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해 해전 》
위해해전은 정여창이 이끄는 북양함대가 일본의 해상과 육지의 포위작전과 외부와 연결이 되지 않아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쟁으로서, 북양함대는 류공도(劉公島)에서 수비병과 힘을 합쳐 저항한 전투였다.
F라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위해입니다.
그곳에서 바로 왼쪽에 표시된 곳이 연대(煙臺, 옌타이)입니다
1 류공도 방어전
류공도 방어전은 청일해군이 마지막으로 싸운 결전으로서, 정여창 장군이 북양함대의 주요 지휘관이었다. 정여창은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청 정부가 그에게 불공정한 처벌과 책임추궁을 하기까지 했다. 여순이 함락된 이후, 정여창은 청 정부로부터 파직을 당하고 죄를 문책당할 뻔도 했다. 그는 그래서 죄를 지은 몸으로 이번에 북양함대를 이끌고 강적 일본해군과 다시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이미 위해의 육지 지역과 모든 포대는 일본군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그래서 육지로부터 도움을 얻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군함도 황해해전에서 부서진 것을 다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군함 확충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먼저 정여창은 일본군의 항복 권유를 거절했다. 일본은 위해위를 공격하기 전에, 정여창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하면 관대하게 대우해주겠다고 했지만, 정여창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이 편지를 이홍장에게 보내면서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전력에서 확실한 열세해 놓여 있는 북양함대였다. 1894년 11월 7일, 정여창은 명령에 따라 여순에서 위해로 돌아왔을 때, 정원, 진원 두 척도 아직 완전히 수리가 끝나지 않았고, 래원은 절반만 수리가 끝난 상태였다. 11월 19일, 북양함대가 등주(登州) 지역을 순찰하고 위해로 돌아올 때, 진원이 암초에 걸려 배 후방에 약 3장(丈) 정도가 넓이 5척(尺)만큼 벌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큰 중상을 입은 것이었다. 정여창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부하 임태증(林泰曾)은 책임추궁을 당하기 전에 자살해 버렸는데, 이는 북양함대에게 설상가상의 타격이었다. 정여창은 진원호를 수리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한겨울이라 수중 공사가 극히 어려워서 이듬해 1월 7일이 되어서도 수리가 끝나지 않았다. 결국 임시처방만 해서 다시 배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바닷가로 나가서 싸우는 것은 어려웠고, 시속도 8해리를 넘지 못하게 되었다. 이듬해 래원의 주요 부위도 대강 수리가 끝났지만, 갑판 등 일부 지역에는 재료 부족으로 수리가 완료되지는 못했다. 이때 북양함대는 5, 6척 정도는 바다로 나갈 수 있었지만, 큰 해전을 치르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였다.
청 정부는 외국으로부터 두 척의 쾌선을 예약 구매했지만 영국과 독일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무위로 끝났다.
정여창은 류공도와 위해위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위해위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그는 연대(煙臺)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위해위의 포대가 적에게 넘어가면 어떻게 이 지역을 지킬 수 있을지 문제에 대해 그는 여러 장치를 해 놓았다. 그밖에 대량의 식량을 저장해두어 장기전에 대비했다. 그러나 일본육군이 남쪽 포대로 공격해올 때 정여창은 북양함대와 포수 수비군을 이끌고 방어했지만, 포대가 공격을 당해 함락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결사대를 보내어 포대를 폭파시키고 화포로 포대 수군이 철수하는 것을 도왔다. 나중에 북쪽 포대의 수비군도 궤멸당하여, 그는 또 북쪽 포대도 전부 폭파시켜 버렸다.
1월 30일, 남쪽 포대가 함락당하자, 정여창은 이홍장에게 급전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청 정부로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일본해군은 1월 19일부터 육군 제2군의 2개 사단을 호송선에 실어 대련만을 떠나 산동반도의 영성(榮成)만에 상륙시켰고, 25일에는 3척의 호송선이 영성만에 상륙하여 육군이 전부 뭍에 올랐다. 1월 30일, 일본 제2군은 남방포대를 총공격하였고, 포대를 공격하는 사이에 북양함대의 공격을 받을지도 몰라서 일본군은 天龙,海门,天成 세 척을 영성만 상륙지점에 두고 방어를 하게 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출동하여 위해위 해변으로 갔다.
이번 해전에 참가한 일본 연합함대는
본대 : 松岛(기함), 千代田, 桥立, 严岛
제1유격대: 吉野, 高千穗, 秋津洲, 浪速
제2유격대: 扶桑, 比睿, 金刚, 高雄
제3유격대: 大和,武藏,葛成
제4유격대: 筑紫,赤城,爱宕,摩耶,大岛,鸟海
일본 연합함대 본대와 제1유격대는 30일 오전 5시 30분 경 위해 해면에 도착했다. 제1유격대는 7시 20분 본대를 떠나 위해의 서쪽 입구로 이동하여 해안 20해리를 순항하며 북양함대의 움직임을 방어하려 했다. 본대와 제2유격대는 위해 동쪽 입구로 가서 북양함대와 전투를 준비했다.
오후1시 7분, 일본 본대와 제1, 2유격대는 다시 하나로 합쳤다. 그들은 위해 항구 바깥쪽으로 나가서 순항(巡航)했다. 북양함대와 류공도 포대의 협력 공격을 당할지도 몰라 함부로 총공격을 하기가 어려워 일단 가벼운 선제공격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남방포대 부군을 움직이던 筑紫이 갑자기 위해 동쪽으로 움직이더니 赤城,爱宕,摩耶,大岛,鸟海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들이 류공도에 접근했을 때, 류공도 포대는 먼저 筑紫을 향해 발포했고, 일도(日島) 포대와 항구내에 있던 북양함대도 일제히 발포했다. 筑紫을 비롯한 나머지 4척은 일단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공격을 피했다. 이 공격으로 筑紫의 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얼마 뒤, 일본육군 6사단이 百尺崖所를 점령하자, 연합함대는 즉각 제2유격대에게 일도를 향해 포격하라고 했다. 그래서 扶桑, 比睿, 金刚, 高雄은 동쪽으로 향해서 공격을 가하려 하자 류공도 포대도 다시 포격을 했다. 청군의 반격이 거세어 제2유격대가 큰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연합함대와 제1유격대는 동쪽 부근으로 전진하여 협공했다. 그러나 류공도는 포의 방향을 바꿔 연합함대를 공격했고, 그 중 한발이 기함 松岛와 千代田 사이에 떨어져 큰 위협을 주었다. 결국 일본 연합함대와 제1유격대는 위해 동쪽입구를 떠났다.
30일 오후 2시, 일본 6사단은 이미 龙庙嘴,鹿角嘴,赵埠嘴 등 남쪽 포대를 전부 장악해버렸다. 이 포대의 대포들이 비록 북양함대에 포격을 받아 거의 망가져버렸지만, “24mm포 3문, 21mm포 2문, 15mm포 1문” 등 일부 대포는 멀쩡해서 일본군이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이 대포를 이용하여 북양함대와 일도 포대를 공격했다.
오후 5시, 해는 이미 지고 있었다. 제1유격대는 위해항 서쪽과 禇岛 사이를 순항(巡航)하고 있었다. 본대와 제2유격대는 계명도(鷄鳴島) 남북 30해리를 순항하며 경계를 했다. 나머지는 계명도 부근에 정박해 있었다. 어뢰정들은 위해 항구 바깥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연합함대 본대는 북양함대와 류공도 수비군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일단 영성만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는 제3어뢰정대를 위해 동쪽입구로 보내어 방어시설을 파괴하게 했다. 일본해군은 사전에 육군6사단과 연락을 해 놓지 않았는데, 제3어뢰정대가 동쪽 입구에 도착하자 인근 포대를 점령해놓은 일본육군이 중국함정으로 오해하고 공격했다. 제3어뢰정대는 별 수 없이 영성만으로 돌아와야 했다.
31일 새벽 4시, 연합함대와 제1, 2유격대는 위해항 바깥 10해리까지 접근했다. 제1유격대는 위해항 서쪽으로 갔고, 본대와 제2유격대는 동쪽으로 가서 경계를 했다. 이때는 아직 동이 트지 않았고, 안개가 해면에 가득했다.
오전 7시, 일본 함대는 다시 하나로 합쳐서, 연합함대가 가운데, 제1유격대가 오른쪽, 제2유격대가 좌측으로 줄을 서서 순항했다. 함부로 항구 안쪽의 북양함대를 공격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오전8시, 이따금 포성이 울렸다. 정여창은 원래 래원과 제원을 보내어 龙庙嘴,鹿角嘴 포대를 공격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포대에 정확히 포가 도달하지는 않았다. 이때 제3유격대 大和,武藏,葛成이 이를 지켜보다가 위해 동쪽입구로 급속히 전진해갔다. 일본연합함대는 전진을 잠시 멈추고, 제1, 2유격대는 그 좌우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4유격대의 赤城이 신호기를 올리면서 기함에 보고했다. 동쪽 해구(海口)로부터 달려왔다. “우리는 筑紫 함장의 명령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오늘밤 일도(日島) 점령을 시도할 것인데 허락해 주십시오” 기함은 이렇게 대답했다. “筑紫함장의 의견에 따라라”
오전 10시부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더니 북풍이 거세게 불어왔고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2시 무렵이 되자 바람과 눈이 더 거세져서 제1유격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함정은 위해위에서 퇴각하여 영성만으로 이동했다.
그날 온도는 영하21도까지 내려갔다. 갑판의 물이 모두 얼어 빙판처럼 되었고, 양현(兩舷)의 속사포에도 얼음이 얼었다.
2월 1일, 풍랑이 멈추지 않아 쌍방은 기지를 떠나지 않았다.
2월 2일, 일본육군 제2사단은 오전1시에 두 개 대대로 구성된 정찰단을 보냈지만 청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오전 8시~10시에 위해위(威海衛)성(城)에 진입하여 육상과 해안의 모든 포대를 장악했다.
이날, 정여창은 북안(北岸)의 北山嘴守포대의 병사들이 대량으로 탈주하는 바람에 유공도와 북양함대가 포위당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북쪽의 포대 3곳과 화포를 전부 포격해서 후환을 제거해버렸다.
2월 3일 이른 아침, 제1유격대(秋津洲 제외)와 제2유격대 7척이 연합함대 본대에 합류했다. 오전 8시, 이들은 또 위해위를 순항하였고, 秋津洲은 영성만에서 매탄을 보급한 뒤 오전 9시에 대열에 합류했다.
1월31일에 전보를 담당하는 병사가 도주했기 때문에 북양함대와 류공도 수비군은 외부와 연락이 끊기고 말았고, 원군은 도착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3일, 영국, 독일, 이탈리아 3국의 배 5척이 계명도 부근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3, 4유격대는 百尺崖灣 안쪽에 정박해 있었다. 영국의 군함만 류공도 해면 가까이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오전 9시, 제2유격대가 천천히 위해위 동쪽 입구로 가서 항구 안쪽으로 조심스레 전진했다. 이때 남쪽 포대를 점거한 일본 육군이 수리를 마친 대포를 사용해서 북양함대를 향해 격렬한 포격전을 전개했다. 제2유격대가 동쪽입구에 도착한 뒤, 扶桑이 먼저 류공도 동측 포대를 향해 발포했다. 북양함대도 이에 지지 않고 제2유격대를 향해 발포했고, 扶桑도 곧바로 속도를 줄이고 전진했다. 쌍방은 격렬한 포격전을 벌였는데, 북양함대가 발사한 24mm포탄은 위력이 매우 커서 일본군의 간담을 설레게 했다. 북양함대의 공격 아래 扶桑은 일단 항구 바깥으로 퇴각했고, 오전 11시 경, 제2유격대도 모두 퇴각했다.
제2유격대가 퇴각한 뒤, 제4유격대의 筑紫과 다른 한 척의 배는 오후1시에 위해위 항구 안쪽으로 진입하였고, 북양함대와 함포전을 벌였는데, 筑紫은 이 싸움에서 북양함대의 포 한발을 맞고 병사 2명이 사망했고,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북양함대의 정원이 筑紫과 2시 30분까지 싸웠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이때 다시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제3유격대의 군함들도 포격을 중지하고 百尺崖灣으로 퇴각했다.
일본함대 사령과 이토 스케유치는 정원, 진원이 있는 북양함대와 류공도의 포대를 정면에서 상대하면 아군의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하여 해상에서 정면전을 벌이기를 중단하고, 어뢰정 기습 공격을 선택했다.
일본해군은 위해위 동쪽 입구에 북양함대가 부설한 방어시설이 매우 견고한 것을 발견했다. 방어시설이 매우 견고하여서 소형 함선만 간신히 통과할 정도였다.
동쪽입구 龙庙嘴 포대 부근은 일본 육군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에, 2월 3일 밤, 일본 해군은 동쪽 입구의 방어시설을 공격하여 간신히 20여m를 파괴했다. 2월 4일 밤, 제2, 3어뢰정대가 항구로 몰래 진입하여 북양함대를 기습했다. 이 기간에도 매일 낮, 일본함대는 류공도 포대를 향해 포격을 가했고, 밤에는 북양함대가 항구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함대와 제1유격대는 시종 해수면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2월 5일 새벽2시 경, 어두운 밤이었다. 일본해군 제3어뢰정대가 앞장섰고, 제2어뢰정대가 뒤따랐다. 10척의 어뢰정은 爱宕,鸟海 두척의 배에 타고 북양함대와 포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몰래 阴山口海湾으로 가서 속도를 11해리로 줄인 뒤, 천천히 동안(東岸)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百尺崖灣부근 해안으로 이동하였다.
본래 제2어뢰정대가 앞장서기로 했었는데, 제3어뢰정대의 3, 6호 어뢰정이 청군이 설치한 방어시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다 보니 길을 잘 알고 있어서 그들에게 앞장을 서게 했다.
일본군 어뢰정은 차례로 항구 안쪽으로 진입했고, 북쪽의 류공도 방향으로 전진하여 함께 공격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밤이 너무 깊어서 앞장 선 어뢰정대가 뒤따르는 어뢰정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앞뒤의 연락이 끊겨지고 말았다. 그래서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어뢰정대는 각각 행동하기로 했다.
그날 밤, 위해위 항구 안 류공도 앞쪽에 정박해 있던 북양함대는 정원이, 동쪽, 진원이 서쪽, 래원은 정원과 진원 사이, 靖远과 위원, 제원은 래원 근처에 있었고, 함포선과 어뢰정은 앞쪽에 나와 있었다.
일본 어뢰정대는 항구 안쪽으로 진입했지만 북양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는데, 북양함대의 유리창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위치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이때 북양함대는 아직 일본 어뢰정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어뢰정대는 측면에서 북양함대 동쪽을 향해 진격하였다. 북양함대가 이들을 발견하자 홍색 신호경보가 울렸고 일본어뢰정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일본 22호 어뢰정은 긴급히 어뢰 하나를 발사했다. 그리고 두 번째 어뢰를 발사하고 황급히 龙庙嘴해안 부근으로 도주했다. 북양함대가 신속히 대응하는 바람에 22호 어뢰정은 그만 암초에 걸려 파손되고 말았고, 4시 15분에 가까운 육지에 어뢰정을 대고 도망쳤다.
일본6호 어뢰정은 류공도 서쪽에서 두 척의 큰 배를 발견하고 어뢰정을 발사하려고 했는데, 하필 어뢰관이 그때 고장이 나는 바람에 어뢰가 발사되지 못했다. 북양함대는 이를 보고 맹포격을 가해 6호 어뢰정도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5호 어뢰정도 포격을 맞고 퇴각했다.
일본 제2어뢰정대의 9호어뢰정은 제3어뢰정대 뒤를 따라가서 항구 안쪽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그곳에 뜻밖에도 정원호가 보였다. 바로 그때 북양함대의 어뢰정 1척도 거기에 있었고, 좌우에 중국 어뢰정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9호 어뢰정은 깜짝 놀라 중국 어뢰정대 대열에 합류해서 중국 어뢰정인 척 했다.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쉽게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9호 어뢰정이 정원호에서 200m 떨어진 지점까지 왔을 때 정원호가 갑자기 홍등(紅燈)을 켰는데, 이것은 아마 암호였을 것이다. 9호 어뢰정은 곧장 어뢰정을 발사했고, 정원호에서 50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해서 배 뒷편을 향해 어뢰를 다시 발사했다. 이 두발의 어뢰는 모두 정원호에 명중하였고, 9호 어뢰는 전속력을 다해 회항했다.
이때 중국군함은 일본 어뢰정을 향해 맹렬히 포격을 가했고, 중국 어뢰정도 추격하여 포를 퍼부었다. 그래서 9호 어뢰정도 이를 피하지 못하고 피해를 입어 그자리에서 4명이 즉사했다. 어뢰정이 침몰하려 할 때, 때마침 19호 어뢰가 와서 나머지 일본군을 태워주었다.
일본의 10호 어뢰정은 제3어뢰정대의 전정(殿艇) 어뢰정이었는데, 5호어뢰정을 따라 항구 안쪽으로 들어간 뒤, 서북쪽 기슭으로 이동했다. 약 7분 뒤, 5호어뢰정이 보이지 않아서 속도를 내었는데, 항로가 우현으로 기우는 바람에 중국어뢰정 가까이로 움직이고 말았고, 공격을 받았지만 가까스로 도주하여 북쪽으로 이동했다. 10호 어뢰정은 북양함대의 큰 배를 하나 발견하고는, 300m 앞으로 다가서 어뢰를 발사했다. 그런데 발사관의 장치가 얼어버리는 바람에 발사에 실패했고, 어뢰는 다시 좌회전을 해서 가운데 부분에 장착된 어뢰를 발사하여 북양함대의 큰 배에 명중시켰다. 알고 보니 이 배는 정원호였다. 10호 어뢰는 빗발치는 함포 공격을 뚫고 도망쳤다.
원래 일본어뢰정이 항구 안으로 돌아와 기습을 한 첫날 정여창도 일도(日島) 포대의 수군의 보고를 듣고 어뢰정대가 공격을 해 와서 방어시설물을 파괴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야습이 감행될 줄 알고 함대에게 경계강화를 지시했다. 5일 아침 4시 30분 경, 정여창은 기함 정원호에 있었는데, 동쪽 입구에서 적함정의 공격이 있음을 보고받았다. 정여창은 갑판에 올라가 상황을 살펴보고 반격을 지시했는데, 어뢰정의 공격을 차례로 받게 된 것이다. 정여창은 망가진 기관을 수리하게 하고 수갑문(水閘門)을 닫게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서 바닷물이 군함 안으로 가득 들어와버렸고 함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정여창은 함체의 부상 정도를 알지 못해서 일단 동쪽 항구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는데, 함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것을 깨닫자 류공도 남안(南岸)의 해안가에 댈 것을 지시했다. 함선의 대포를 이용해 동쪽 입구 방어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해군은 2월 5일 어뢰정대의 야습이 성공하자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만 공격의 끈을 놓지 않고 그날 밤 2차 어뢰정대의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제1어뢰정대가 나섰다.
6일 새벽3시, 어두운 밤, 제1어뢰정대의 23, 13, 11호, 그리고 小鹰 어뢰정이 항구 안으로 진입했다. 어제 밤 일본어뢰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북양함대는 경계를 강화했는데, 그러나 어뢰정대의 침입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23호와 小鹰은 항만 중간에 있는 적함을 공격하고, 13호와 11호 어뢰정은 항만 서쪽에 있는 군함을 공격했다. 그 중에 13호는 진원만 공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일본 어뢰정이 공격목표를 찾고 있을 때, 류공도 포대는 잠시 포격을 멈추었고, 류공도의 동, 서 양쪽에서 탐조등을 키고 어뢰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어뢰정을 찾지 못했고, 도리어 이 행동 때문에 자기편 군함의 위치를 일본군에게 알려준 꼴이 되었다. 일본 어뢰정들은 세 척의 군함이 정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접근해 갔다. 그들이 약 400m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을 때, 중국군함이 이를 발견하고 사격을 가했다. 어뢰정 小鹰도 중국측의 공격을 받아 충격을 입었지만 큰 손실은 입지 않았다. 小鹰도 이에 지지 않고 어뢰를 한 발 발사했지만 명중하지 못했다. 小鹰은 250m 지점까지 접근하여 우현의 어뢰를 발사했고, 이 어뢰가 마침내 중국의 래원호를 격침시켰다. 일본의 23호 어뢰정도 중국 군함을 한 척 발견하여 어뢰 두발을 발사해서 그 군함도 침몰시켰다. 일본의 11호 어뢰도 연속해서 어뢰 두 발을 발사하여 중국의 소형 함선 한 척에 명중시켰다.
이 기습 작전 중, 일본군은 각 어뢰정들이 기관총과 소총의 탄환에 맞았지만,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이날 밤, 북양함대의 래원과 연습함 위원, 포뢰선(布雷船) 보벌(寶筏)이 모두 어뢰에 맞아 격침되었다. 래원도 어뢰를 맞고 5분이 되자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병들은 거의 다 바다에 잠들었다.
정원, 래원, 위원 등 함정이 어뢰에 맞아 침몰하고 사상자가 증가하자 북양함대의 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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