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일본군은 평양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계획에 따라 북양함대는 대련에 도착했다. 유성휴가 이끄는 4000명은 5척의 배에 나눠 타고 그날 밤 짐을 모두 풀었다. 16일 이른 아침, 정여창이 이끄는 정원(定远), 진원, 제원, 치원(致远), 정원(靖远), 경원, 래원, 평원, 초용, 양위, 광갑, 광병, 진남, 진중 14척과 4척의 어뢰정을 이끌고 도착했다.
17일 여명, 일본군 제1유격대와 본대가 북양함대와 해양도(海洋岛) 부근에서 만났다. 북양함대를 발견한 요시노 호는 본대에 신호를 보냈고, 교전이 벌어졌다.
해상교전에는 기동성이 매우 중요하다. 해군편대의 최고속도는 팀 내 항속이 가장 낮은 군함의 최고속도로 정해진다. 12척의 일본 해군 중 항속이 가장 높은 요시노는 23노트, 최저항속인 적성은 10노트로 차이가 현저했다. 그러나 제1유격대와 본대의 전술군은 작전 시 합쳐졌다가 나눠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제1유격대의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일본함대는 중국군함을 발견한 뒤, 즉시 점심을 먹고 격전을 준비했다. 11시 5분, 전투 위치로 배치되었다.
북양함대의 작전 초기 진형
정여창은 일본함대가 종대로 오는 것을 보고, 진형을 바꾸고 항속을 7로 높였다.
정여창이 바꾼 진형은 기러기형으로, 두 척이 한 소대(小隊)를 이뤄 앞뒤로 교차하는 형태이다. 북양함대의 최종 진형에서 중간에 소속된 배의 위치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주장도 많다. 그렇지만 적어도 정원, 진원이 가운데 있고, 제원, 광갑이 가장 좌측에, 초용과 위양이 가장 우측에 있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북양함대의 위치가 조금씩 차이가 난다.
북양함대의 배치를 변형한 뒤, 정여창은 각 배에 훈령을 내렸다.
1 각 소대의 2척의 배는 서로 협력한다
2 배의 정면이 적을 향하는 기본전술을 원칙으로 한다
3 각 배는 가능한 한 기함과 함께 움직인다
2번과 같이 명령한 이유는 북양함대의 각 배들의 중포가 배 앞부분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적을 향해 최대한도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3번은 일본배의 포는 매우 빨랐기 때문에 중국함대는 반드시 진형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북양함대의 주력전함은 구입한 지 좀 된 것이 많았는데, 대구경중포가 많고 항속이 느린 편이고, 속사포도 적었다. 속사포가 적은 문제는 원래 정여창 제독이 여러 차례 정부에 포를 더 달라고 요구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풍도 해전 전날 위기상황이 닥치자, 북양함대는 간신히 교주만에서 10문의 53미리 속사포와 8문의 차륜쾌포를 각 함선에 배치할 수 있었다.
일본함대의 주력선은 비교적 신형이었다. 특징은 항속이 높았고, 중소구경 속사포가 많고 대구경포가 적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측이 전체적인 측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전투력은 장비에만 있지 않고, 그것을 잘 조종하는 사람에게도 달려있다.
11시 18분, 일본군 지휘관 이토 스케유키(伊东佑亨)가 제1유격대를 향해 명령했다. “우익의 적함을 공격해라”
11 30분, 이토 스케유키는 항속을 10노트로 높이고, 각 함대가 거리와 속도에 주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북양함대의 대형은 정원과 진원호가 중앙에 돌출된 형태였고, 전체적으로 무뎌진 뿔과 같은 횡대진형이었다.
쌍방이 12km지점에 근접했을 때, 제1유격대가 약간 좌측으로 돌아가서 이토 스케유키의 명령에 따라 북양함대의 우익을 공격했다.
11시 50분, 북양함대의 기함인 정원이 먼저 발포했고, 이토 스케유키는 재차 명령을 내렸다. “적당한 거리에 도착했으면 발포해라”
일본군 각 함대는 사정거리에 이르기 위해 14노트까지 속도를 높였고 빗발치는 포탄을 뚫고 북양함대의 우익을 향해 돌진했다.
11시 52분, 일본함대의 기함인 마츠시마가 중국함대에서 3500m 떨어진 지점에서 발포했다. 55분, 제1유격대 기함 요시노가 북양함대에서 3000m 떨어진 지점에서 발포했다. 뒤이어서 본대와 제1유격대도 발포했다.
그러나 포는 거의 명중하지 않았지만, 정원을 향해 발사한 포탄이 하필 정여창 제독이 있는 갑판을 강타해 그에게 부상을 입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원에 있는 신호장치가 망가진 것이다. 그래서 기함과 다른 함대 사이에 연락할 방법이 사라지고 말았다. 정여창도 자신을 대신할 사람과 기함을 전쟁 전에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휘체계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각 함대는 사전에 반포된 세 훈령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일본함대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포격을 가하자 사실상 대형을 유지해서 싸우기가 불가능해졌다.
정원호가 첫 번째 포를 발사했을 때 일본 제1유격대는 이미 북양함대의 우익 “초용(超勇)”과 “양위(扬威)” 함선에 다가간 상태였다.
초용(超勇)
양위(扬威)
북양함대는 일본 본대를 집중 공격했다. 11시 55분, 마츠시마의 320mm구경포 포납 위쪽에 정원의 150mm구경포가 명중해서 두 명의 포수가 부상을 당했다. 곧 이어 마츠시마의 제7호포가 망가져서 1명의 포수와 1명의 신호병이 사망했다. 오후1시 경, 일본함대의 3호 함선인 “厳島(严岛, 이츠쿠시마)”의 우현이 210mm 포를 맞아 큰 충격을 입었고, 11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곧 이어 150mm포탄이 우현에 떨어져 뒤쪽에 있는 기관실이 폭발했고, 5명의 병사가 부상을 당했다.
厳島(이츠쿠시마)
1시 10분, 본대 4호 함선인 “橋立(하시다테)”의 320mm구경포 포탑이 포격을 당해 수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때, 일본 본대의 5호군함 “比睿(히에이)”와 4호선 “橋立”의 거리는 이미 1300m 벌어진 상태였다. 북양함대의 V형 편대의 머리부분은 바로 이 두 함대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比睿”이 앞 함대를 따르지 못하고 당황한 나머지 급히 우회전하여 정원호의 좌현 1000m 지점에서 북양함대의 진형으로 뛰어들었다. 중국함대 수척이 함께 이를 공격하여 比睿는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고, 군기도 날라가버렸다. 比睿는 본대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정원과 진원 등 함대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원호가 발사한 305mm포탄이 比睿의 우현을 관통해서 배 뒷부분에서 폭발했고 큰 불이 났고, 뒤쪽 갑판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격전 중에 比睿호의 수십 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그렇지만 比睿은 북양함대의 끈질긴 공격에도 격침되지 않고 포탄 사이를 뚫고 도망갔다.
일본의 철갑순양함 야마시로
야마토
북양함대가 집중해서 일본본대의 약한 함선을 공격하는 때에, 우익에 약한 초용, 양위 두 함선도 일본 제1유격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요시노는 초용, 양위에게 다가가 공격을 했고, 뒤를 이어오는 高千穗, 秋津洲, 浪速 3척의 함선은 북양함대의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중국함대도 이 4척의 일본 함선을 향해 맹렬히 공격했다. 1시8분, 요시노의 후갑판이 포탄에 맞았다. 요시노의 후면에는 대량의 포탄과 화약을 저장해두었는데, 이게 다 폭발해버렸고, 이것을 지키던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를 따르던 3척도 모두 포탄에 맞았다. 제1유격대는 우회전을 하여 반달 모양의 항적을 보였고, 순식간에 북양함대의 우익 끝자락을 돌아갔다. 초용과 양위는 둘다 구식 순양함으로써, 항속이 느리고 화력이 약하고 보호력도 약했다. 결과적으로 4척의 일본함선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큰 불이 났다. 초용은 함체가 차차 우현으로 기울더니, 1시30분에 침몰했다. 양위는 당시에 침몰하지는 않았지만 기울기 시작하였고, 불기운도 점점 거세져서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북쪽으로 퇴각했고, 가까운 해안에 배를 대고 병사들은 도망쳤다.
북양함대의 주력과 일본본대의 격전은 계속되었다. 일본 比睿가 북양함대의 진영 가운데로 뛰어들자, 그 뒤에 있던 扶桑이 정원호에서 700m 거리에서 갑자기 좌현을 향해 방향을 바꿨다. 그렇지만 우현에 포탄을 맞아 후갑판에 불길이 치솟았다. 比睿은 포위를 뚫은 뒤 본대전함인 扶桑을 뒤쫒으려고 했지만, 함선에 다시 불이 났고 전투능력을 상실하여 2시 무렵에는 서남쪽으로 퇴각했다. 원래 본대 뒤쪽 좌측에 있던 赤城, 西京丸호는 항속이 더 느려서 이미 본대에서 훨씬 뒤로 쳐저있었다. 북양함대 좌익은 화력을 집중하여 赤城을 공격했다. 1시 25분 赤城은 함교에 포탄을 맞고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곧이어 赤城은 증기관에 균열이 생기고 항속이 떨어졌고 탄약도 바닥이 났다. 赤城은 구원을 요청하면서 남쪽으로 퇴각했다. 2시15분, 래원호가 赤城의 후방 200m 지점에서 재차 포격을 가해 赤城의 함교를 맞췄고, 2시20분, 赤城은 래원호에 포격을 가해 앞부분 갑판을 맞췄고, 그 틈을 타서 달아났다.
西京丸는 1시 9분에 3000m 쯤 되는 거리를 두고 중국함대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5분 뒤 정원, 진원호가 발사한 포탄에 갑판이 관통당했다. 그 뒤 西京丸는 比睿와 赤城이 퇴각하자 자기도 퇴각하려고 했다. 정원, 진원 등 4척의 군함은 화력을 집중하여 西京丸을 공격했다. 西京丸는 즉시 “함대고장”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곧이어 150mm 포탄 1발과 몇 발의 속사포탄이 후갑판에 명중하여 항속장치와 신호장치가 모두 망가졌다. 그리고 150mm포탄이 선미를 뚫고 기관실에서 폭발하여 큰 불이 났다. 西京丸호는 사람의 손으로 키를 움직여야 했다. 2시 40분, 제1유격대로 가려고 하는 西京丸와 중국군함 평원, 광병(廣丙)과 어뢰정과 마주쳐 재차 공격을 받았다. 어뢰정은 西京丸를 향해 2발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명중시키지 못했고, 西京丸는 운 좋게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제1유격대는 북양함대의 우익 초용, 양위 2척을 공격한 뒤, 좌현을 향해 180도 회전하였고 항속을 12노트로 낮췄다. 1시30분쯤, 기함 마츠시마가 제1유격대 회항 신호를 내렸다. 제1유격대는 다시 좌현을 향해 180도 회전을 하고 항속을 15노트로 높여 본대와 합류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본대는 계속해서 우회전을 해서 북양함대의 뒷길을 포위하려고 했다. 이렇게되자 제1유격대는 본대와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항속을 다시 10노트로 낮추고 본대의 뒷부분을 따라 움직이려고 했다.
2시 15분, 제1유격대가 점차 본대의 전함 扶桑을 따라갔을 때, 西京丸가 보낸 “比睿,赤城 위험 신호”를 받고 갑자기 좌측으로 180도 회전을 하여 赤城과 중국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서 제1유격대와 본대는 북양함대를 양쪽에서 협공하는 모양이 되었다.
초용이 막 침몰하고 있을 때, 중국군함 평원, 廣丙, 복룡호가 大东沟에서 달려와서 참전하여 북양함대가 손실한 초용, 양위 두 함선을 보충했다. 일본함대는 比睿, 赤城, 西京丸가 차례로 전장을 떠나 9척이 남았다. 그러나 전쟁은 북양함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어서 북양함대의 진형은 이미 엉망이 되었다. 정원과 진원 두척의 철갑함만이 서로 도우면서 행동했고, 나머지 함선은 각자 싸웠다. 그러나 일본함대는 약한 함선을 이탈하게 하고 나자 기동성이 더 좋아졌다. 제1유격대와 본대는 속사포가 우세한 점을 활용하여 앞뒤로 협공하여 전장의 주도권을 쥐었다.
일본본대는 북양함대의 우익에서 회선한 뒤, 다시 중국군함을 향해 공격했다. 2시26분, 마츠시마는 320mm 구경포를 쏘아 진원의 앞부분을 맞췄다. 2시34분, 우측방향에서 마츠시마의 정면을 향해 전진하던 래원은 260mm포탄 1발을 마츠시마의 좌현에 맞춰서 어뢰실과 어뢰발사실을 맞춰 폭발시켰다. 3시10분, 47mm 포탄이 1발이 마츠시마의 좌현중앙 어뢰실 상부를 맞췄고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 본대는 있는 힘을 다해 반격하여 래원과 평원, 廣丙에게 포탄을 퍼부었다. 제1유격대는 2시54분 좌현을 향해 180도 회선하고 항속을 14노트로 낮췄다. 그리고 우현을 향해 90도 틀고 항속을 다시 12노트로 낮췄고, 그 결과 본대의 항로의 직각을 이루게 되었고, 십자포화를 구성했다. 일본함대의 양면 협공 아래, 정원의 앞부분에 큰 불이 났고, 제독의 깃발도 날라가버렸다. 치원도 큰 상처를 입고 해수가 선내에 들어왔고, 침몰할 위기에 처했다. 치원의 邓世昌은 도박을 걸기로 결심하고, 함선을 정면에서 다가오는 요시노에 부딪히기로 했다. 함선의 병사들이 이 명령을 듣고 소란을 일으켰다. 등세창은 엄명을 내렸고, 치원은 일함을 향해 돌진했다. 요시노는 이를 보고 한편으로 피해가면서 한편으로 포탄을 연이어 발사했다. 3시 30분, 치원의 좌현이 기울어졌고, 함선의 머리부분이 바다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등세창 등 200여 명의 병사들도 바다에 잠들었다.
치원
치원이 격침된 뒤, 제원(济远)이 먼저 전장을 이탈하여 여순방향으로 퇴각했다. 광갑(廣甲)도 그 뒤를 이어 연안의 얕은 수로를 따라 대련 방향으로 퇴각했다. 당시 정원(靖远), 래원, 경원도 이미 포탄을 많이 맞아 연기가 자욱하여 퇴각했다. 4시 16분, 평원, 廣丙도 부상을 입어 어뢰정과 함께 전장을 이탈하여 북쪽으로 갔다. 이 전에 일본본대의 “엄도”호가 마침 정원과 진원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장을 이탈하던 평원은 엄도의 좌현 1200m 지점을 지나가면서 곧장 사격을 가했다. 격전 중 엄도는 평원에게 두 발을 맞아 10여 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일본 제1유격대 4척은 대형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전장을 이탈하는 중국군함을 추격했다.
중국군함은 전장에 이제 정원과 진원 밖에 남지 않았다. 두 군함은 일본본대 5척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정여창은 비록 개전 초기 부상을 입었지만,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 갑판에서 계속 지휘를 했다. 정원호는 3시10분 경에 앞부분에 포를 맞아 불이 났지만 병사들은 기가 죽지 않았다. 정원과 진원은 서로 협력하면서 엄호도 해 주었다. 3시 30분, 정원과 진원 두 함대는 나란히 305mm구경 대포를 발사하여 그 중 한 발이 마츠시마의 4호 포위에 격중시켰다. 마츠시마의 갑판에 큰 폭발이 일어났고, 선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폭발로 인해 28명이 죽었고 68명이 부상당했다. 함선의 대부분의 포가 망가졌고, 겨우 6문의 포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수가 대부분 부상을 입어 더 이상 함대운용이 불가능해졌다. 4시 10분, 마츠시마호는 각 함선에 자유행동을 지시하고는 퇴각했다.
마츠시마가 큰 충격을 받은 뒤, 본대의 나머지 4척의 군함은 동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정원과 진원은 끝까지 맹렬히 공격하였다. 일본본대의 마츠시마, 엄도, 교립 3척은 정원과 진원을 상대하기 위해 설계된 것으로써, 320mm구경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정원과 진원의 30인치 두께의 장갑을 뚫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정원과 진원의 장갑 및 포탑에는 일본함대의 포격에 많이 맞았지만 그 깊이가 4인치를 넘어가지는 않았다.
일본 제1유격대는 전장을 이탈하는 중국군함을 추격하였는데, 목표는 큰 충격을 받고 항속이 느려져 뒤에 쳐진 경원, 래원, 정원(靖远), 3척이었다. 경원은 이미 백여 발의 포탄을 맞아 함내에 이미 물이 많이 들어왔다. 래원도 이미 200여 발의 포탄을 많고 뒷부분에 큰 불이 났다. 제1유격대는 먼저 경원을 추격하기로 하고 항속을 14로 올렸다. 4시 48분, 요시노가 경원으로부터 2500m 지점부터 포격을 가하여 1800m 지점까지 접근했다. 경원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좌현으로 기울더니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경원이 제1유격대의 4함선을 견제한 덕분에 정원과 래원은 인근 섬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제1유격대가 경원을 격침시킨 뒤, 5시 45분에 방향을 바꾸어 정원과 래원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바로 이때, 제1유격대가 본대에서 보낸 회항 신호를 받고 방향을 돌려 본대로 돌아갔다. 원래 이토 스케유키는 저녁에 되어가는 것을 보고 계속 작전을 수행하다가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 대형을 갖추기로 한 것이다. 또 북양함대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당할지도 몰라 전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제1유격대에 회항 명령을 내린 뒤 그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본대5척을 이끌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6시 무렵이 되어서야 제1유격대가 뒤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저녁 7시, 이토 스케유키는 막료를 이끌고 기함을 교립으로 바꾸었고, 마츠시마는 즉각 일본으로 돌아가 수리하게 했다.
정원(靖远)과 래원은 일본의 제1유격대가 퇴각하는 것을 보고 정원과 진원호가 있는 방향으로 갔다. 이때 靖远은 기함을 대신하여 제독기를 내걸고 기타 군함을 모았다. 정원, 진원, 靖远, 래원, 평원, 광병(廣丙) 6척은 일본함대가 퇴각한 방향으로 나갔다가 일본함대가 이미 가버린 것을 보고 여순항으로 돌아갔다. 5시간 계속된 황해대전은 이렇게 끝났다.
정여창 제독은 이홍장에게 “아군은 4척을 잃었지만, 3척의 일함을 격침시켰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사실 정여창은 광갑(广甲)이 돌아오지 못한 것을 몰랐다. 이 배는 전장을 이탈한 뒤, 그날 밤 대련만 외곽의 삼산도(三山岛)에 이르렀는데 암초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날, 일본함대가 해역을 수색하고 나서서, 얕은 물가에 버려져 있던 “양위”를 격침시켜버렸고, 19일에는 정여창이 제원을 보내어 삼산도에 놓여져 있는 광갑을 구출하게 했지만 실패하였다. 나중에 “금룡”을 보내어 끌어오게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그냥 그 배를 폭발시켜버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중국함대가 일본 3개를 격침시켰다고 착각한 것은 比睿, 赤城, 西京丸가 큰 타격을 입고 퇴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赤城은 증기기관을 수리한 뒤, 해전이 벌어진 곳에서 가까운 데서 본대로 돌아왔다. 比睿과 西京丸는 거의 망가진 상태여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가서 임시 닻을 내려놓고 있었고, 이토 스케유키도 두 척의 군함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츠시마를 일본에 보내 수리를 하게 한 뒤, 赤城의 사상자를 배 위에서 내리게 하였고, 두 척의 군함을 수색하게 했다. 다음날 오후, 일본군은 어제의 전장을 다시 찾았지만 두 군함을 찾지 못했다. 이토는 千代田에게 얕은 물가로 가서 찾아보라고 했고, 그날 저녁 6시에 별 소득 없이 돌아왔다. 그러나 9월 19일, 이토 스케유키가 본진으로 돌아오자 두 군함이 이미 안전하게 도착해있었다. 일본군의 피해는 사망 121명, 부상 177명이었다. 9월 23일 오후, 이토 스케유키는 압록강 입구로 순찰을 돌면서 제2유격대를 불러 군함을 보충했다. 그리고 연합함대도 5일 동안 쉬면서 다 수리를 했다.
이와 비교해서 북양함대는 5척의 전함이 가라앉았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청 정부는 임시방책으로 외국군함을 사들이는 것을 고려했다. 먼저 영국으로부터 사려고 했고, 한편으로 각국에 사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해서 일이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배는 어떻게 구입해서 보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수한 지휘관과 훈련된 병사는 어디에서도 보충할 수 없었다. 사실, 중국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함 전부를 모아서 운용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실현될 수 없었다. 10년 전에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남방쪽 함대가 동원되어 많은 타격을 입었을 때 이홍장의 북양함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북양함대의 실력을 보존해서 최후의 보루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었겠지만…
북양함대의 손실된 군함은 보충되지 못했고, 각 군함의 회복도 여순항 쪽의 기술자가 일손이 딸려 신속히 진행되지 못했다.
황해 해전은 북양함대가 5척의 군함을 잃은 것에 그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 해전을 기점으로 해서 중국은 전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일본에 넘겨주게 된다.
황해해전 분석
1 전술운용
일본함대는 황해해전에서 보여준 것은 전형적인 기동전술이다. 일본은 진작부터 병력을 본대와 제1유격대, 제2유격대(황해해전에 참가하지 않음)가 합쳐졌다 나누어졌다 하는 훈련을 반복해왔다. 그래서 북양함대가 어떤 진형을 택하든 관계가 없었다. 황해해전에 참가한 제1유격대는 일본해군의 주력으로서 군함이 출항한지 오래되지 않은 새것이었고, 항속이 빠를 뿐만 아니라 대량의 신식 속사포를 설치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종대 작전에 매우 유리했다. 특히 제1유격대의 4척의 순양함은 120mm구경 이상의 속사포가 34문에 이르렀고, 평균항속은 북양함대보다 4노트가 빨라, 기동성과 화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북양함대는 대구경포가 일본함대보다 많고 우세했다. 그러나 군함측면에 설치된 대포와 속사포 수가 적었고, 그래서 횡대 대형으로 일본의 종대 대형을 상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횡대에서 발휘할 수 있는 화력이 종대보다 4문의 305mm포가 많았지만, 2문의 250mm포, 2문의 210mm포, 7문의 150mm포와 2문의 120mm포가 더 적었다. 즉 종대대형으로 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횡대대형보다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북양함대는 고집스럽게 횡대대형을 유지하려다가 기동성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각 군함의 기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이다. 초기에 정여창 제독이 부상을 입고 기함의 신호체계가 무너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원래 계획했던 기러기 대형이 아니라 산만한 형태의 편대로 변해버린 것이다.
2 전장 지휘
일본함대는 비록 두 개의 전술군으로 나뉘었지만 서로 호흡을 맞추어 전장을 휘저었다. 전쟁 마지막 즈음에 기함 마츠시마가 중상을 입고 각 함대에게 자유행동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지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토 스케유키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전투를 끝내라고 명령한 뒤, 제1유격대에도 신호를 보내 귀환하라고 하였고, 그 뒤에서야 본대를 이끌고 전장을 빠져나갔다.
북양함대는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었다. 정여창 자신도 해군출신이 아니어서 해전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작전전술 능력도 부족했다. 그는 육군 장군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지만, 전문적인 해군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북양함대를 이끈 것은 경력과 인품으로 한 것이었다.
3 무기장비
|
북양함대 |
일본함대 |
군함총수 |
10 |
12 |
300mm 이상 중포 |
8 |
3 |
200mm 이상 대포 |
17 |
8 |
150mm 이상 속사포 |
0 |
8 |
120mm 속사포 |
0 |
60 |
100mm 이상 경포 |
20 |
26 |
총계 |
45 |
105 |
배수량 |
29970 |
40880 |
군함 정원 총수 |
2100 |
3532 |
최고항속 |
18노트 |
본대 19노트 유격대 22.5노트 |
최저항속 |
11노트 |
본대 18노트 유격대10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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