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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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수훈 조종하들은 용감한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중세 시대에 창을 들고 유럽을 방랑하던 기사들처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종사들은 개개인을 상대로 고독 한 전투를 벌였다. 옛날 기사들의 정신을 회상하며, 거대하고 다루기 힘든 비행기 위에 올라 옛날 기사들이 가졌던 정신으로 왕과 황제들의 명예를 위해 싸움으로써 그들에게 충성을 다 했다. 영국과 프러시아가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을 워털루(Wateroo)에서 물리친 1815년 이래로 1914년까지 유럽에는 별다른 다툼이 없었다. 그 세월동안 자기 나라의 우월성을 외치며 군 사적 능력을 시험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국수주의적 조짐이 나 타나고, 여러 왕실국가 사이의 오래던 적개심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은 전쟁의 본질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기관총과 장거리 대포, 철조망의 발명으로 기마병은 그리스 시대의 보병 만 큼이나, 총검 로마시대의 단검 만큼이나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새로 개발된 무기들은 소규 모의 공격에도 엄청난 실상을 입힐 정도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일찌기 현대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군비 경쟁이 여러 주요 국 가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전쟁에서의 승리는 단지 전투에서의 무용과 사기가 아닌 그들 나 라가 생산할 수 있는 군수 물자와 전함의 수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다.
전쟁을 알리는 한발의 총성 마침내 한 암살자의 총알 몇 발로 전 유럽을 전화속으로 몰고갈 제1차 세계대전이 불이 붙다. 독일의 남쪽에 있는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연합(Austria-Hungary)과 발칸반도의 소국 인 세르비아(Serbia)가 장기간의 전쟁에 돌입하려하는 시점에 있었다. 1914년6월28일 세르 비아의 한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 헝가리 연합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디 (Franz Ferdinand) 대공을 암살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오스트리아는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세 르비아를 단정하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 해7월 말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무리한 사 과와 양보의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에 세르비아는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겠다고 했 지만,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략하는 전쟁의 길을 택했다. 오래 전부터 발칸반도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였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침공하자 오스트리 아와의 전쟁에 돌입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도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항해 군사 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1914년8월4일에는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자, 영국이 독 일에 대항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선이 형성되고, 수 많은 젊은이들이 군중의 환호속에 군가를 부르며, 전장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이는 드물었다. 19세기가 끝나기 몇 해 전 독일의 참모총장인 폰 슐레이펜(Von Schleiffen)은 프랑스와 러시 아를 동시에 공격하기 위해서 교활한 작전을 세웠다. 양쪽으로 전선을 형성해서는 오래 버 틸 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한 슐레이펜은 프랑스를 기습 공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전략이 라고 결정했다. 그는 독일군의 뛰어난 기동력을 이용해 벨기에를 통과해서 프랑스군의 동부 방어선을 측면공격하여 단숨에 파리 근교까지 밀고 들어가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일단 프랑스군을 무력화시킨 후에, 형편없는 전력의 러시아를 공격해서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1914년 독일은 폰 슐레이펜의 계획을 실행에 옮겨, 백만이 넘는 병력으로 벨기에를 초토화 시키고, 영국과 프랑스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단 몇 일만에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까지 쇄도하 기 시작했다. 남동부 전선에서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화려한 군복을 입은 프랑스군이 수 백 대의 기관총으 로 무장한 군대와 맞서서 형편없는 총검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프롱티에(Frontiers) 전투 알려진 9일 동안의 역공작전에 30만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희생되었다. 이제 영국군도 프 랑스 북부에 병력을 투입하였다. 8월이 되자, 영국군이 투입한 병력마저도 몽(Mons) 전투와 르 카토(Le Cateau)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8월이 다 지나갈 무렵, 전 세계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몰락을 지켜보며 공포에 떨었고, 독일군의 선봉 부대들이 프랑스 파리의 외곽 지역까지 도달했다. 독일의 승리가 바로 눈앞 에 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독일은 실수를 범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병력을 지휘하는 폰 클럭 장군이, 미리 예 정된 서쪽으로 침투하려던 진로를 수정하여 파리의 동쪽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로, 그의 병력 오른쪽이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불운하게도 가까이 있었던 부대 와의 연락이 끊어지고, 고립되게 되었다. 그러자 연합군의 정찰기가 이 헛점을 발견하고, 영국군 과 프랑스군을 투입하여, 폰 클럭 부대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독일군의 행진은 만(Marne) 강 에서 멈추게 되었고, 이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전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던 독일의 절호 의 기회가 폰 슐레이만의 계획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만의 기적(Miracle of the Marne)이 일어난 이후, 양 측 군대는 서로의 서쪽 진형을 측면공격하 려고 시도했지만, 북해(The North Sea) 연안에서 모든 작전이 무산되고, 독일군과 연합군은 프랑스 해안에서 벨기에를 거텨 스위스의 국경선에 이르는 장장 600마일의 전선위에서 참 호를 파고 대치하게 되었다. 지겨운 참호전의 탈출구 푸르른 창공 그 후, 삼 년 동안 전선은 정체상태를 유지하였다. 병사들은 무릎까지 오는 진흙더미속에서 지쳐버렸고, 최전방의 참호에서는 질병이 끊이지 않았다. 장군들은 기관총과 대포로 가득차 있는 전장속으로 진격하라는 일관성 없는 명령들을 남발하였다.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위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가득 쌓였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집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지 켜지지 않았다. 버든(Verdun)이나 솜므(Somme), 이프르(Ypres)등의 전선은 살육과 피비린내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지상 전투에서의 공포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비행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제1차 세 계대전은 최초로 비행기가 대량으로 사용된 전쟁이었다. 느리고 볼품없는 아주 조종하기 쉬 운 비행기가 유럽전선에 있는 부대들의 보병역할을 했다. 무장도 안되었고, 속도도 느린 타 우배(Taubes), 블레리오트(Bleriots), 파르망(Farmans) 같은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 지르며, 적군 의 부대배치나 이동등을 정탐했다. 전선의 최전방에서는 기마병을 대신하여 '군대의 눈' 역 할을 하였다. 그러한 일들이 비행기들이 수행하던 임무의 전부였다. 당신의 장군들이 비행기 의 중요한 역할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포츠 (Foch)원수는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는 스포츠로는 매우 좋은 것이나, 전쟁에는 쓸모없다." 그러나 곧 이러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자료출처:고공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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