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부대 이야기
외인부대는 나의 고향"이라는 모토아래 전세계 국적을 불문하고 병사들을 모집했던 외인부대에 있어서 2차대전은 전우들이 둘로 나뉘어 싸워야 했던 불행한 시기였다. 동료가 적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헤쳐나가며 다시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 오늘의 이야기이다.
1. 불안한 서막
1차대전이 종전되고 나치정부가 독일에 들어선 어수선한 그때, 프랑스 식민지인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외인부대 본부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정보장교들에게....
외인부대는 창설이래 항상 다수의 독일인 구성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충성스럽고 임무수행능력이 뛰어난 독일인은 영국인과 함께 외인부대의 중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내 나치 정부의 대대적인 모집반대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많은 독일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30년대 말이 되면서 더욱 심해졌고, 이로인해 독일과의 외교적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독일 정부는 모집 중단을 요구했고 독일내 외인부대에 관한 서적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하지만 그런 유치한 수준의 대책으로는 지원자를 막지 못했다. 기껏한다는 것이 선전장관 괴벨스가 프랑스 정부가 순진한 독일청년을 최면으로 꼬드긴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본보기로 1938년 독일 칼스루헤에서는 알버트 자굴라라는 이름의 직업최면술사가 범죄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독일인의 입대행렬은 이어졌고 외인부대의 사병 절반과 하사관의 80%는 독일인이 채웠다. 사실 이런 지나칠 정도로 편중된 구성비는 독일 정보국의 조직적인 개입에 의한 것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제1차대전 당시 외인부대에서 근무했던 상당수 독일인에 대한 교훈이 반영된 것이다. 향후 어떠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계 대원들이 외인부대의 내부로 부터의 분열을 획책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본의든 아니든 새로이 외인부대에 참여한 독일인 상당수는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역할을 했다.
외인부대는 전세계의 패배자 망명자들에게 항상 매력적이었고 특히 1930년대에는 전유럽의 망명객들이 외인부대로 쏠렸다. 처음에는 스페인내전으로 스페인인들이, 다음엔 나치탄압으로 유태인이, 독일의 주변국 점령이 시작되자 체코인,폴란드인이 줄을 이었다. 이들 지원자들은 외인부대내 새로운 독일 지원자들과 융화되지 못했다. 싸움과 군법재판이 부지기수였고, 본국출신 장교들은 그들의 독일계 하사관들을 믿지 못했다. 이로인해 외인부대의 사기는 심각하게 떨어졌고 부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2.개전과 노르웨이 전투
1939년 개전이 있자 잠재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내부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외인부대 본부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수의 독일인 병력을 북아프리카의 사막 오지로 보냈고 하사관내 독일인 비중을 줄이기 위해 비독일인으로 채웠다. 그러나 여전히 외인부대 전반에 독일인은 많았고 이들은 잠재적으로 친나치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들을 유럽전선에 투입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대신에 군부는 4개 이상의 외인연대를 프랑스 본토에서 창설하고 북아프리카 출신의 베테랑 장교들에게 훈련을 맡겼다. 이들 외인부대원이 마지노선을 담당했다.
프랑스 본토로 외인부대 전체병력을 이동시키는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북아프리카에서 근무경험이 있고 전투를 갈망하는 일부 충성스런 경력의 차출을 결정했다. 40년초 외인부대가 마침내 실전투입 명령을 받았고 각각 1000명 규모의 2개대대가 지원자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철저히 신상 조사를 받았고 그결과 이들 부대에 남은 독일인은 충성심에 대해 의심에 여지가 없는 역전의 베테랑뿐이었다. 이들 병력은 새로운 비 독일식 이름이 주어졌고 생포될때를 대비해 가짜 신분 증명서가 주어졌다.
이들 2개 대대가 외인부대 제 13여단을 결성하였고 지휘는 마그랭 버너리 중령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생시르 육사 출신으로 1차대전의 베테랑이자 외인부대에서도 괴짜로 통했다. 그는 1차대전중의 심각한 부상으로 군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심한 머리부상으로 성질이 괴팍했고 다리부상으로인해 절뚝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천성이 싸움꾼이었고 이것은 외인부대가 바라는 바였다.
13여단이 프랑스에 도착했을때 항상 준비상태를 유지하는 외인부대답게 사막전의 베테랑들은 금새 새로운 장비에 숙달되며 극지와 산악전에 적응해 갔다. 그들은 당초 핀랜드로 갈 예정이었다. 서방 동맹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소련과 싸우는 핀랜드인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외인부대가 프랑스를 출발하기전 핀랜드가 소련과의 강화를 맺었고 핀랜드 파견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영국의 해군장관인 처칠은 중립국 노르웨이 영해에 기뢰부설작전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중립국 스웨덴이 수출하는 철광석을 독일해군이 호위한다는 점에서 였다. 동시기 히틀러는 노르웨이 침공을 계획했다. 철광석이 문제가 아니라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목적이었다. 이로인해 독일과 영국해군은 치열한 해전으로 돌입했고, 양측 해군력의 차이처럼 바다에서는 영국이 우위를 점했다.
이어 영국지상군이 노르웨이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미 독일군은 나르비크에서 오슬로에 이르는 노르웨이 서부해안의 중요항구를 장악한 뒤였고 영국-노르웨이 연합국은 선전했으나 임무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결국 영국군은 노르웨이로부터 철수했다.
이제 연합국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노르웨이 남쪽은 포기하는데신 철광석의 수출을 막기위해 나르비크 북부의 항구를 장악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강습은 영국의 클로드 오킨렉 중장이 지휘를 맡았다. 영국해군의 엄호아래 프랑스와 폴란드 주력군이 임무를 담당했다. 물론 이부대의 핵심에 외인부대 제13여단이 있었다.
이러한 파견명령에 대해 외인부대원들은 여단을 지휘하는 마그랭 버너리 중령에게 노르웨이 파견이유를 물었다. 괴팍한 그는 대답 또한 그러했다. 외인부대원에게는 이유는 필요없다는 투였다.
“왜냐구? 나르비크로 가라니까 가는거다. 왜 나르비크냐구? 철광석을 위해? 앤초비(멸치의 일종)를 위해? 노르웨이인을 위해? 난 그딴 이상적인 거 필요없다!
외인부대 13여단은 프랑스의 마리 에밀 베투아 장군의 제1경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부대는 제27알프스 산악부대와 폴란드 제1카파티안 여단(망명객으로 구성된 산악부대였다)도 함께 배속되었다. 그리고 현지에는 많은 노르웨이 부대가 여전히 전투중이었다.
계획은 영국해군의 보호를 받으며 나르비크 항구로 이어지는 피요르드 해안을 이동한 다음 13여단이 나르비크를 정면 공격하고 프랑스-폴란드 산악부대는 노르웨이 군과 함께 측면을 강타하는 것이었다.
외인부대의 맞수는 에두아드 디틀 장군의 독일군이었다. 디틀장군의 부대에는 공수훈련과 설산훈련을 받은 정예 제 137 산악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외인부대가 7갈래 화염의 수류탄을 상징으로 하는 정예라면,이들은 에델바이스 마크가 있었다.)그들은 역시 상대하기 힘든 적이었다.
제13여단은 나르비크 공세전에 인근마을 비예르비크를 장악하기로 했다. 이 마을 뒤 고원은 전략항구"나르비크"를 내려다보는 지점이었다. 5월13일 13여단이 비예르비크 해변에 상륙했다. 이를 지원하기위해 자정에 영국전함"레졸루션"과 순양함 "이핑엄"빈딕티브", 기타 구축함 5척이 독일군 수비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시동안의 격렬한 포격후 선발대는 보병과 전차,상륙정을 동원해 해변을 밀고 올라갔다. 2차대전 개전이래 처음 벌어진 유기적인 합동작전이었다. 독일군의 반격도 거셌다. 동이트자. 독일공군이 지원을 나와 영국함대와 해변을 공습했다.
외인부대도 독일군의 야포와 소화기 집중사격을 견뎌야 했다. 작전부대 지휘관 마그랭 버너리 대령은 앞장서서 그의 부하들을 독려했다. 잠시후 진격이 재개되었다. 16년경력의 베테랑 아밀락바리 대위가 중요한 언덕위의 독일군 야포대를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위는 "A moi la Legion!" 이라고 외치며 언덕을 올랐다.(외인부대 전통의 구호로 "나를 따르라"는 의미) 기세 등등한 대위와 부하들의 진격에 독일군은 접전하기전에 도망쳤고, 언덕은 점령되었다. 이윽고 아밀락바리의 부대는 그들의 측면을 따라 전진해온 알프스 산악부대와 합류했다. 드디어 폐허가 된 비예르비크와 주변 산지가 프랑스군에 장악되었다.
이제 외인부대의 관심은 당연히 나르비크에 쏠렸다. 비예르비크와 마찬가지로 나르비크 항구는 연합군함대의 포격을 받았고 주변 산지를 장악한 연합군 부대가 항구를 향해 쏟아져 내려갔다. 이번에도 독일공군이 나타나 연합군함대를 폭격하려했으나, 영국도 지지 않고 호커 허리케인 전폭기를 불러 들였다. 결국 독일공군은 퇴각할수 밖에 없었다.
5월 28일 13여단은 나르비크 시가지를 향해 전진했고, 독일군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다음 몇일 동안 외인부대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해 영하권의 추위를 자랑하는 눈덮인 스웨덴 국경까지 진격했다. 그들의 목표는 독일침공군 에드워드 디틀과 그의 산악부대를 생포하거나 스웨덴 국경쪽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스웨덴 국경까지 10마일남은 지점에 도착했을때 프랑스로 귀환명령이 떨어졌다. 독일의 저지대공세(네덜란드,벨기에 등지를 말함)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가짜전쟁" 이 끝난것이다.
노르웨이에 파견된 병력과 장비는 프랑스 방어에 반드시 필요했고, 귀환명령에 따라 제13여단은 승전의 기쁨과 함께 브레스트 항구헤 도착했다. 노르웨이 전투는 전쟁개시후 연합군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갈길이 멀었다.
3.프랑스 전투와 외인부대의 분열
한편, 마지노선에 배치된 급조된 외인부대 연대들은 포탄의 복음을 들어야 했다.
1940년 프랑스 전투의 패배를 논함에 있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용기를 보여준 많은 부대들이 그냥 매몰되어버리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 중 하나가 외인 제11보병연대다. 이 부대는 아프리카에서 파견된 원조 외인부대원과 최근에 유럽에서 받은 지원자, 원치않는 프랑스국적의 징집병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프랑스 본토인들은 외인부대와 함께 근무한다는데 대해 매우 거부감을 가졌고 편입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짜전쟁"중의 부대훈련내내 음주와 싸움, 군법재판이 다반사였지만, 5월 독일군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11보병연대의 불화는 사라졌다. 다른 프랑스 보병연대들이 독일군 전차와 수투카 폭격기의 공포에 패닉상태에 빠져 줄행랑을 친것과 달리, 외인 제11보병연대는 전선을 사수했다.
2주동안의 처절한 육박전동안 외인부대는 공격자를 그자리에 묶어두었다. 그러나 다른 프랑스 부대들은 전선에서 이미 내뺀뒤였다. 마침내 완전포위된 외인부대는 퇴각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장 밥티스트 로버트 대령은 연대 상징을 소각하고 부대기를 묻었다(후에 파내져 외인부대로 반환되었다). 독일과의 강화뒤 북아프리카로 귀환한 병력은 본토에 파견된 3000명중 단 450명에 불과했다.
제97외인부대 사단수색대(GERD 97) 또한 1940년 프랑스전투동안 명성을 얻었다.이 부대는 프랑스 전투 당시 전원 북아프리카 출신 외인부대원으로 구성된 유일한 부대였다. 제97수색대는 외인 제1기병연대 출신자로 구성되었다. 외인제1기병연대는 러시아 내전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궤멸된 러시아 백군 "바이런 표트르 랭엘" 장군의 기병대 잔존세력을 규합해 1920년 북아프리카에서 창설된 부대다.
기계화 보병으로 개편되어 구식 장갑차를 보유한 97수색대는 정찰임무를 수행했는데, 그만 강력한 독일군 3호전차대와 마주치면서 양측간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97수색대는 외인부대의 전통에 따라 주저없이 돌격하며 철수하는 나머지 프랑스 부대들을 엄호했다. 부대는 치열한 격전을 벌이며 6월 9일까지 버텼으나 결국 자살적인 돌격끝에 전원 전사했다(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기록).
6월 13일 노르웨이에서 프랑스 브레스트항으로 돌아온 제13여단은 독일군이 파리를 향해 진격중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마그랭 버너리 대령은 "브레턴 보루"라고 명명된 방어선의 일부를 형성하게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독일군은 가볍게 돌파해 버렸다. 대령은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전방수색작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로인해 대령과 몇몇 장교들이 13여단 본대와 분리되어 버렸다. 이들이 브레스트 항에 도착했을때 부대의 흔적을 찾을수 없었다.
정찰대는 본대가 전멸했다고 판단, 대령은 영국으로 망명해 계속싸우기로 결정했다. 모든보트는 철수하는 영국프랑스 병사들에 의해 이미 징발되었지만, 대령과 부하들은 천신만고 끝에 영국 사우스햄턴 항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놀라운것은 그들이 전멸했다고 생각한 제13여단은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는 점이다.
6월18일, 드골장군은 스스로 영국에 망명했음을 선언했다:
"프랑스는 전투에서 진것일뿐이며 전쟁에서 진것은 아니다"
마그랭버너리 대령은 즉시 13여단의 지휘권을 자유프랑스운동본부에 넘겼다. 그리고 부대는 "스톡온트렌트에 위치한 트렌턴 파크의 훈련캠프로 이동했다.
6월 25일 프랑스-독일-이태리간 강화협정이 조인되었다. 이제 13여단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드골과 함께 싸울것인가 아니면 페탱의 신정부가 관리하는 북아프리카로 돌아갈 것인가. 아밀락바리 대위의 카리스마가 미치는 제1대대는 드골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제2대대는 모로코로 이동해 부대를 해체하게 된다.
프랑스제국의 잔여세력들처럼 외인부대도 이제 둘로 나뉘게 되었다. 13여단은 자유프랑스에 합류했으나 나머지 외인부대들은 비시정부하의 북아프리카,시리아,인도차이나로 갈가리 쪼개져 버렸다.
그러나 독일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외인부대에서 근무하는 제3제국 출신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줄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외인부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소속병사들을 인도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외인부대에는 유대인,독일인,폴란드인,체코인,이태리인 등등 돌아가면 재교육수용소로 가야할 많은 부대원들이 있었다.
북아프리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대, 특히 외인부대에는 비시정부를 동정하고 독일을 증오하는 이들이 많았다. 더구나 외인부대는 동료는 스스로 보호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외인부대 정보팀은 병사인도를 요구하는 강화위원회의 현지방문에 앞서 위원회가 가지고 있는 리스트에 올라있는 외인부대원의 이름을 알아냈다. 외인부대는 즉시 해당자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신분증,증명서를 발급했고, 독일인들이 오기전에 해당자들을 위원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사하라사막 오지의 전초기지로 전출시켜 버렸다.
한편 강화위원회는 프랑스군대에 개인화기를 제외한 모든 중화기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외인부대에게는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부대는 명령을 따르는 듯 행동하면서 몰래 사하라 오지의 전초부대에 은닉시키거나 비밀장소에 파뭍어 버렸다.
북아프리카의 외인부대 장교와 사병 대부분은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알제리의 지리적 문제로 인해 자유프랑스군에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북아프리카의 외인부대원들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을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프랑스의 분열은 외인부대원 개개인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북아프리카에 잔류한 외인부대원들은 프랑스의 전쟁전 유니폼을 그대로 착용한 반면, 자유프랑스군의 외인부대원들은 영국군스타일의 복장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 차이는 노르웨이 작전이 끝난 이후 계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다만 부대의 상징인 군모 케피블랑과 외인부대를 상징하는 수류탄 마크는 양측이 공히 함께 사용하였다.
북아프리카의 비시정부측 외인부대는 강화위원회의 계속적인 압박에 시달림과 동시에 무기,유류는 물론 식료품의 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외인부대는 겨우 1만명 남짓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독일은 끊임없이 해체할 것을 종용했다. 외인부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탈영과 자살이 속출했다. 반면에 자유프랑스군의 외인제13여단은 끊임없이 보충병을 받을수 있었다.
4. 자유프랑스군의 출범과 제13여단
자유프랑스군이 영국에서 출범하면서 망명자들로 구성된 외인부대도 점차 활기가 넘쳤다. 이제 이들은 여타 망명국가 군대처럼 영국제 장비를 운영하는 절반은 영국군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든 망명국가 군대들이 잘 알고 있었고 외인부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에 소속된 제13여단의 최초의 임무는 유감스럽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6월 28일 이제는 중령이 된 아밀락바리가 지휘하는 대대가 영국을 떠나 프랑스 연방 서부아프리카의 주요항구 "다카르"를 향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함이 호위하고 드골이 기함에 승선한 대규모 선단이었다.
드골의 목적은 이 중요한 거점 수비사령관을 설득해 자유프랑스로 돌아서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렇게만된다면 이후 벌어질 작전에 중요한 전진기지가 될수 있었다. 하지만 드골의 계산은 빗나가고 말았다.
식민지 총독 "피에르 부아송"은 비시정부에 충성스러웠고,결국 짧지만 격렬한 해전이 벌어졌다. 지상군,특히 주력인 외인부대의 피해를 원치 않는 드골은 해상요새인 항구에 대한 상륙작전을 포기했다.
몇달후, 13여단은 다음 작전에 투입될때까지 아프리카의 카메룬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마그랭 버너리, 이제는 "몽클레아"대령의 지휘하에 외인부대의 2개대대는 통합되어 희망봉을 향해 긴 항해를 하게 되었다. 항로는 희망봉을 지나 동아프리카해안으로 북상해 홍해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1월14일, 외인부대는 영국령 아프리카의 "포트수단"에서 하선해 열차편으로 사막을 이동했다. 이들은 이태리령 에리트리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영국군과 합류하였다. 수단 남쪽의 에리트리아는 매우 거친 사막이었다. 외인부대원으로 막 임관한 미국인 존 핼시 중위는 이곳에서의 훈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래와 열기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고, 공기는 너무도 뜨겁고 건조했다. 태양은 자비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뙤약볕은 목과 셔츠깃아래 양말 위 등등 노출되는 곳은 어디나 그을려 버렸다. 태양빛은 사막의 모래를 눈부시게 만들었고 낮은 언덕 어디에도 식물의 존재는 찾아볼수 없었다. 심지어 한조각의 그늘을 기대하는 것도 사치였다."
물론 이는 새로 임관한 장교들에게 비친 모습이었겠지만. 대다수 외인부대의 베테랑들에게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핼시 중위 역시도 너무도 편안하게 사막을 즐기는 그의 부하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들은 행군중에 휴식이 생길때 마다 편가름없이 하나로 둥글게 모였고 뜨거운 태양과 모래 아래에서도 아무상관 없다는 듯이 활개치고 있었다. 그들은 훈련을 지루해 했다." 아마도 헬시 중위가 경험이 많았다면 이런 모습에 결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에리트리아 작전은 13여단에게 큰 명예를 선사했다. 그러나 쉽게 얻은 것은 아니다. 케렌 주위의 고원에서 처음 이태리 군과 교전을 벌였을때, 이들이 만난 적은 기술과 용기에서 결코 만만치 않은 이태리 산악부대였다. 이태리부대가 궤멸되어 다수가 항복할때까지 격전이 수일간 지속되었다. 외인부대는 마침내 1000명의 이태리 군을 생포했다.
케렌전투 이후, 외인부대는 에리트리아의 홍해상 주요 항구이자 연합군에 저항하는 마지막 주요도시인 "마사와"를 향해 떠났다. 마사와의 외곽은 "빅토르 엠마누엘레"요새의 지원을 받는 일련의 방어거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국포병대의 요새에 대한 맹포격후, 13여단에 요새 점령명령이 떨어졌다.
먼저, 외인부대는 주위 언덕에 위치한 이태리군 기관총 진지를 제거해야 했다. 외인부대원들은 언적을 올라 대검과 수류탄으로 이태리 군을 제압했다. 이제 외인부대는 요새의 성벽에 도착했다. 이태리군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으나 외인부대는 이들을 제압하고 항복을 받았다. 41년 4월 10일 오후, 몽클레아 대령과 2개 차량차량에 탑승한 외인부대병력이 마사와에 입성하면서 에리트리아는 연합군의 손에 완전히 넘어왔다. 프랑스 전투패배 이후, 연합군에서 무능력한 겁쟁이로 인식되던 프랑스군대는 케렌과 마사와 전투이후, 전과 다른 평가를 받을수 있었다.
5.형제들의 싸움, 시리아 전투
이무렵, 시리아의 정세가 심각해지자 영국은 주둔중인 프랑스군의 축출을 결심했다. 레반트라고 알려진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은 1차대전이후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국은 지역을 통제하는 비시정부와의 군사충돌을 가급적 피하려 해왔다. 레반트 수비대장 앙리 덴츠 장군휘하의 주둔군은 3만5천에서 8만에 달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으며, 특히 휘하에는 거칠고 사막에 강한 제6외인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벌서 수년간 시리아에 주둔 중이었다.
레반트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독일 아프리카 파견군 사령관인 롬멜원수는 서쪽으로부터 이집트를 위협하고 있었다. 만일 독일군이 레반트를 통과해 수에즈 운하와 중동을 장악하면 연합군의 유류수송로는 붕괴될 것이었다.
독일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항구와 비행장의 사용권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비시정부 역시 마치못해 수용하려는 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고, 연합군은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41년 6월 8일, 약 4개사단규모의 연합군 원정대가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의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진격했다. 영국,오스트레일리아,인도군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민병대를 포함한 다국적 군은 이후 자유프랑스군과 합류하였다.
프랑스부대의 구성은 매우 다양했다. 13여단을 중심으로 프랑스해군보병대,세네갈인,북아프리카 스파히,체르키 기병대 등이 포함되었고, 특히 체르키 기병대는 수년동안의 박해를 피해 망명, 시리아에 정주하던 무슬림이었다. 프랑스인의 지휘하에 이들은 비시정부관할지역을 떠나 요르단으로 넘어왔고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했다. 그들은 러시아 코사크기병대 풍의 복장을 한 기병전투 전문가들이었다.
다카르에서 처럼 드골은 시리아의 비시정부관리들이 자유프랑스에 합류하기를 바랬지만, 덴츠 장군은 비시정부의 침공군에 저항하라는 명령을 따랐다. 시리아의 전투는 모든 프랑스군에게 슬픈일이었고 특히 외인부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프랑스인 대 프랑스인의 싸움일 뿐이 아니라 13여단의 입장에서는 자유프랑스 외인부대 대 비시정부 외인부대의 싸움이기도 했다, "외인부대는 나의 고향"이라는 모토아래 싸워왔던 형제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작전이 개시되자 자유프랑스군 외인부대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국경너머 시리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운송하는 수단은 당장 폐차시켜도 무방할 정도로 낙은 민간 트럭과 승용차, 버스였다. 사실 이들은 수시로 고장을 일으켰다.
제13여단은 호주군 제7사단과 함께 다마스커스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행군은 여러면에서 앞서 에리트리아원정과 유사했다. 숨막히는 열기, 날아다니는 모래먼지, 이글거리는태양,부족한 식수... 모든것이 지옥을 행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강인한 외인부대는 마치 사막의 일부분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몇일간의 사막행군이후, 13여단은 다마스커스 근처 고원지대에 도착했다. 거기서 외인부대의 시리아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외인부대는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외인부대는 자체적인 항공지원은 물론이고 대공장비도 없었다. 반면 시리아 주둔 비시 정부군은 상당수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외인부대는 어떠한 효율적인 대전차 장비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비시 정부군의 전차가 진격해 옴에 따라 13여단 부대들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절체 절명의 순간, 이들은 부대가 보유한 유일한 중화기인 1차대전식 75미리 야포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차를 상대하기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제로거리 사격이라 비시 정부군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었다.
같은 프랑스군 간의 치열한 보병전투가 전선을 따라 이어진 후에야 외인부대는 서서히 다마스커스를 향해 진격할수 있었다. 드디어 13여단은 도시 외곽에서 형제인 비시 정부측 외인제6보병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6연대와 마추진 제13여단은 순간 주저했다.
"이들은 친구인가 아님 적?"
그들은 오랫동안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마침내 13여단은 순찰대를 보냈다. 이들이 비시정부의 외곽초소에 도착하자, 경비중이던 비시정부 소속 외인부대는 무장을 풀지않고 바로 순찰대를 체포해 버렸다.
이상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는 외인부대식 인사법인 셈인데 외인부대가 다른 외인부대에 대새 경의를 표현하는 제스추어였다. 이는 또한 양측간의 전투가 개시됨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양측의 공방은 치열해서 공격과 반격이 이어졌다. 마침내 비시 정부측 외인부대는 압도당하기 시작했고 결국 외인 제 6보병연대는 물러섰다.
7월 21일, 지치고 만신창이가 된 제13여단은 영광스럽게 다마스커스 시가지로 행진했다.
(레반트 지역의 비시 정부군이 항복할때까지 많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7월 14일 체결된 강화협정은 비시 정부측 부대들에게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할 기회를 제공했다.)
6. 그 이후
비시정부측 외인제6보병연대의 잔존병 1000명은 자유프랑스군 소속 외인제13여단으로 인도되었고 이들은 한개 대대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인원이었다. 이들은 13여단 제3대대로 편성되었고 쌍방의 전사자는 동등한 외인부대원으로 함께 매장되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전쟁전 나치 분자들의 침투로 촉발된 외인부대 내부의 분열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시리아 전투는 외인부대가 서로 총구를 마주한 최후의 순간이었다.
비시측 외인부대는 42년 11월에 있었던 미군의 북아프리카 침공당시 의례적인 저항제츠쳐만을 보인채 바로 연합국에 투항하였고 이어지는 튀니지아에서 돌일군을 상대로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2차대전 외인부대의 상징이라 할만한 외인제13여단은 영국제8군에 소속되어 추축군과 전투를 벌여나갔고 이집트 밖으로 롬멜을 추격해 북아프리카를 횡단했다.
이제 미군장비로 무장한 외인부대원들은 튀니지와 이태리,프랑스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외인부대를 상징하는 "르부당"의 노랫소리는 다뉴브 강둑에서 프랑스 알프스산맥까지 메아리 쳤다.
참고로 마그랭 버너리 , 가명으로 몽끌레아 중령은 후일 중장에 오르게 되고 한국전 당시 중령계급장 달고 한국전의 승부처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 군 대대를 이끌기도 한 인물입니다.
'전쟁.....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중해 상공의 야간 암살 작전 (0) | 2013.11.25 |
---|---|
프랑스 외인부대의 전설 ~ (0) | 2013.11.23 |
(3) 최초의 에이스들 (0) | 2013.10.30 |
(2) 나르는 쏘세지, 용? (0) | 2013.10.30 |
(1) 인류 최대의 전쟁 - 일차대전의 시작 (0) | 2013.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