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1968년
푸에블로호 비공개 협상을 통해서 북한은 자기네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적대국인 미국과 동등한 입장을 국내외에 과시하면서 미국을 난처한 지경에 몰아넣었다. 또 한·미 간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부수효과도 거뒀다.
1966년 10월5일 열린 조선노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김일성은 당이 당면한 전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미국은 추종국이나 괴뢰국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침략에 반대한다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조선노동당은 베트남 인민을 돕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베트남 정부가 요청한다면 지원군도 파견할 것이다. 미국은 수만명의 남한 군대를 월남에 파병시키고 있다. 남한 인민은 월남 파병을 반대하고 미국의 침략정책에 적극 반대해야 할 것이다.
둘째, 조국의 통일과 혁명의 승리는 남한에서 혁명세력의 강화, 혁명투쟁의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남조선 인민의 혁명적 투쟁은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광범위한 「애국적 민주세력」이 반미·반파쇼 깃발 아래 모여들고 있다. 남조선 혁명의 기본적 과제는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몰아내고, 남조선 사회의 민주화를 성취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당시 필자는 이 연설문을 읽고 ▲ 북한의 대남전략이 정치선전·선동 위주에서 제한적 군사행동으로 바뀔 것이고 ▲ 이에 따라 북한은 유격부대를 지상 또는 해상으로 침투시켜 양측간에 충돌이 빈발할 것이라는 내용의 분석·보고를 올린 적이 있다.
새해 벽두의 청와대 기습사건
실제로 이 대표자대회가 끝난 열흘 뒤인 1966년 10월15일부터 비무장지대 안에서 북한의 무장침투 사건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2일까지 18일 동안에만 국군과 미군 병사 24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1953년 휴전 이후 그 시점까지 13년간 사상자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해를 넘겨 1967년에는 침투사건 수가 1백14건으로 급증해서 미군 16명과 국군 1백15명, 민간인 22명이 사망했고, 북한측 침투요원 2백28명이 사살됐다. 주요 사건들로는 ▲ 67년 5월22일 미 2사단 막사 폭파사건 ▲ 67년 8월28일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 전방기지 구역 안에서 작업하던 76공병단 막사가 공격받은 사건 ▲ 67년 1월19일 한국해군 PCE-56함이 동해에서 북한측 해안포 사격으로 침몰된 사건 등이다.
그러다가 1968년이 왔다. 내가 만들어 갖고 있던 『정전협정 관련 주요사건 일지』에서 1968년도 첫머리를 보면 『1968년은 한국 휴전사상 가장 격렬한 해였다.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1백81건의 주요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씌어 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청와대 기습사건이었다.
북한은 젊은 인민군 장교들 중에서도 유능한 사람들을 선발해 특전부대인 124 군부대를 편성했다. 이 부대에 속한 김신조 등 침투조 32명이 1월17일 밤, 미 2사단이 관할하던 비무장지대 서부전선의 최신식 철조망을 뚫고 침투한 것이다. 이 철조망은 나날이 증가하는 북한의 무장침투를 저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많은 예산을 들여서 만든 것이었다.
이들은 서울을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행군했다. 물론 신고가 들어왔지만,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서 보고가 늦어졌다. 아무튼 이들은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승가사 뒤 비봉에 도착, 하룻밤을 보내고 1월21일 저녁에 하산해서 구기동 검문소를 통과했다.
이들은 북문에 도착해 출동한 경찰과 교전을 벌이고, 청와대 바로 옆 8백m 지점에서 저지됐다. 이들은 흩어져 한국 경찰과 교전을 벌였고 그 중 몇 명은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민간인들을 살상했다. 6명은 서울시내와 문산으로 가는 근교에서 사살됐고, 나머지는 북으로 도주하다가 여러 곳에서 사살됐다. 전체 32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한 명은 생포됐으며, 한 명은 북으로 달아난 듯했다.
전투원 32명이 미 2사단 지역을 뚫고 그렇게 빨리 서울로 침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유엔사령부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체를 육군통합병원 마당에서 조사하고, 생포된 김신조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나갔다.
조사를 끝내고 1월22일, 유엔사는 북한측에 다음날 11시에 제261차 정전위 본회의를 가질 것을 요구했다. 북한측은 회의를 하루 늦춰 24일 열자고 요청, 그렇게 합의했다. 그런데 23일 오후 1시 반경,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전자정보 수집활동을 하던 미 해군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경비정 4척에 의해 나포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유엔사로서는 휴전 이래 가장 심각한 두 개의 사건을 한꺼번에 다루게 된 것이다.
『미친 개가 달 보고 짖는다』
1월24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위 제261차 본회의장, 유엔사 수석대표인 스미스 해군제독은 『6·25 남침 이래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인 박대통령 살해기도를 항의하기 위해서 본회의를 소집했다』고 첫 발언을 시작했다. 스미스 수석대표는 김신조의 진술내용을 담은 테이프를 돌리고 한국 국방부가 제공한 사건보고를 토대로 북한에 강력히 항의하고, 『이 사건에 관한 한 북한은 여느 때처럼 선전만으로 얼버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스미스 수석대표는 바로 전날에 일어난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서도 항의했다. 그는 나포 당시 푸에블로호의 정확한 위치가 북위 39도25분, 동경 127도54분이었고, 북한 해안에서 적어도 16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국제법과 관례에 의거해 ▲푸에블로호 선박과 승무원을 즉각 석방·송환하고 ▲불법 나포행위에 대해서 「미국 정부」에 사과하며 ▲미국 정부가 국제법에 의거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미스 수석대표는 또 「미국 정부」의 공식 메시지를 북한 정부에 전달할 것을 북한측 수석대표 박중국소장에게 요구했다.
이제 박중국이 발언할 차례. 참으로 듣기 힘든 폭언이 터져나왔다. 그의 욕설 중 좀 덜한 것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속담에 미친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제멋대로 떠드는 당신 같은 사람을 두고 나온 말인 것 같다』
『명예를 저버리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이 회의장에서 전쟁광신자 존슨의, 그 미친 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깡패같은 노릇을 해야 하는 당신이 불쌍하다. 베트남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는 미국 청년들의 「존슨 죽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오늘날 전세계가 성조기를 불태우며 데모를 벌이고 있다. 당신도 그런 일을 남조선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까 이 자리에서 겁에 질려 떠들고 있는 것이다』
『전쟁광신자이자 살인자의 두목인 존슨이 1966년 10월 남조선에 기어들어와 전쟁도발을 종용하고 군사분계선 부근 참호를 쏘다니며 도발적 언행을 한 이후 우리에 대한 당신네의 군사도발이 갈수록 악랄해지고 있다. 존슨이 다녀간 후 당신네 최고사령관(본스틸)이 비무장지대에서 우리측에 포사격을 명령하고, 당신도 이 자리에서 그 같은 휴전협정 위반행위를 서슴지 않고 계속할 뜻을 밝힌 적이 있다』
아마도, 박중국이 스미스에게 「미친 개」 운운했을 때 스미스는 부친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부친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해병대 대장이었는데, 그가 일본군을 격파한 게 마치 미친 개가 싸우는 것처럼 보였는지 별명이 「미친 개 스미스(Mad Dog Smith)」였다.
적반하장, 북한의 주장
박중국의 욕설을 음미해보면 다음과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북한은 새로운 대남전략을 수립, 다수의 「남조선 혁명전투원」을 침투시켜 베트콩과 같은 역할을 시키려고 의도한 듯하다. 1966년 10월 이후 68년 말까지 북한은 수많은 무장침투를 자행했고, 쌍방간에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한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 좋은 예가 68년 11∼12월에 있었던 울진·삼척 침투사건이다.
박중국은 66년 10월 존슨 미 대통령이 방한해서 한반도에 제2의 베트남전을 계획했다고 책임을 전가했는데, 북한은 그 전에도 한국전쟁에 대해서 비슷한 선전을 해왔다. 즉 1950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방한해서 한국의 신성모 국방장관과 함께 전방을 돌아다니며 북침을 지시했다고 정전위 회의에서 떠들어대곤 했던 것이다.
박중국은 또 북한에서 말하는 「남조선 혁명전투원」들로 구성된 124군 부대의 남침과 적대행위를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라고 일축하면서도 이들 전투원들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며 찬양했다.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박중국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며칠 전 정전위 본회의에서도 무장간첩선이 남조선 어선들에 끼어서 우리 공화국 연해에 침투하는 일이 날로 증가하는 것에 항의하고, 그와 같은 범죄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월21일, 23일에도 간첩선 침투가 계속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이고 심각한 미제 해군의 무장간첩선 침투가 1월23일에 일어났다.
그날 12시15분경 다양한 무기와 간첩활동에 필요한 장비를 실은 미제 침략군의 간첩선은 북위 39도17분, 동경 127도46분 부근 원산 앞바다 공화국 영해에 불법적으로 침투했다. 이 때 부근 연안에서 통상적인 순찰임무를 수행하던 인민군 해군함선은 우리 연해 깊숙히 침투해 해적행위를 하며 우리측에 발포한 간첩선에 대응해 사격을 가해서 수명의 미제 해군이 살상되고 80여명이 체포됐다.
이와 같은 행위는 우리에 대한 공개적 도발이며 긴장을 고조시켜 새로운 전쟁을 도발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우리측은 당신측이 전쟁을 유발시키려는 데 대해서 엄중히 항의하는 동시에 그와 같은 불법적인 휴전협정 위반행위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하며, 휴전협정에 의거해 범법자들을 처벌하고 이 자리에서 그와 같은 위반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을 데 대해 담보하라』
북한은 과거에 유엔사나 국군의 헬기나 비행기가 북한 영공에 잘못 들어가 격추됐을 때 그랬던 것처럼,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서도 유엔사측이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하고 사과하며, 앞으로 그런 침입을 다시 하지 않을 데 대한 보장을 하라는 식의 요구를 똑같이 제시한 것이다. 이는 즉 푸에블로호 사건을 과거의 다른 사건들처럼 정전위를 통해서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세계가 놀란 「자백」 성명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두 손을 들고 북한 경비원들에 끌려가는 비참한 몰골을 본 미국민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고, 미 의회는 푸에블로호 나포를 전쟁행위로 간주하고 규탄했다. 미국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항모 엔터프라이즈호와 두 척의 구축함을 동해에 진입시키고, 미 제5공군은 일본과 태평양 공군기지에 있던 전폭기 38대를 오산과 군산 비행장으로 발주시켰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미 군사력을 한반도로 돌리게 해, 월맹측을 도운 셈이다.
1월26일 존슨 미대통령은 미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첫째,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유엔 안보리에 제기해 유엔 회원국들로 하여금 북한이 푸에블로호와 83명의 승무원을 즉각 송환하라고 촉구하도록 하고, 둘째 외교경로를 통해서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할 것이며, 셋째 한반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그 어떤 사태에 대해서도 대처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를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유엔 안보리에서는 미국대사 아더 골드버그가 안보리 회의 소집을 성사시켰다. 안보리 회의에서 그는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정전협정과 유엔헌장, 그리고 국제법 위반행위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나 모로조프 소련 대사는 전적으로 북한측 입장을 지지하면서 의제 토의에 들어가기를 거부, 회의는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휴회됐다.
1968년 당시 미국의 형편은 썩 좋지 못했다. 기대와는 달리 베트남전의 승리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반전 무드가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미 의회에선 미국이 베트남전에 직접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된 피그만(Bay of Pig) 사건(월맹측이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을 포격한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 존슨 대통령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존슨 행정부가 제2의 한국전쟁을 모험할 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 국민들과 언론, 그리고 의회 강경파들은 푸에블로호 승무원 송환을 위한 존슨 행정부의 외교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해댔다. 당시 갤럽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민의 3%가 『전쟁을 불사하고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고 한 반면, 47%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지지했다.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지 이틀 후인 1월25일. 평양방송은 함장 로이드 부커 중령의 북한 영해침범과 도발적 정탐행위를 했다는 「자백」 사실을 보도했다. 평양측은 부커 중령이 자백서에 서명하는 사진까지 공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자백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푸에블로호는 소련 극동지역과 북한 해안선을 따라서 항해하면서 군사정보 수집활동을 하라는 명령을 주일본 미해군 사령관으로부터 받고, 67년 12월2일 장교 6명, 민간인 2명을 포함한 83명의 승무원으로 일본 사세보 해군기지를 출항했다. 푸에블로호는 그 전에도 그와 같은 사명을 띠고 북한 해안선을 따라서 정탐행위를 해왔다. 그 결과는 미 중앙정보부에 보고됐고, 이번에도 미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
함장과 승무원 모두가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범죄행위를 자행했고, 따라서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푸에블로호는 정탐행위를 은폐할 목적으로 미국 국기를 달지 않았다. 승무원 모두가 가족들 품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온 미국이 함장의 고백에 놀랐다. 아마도 북한의 고문에 못 이겨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부커 함장은 68년 12월23일, 즉 나포된 지 11개월 만에 석방돼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왔을 때, 사건 당시 승무원들에게는 오로지 「도살」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의 코로나도에서 69년 1월20일부터 4월10일까지 열린 해군청문회에서는 푸에블로호가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원산항으로 끌려간 책임을 물어 부커 함장과 정보장교 해리스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존 샤피(John H. Chafee) 해군장관은 이들이 이미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같은해 1월26일 존슨 대통령이 『모든 외교 경로를 통해서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겠다』고 언명한 같은 날, 정전위 유엔측 수석대표는 스위스·스웨덴·체코·폴란드 등 4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감독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 북한측이 제261차 정전위 본회의에서 언급한 사상자 명단과 부상자들의 상황을 알아봐달라는 것이다. 다음날인 1월27일 폴란드·체코 대표들은 북한측 정전위 수석대표와 접촉해서 받은 메시지를 스위스·스웨덴 대표를 통해 전달해왔다.
『만약에 미국이 무력을 사용해 선박과 승무원을 구하려고 하면 오로지 시체만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통상적인 협상」 용의가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고 승무원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식 통보에 덧붙여 북한은 『승무원들의 건강은 아주 양호하다. 승무원 한 명이 사망했으나 그의 시체는 잘 보존돼 있고 부상자 상황에 대해서는 정전위 쌍방의 직접 접촉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해왔다
한국은 반발하고…
1월29일 저녁, 유엔사측 수석대표는 직통전화로 북측 수석대표에게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중립국감독위원회를 통해서 당신측 메시지를 받았다. 미 해군 푸에블로호와 승무원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1월26일 미 대통령이 발표한 것처럼 이 문제의 신속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미 해군 소속이며, 그 중에 포함된 민간인 두 명은 수로측량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북한도 준수를 약속한 제네바협약에 의거해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 이 문제의 조속 해결을 위한 협상 양식을 논의하기 위해서 수석대표간의 조속한 접촉을 요청한다…』
그 후 1월31일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 당서기 김광협이 『푸에블로호 문제는 정전위를 통해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고, 2월1일 미 국무성 대변인 매클로스키는 미국이 북한의 비공개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발표했다.
한편 한국은 이와 같은 미국과 북한 사이의 비공개회의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한국 언론은 북·미 비공개회의에 대해서 한국 정부와 사전협의가 없었고, 한국으로서는 청와대 기습사건이 막중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만 치중하는 데에 불만을 표시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침략에 대해 타협이나 양보를 하는 것은 항상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경고했다. 그는 또다시 북한의 침략행위가 있을 경우 즉각 군사대응 조치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주한 미 대사 윌리엄 포터와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미군 사령관 찰스 본스틸 대장이 정일권 총리를 예방해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즉각적인 군사원조 및 방어조약의 충실한 이행 등을 재확인했지만, 한국 정부는 북·미간 양자 회담이 아니라 한국군 정전위 대표가 참가하는 공개회의가 돼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존슨 미 대통령은 결국 2월12일 사이러스 밴스를 특사로 서울로 보냈다. 뒤 이어 열린 한·미 고위급회의에서는 ▲ 향후 한반도에서 한국 안보에 위협적인 사태가 발생하면 미국은 한미 방어조약에 의거해 만반의 조치를 취한다 ▲한미 양국 국방장관이 연례안보회의(SCM)를 갖는다 ▲미 대통령은 1억 달러의 군사원조 지불 승인을 미 의회에 요청한다 등에 합의했다. 물론 그 대가는 판문점 비공개회의에 한국이 더 이상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오늘날의 한·미 연례안보회의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유엔사 정전위 수석대표의 승용차가 가는 곳마다 보도진은 물론 한국 중앙정보부 차들이 뒤쫓았고, 정전위 한국인 통역들이 중정요원들에 의해 호텔방으로 끌려가는 불상사가 다반사로 일어나곤 했다.
지루한 줄다리기
유엔사 수석대표의 제의로 1차 회의가 2월2일, 정전위 회의실 바로 옆에 위치한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양측 수석대표와 참모 2,3명, 그리고 통역관이 각각 참여했고 보도진은 접근이 금지됐다. 회의장 테이블은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사용하던 원탁을 그냥 사용했고, 테이블 위에는 마이크와 녹음기,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회의는 오전 11시에 시작돼 55분간 진행됐다. 보도진과 방문객들이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정전위회의와는 달리 차분한 분위기였고, 양측은 선전이나 욕설 한 마디 없이 회의를 진행했다. 비공개회의에서 선전을 해봐야 누가 봐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선전이 난무하는 회의에 익숙해져 있던 필자로선 좀 허전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유엔사측 스미스 수석대표는 그 전 공개회의에서 한 발언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즉,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승무원들은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승무원과 선박을 조속 송환하는 것이 쌍방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푸에블로호 사건은 그 전에 있었던 헬기 사건들과는 성격이 다른 일이며, 푸에블로호는 유엔군 사령부에 소속하지 않은 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북측 박중국 수석대표는 『미국은 침략행위를 은폐하려고 하지만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 침입한 것은 정전협정의 가장 극악한 위반행위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국이 그 태도부터 바꿔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로써 1차 회담은 끝났다.
2월4일 열린 2차 회의에서 북측은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을 뿐더러 함정과 전투기 폭격기를 동원해 북한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와 같은 강압적인 분위기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북한측은 푸에블로호가 유엔군 사령부에 소속하지 않는다고 한 1차 회담 때 유엔사측의 발언을 상기시키면서, 그렇다면 이 문제는 응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 합중국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하며 쌍방이 적절한 대표를 다시 임명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2차 회담도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여기서 유엔사측 수석대표가 『푸에블로호가 유엔군 사령부에 소속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북한이 이 협상을 북·미 양자간 회담으로 끌고 가려는 구실에 빌미를 준 것으로, 필자는 이 말이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그 후 3차 회의(2월5일)부터 14차 회의(4월11일)까지 양측은 각각 기존 입장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북한은 『오로지 미국이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범죄행위를 자행하지 않는다고 담보할 때에만』 승무원 송환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유엔사측은 『승무원들이 돌아와 조사를 받고 그 결과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유감의 뜻」을 표명할 수 있을 것』(7차 회담)이라고 버텼다. 결국 양측은 푸에블로호 사건 발생 직후 공개리에 가진 정전위 본회의 때의 입장에서 아무런 진척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기묘한 타결
15차 회의(4월22일)에서는 유엔사측이 한 가지 큰 양보를 했다. 즉, 북한이 주장하는 12마일을 보장할 것이며, 푸에블로호가 정보수집함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한편, 만일 북한 영해를 침입했다면 「유감의 뜻」을 표명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필자는 유엔사측 전략에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푸에블로호가 북한 연해 12마일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공정한 제3자에 의해 입증되면 (이 사건에 한해서) 「유감의 뜻」을 표명할 용의가 있다』고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서해 같은 복잡한 해상에서도 12마일을 존중한다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유엔사측이 북한의 12마일 영해를 보장한다는 말은 다시 한 적은 없다). 이들 비공개 회담은 유엔군 사령관이 아니라 미 국무성이 직접 협상과정을 지시했다.
16차 회의(5월8일)부터는 유엔사측 정전위 수석대표로 새로 부임한 미 육군 길버트 우드워드 소장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북한은 사과문을 작성해와서 서명할 것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미 국무부에서 새 타협안을 제시했다. 즉 유엔사 수석대표가 미국 정부를 대표해 북한이 작성한 사과문건의 끝에다 승무원들을 인수한다는 문구를 삽입하고, 서류에 서명하기 직전에 이 문서의 내용을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한다는 방안이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제안은 68년 12월17일 열린 26차 회의에 제시됐다. 며칠 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협상은 급진전됐다.
미국으로서는 68년이 지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해를 넘기면 곧 닉슨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식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기네가 작성한 사과문을 한 마디도 고치지 않은 채 그 밑에 인수 문구를 삽입하고, 구두로 그 내용을 부인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68년 12월23일 열린 29차 회의에서 유엔사측 수석대표는 다음의 사과 문건에 서명하기 직전에 『이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 견지에서 승무원들을 돌려받으려는 것이며,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에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앞
미 합중국 정부는 1968년 1월2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서 조선인민군 해군 함정들의 자위적 조치에 의하여 나포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행위를 하였다는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충한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과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실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이와 아울러 미 합중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 의해서 압수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의 승무원들이 자기들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청원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들 승무원들을 관대히 처분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 구를 인수함을 인정합니다.
미 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육군소장 길버트 H. 우드워드
1968년 12월23일』
북한은 미국측 대표가 사과문에 서명한 뒤 사과문 끝에 덧붙인 승무원 인수 구절을 삭제해버렸다. 이런 사실은 평양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원본을 찍은 사진 사본, 판문점 정전위회의 때 전시한 사진 사본을 통해 밝혀졌다. 미국 정부로서는 이 사과문 자체를 무시한다는 입장에서 이런 조작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다.
결국 북한은 11개월간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자기네 입장을 끝내 관철시켰고, 미국은 승무원들을 돌려받는 데에 성공했다. 사과문에 서명한 두 시간 뒤, 승무원 82명과 시체 한 구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어서 송환됐다.
정전위에는 「심판」이 없다
미국과 북한은 외교관계가 없었으므로 군사정전위원회라는 창구를 이용해 푸에블로호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푸에블로호가 미 태평양사령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전위가 다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69년 4월15일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미그기에 의해 격추된 EC-121기도 유엔군사령부 소속이 아니었고, 83년 10월9일의 미얀마 랑군 폭발사건, 87년 11월의 KAL 858편 폭파사건 등 정전협정과 관련이 없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우리측은 정전위 본회의를 통해 항의해왔다. 한국이 가진 불만은 이런 큰 사건들 중 미국과 관련된 사건은 더 신중히 다뤘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푸에블로호 송환협상으로 돌아가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필자는 첫 단계부터 푸에블로호가 미 태평양사령부에 소속한다고 우리 쪽에서 주장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북한이 작성한 사과문에 서명하는 우리 쪽 주체가 미국 정부가 된 것이다.
만약 북·미간 협상이 아니라 정전위 본회의를 비공개로 했다면 한국 대표와 유엔참전국 대표도 참여할 수 있었고, 정전위 수석대표가 서명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본다.
푸에블로호 협상을 통해서 북한은 자기네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적대국인 미국과 동등한 입장을 국내외에 과시하면서 미국을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었다. 또 한·미간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부수효과도 거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11개월 동안 비공개로 진행된 푸에블로호 협상에서 북·미간에 어떤 정치적 흥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북한과 미국이 일 대 일 비공개로 만났으니 한국이 걱정한 것도 당연하지만, 어떤 때는 좀 과민하게 반응한 것 같다. 미국은 회의 내용을 한국 정부에 알려줬지만, 한 한국군 장성은 나에게 무슨 정치흥정이 있었는지를 묻곤 했다. 좀 자신감이 있었으면 한다.
군사정전위에서는 적대 쌍방이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 결정도 내릴 수가 없는 구조로 돼 있다. 정전위는 양측에서 각각 5명씩의 장성·대령급들로 구성되며 정전위 의장은 없다. 즉, 정전위원회의 임무는 정전협정 위반사건을 「협의 처리」하는 것인데, 그 처리과정에 심판이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건 조사도 공동으로 하고, 그 결과를 정전위에 보고해 위반사건을 시정하고 결과를 쌍방 총사령관에게 보고하도록 돼 있지만, 그와 같은 조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정전협정에 따라서 비무장지대와 한강 하구에서 발생하는 정전협정 위반사건을 조사하는 기구로서 공동감시소조 조사반을 10개 설치했는데, 이것이 55년 7월 6개로 축소됐다. 또 비무장지대 밖에서 일어난 위반사건은 중립국감독위원회의 10개 기동조사반이 조사하게 돼 있는데, 60년대에 들어와 그런 조사 역시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예를 들어 68년 1월의 청와대 기습사건도 공동감시소조 1조가 비무장지대 불법침투를, 비무장지대를 통과한 후 서울까지의 경로에 대해서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기동조사반이 조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공동조사기능이 마비돼 있었기 때문에 유엔사의 일방적인 조사로 끝난 것이다.
물론 그런 공동조사가 공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중립국감독위원회도 각자 자기네 편을 두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전위를 비롯해 공동감시소조, 중립국감독위원회 모두가 심판이 없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앞으로 남북이 직접 당사자가 돼 남북공동합의서에 의거한 남북공동군사위원회가 설립되고, 판문점이 한국화되더라도 이와 같은 문제점은 상존한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전쟁.....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중해의 1차대전 잠수함전 (0) | 2013.11.28 |
---|---|
장고봉 전투-1938년 (0) | 2013.11.26 |
지중해 상공의 야간 암살 작전 (0) | 2013.11.25 |
프랑스 외인부대의 전설 ~ (0) | 2013.11.23 |
외인부대 이야기 (0) | 2013.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