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북양함대의 위기
북양함대는 두 차례 어뢰정의 공격을 받아 정원, 래원, 위원을 잃었고, 주요 함선인 진원, 진원(靖远), 평원, 제원, 광병 등 5척과 6척의 함포선, 11척의 어뢰정만 남았다. 이토 스케유키는 북양함대를 일거에 섬멸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2월 6일에 명령을 내려, 7일 여명에 총공격을 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연합함대와 제1유격대가 류공도 동안(東岸)포대를 공격하고, 제2, 3, 4 유격대가 일도(日島) 포대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7일 새벽, 각 함대는 위해위로 총공격을 하러 출항했다. 6시 20분, 일본 본대와 제1유격대가 1군이 되어 류공도에서 4500m 떨어진 곳에 모였고, 제2, 3,4 유격대는 일도(日島)에서 4500m 떨어진 곳에 모였다. 연합함대와 제1유격대는 우군(右軍)이 되었고, 2,3,4 유격대는 좌군(左軍)이 되어 양익(兩翼)이 청군을 공격하였다.
연합함대의 본대인 千代田가 먼저 포문을 열였다. 류공도 서안(西岸)포대에서도반격을 가했다. 포격전이 거세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松岛가 포를 맞고 휘청걸ㅆ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6시 50분, 桥立이 포를 맞았다. 7시 5분, 류공도 포대에서 발사한 포탄이 吉野에 떨어져 갑판실이 박살나고 2명이 죽고 4명이 부상을 당했다. 秋津洲도 포탄에 몇 발을 맞고 수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곧 이어 浪速도 포를 맞았다. 일본의 전 함대가 상당한 타격을 받고 전진하지 못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인 2월 6일 밤, 정여창은 일본군의 어뢰정을 공격하기 위해 어뢰정 지휘관 왕평에게 북양함대의 어뢰정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7일 새벽, 왕평은 어뢰정을 이끌고 도주했다. 아침 7시 40분, 전투가 한창인 때에 왕평은 거센 저항을 당해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는 커녕, 위해위 서쪽 입구로 달아나려고 했다. 일본연합함대는 원래 이 북양함대의 어뢰정들이 자신을 공격하러 오는 줄 알고 움찔하면서 서둘러 방어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멀리 도망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토 스케유키는 제1유격대의 쾌선을 보내 이들을 추격하게 했고, 본대도 그 뒤를 따라 가라고 명령했다. 이제 북양함대의 일도의 포대, 유공도의 포대와 싸우는 것은 일본의 좌군(左軍)이었다.
일도를 지키는 병사는 30명의 수병뿐이었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일본의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 일본 군함은 일도에서 4000m 떨어진 곳에서 일도 남쪽의 3개의 포대에 화력을 집중했다. 오전 7시 무렵, 일본은 赵埠嘴포대에서 화포를 발사해서 일도의 한 포대의 탄약고를 폭발시켰다. 그리고 筑紫도 한 발의 포탄을 다른 포대에 명중시켰고, 일도는 더 이상 청군이 포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정여창은 일도의 수비병들에게 포대를 포기하고 류공도로 피하라고 명령했다.
扶桑가 세 번째 포격을 마치고 金刚과 高雄이 포격을 하려는 순간, 류공도 동안(東岸) 포대에서 발사된 포탄이 扶桑에 명중했다. 순식간에 큰 소리가 울리면서 扶桑 좌현이 파괴되어 큰 구멍이 뚫렸다. 일본 기함은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고, 각 함은 차례로 귀환했다.
타카치호(高千穗)
나니와(浪速), 위 사진의 타카치호와 아 사진의 나니와는 자매 함정입니다
북양함대 어뢰정대는 왕평 등의 지시로 연대(煙臺)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는데, 吉野는 쾌속 순양함이었기 때문에 吉野가 최고속도로 움직이면 도망칠 수가 없었다. 吉野를 비롯해 高千穗, 秋津洲, 浪速 등이 추격하자 왕평은 당해낼 수 없음을 알고 연대 서쪽에서 멀지 않은 해안가에 배를 대고 육지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어뢰정 수병들은 거의 다 일본육군의 포로가 되었고, 북양함대의 어뢰정은 이렇게 괴멸하고 말았다.
2월 7일 하루 동안 벌어진 전투로 북양함대와 류공도 수비병들은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는데, 어뢰정마저 도망가다 괴멸하자, 군심(軍心)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2월 8일, 오전 일본연합함대는 위해위를 왔다갔다했지만 북양함대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위해위 동쪽 입구의 방어시설은 비록 어뢰정이 어느 정도 부수기는 했지만, 대형 군함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방어시설을 더 부숴서 통과할 수 있을 때까지 한 뒤, 함대 전체가 항구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오전 10시, 회의 끝에 高千穗의 지휘관 한 명이 8척의 소형 함선을 이끌고 이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밤 10시가 되자 8척의 함선은 짙은 안개를 틈타 8척의 함선을 이끌고 위해위 동쪽 입구로 갔다. 이미 뚫려진 목재와 방어시설을 뚫고 항구 안으로 들어갔지만, 청군은 이때 서쪽 입구를 공격하는 일본군을 견제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미처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도끼로 목재와 철사를 자르고, 구멍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오전 1시, 이들은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고, 吉野, 秋津洲, 浪速은 화약을 잔뜩 싣고 나머지 시설물을 폭발시켜 버렸다. 이때 난간과 목재 등 시설물이 파괴되어 400m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이를 발견한 류공도 동남쪽 포대에서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가했지만, 일본 함정은 잽싸게 도망쳤다. 이튿날, 일본은 재차 방어시설물 파괴공작을 벌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일본군은 초조해졌다. 그래서 청군 포로를 협박해서 북양함대와 류공도 수비병의 자세한 상황을 파악했고,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양함대와 퓨공도 수비군은 일본의 수륙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군함과 화포, 탄약도 보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산동의 청군은 감히 위해에 있는 일본육군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원군을 얻기 위해 2월 7일 아침6시 정여창은 구조를 리순(利順)이라는 작은 배에 병사를 싣고 연대(煙臺)로 보내어 구조를 요청했다. 이때 4척의 일본 군함이 포격을 가해 利順은 격침되었고, 배에서 탈출한 5명은 8일 오전 1시에 영국제독함에 구출되어 2시에 연대로 보내졌다. 그들은 정여창의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마쳤지만, 연대의 류함방(劉含芳)은 이 편지를 이홍장에게 전달했고, 이홍장은 편지를 받았지만 보낼 만한 원군이 없었다.
2월 9일, 일본해군은 天龙,大和,武藏,海门을 선두로 하고, 葛成을 전함으로 하여 오전 7시에 류공도 포대를 공격하게 했다. 5척 중에 葛成의 성능이 가장 뛰어났다.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제1, 2유격대도 한 차례씩 포격을 가하고는 다시 동쪽 입구로 돌아가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류공도 포대가 적군과 포격전을 벌일 때, 정여창은 진원(靖远)을 타고 鹿角嘴 포대를 공격하였다. 이 싸움은 점심 때까지 이어졌는데, 靖远은 두 발의 포탄을 맞고 격침되었고, 독전(督戰)을 하던 정여창과 휘하 부하들도 배와 함께 가라앉겠다고 버티다가 그들을 구하러 온 작은 배에 옮겨 탔다.
연일 이어진 전투로 북양함대는 정원, 래원, 위원, 진원(靖远)을 잃었고, 이제 남은 것은 진원(镇远), 평원, 제원, 광병 4척뿐이었다.
청일전쟁 - 위해해전 & 북양함대의 궤멸
3 북양함대의 침몰
왕평 등이 어뢰정을 이끌고 도망가다가 전멸한 것 때문에 청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말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연대 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류공도가 거의 함락되었고, 함선 등 모두 궤멸된 상태라고 보고했다. 위해에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원군을 보낼 생각도 하지 않던 李秉衡은 그 말을 믿고 총리아문에 이를 보고해버렸다. 청조는 이를 듣고도 李秉衡에게 원군을 보내어 포위를 풀고 아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2월 10일, 눈이 내리는 날 일본함대는 류공도를 공격하지 않았고, 严岛만 위해위에서 경계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기함 松岛, 千代田, 桥立이 합류하여 함께 위해위에서 경계를 했고, 다른 함정들은 매탄을 보충하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4척의 일본 어뢰정이 위해위 서쪽 입구를 공격했지만, 어뢰가 적중하지는 않았고, 청군의 포화를 피해 후퇴했다. 곧이어 현암(現岩) 포대 위에서 일본군은 류공도와 북양함대를 향해 공격했는데, 오후가 되어서야 그쳤다.
11일 밤, 정원호의 포탄 저장고가 바닥이 났다. 정여창은 정원호 가운데에 화약을 재어 두고 자폭을 실시하게 했다.
정원호
전쟁 발발 전 일본 방문 시에 나가사키 항에 정박해 있던 정원호(이때가 좋았죠ㅠ)
2월 11일, 류공도와 북양함대가 포위된 지 14일이 지났다. 그들은 밤낮 없이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내면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원군이 이미 일본군에게 격퇴되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마지막 원군이었던 陈凤楼 부대는 군량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일부 해군 지휘관과 서양인들은 정여창에게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청 정부는 일본군이 천진에 상륙할까 두려워 위해에 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2월 11일, 일본의 제3유격대 4척은 류공도 동남쪽 포대를 공격했지만, 포대에서도 완강히 저항했다. 일본군 葛成에도 포를 맞아 배 앞부분에 타격을 입었고 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天龙의 부함장도 함교 좌현에서 지휘를 하다가 배 좌현에 포탄이 날라와 즉사했다. 제2유격대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야간에는 浪速과 秋津洲가 위해위 서쪽 입구로 가서 류공도를 포격했는데, 이는 해구 방어물 제거를 위해 일본군이 동쪽 입구를 통해 항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돕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강풍이 불어와서 이 작전도 실패했다.
2월 11일 이날이 바로 청군이 가장 위급한 날이었다. 청군은 이제 탈주자와 항복을 주장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심지어 정여창을 죽이고 항복하자는 자도 있었다. 그날 밤, 정여창은 회의를 열어 원군이 올 희망이 사라졌으니, 앉아서 죽기보다는 포위를 뚫어 몇 척이라도 연대로 가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牛昶柄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과 서양인 고문은 이미 항복을 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해 두었기 때문에 정여창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 일부 사병들이 모여 정여창을 칼로 위협했다. 정여창은 제독의 도장을 牛昶柄에게 주며 바로 폐기해버리라고 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이 도장을 훔쳐가지고 일본군에 투항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牛昶柄는 본심을 숨기고 승낙했다. 정여창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러가라고 하고, 대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정여창이 자살한 뒤, 牛昶柄은 그가 죽기 전에 한 명령을 어기고 제독인장을 버리지 않았다. 2월 12일, 牛昶柄과 서양인 및 기타 지휘관들은 투항하는 문제를 두고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일단 정여창의 죽음을 대외에 발표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 그리고는 결국 오전 7시 30분, 진북(鎭北)호에 정벽광(程壁光)을 중심으로 항복 사절단이 타고 배 앞쪽에는 백기를, 뒤쪽에는 황룡기를 걸고 위해위 동쪽 입구를 나가 阴口山에 정박해 있는 일본연합함대의 기함 松岛를 향해 갔다. 이토 스케유키는 항복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고 즉시 막료회의를 열고 항복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상의했다. 동시에 어뢰정대가 진북을 둘러싸서 움직이게 못하게 한 뒤, 吉野, 高千穗, 严岛, 桥立을 서쪽 입구로 보내고, 浪速과 秋津洲을 함께 류공도 앞쪽에 보내어 순찰하게 하여 있을지도 모르는 북양함대의 공격을 대비하게 했다.
동시에 이토 스케유키는 정여창에게 편지 한 통과 술, 히로시마 산의 감(柿) 등 3개의 선물을 보냈다.
13일 오전 7시 25분, 정벽광은 진중(鎭中)호를 탔고, 배 앞부분에 백기를, 뒷부분에는 국기를 절반 내려 걸고 가짜 정여창의 답신을 들고 松岛호로 갔다. 그리고는 정여창 제독이 답신을 쓰고 자살을 했다고 뻥을 쳤다.
정벽광이 가지고 온 답신과 정여창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놓고, 松岛에 탑승한 일본 육해군 고관들이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정벽광이 일개 군사(軍使)일뿐이므로 그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정여창을 대신할만한 청국 육해군 관원과 담판을 벌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토 스케유키는 답신을 써서 정벽광에게 가지고 가게 했고, 松岛호에게 “정여창 사망” 소식을 알리게 하고 각 함대에 “의식(儀式)을 제외하고는 오락을 금한다”고 했다.
당일 오후 4시 20분, 청군은 牛昶柄를 항복대표로 하여 진변(鎭邊)호를 타고 일본측으로 가서 구체적인 내용을 상의했다. 14일 오후 2시 30분, 牛昶柄과 정벽광 등은 다시 松岛로 가서 정식으로 항복에 서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청 육군 2040명, 해군 3084명이 항복했다. 그날 밤, 牛昶柄과 이토 스케유키는 《위해항복조약》11조에 싸인을 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청군은 위해위 항구 안쪽의 북양함대 전부와 류공도의 포대의 군수품과 시설을 모두 양도해야 했다.
2월 15일, 류공도 잔여 청병은 연대로 갔고, 일본의 浪速과 高千穗는 위해위 서쪽 입구에서 진행과정을 조사했다.
2월 16일, 잔류 청국의 민간인들은 범선을 타고 연대로 갔다.
2월 17일, 일본 함대는 류공도에 다가갔고, 항구 안쪽으로 진입하였다.
17일 오전 9시 30분, 북양함대의 잔여함선인 진원, 제원, 평원, 광병, 진동, 진서, 진남, 진북, 진중, 진변이 모두 일본에게 넘겨졌다. 이 배들의 청국 국기는 내려졌고, 일본의 태양기가 올라갔다. 연습선 강제(康濟)만 함포를 해체하고 청군에게 돌려주어 나머지 청군과 외국인들이 연대로 가도록 했다.
오후 3시, 정여창의 시신과 해륙군관들과 서양인들이 강제호에 올라탔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 연대로 출발했다.
진원(鎭遠)호의 상태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먼저 진원호를 여순으로 보내어 수리를 하게 한 뒤 일본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다른 배들은 모두 일본으로 바로 보냈다. 진원호는 처음에 일본의 상비함대의 기함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진원, 제원, 평원 3척은 일본해군 연합함대 제3대가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순양함 광병, 조강, 진동, 진서, 진남, 진북, 진중, 진변 등은 일본 본토에 남아있었다. 러일전쟁 중, 진원은 여순 공성전에 참가하였고, 황해해전 및 마대(馬大)해전에도 참가했지만 격침되지 않았다. 제원과 평원은 일본육군 제3군과 함께 여순 요새를 공격하였고, 제3군의 우익 진지를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1904년 9월 18일, 평원호는 러시아의 어뢰를 맞고 침몰하였다. 11월 30일, 제원호도 어뢰를 맞고 침몰하였다. 진원호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 나이가 많은 관계로 퇴역하게 되었고, 나중에 일본의 이세(伊勢)만에서 침몰되었다. 일본해군은 바다에서 진원호의 닻과 사슬을 끌어올려 도쿄의 우에노공원에 전시해놓고 비문을 세워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일본정부는 34척의 소형군함을, 청일전쟁 중 중국군함을 빼앗은 배상금처럼 중국정부에 돌려주었다. 동시에 도쿄의 우에노공원에 전시해놓은 진원호의 닻과 사슬, 포탄도 모두 중국에 돌려주었다. 현재 진원호의 닻은 북경의 군사혁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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