쪽의 등대 라인도 포함
되었다.
또한 이들은 아드리아 해의 모든 해도를 작성해 놓고 있었다. 이들 해군
의 함정들은 멀리 중국과 일본까지 순항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많은 수상비행기를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이들은 일반적인 개량과 동시
에 비공식적인 개량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어뢰의 발명 등이다.
"The Coast Rescuer"
19세기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이상한’무기를 발명했는데 그
이름이 ‘해안 구조기’였다. 원래는 해안에서 발사하여 적의 함정을 공격
하는 무기였다.
186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이반 루피스는 영국의 기술자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고안을 받아들여 이 해안 구조기를 개량하고, 그 특허권까지
보유했다. 로버트 화이트헤드는 세계 최초로 크로아티아에 어뢰 공장을
만들어 생산에 들어갔다.
새로 발명된 이 무기의 이름은 처음에 "Minenschiff"였다가 곧 어뢰(torpedo)
로 바뀌었다. 중간에 ‘전기 광선’이라고 명칭이 한번 더 있었고, 결국 라틴어
에서 유래한 torpedo로 정착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을 하나의 글로 다루기에는 불가능하다. 이
해군은 단 10년간 존재했으나 믿을 수 없는 진행을 보여주었다. 강한 함대
가 있었고 해군 비행대도 운영했다. 훌륭한 해군 학교들, 조선소 등등.
근거지 퓰라 근처의 해군기지는 완전히 현대식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이
요새들과 당시 해군이 썼던 유언장 등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을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이들 해군의 계급은 네 개의 가지로 나뉜다. 선원들, 하급 부사관, 상급부사관,
그리고 해군장교다. 이들은 또한 주특기에 따라서 또 분류된다. 조타, 어뢰,
통신, 엔진, 전기 등으로 나뉜다.
선원들 - 이들은 징병군사들로 복무 1년이 지나면 4등급선원, 2년이 지나면
3등급, 3-4년이 지나면 2급선원이 되었다. 1등급 선원은 예외적인 빼어난
기량이 있어야 했다. 해군 복무 4년이 지나면 병사는 예비군으로 빠져서 3년
간 해안방어 근무를 했다.
하급부사관 - 이들은 직업군인이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선원에서
4년을 복무하고 하급부사관이 되거나, 1등급 선원이 될 경우 부사관으로 진급
하는 경우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은 해군 군사학교를 졸업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선원과 같은 군복을 입고 부사관 엠블렘을 달았다.
상급부사관 - 하급 부사관으로 몇 년을 근무하면 상급부사관이 된다. 상급
부사관이 되면 장교 유사한 복장을 입게 된다. 이들은 매달 월급을 받았고,
연금혜택도 받았다. 그러나 계약 중간에 나가면 혜택이 없었다.
장교 - 장교는 네 그룹으로 나뉜다. 장교 후보생, 장교, 참모장교, 기함(flag)
장교다. 주특기는 갑판 장교(항법), 엔진, 의무, 사무, 군목 등으로 나뉘었다.
당시 해군사관학교는 15-16세의 청소년들이 입교하여 시작했다. 그 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18개월 동안 하는 단기 코스도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잠수함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첫 번째 잠수함은 U1과 U2였고 레이크(Lake)급
으로 분류되었고 퓰라에서 건조되었다. 다른 두 개의 잠수함은 U3와 U4로
독일이 킬(Kiel) 건조했기 때문에 ‘게르마니아’ 급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다시
퓰라로 견인해갔다. U1과 U2는 1911년에 취역해서 주로 훈련용으로 쓰였고,
전쟁이 나자 이 두 척은 부유한 상태에서 어뢰를 발사하는 용도로 쓰였다.
U3과 U4는 1909년에 취역하여 아드리아해에서 전투에 사용되었다.
아래는 레이크급과 게르마니아급의 기술 특징이다:
레이크 타입 U1 , U2 | 게르마니아 급 U3, U4 | |
수면 수중 전환치(톤) |
230 / 270, 나중에 223 / 277.5 |
240 / 300 |
치수(길이. 폭. raft) 미터 | 30.5 / 4.8 / 3.9 | 42.3 / 4.5 / 3.8 |
엔진 | 2개의 가솔린 엔진과 전지 엔진 2개 (나중에 디젤) | 가솔린 엔진2, 전지엔진2 |
엔진 추진력(마력) |
560-200 (나중에 720-200) |
600 - 320 |
속도 (수면. 수중) | 10 / 6 | 12 / 8 |
작전반경(수면/수중) | 950/40 1200 |
12노트에서 1,200 3노트에서 40 |
무기 |
3개의 5.4Cm 어뢰관과 데크에 37밀리포 |
4.5Cm 어뢰관 2개. (1관은 예비) |
승무원 | 장교 3명, 부사관 14명 | 21명 |
잠수함의 이동
독일 잠수함은 주로 리제카(Rijeka)에서 만들어졌고 나중에는 어뢰도 같이
만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1차 세계대전 전에 총 7척의 잠수함을
보유했고, 4척은 건조 중이었다. 이후 7-8 종류의 독일 잠수함들이 더 만들어
졌고, 오-헝 해군에게 인도되기도 하고 자신들이 퓰라로 운송해서 쓰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잠수함들은 현대에 것에 비하여 외관이나 기초적인 기능은 비슷
했지만, 여전히 장거리 순항에 불안했다는 점이다. 순항 중에 침몰한 잠수함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받은 잠수함들은, 먼저
독일에서 분해를 한 뒤에 열차로 이동을 시켜서 아드리아 해로 가져온 뒤 독일
기술자들이 다시 재조립했다. 독일이 사용하던 잠수함을 넘겨준 예도 있다.
1914년 12월 20일, 프랑스의 ‘퀴리’라는 잠수함이 퓰라 만까지 침투해 시도해
왔다. 결국 20미터 깊이에서 대함수함용 어망에 걸려서 침몰했다. 이 잠수함은
1915년 1월에 건져 올려져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사용하게 된다.
그것이 U14호다.
결국 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총 27척의 잠수함을 운영했다.
그리고 대부분 독일이 준 것이다. 세계대전 동안 이들은 잠수함을 더 원했고, 전쟁
이 끝나는 시점에도 계속 건조 중인 것들이 있었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잠수함을
운영했고 아드리아해에서 연합국 함정을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선단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잠수함의 중요한 성공의 예이다.
U12 - 1914년 12월 프랑스 대형전함 ‘장 바트’에 큰 타격을 입힘
U26 - (독일 것의 대리 운영) 1915년 7월 이탈리아 순양함 ‘마랄피’를 침몰시킴
U4 - 1915년 7월, 이탈리아 지휘 순양함 ‘주세페 갈리발디’를 침몰시킴
U4 - 같은 해 6월, 영국 경순양함 ‘더블린’에 큰 피해 입힘
U5 1915년 4월, 프랑스 순양함 지휘선 ‘레옹 감베타’를 침몰시킴
U5 - 같은 해 8월, 이탈리아 잠수함 ‘네레이데’를 침몰시킴
U6 - 1916년 3월, 이탈리아 구축함 ‘레나우딘’을 침몰시킴
U5 - 1916년 6월, 이탈리아 운송함 ‘프린시페 움베르토’를 치몰시킴
U15 - 1916년 6월, 이탈리아 보조 순양함과 구축함을 오트란토 해협에서 침몰시킴
U16 - 1016년 10월, 이탈리아 구축함 ‘넴보’를 오트란토 해협에서 침몰시킴
U17 - 1916년 7월, 이탈리아 구축함 ‘임페투소’ 침몰시킴
U27 - 1917년 6월, 일본 구축함 ‘사카키’에 피해를 입힘
U27 - 1918년 5월, 영국 구축함 ‘피닉스’를 침몰시킴
U47 1918년 9월, 프랑스 잠수함 ‘키르케’를 침몰시킴
U31 - 1918년 10월, 영국 순양함 ‘웨이마우스’에 피해를 입힘
오트란도 봉쇄선(The Otranto barrage)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가장 큰 성공은, 함대로 오트란토 봉쇄선에 대항한
공격이었다. 1917년 5월 15일 연합국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잠수함이 아드리아해에서 지중해로 관통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오트란토 봉쇄선’
을 만들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3척의 순양함과 두 척의 구축함으로 이
오트란토 봉쇄선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합국 전함들과 전투를 벌였다. 독일
잠수함 UC-25호는 브린디시 앞에 기뢰를 깔았고 그 앞을 정찰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잠수함인 U4는 또한 알바니아의 항구인 바로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U-27호는 브린디시와 코토르 사이를 순양했다.
앞의 그림인데, 오틀란도 봉쇄선이 보인다... 그냥 입구를 막는
연합국은 순양함 3척과 구축함 4척을 브린디시에서 오트란토 봉쇄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냈다. 연합국들의 전함들이 오트란도 봉쇄선에서
브린디시로 돌아오는 동안,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함대와 해전을
벌였다.
U-27호는 어뢰를 발사하여 영국 순양함 ‘다트마우스’에 피해를 주었고,
연합국의 한 함정,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 한 척이 U-25호가 부설한 기뢰
에 충돌해 침몰했다. 여기서 오스트로-헝가리 해군은 수상함과, 항공기,
잠수함을 모두 동원했다. 독일 해군과의 연합 작전은 매우 훌륭했다.
거기다 연합국 함선에 대한 전파방해 작전까지 성공적으로 해냈다.
전쟁의 후반
1918년 11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사령관은
바다에 있는 모든 잠수함에 관하여 기지로 복귀 명령을 내렸다.
1차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자, 이들의
퓰라에 있던 잠수함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조선소는 파괴되었다. 노획된 모든 잠수함은 침몰시켰다.
잠수함 U14는 프랑스 해군으로 넘어가 ‘퀴리’로 명명되어 사용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잠수함 손실
U3 - 1915년 8월 프랑스 구축함에 의해 침몰. 승무원 7명 사망. 14명 포로.
U6 - 1916년 3월 영국 전함에 침몰. 승무원은 구조.
U12 - 1915년 8월, 베네치아 부근의 기뢰 매복으로 침몰.
U16 - 1916년 10월, 이탈리아 구축함과 상선을 각 한 척씩 공격해 침몰시켰으나,
증기선과 충돌하여 침몰. 2명의 부사관이 죽고 나머지는 모두 구조되어 포로가 됨.
U20 -1918년 7월, 이탈리아 잠수함 F12에 의해 침몰. 승무원 모두 사망.
U23 - 1918년 2월, 이탈리아 함정의 어뢰공격으로 침몰. 전원 사망.
U30- 작전중 실종, 1917년 4월 1-2일 사이에 기뢰에 의해 침몰한 것으로 추정.
독일해군 지중해사단의 잠수함 소함대
독일 해군의 잠수함은 지중해와 아드리아해에서 1915년 여름부터 활동했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를 달고 활동했으나, 이는 그들 해군에
임시 배속이었기 때문이다. 1916년 8월 독일이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모두 독일 깃발로 바꾸어 달았다.
첫 번째 독일 잠수함인 UB I과 UC I급이 열차를 이용해서 퓰라로 이동되었다.
이동된 잠수함은 6척으로 모두 퓰라에서 조립되어 1915년 6월부터 활동을 시작
했다. UB II급 네 척도 열차로 도착했고, 또한 퓰라의 조선소에서 조립되어 1916
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Mittel-U 급 잠수함들은 독일에서 아드리아해로 바다를
통해서 이동했다.
그리고 1915년 5월부터 터어키에 보급품을 수송했다. 다른 Mittel-U 급은 나중
에 아드리아해로 이동했고, 이후 잠수함들은 계속 도착했다. 아래는 독일 잠수함
의 지중해로의 이동상황이다. UC II, UB III 타입에만 해당되는 기록.
1916년 10월 - 11월 : 5대
1917년 - 18대
1918년 - 8대. (그중 3척은 바다에서 오다가 도착 전에 침몰)
1차 세계대전 동안 기뢰부설용 잠수함 두 척이 아드리아해에서 활동했다. U 72,
U 73이었다. 독일군의 잠수함으로 인해서 아드리아해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지중
해에서 잠수함전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명확해졌고, 점차 잠수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독일 해군은 연안 공격과 기뢰 부설에 잠수함만큼 탁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잠수함을 마구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수함 기술자들이
정비와 유지를 위하여 퓰라로 파견되기 시작했다.
지중해 지역의 독일 해군의 잠수함 소함대는 1915년 11월 18일 만들어졌다.
본부는 오스트로-헝가리안 해군본부가 있는 퓰라였고, 또한 그들 해군의 순양
함 마리아 테레시아를 본부로 사용했다. 독일 잠수함들은 지중해의 주로 북
아프리카 해안에서 작전했고, 지브롤털과 말타, 수에즈 운하 입구와 에게
해에서 활동했다. 이 독일군 잠수함들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에서도 작전했는데, 그로 인해 이스탄불이 일부 잠수함들이 주둔했다.
일부는 흑해까지 들어갔다.
독일 잠수함들은 잠수함의 타입과 역량에 따라 의존했다. 맨 처음 도착한 독일
잠수함인 UC 15, UC 13, UB14는 아드리아해에서 이스탄불로 이동했고 나중
에는 흑해에서 작전했다. UC 14는 특히 보급품 수송과 기뢰부설을 했다. UC12
도 북아프리카에 보급품을 나르며 기뢰를 가설했다. 그러나 이스탄불로 향하는
잠수함 중에서 침몰한 것도 있었다. 많은 함정들이 기뢰부설과 보급품 수송,
그리고 연락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UB III 급 잠수함들이 해안 공격용 어뢰를 사용했다. Mittel-U 급도
비슷했지만, 이 잠수함은 순양을 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를 따라서 지브
롤털 - 수에즈 운하 - 다르다넬스 해협까지 가곤 했다.
1차 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들은 많은 동맹국의 전함과 상선을 침몰시켰다.
지중해의 독일군 잠수함은 계속 늘어났다. 그러나 독일군 잠수함의 손실은
오히려 해안선 부근의 바다였다. 해안지역의 바다는 잠수함에 매우 위험
했다.
또한 동맹국의 대-잠수함전 전술을 나타나기 시작했고, 수송선단을 조직적
으로 연합해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오트란도 봉쇄선이 개량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좀처럼 잠수함을 아드리아해에서 지중해로 진입시키지 못했다.
마침내 1917년, 이 지중해에 새로운 나라인 미국 해군과 일본 해군이 등장
해서 대-잠수함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917년 4월, 일본 해군은 한 척의
순양함과 구축함 세 개 제대를 보냈다.
지중해 독일 유보트의 종말
지중해에서의 독일 잠수함은 기술적인 문제가 거의 없었지만, 많은 수가
잠수함 자력의 힘으로 독일까지 돌아갈 수는 없었다. 구축함이 끌고 가야
했다. 그리고 10척 정도가 이미 침몰했다.
1918년 10월 26-28일 동안 열차로 독일 육군 부대들과, 독일군 조선소
일군들, 독일 해군병사들이 퓰라를 떠났다. 10월 28일에 15척의 독일
잠수함이 독일을 향해 바다에서 출발했다. 지브롤털로 직행하고 있었다.
이중 13척은 독일의 항구에 도착했지만, 한 척은 지브롤털에서 공격받아
침몰했고, 한 척은 스페인에 억류되었다가 프랑스에 나포되었다. 이 잠수함
은 나중에 영국에 주게 된다. 영국은 잠수함을 연구하고는 바다에 수장시켰다.
4년간의 전쟁 후, 파괴는 피할 수 없었다. 독일군 잠수함 승무원들은 멀고
먼 길을 목숨을 걸고 잠수함들을 독일로 끌고 왔다. 그러나 헛된 것이었다.
1918년 11월 동맹국들은 숨겨 놓은 160척의 독일군 잠수함을 평화협정에
따라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유보트는 굉장히 혁명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같은
연합인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매우 잘 훈련되고 장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획보다 길어지자, 마지막 2년 간은 경제 등으로 인해서 매우 힘들어
졌다. 1917년에 이들은 육군보다 훨씬 잘 준비되어 있었고, 1918년의 활동은
매우 정력적이었다. 그리하여 기간이 초과되자 해군의 복무 여건은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위기와 함께 하락하기 시작했다.
수병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수병들은 고향의 가족들도 굶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해군은 더 열악했었다. 더욱이 본국으로 송환되는 엄청난 러시아군
포로들이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여 증폭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해군에도 혁명의 조짐이 나타났다. 혁명의 징후는
오래된 수상함에서 강했고, 새로운 전함들이나 잠수함 부대 등은 영향이 적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본부인 퓰라에, 독일군은 총 30척의 잠수함과
킬에서 이동한 1,500명의 일군들과 500명의 독일 해군이 있었고, 독일에게는
항구의 500미터 구간이 배정되었다.
그런데 1918년 1월에 퓰라 항구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고, 이에 독일군
인부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그러자 독일군인들은 오-헝 제국의 군대와 동참해서
이들 파업자들과 마주섰다. 독일 육군들이 퓰라 시를 순찰했고, 잠수함 승무원들
도 이 일을 같이 했다. 독일군 수병들은 중립이었다.
특히 잠수함 승무원들은 그랬다. 특히나 독일 잠수함 작전의 본부로 사용되던
순양함 마리아 테레시아에서는, 독일 잠수함 부대원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들과 동료애가 생겼고, 독일군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졌다. 당시 독일
잠수함부대원들은 그들보다 음식이나 편의에서 나은 상태였고, 계급이 더
낮은 독일 해군병사가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잠수함부대원
들이 혁명 활동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
1918년 2월 1일 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수병들이 선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좀 더 나은 조건과 휴전이었다. 수병들의 반란
은 오래된 거함들이 강했고, 구축함이나 수뢰정 같은 작은 배들은 미미했다.
이때 3명의 독일군 잠수함 승무원이 동참하기도 했다.
퓰라에서 독일군 장교들은 해군 승무원들을 잘 통솔했고, 결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해군들과 분리된 상태가 되었다. 며칠 후 폭동이 시작되자, 반란군을
대응하는 쪽에 독일군은 섰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고위 장교는
이런 전문을 보냈다.
“우리 함정들이 이탈리아 등으로 탈출하는 것을 예의 주시해고 못하도록
해야 한다. 차라리 함정들을 침몰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해서, 마지막 경우, 독일군 잠수함을 불러야 할 것이다."
결말
1차대전 기간 중 지중해 주변에는 많은 전장들이 있었다. 발칸, 이탈리아,
터키 다르다넬스 해협, 팔레스타인 등등. 그러므로 인해서 동맹국들은 안전한
선단의 통행이 매우 중요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는 북아프리카 본토 병력들을 지원해야 했다.
그리고 또한 프랑스의 서부전선을 위해서 병력을 실어나르기도 해야 했다.
영국은 중동에서 병력을 실어 날라야 했고, 오스트레일리아 병력을 프랑스로
데려오기도 해야 했고, 이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 했다. 이집트의 병력을
갈리폴리로 날라야 하기도 했다.
1918년, 지중해 지방의 병력을 영국은 프랑스의 서부전선으로 종종 날라야
했다. 그런 이유로 독일은 잠수함들을 지중해로 보냈다. 그러나 연합국 함대와
선단을 모두 막기에는 부족이었다. 그러나 이런 공격으로 같은 동맹국 안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터어키와 불가리아가 대표적이다.
원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아드리아해를 기본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독일군 잠수함들은 지중해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합국 수송단을
공격했다. 이어서 에게해와 흑해까지 들어가게 된다. 결국 흑해의 러시아 해군
과도 맞닥트리게 된다. 러시아의 해군의 흑해 함대의 일부는 불가리아의 항구
와 바르나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중해에서 활동한 독일군 잠수함들은, 새로운 항구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터어키의 이스탄불 항구 등이다. 이를 통해서 흑해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독일의 잠수함과
터어키의 군함이 해협을 통과 못하도록 했다. 터어키의 해안선은 길었으나
터어키 해군은 약했고 해상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 잠수함은 매우 중요했다. 다른 독일 잠수함의 문제는
그것을 완벽히 수리할 조선소가 딱 한 군데뿐이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해군이 기지 퓰라 뿐이었다. 그곳에는 좋은 시설과 훌륭한 기술자들
이 있었다.
결국 영국 해군은 오트란도 봉쇄선을 만들기에 이른다. 영국 해군은 이 곳을
1915년 9월 26일 봉쇄했다. 수중에는 어망과 기뢰가 설치되었고 항공기와
함정이 계속 정찰했다. 1916년에는 이탈리아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이 봉쇄
작전에 함께 했다. 1917년에는 미군까지 합세했다.
전쟁 기간 동안, 이 봉쇄선은 독일군의 잠수함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 그를
통해서 아드리아해에서 지중해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독일 잠수함도 통과
하기 매우 힘들었다. 이 봉쇄선이 독일군 잠수함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독일군 잠수함은 지중해의 연합국 국가들의 해군 작전 전략의 변화를 가져
오게 했다. 그래서 연합국들은 수송선단을 매우 유기적으로 조직했고, 또한
매우 느리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1916년 영국은 오스트레
일리아의 병력을 데려오는데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남아프리카를 이용하
기도 했다. 수에즈 운하를 거치지 않은 셈이다. 지중해에서 활동한 ‘동맹국’
의 잠수함의 35%가 전쟁기간 중에 침몰했다.
1915년 5월 이탈리아가 엔텐테에 가입했다. 그로 인해서 지중해의 전술은
또 한번 변화를 맞는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들의 활동이 에게
해를 포함해서 편해졌기 때문이다.
1916년 8월과 1917년 1월에,
이 두 번의 회담을 통해서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전을 선언했다.
독일 수상과 군대 사령관이 협조한 것이다. 자국 방어와 자국 항구의 함선들을
연합국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당시는 독일이 매우 힘든 시기였다.
미국과 다른 몇 개의 중립국이 연합국 쪽에서 전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유보트 전쟁은 마지막 카드다.”
독일 지도자들은 지중해의 잠수함이 중요함을 알았다. 당시 독일의 새로
건조된 잠수함의 1/4이 지중해로 갔다. 또한, 지중해의 잠수함들은 베를린의
해군본부에 직접 명령을 받았고, 함대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잠수함
만으로 연합국의 모든 해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18년 11월 이탈리아 해군 사령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전직 고위
장성에게, 퓰라와 아드리아해에 독일군 잠수함이 남아 있는가 물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함대는 무너진 상태였다. (오스트로-헝가리안
제국 전체가 무너진 것이다) 이탈리아는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드리아해에 남아 있는 독일군 잠수함은 이탈리아의 야욕에 장애물이었다.
퓰라의 지도자들은 독일군의 잠수함이 며칠 전에 아드리아해를 떠났다고 대답
했다. 그 이후, 퓰라를 차지하려는 이탈리아를 막을 것은 없었다. 이탈리아는
아스트리안 반도와 일부 아드리아해 동쪽 해안과 섬을 그대로 먹어버렸다.
전쟁 기간 동안, 아탈리아 해군은 두 척의 전함을 잃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해군의 사보타주가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전함 ‘베네데토 브린’이 1915년
9월 브린디시 항에서 침몰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전함이 타란토에서
1916년 8월 전복되었다. 모두 폭발 때문이었다. 어떻게 사보타주가 일어났나?
그것은 아마도 잠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보트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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