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전쟁

구름위 2013. 9. 2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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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전쟁 개요
개요표
전쟁 주체 에스파냐/아메리카 왕당파 vs 각국 독립세력/공화주의 세력
전쟁 시기 1804-1825
전쟁터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미 각 지역, 카리브해 일부
주요 전투 마이푸 전투, 카라보보 전투, 보야카 전투, 살타 전투, 카르타헤나 공방전, 오악사카 공방전, 아카풀코, 차카부코 전투, 구아나후아토 전투, 깔데론 전투

두 개의 아메리카

 

영어에서 'American'은 일반적으로 미국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미국의 정식 명칭이 'United States of America'이기 때문에 미국인을 뜻하는 인칭(人稱, demonym)으로 정착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America라는 단어 역시 ‘미국’의 줄임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옳다고 할 수 없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아메리카’는 알라스카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까지의 땅덩어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두 ‘American'이다.

아울러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는 두 개의 아메리카를 나누는 일반적인 기준이다. 이 기준에서는 알래스카에서 파나마까지가 ‘북아메리카’로 구분이 되고 콜롬비아 북단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까지가 ‘남아메리카’가 된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지리적 기준에 의한 구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북극권에서 남극인근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땅을 무슨 기준으로 남북으로 나눈단 말인가? 남북아메리카를 가르는 파나마 남단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남북아메리카의 경계로 설정이 되었는지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땅덩어리가 두 개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 기준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기준으로 아메리카는 두 개의 판이한 문화권으로 나뉜다. 영어를 쓰고 영국에서 기원한 문화가 주축이 되는 앵글로 아메리카(Anglo-America),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전쟁사의 주인공이자, 이베리아 반도의 문화와 언어가 주축이 되는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다.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

 

 

17세기에 이르러 아메리카 대륙은 에스파냐(노랑), 포르투갈(초록), 영국(파랑), 프랑스(빨강), 네덜란드(검정)등 유럽 국가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라틴 아메리카의 건설이 앵글로 아메리카보다 오래되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동방무역의 길이 막히면서 유럽인들은 다른 방향에서의 돌파구를 모색했고 범선을 이용해 먼 바다로 나갔다. 유럽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동방무역에 불리했던 포르투갈이 1415년에 현재 모로코 북쪽의 세우타(Ceuta)를 점령한 후 이를 기점으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진입하는 항로를 개발했다. 에스파냐도 1402년에 카나리아 제도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의 기니에 진출했다. 그리고 1492년에 콜럼버스에 의하여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간에 신경전이 벌어졌고 결국 1494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 하에 카보 베르데(Cabo Verde) 제도 서쪽 370해리를 기준으로 유럽 밖의 세상을 양분(兩分)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has)을 맺고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에 나선다.

1500년에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브라질에 상륙하였고 1521년에는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tm가 현재 멕시코를 지배하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1532년에는 역시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카하마르카에서 잉카군을 학살하고 잉카의 황제들은 꼭두각시가 되었다. 1572년에는 에스파냐가 마지막 꼭두각시 잉카(황제)인 투팍 아마루를 죽임으로서 잉카의 황통(皇統)을 끊었고 남아메리카에 대한 본격적인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가 초기에 아메리카에 구축한 경제체제는 기본적으로 아메리카의 부(富)를 긁어모아 본국으로 보내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아즈텍, 잉카와 함께 원주 문명의 황금유물들이 녹여져서 본국으로 보내졌다. 에스파냐는 이 돈으로 17세기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구-신교간 종교전쟁에 필요한 군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비용이 막대해 에스파냐 정부는 신대륙에서 들여오는 엄청난 양의 황금을 가지고도 몇년마다 재정파산을 되풀이했다. 결국 금을 녹여서 본국으로 보내는 식의 식민 경제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새로이 점령한 영토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부를 약탈하기보다 실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져야 했다. 결국 에스파냐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행정 체제를 구축하고 관리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는 대개 그 땅을 먼저 차지하는 인물을 지배자로 만드는 방식으로 늘려나갔다. 이렇게 진행된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에스파냐는 18세기 중반에 북쪽으로는 현재 미국의 캘리포니아-오리건주 경계로부터 남쪽으로는 칠레의 산 카를로스(San Carlos)-파타고니아 중부에 이르렀다.

식민지 경제

 

 

원주민을 학대하고 있는 엔코멘데로

에스파냐의 관점에서 식민지배에 유리했던 점은 원주민들이 아즈텍과 잉카라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아래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아즈텍과 잉카는 계급사회였으며 이 때문에 전쟁과 질병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상황에 순응했다. 아메리카를 차지한 유럽인들, 특히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를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엔코미엔다(encomienda)'였다. 이는 일종의 봉건제였는데 귀족이나 군인들에게 넓은 땅과 함께 그 안에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까지 허용하는 제도였다. 다시 말하자면 원주민들로부터 공물을 제공받고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받은 것이다. 이들 ‘영주’들은 엔코멘데로(encomendero)라고 불렸으며 이러한 영지를 하사받는 대신 위기시에 왕실을 수호하고 원주민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킬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들 영주들은 실질적인 사법권(私法權)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영지에 있는 원주민은 실질적으로 노예나 농노였으며 이들에 대한 폭행이나 심지어 살인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였다.

엔코미엔다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레빠르티미엔토(repartimiento)라는 제도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노동력을 정기적으로 공역(供役)의 형태로 징발하는 제도였다. 아즈텍과 잉카는 제국내의 제후들과 영주들, 그리고 부락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았다. 에스파냐인들은 잉카제국의 공용어인 케추아어로 미타(mita)라고 불린 이 시스템을 참조하여 공역(供役)체제를 만든 것이다. 특히 멕시코와 중남미 지역에서는 원주민들을 각종 광산으로 동원하는데 이용되었다. 해마다 각지의 성인 남자 일곱명 중 한명은 광산으로 불려나가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물론 이들은 단순히 노동을 제공하는 형태여서 신분상으로 에스파냐인들의 노예는 아니었으며 자유민이었으나 에스파냐인들이 주는 일거리가 없으면 생활이 어려웠다는 점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식민지 모든 지역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페루지역에서는 엔코미엔다 제도가 보다 오랬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에스파냐의 확장 초기에 점령했던 카리브해에서는 담배와 사탕수수 등의 재배를 위한 장원들이 세워졌다. 유럽에서 건너온 질병에 의해 원주민의 수가 크게 감소하면서 에스파냐 지배자들은 노예상들을 통하여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을 수입해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였다. 이후 카리브해 지역이외 에스파냐 식민지에서도 흑인노예들을 수입하여 농지, 광산, 공방에서 노동력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라틴아메리카는 철저히 수직화된 계급사회였고 그 경제는 본국을 위해 경제력을 생산하는 생산기지이자 본국의 물건을 소화할 수동적인 시장에 불과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는 반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총독들과 지사들에 의하여 지배되었으나 식민지 전체에 대한 일관적인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 각지에서 행하여진 판결과 식민지를 관할하는 최고기관인 왕실 인디아 위원회(Real y Supremo Consejo de Indias)의 각종 결정을 모아 1680년에 인디아 법전(Recompilación de las Leyes de Indias)이 만들어지면서 에스파냐의 통치는 더욱 공고해진다.

다양한 혼혈인들의 탄생

 

라틴아메리카 식민사회의 계서성(階序性)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스파냐말로 계급을 뜻하는 ‘까스타스(castas)'였다. 유럽 본토에서 들어온 에스파냐인, 전쟁과 질병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노예들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게 되면서 혼혈인들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모든 제국들이 그렇듯 이 사람들 사이에 등급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 등급은 과연 얼마만큼의 에스파냐 혈통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순수 에스파냐 혈통은 당연스럽게 상위계층이자 귀족이 되었고 나머지는 에스파냐인 조상과의 친연성(親緣性) 정도에 따라 사회 속에서의 자리가 결정되었다.

수많은 혼혈의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에스파냐 식민사회의 구성원들은 크게 아홉으로 나뉠 수 있다.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 것은 에스파냐 백인들로 그 출생에 따라 뻬닌술라레스(Peninsulares,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라는 뜻)과 끄리올로스(Criollos,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에스파냐 백인)으로 나뉜다. 그 다음에는 에스파냐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로서 메스티조(Mestizo)와 까스티조(Castizo)가 있다. 메스티조는 순수 에스파냐인과 순수 원주민의 피가 반반씩 섞인 경우이다. 이 메스티조가 에스파냐 백인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 까스티조이다. 즉 까스티조는 ¾ 에스파냐 백인 혈통에다 ¼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메스티조와 원주민이 아이를 낳게 되는 경우 이들은 촐로스(Cholos)가 되었고 에스파냐 남자와 흑인여자 사이에서 낳은 혼혈아들은 물라토(Mulato)가 되었다. 이외에도 원래의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Indio)와 아프리카 흑인들과 그들의 후손인 네그로(Negro), 그리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인 짬보(zambo)가 있었다.

물론 혼혈인들 역시 다른 혼혈인들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았고 에스파냐인들은 어떻게 피가 섞였느냐에 따라 명칭을 부여하고 분류하려 들었다. 이러한 ‘분류법’은 통일되어있지 않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현재 멕시코 테포트조뜨란(Tepotzotlan)에 있는 누에보 에스파냐 총독부 박물관(Museo Nacional del Virreinato)에 전시된 18세기의 까스타스(계급) 분류도에는 혼혈의 유형이 16개로 나뉘어져 있다.

 

Museo Nacional del Virreinato에 있는 “까스타스(Castas)" 분류도.

에스파냐의 인종분류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이 분류 자체가 18세기에 에스파냐에 소위 ‘계몽사상’이 퍼지면서 인종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류법의 골자는 기본적으로 에스파냐인에 가까울수록 우수하며 멀어질수록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류가 기존의 차별의식의 연장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여 준다. 아울러 당시 식민사회에서는 이러한 분류법에 따라 계급이 낮을수록 국가에 바치는 것, 노동과 공물 등의 세금이 높았다. 아울러 에스파냐인과 인디오들의 혼혈인들은 만약 에스파냐인들과 지속적으로 결혼하여 인디오 혈통이 옅어질 경우 3대를 지나면 대개 에스파냐인들로 간주되었지만 물라토 유형의 혼혈인 또는 짬보 유형의 혼혈인들은 혼혈의 유형과 관계없이 몇 대를 지나도 에스파냐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끄리올로스와 본국의 대립

 

에스파냐 본국에서 뻬닌술라레스들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이민자들은 그 수가 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하면서 자식을 낳았고 이주민 2세대, 3세대가 등장한다. 이들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끄리올로스’이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사회의 최고 까스타(casta)로서 끄리올로스는 소수의 뻬닌술라레스들과 함께 귀족계층이 된다. 이들은 넓은 장원이나 광산을 소유하거나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상인들로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에스파냐 식민사회를 종교적으로 장악한 예수회(Jesuits)와 결탁하여 공고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들의 부로 식민정부에 막대한 영향을 발휘하였고 돈으로 관직을 사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또 다른 계층은 바로 카톨릭의 사제들이었으며 특히 끄리올로스 특권층의 비호를 받고 있는 예수회의 세력은 막강하였다. 예수회의 교회와 사원들 역시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고 식민정부의 관리들이 모든 곳에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시골마을과 오지(奧地)에 파고든 교회는 각 공동체를 반(半)자치적인 종교적 영지로 삼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본국인 에스파냐에서 부르봉(Bourbon) 왕가가 등장하면서 제국의 운영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게 된다. 이미 총독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던 누에바 에스파냐(지금의 미국 서부, 멕시코 전체, 온두라스,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와 페루(페루, 칠레 북부, 볼리비아)와는 달리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던 기타 영토를 통합하는 의미에서 이들을 관할하는 총독부들을 신설하게 된다. 현재 파나마와 콜롬비아, 그리고 에콰도르에 이르는 지역은 1717년에 누에보 그라나다 총독부(Virreinaito de Nuevo Granado)에 속하게 되었다. 누에보 그라나다는 6년후 폐지되었다가 1739년에 다시 부활한다. 1776년에는 브라질 남단(南端), 우루과이, 파라과이, 그리고 아르헨티나 북부와 파타고니아를 아우르는 리오 델 플라타 총독부(Virreinaito de Rio del Plata)가 만들어진다. 베네수엘라는 군령권을 가지고 있는 사령장관(capitan)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사령부(capitania)가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식민지 통치에 관하여 거의 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부에 완전히 속하지도 않은 왕실직속기관인 왕실 인디아 위원회의 권한을 축소시킨 것이다. 1764년에 부르봉 국왕 카를로스 3세는 인디아 위원회로부터 행정권을 빼앗고 이를 신설된 정식 행정기관인 국가 인디아 장관부(Secretarío del Estado del Despacho Universal de Indias)에 주어 식민지 행정을 통일한 것이다. 아울러 식민지 관리들을 중앙에서 임명하여 파견하여 식민지 정부에서 과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끄리올로 관리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때 에스파냐 식민지 행정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는 총독부 밑의 코레기미엔토(corregimiento)였으며 대개 토착 끄리올로 출신 관리들, 즉 꼬레기도레스(corregidores)가 행정권을 맡고 있었다. 카를로스 3세는 꼬레기도르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인텐덴테(intedente)라는 자리를 만들어 이들을 식민지 각지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총독부에 속한 것이 아니라 국왕직속의 관리들이었고 끄리올로 출신 총독, 사령장관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이들을 통하여 에스파냐 본국정부는 총독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식민지의 고등법원(audencia)들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던 끄리올로 사법관들의 수를 줄이고 새로이 사법관들을 임명하였다. 새로이 임명된 사법관과 판사들은 모두 에스파냐 출신의 뻬닌술라레스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시절에 돈으로 사법관이 된 끄리올로들은 갑자기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아울러 ‘자유무역 칙령’을 내려 몇몇 항구와 그 상인들에게 집중되었던 무역권을 식민지 치하 모든 항구에 개방하였다. 이는 당연히 자신들의 특권을 당연시 하고 있던 끄리올로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고 뻬닌술라레스 관리들과 끄리올로 상류층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촉매제가 된다.

 

 

 

 

계층 간의 갈등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의 동인(動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유럽 출신들과 아메리카 태생의 엘리트간의 갈등, 유럽 대륙의 정세,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스파냐 식민사회에서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던 아메리카 태생의 끄리올로들은 부르봉 왕가의 ‘개혁’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이들 끄리올로들은 ‘자유무역’의 과실은 누리면서 왕가의 간섭을 물리칠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계층들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바닥에서 노예나 하층 노동자로 살고 있던 흑인들의 불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에스파냐인이나 프랑스인, 또는 포르투갈인들을 막론하고 식민사회의 상류층은 흑인이나 그들의 후손들에게 노동력 이외의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노예였다가 자유민으로 풀려난 흑인들이나 흑/백/원주민 혼혈인 ‘파르도(pardo)’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민 흑인들과 파르도는 아무리 노임을 많이 준다하여도 농장이나 끄리올로 귀족들의 장원에서 일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도시로 몰려 대장장이, 은(銀) 세공, 목수, 재단사, 석공, 신발제조, 푸줏간 등의 업종에서 기술자나 자영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말을 타거나 비단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신학교에서 수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상류층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790년에 에스파냐 정부가 파르도들에게 법적으로 ‘백인’ 신분을 획득할 수 있는 ‘면허’를 판매하려 했을 때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끄리올로 상류층은 이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켜 좌절시켰는데 이 반대운동을 주도한 것은 카를로스 팔라치오스, 후일 누에바 그라나다에서 독립군을 이끌게 되는 시몬 볼리바르의 숙부였다.

파르도들의 운명은 대다수의 다른 메스티조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 중간계층이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회적 명예’를 획득할 수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상류층들은 사회적인 명예란 ‘고귀하게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을 제외한 노예들이나 하층민 농부, 또는 중간계층 파르도나 메스티조들은 ‘주제’를 알아야 하고 주어진 자리에 만족해야 한다는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당연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멕시코에서의 민중봉기를 이끌게 되는 미구엘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의 친구이자 미초아칸(Michoacan)의 주교인 마누엘 아바드 이-퀘이포(Manuel Abad y Queipo)가 에스파냐의 국왕에서 올린 상소문에 잘 드러나 있다. 아바드 주교의 상소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누에바 에스파냐 인구의 9할이 인디오, 가난한 메스티조와 파르도들인데 이들은 지독한 가난 때문에 식민지에서 자신들의 지분(支分)이 거의 없다. 백인들이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한데 비하여 자신들은 변변한 재산도 없기 때문에 백인들을 매우 원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디오들은 자신들이 바쳐야 하는 조공에 심하게 반발하고 있고 메스티조들과 파르도들은 신분상승을 막고 있는 까스타 제도에 분노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파냐 정부는 인디오들의 조공을 없애고 ‘까스타’제도를 폐지하며 누에바 에스파냐에 있는 모든 공지(空地)를 무상분배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상소문의 내용같이 지독한 불평등을 인정하고 있었던 아바드 주교 역시 에스파냐 지배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기에 작은 교구의 사제들에게 더욱 많은 권한을 허락하여 이들을 통하여 민초들의 (에스파냐 본국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아메리카에 전해진 혁명의 메시지

 

이처럼 차별이 가득한 라틴 아메리카 사회에 충격을 가져다 준 두 개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프랑스 혁명과 아이티의 노예봉기였다. 라틴 아메리카 상류층은 그들의 자식들을 유럽으로 보내어 고등교육과 ‘교양’을 익히게 하였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유럽에 있던 많은 라틴 아메리카 젊은이들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물들게 된다. 결국 이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면서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차별의식이 흔들리게 되고 많은 수가 라틴 아메리카 독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791년 루베르튀르가 아이티의 노예봉기를 주도하면서 프랑스에서 반혁명파들을 격파하였고 아이티에서는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비록 루베르튀르가 1802년에 프랑스군에게 잡혀 투옥, 사망하지만 쟝-쟈끄 데살린에 의하여 독립운동은 계속되어 1804년 아이티의 독립이 선포된다. 이는 프랑스의 혁명사상이 라틴 아메리카로 퍼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일단 노예와 하층민들이 유럽인들에게 맞서서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고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자유민 흑인들과 파르도들을 통하여 그 소식이 중남미로 전해진 것이다.

 

1804년 아이티의 독립 선포는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라틴 아메리카로 퍼지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반란과 전쟁으로 치닫는 라틴 아메리카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을 부추긴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 1807년에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에스파냐를 거쳐 포르투갈을 침공한 것이다. 포르투갈 군대는 프랑스가 해안으로 공격해 올 것으로 생각하여 군대를 모두 해안가에 포진하였지만 이미 프랑스는 에스파냐의 총리대신인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와 포르투갈을 삼분(三分)하기로 협약을 맺은 상태였다. 포르투갈 수도인 리스본은 거의 싸움 없이 함락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동맹군이 목을 조여오는 상황에서 여왕 마리아 1세와 섭정인 조앙 왕자를 비롯한 포르투갈 왕가와 정부인사, 귀족 1만여 명이 50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1807년 11월 29일에 리스본을 떠나 브라질로 망명하게 된다.

그러나 에스파냐 왕가의 상황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국왕인 카를로스 4세는 정치능력이 없어 무능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고 정권은 고도이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 페르난도 왕자는 고도이의 비호 하에 부왕에게 양위(讓位)할 것을 압박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은 이 부자간의 분쟁을 중재한다는 핑계로 카를로스와 페르난도를 프랑스로 불러들였고 그 틈을 타서 프랑스 주둔군에게 에스파냐의 주요 요새를 모두 점령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프랑스 군대는 신속하게 에스파냐 각지를 점령하였고 국왕과 왕세자가 모두 없는 상태에서 에스파냐 군 수뇌부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에스파냐 군대는 각지에 분산되어 있어 전력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에스파냐의 왕좌에는 나폴레옹의 동생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앉게 된다.

 

마누엘 고도이의 초상화. 그의 실정으로 인하여 에스파냐는 프랑스에게 패망하고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 본격적인 독립 투쟁이 시작된다.

에스파냐 왕실의 불행은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파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였다. 에스파냐 정부와 총독부들은 식민지에 퍼지고 있었던 소위 ‘프랑스 사상’을 경계하면서 혁명 사상을 지닌 인사들을 탄압하였고 모든 집회를 면밀히 감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침략으로 총독부에게 명령을 내릴 정부가 없어지면서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독립파들은 열심히 집회를 열고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에 잡혀있는 페르난도 왕세자를 위하여 무기를 들고 아울러 새 땅에 임시정부를 세워야 된다는 명목 하에 독립파들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에스파냐에는 서로 임시정부를 칭하는 위원회(훈타, junta)들이 생겨났지만 프랑스군에 진압되거나 살아남더라도 해당 지역을 통치하는 데 그쳤다. 1809년에야 소위 중앙 최고위원회(Junta Suprema Centrale) 생겨나면서 나폴레옹군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을 꾀했지만 에스파냐군은 속절없이 밀리면서 1810년에는 가데스(카디즈)를 제외한 에스파냐 전국이 프랑스에게 점령되었다.

이에 따라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 각지에서도 훈타가 조직되었고 그 아래 민병대가 꾸려졌다. 명목상으로 페르난도의 복위를 위한 ‘근왕 세력’이었지만 이들은 사실상 해당 지역을 장악하고 총독부의 명령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809년 말에는 차키사카, 라 파즈, 키토등 안데스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독립세력이라기 보다는 총독부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하여 일어난 민중봉기였고 곧 페루 총독부에 의하여 진압되었지만 이러한 봉기는 다른 지역에서도 무장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810년에 누에바 에스파냐, 즉 현재의 멕시코 지역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는 그 군세만 10만을 넘는 대규모 봉기였고 향후 정치에 미친 파장도 엄청났다.

괴짜신부 미구엘 이달고와 멕시코의 민중봉기

 

멕시코 민중봉기를 주도한 미구엘 이달고(Miguel Hidalgo) 신부. 그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멕시코 독립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후 멕시코의 국부(國父)로 추앙을 받는다.

이 봉기를 주도한 미구엘 이달고는 현 멕시코 구아나후아토(Guananhuato) 출신의 끄리올로로서 멕시코 시티의 왕립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790년에 산 니꼴라스 대학의 학장이 된 후 프랑스와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에스파냐 왕실의 정당성과 교황의 절대성에 대하여 공공연한 의문을 제기하고 파격(破格)과 기행(奇行)으로 일관하였다. 심지어 그는 처녀잉태설과 사제 독신까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는 여러 명의 여인과 같이 살면서 자식을 보았고 그의 집에 사람들을 모아서 밤새 춤추고 도박하는등의 행위로 결국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다행히 파문당하지는 않았으나 학장자리를 박탈당하고 조그마한 산 펠리페와 돌로레스 교구의 일반 신부로 전출된다.

그러나 이달고가 춤추고 노는 것은 사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의 집은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었고 까스타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아울러 신부로 재직하면서 인디오들과 메스티조들의 지독한 가난을 목격하고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심고 도자기를 만드는 기계를 제작하여 주변의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인디오와 메스티조들의 자립을 도왔다. 사실 정부가 에스파냐 본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올리브와 와인을 포함한 온갖 물품에 대한 판매권을 독점한 상황에서 이는 불법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행으로 뻬닌술라레스 상류층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던 그는 생산과 판매를 공동으로 하고 수익을 나누어 가지는 방식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 하였다. 그러나 1807년과 1808년에 극심한 가뭄이 멕시코 지역을 강타했고 이에 가난한 민중들은 총독부 저장고에 있는 곡물이 풀리기를 기대하였지만 총독부와 결탁한 에우로페오(Europeo, ‘유럽출신’을 뜻하는 말. 뻬닌술라레스와 동의어) 상인들은 저장고의 문을 닫고 곡물값을 폭등시켰다. 결국 그는 1809년 9월 16일에 ‘돌로레스의 외침’이라고 알려진 공개 미사를 열어 민중들에게 봉기를 촉구한다.

약 5천으로 시작한 그의 봉기는 농민들과 함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끄리올로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 좋게 진군하면서 도시 여럿을 함락시키고 15000까지 불어난다. 1810년에는 구아나후아토를 점령하면서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지만 그의 군대는 기강이 해이하여 도시를 함락시킨 다음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위로 끄리올로들의 지지를 잃는다. 1810년 10월에는 멕시코 시티를 포위하였으나 왕당파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결국 1811년 1월 17일에 현재 멕시코 할리스코(Jalisco)주에 있는 깔데론 다리에서 총독부군과 싸워 (La Batalla del Puente de Calderón) 크게 패한다. 그는 이후 총독 펠릭스 마리라 깔레하가 지휘하는 총독부군에 잡혀 1811년 7월 30일에 치와와주에서 총살을 당한다.

훈타들의 설립과 들끓는 라틴 아메리카

 

마누엘 벨그라노.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junta)의 중심인물이며 아르헨티나의 국부 중 한 명으로 추앙된다.

미구엘 이달고 신부의 봉기가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멕시코의 봉기는 여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농민군은 다시 호세 모랄레스를 중심으로 뭉쳐 봉기를 이어간다. 아울러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 훈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다.

1810년에만 카라카스(Caracas, 현 베네주엘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보고타(Bogota, 현 콜롬비아 수도), 산티아고 (Santiago, 현 칠레 수도)에서 훈타가 생겨났고 페르난도 7세의 복위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사실 상의 지역정부로 기능하였다. 이중 리오 델 플라타 총독부가 무력화되자 현재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지역의 개혁세력이 모여서 설립한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는 우루과이와 파타고니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기세를 떨쳤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는 그 영향력과 함께 독립세력의 기반을 넓히고자 이후 아르헨티나의 국부(國父)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게 되는 개혁가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를 1810년 8월에 훈타 병력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벨그라노는 부에노스아이레스군을 이끌고 에스파냐의 세력이 약한 현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일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개혁적 인사들이 많고 민중들이 총독부에 불만이 많은 데다 총독부 세력은 약하니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썩어 보이는 왕조라도 실제로 맞닥뜨려보면 만만치 않은 경우가 많다. 반란세력이나 소위 혁명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당성만을 믿고 아무런 준비 없이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가’들이 그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훈타는 그나마 준비가 잘 된 편이었지만 보급과 작전에 대한 면밀한 준비 없이 파라과이 지역으로 진격한 벨그라노의 군대는 페루 총독이 모은 에스파냐 정규군과 왕당파들의 혼성군에 대패한다. 앞서 말한 대로 페루에서는 이미 몇 차례 봉기가 일어났고 1809년에는 라파즈와 키토에 소규모 독립파 훈타들이 조직되었으나 당시 페루 총독이 파견한 병력에 의하여 철저히 진압당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지 못하고 단순히 그 지역 독립파들의 내응 약속만을 믿고 안이하게 접근한 까닭이었다. 무엇보다도 페루의 총독 호세 페르난도 아바스칼(José Fernando de Abascal y Sousa)은 라틴 아메리카에 남아있는 에스파냐의 총독들 중에서는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것도 독립파에게는 불운으로 작용하였다. 파라과이와 페루 공략실패는 이후 에스파냐 식민지 각지의 독립파 ‘훈타’들에게는 재앙이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페루는 에스파냐 정부와 왕당파들이 본격적인 반격을 개시하는 거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이나 혁명가인 프란시스코 미란다. 1811년에 베네주엘라 공화국을 선포한다. 시몬 볼리바르는 미란다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 공화제 사상(Republican ideas)을 지니고 있다 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정부로부터 수배를 받고 피신하여 유럽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던 지식인이자 자칭 혁명가인 프란시스코 미란다(Francisco Miranda)가 1811년에 일단의 무장세력을 모으고 독립파 세력, 특히 파르도(pardo) 자유민들을 규합하여 누에바 그라나다에서 ‘베네주엘라 공화국’이 세워졌음을 천명한다. 그러나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카라카스와는 달리 코로(Coro), 마라카이보(Maracaibo), 기야나(Guyana)의 도시민들, 특히 에우로페오 엘리트들은 미란다의 공화정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였고 처음에 미란다의 공화국에 참여하였던 발렌시아(Valencia)도 공화정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공화제의 대열에서 이탈하려 하였다. 이에 미란다는 소위 공화국군을 보내어 발렌시아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공화국군을 이끈 인물은 카라카스 출신의 젊은 개혁가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였다.

1812년 헌법

 

페르난도 7세가 프랑스에 잡혀있는 상태에서 에스파냐의 합법적인 정부인 가데스 훈타는 1812년에 소위 ‘1812년 헌법’을 선포한다. 이 헌법의 제정과정에서는 에스파냐 각지와 에스파냐 식민지의 ‘대표’들이 참여하였는데, 총 303명이었고 상당수가 프랑스 혁명사상, 또는 계몽주의나 자유주의 사상을 배운 지식인들이었다.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지방의 자치를 허용하는 연방 제도를 일부 받아들이고 있으며 아울러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에서 태어났거나 장기간 거주하였거나 귀화한 사람 모두를 ‘에스파냐 시민’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간접 투표방식을 통하여 각 지방의 대표를 뽑는 방식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는데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력자들이란 대개 땅을 가진 기존의 끄리올로들과 함께 새로이 부를 형성한 부르조아지와 도시 중상류층을 의미했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뻬닌술라레스(에우로페오)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의회(코르테스)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1812년의 헌법은 식민지에서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식민지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 헌법을 근거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이 에스파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 제정과정에서의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우선 카디즈 코르테스에 참여한 에스파냐 본국 출신 대표들과 아메리카 출신 대표들 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에우로페오들과 아메리카노들간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장 큰 갈등은 역시 아메리카에 있는 흑인들과 흑인계열 혼혈인들에 대한 인정이었다. 다른 혼혈인들에게 시민의 자격을 인정하면서 흑인들을 제외하면 많은 수의 아메리카노들이 사실상 인구 집계에서 제외되는 것이며 향후 인구 비례로 선출될 입법기구는 에우로페오, 즉 에스파냐 본국 출신들과 뻬닌술라레스가 언제나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외에도 협상과정에서 아메리카 출신들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를 사용하면서 이를 당연시하는 것도 아메리카 출신 대표들을 자극하였다. 인종적인 차이가 없는 아메리카노들도 에스파냐 본국인들에게는 차별의 대상일 뿐이었다.

 

1812년 헌법을 선포하는 카디즈의 코르테스(cortes).

물론 현실적으로 1812년 헌법이 당장 식민지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 일단 프랑스 세력이 에스파냐를 여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카디즈 의회에 에스파냐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총독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카디즈 의회를 지지하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왕에 대한 충성을 거두지 않았다. 즉 왕실과 의회의 갈등이 불거질 경우 이들은 지체 없이 왕실 쪽으로 택할 사람들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헌법에 명시된 ‘자유주의적 조항,’ 예를 들어 집회와 출판의 자유같은 조항들을 식민지에 적용하는데 인색하였다. 자치단체에서의 투표도 마지못해 용인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식민지적 현실은 차지하고라도 카디즈 코르테tm에서 에스파냐 출신 대표들의 태도는 결국 아메리카 출신 대표들의 대거 이탈을 야기하였다. 영향력 있는 사제인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Servando Teresas de Mier) 신부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력 가문 출신인 카를로스 알비아르(Carlos Alvear) 등 프란시스코 미란다의 독립파에 몸을 담고 있던 인물들이 이탈 대표들의 주축을 이루었다. 아메리카 대표로서 코르테스에 참여하였던 리오 델 플라타(아르헨티나) 출신의 호세 산마르틴(Jose San Martin)도 더 이상 에우로페오들과 상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다른 아메리카노 대표들과 함께 카디즈를 떠나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는 몰랐지만 호세 산마르틴의 이탈은 향후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중대한 사건이 된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이달고 신부의 죽음 이후 사그러져 가던 봉기가 모렐로스의 지휘 하에 다시 살아났다. 1811년에 아카풀코를 포위하였으나 함락에 실패한 모렐로스는 내륙 멕시코 시티 인근의 쿠아우트라(Cuautla)에 입성하여 이를 내륙공략을 위한 본거지로 삼고자 하였으나 총독 바네가스(Francisco Xavier Vanegas)와 군사령관 깔레하스(Calejas)의 총독부/보수파 병력에게 포위당한 모렐로스는 72일후 쿠아우트라를 포기하고 오악사카(Oaxaca)로 이동하여 보수파 병력에 수세에 몰려있던 독립파 동료인 트루한(Trujan)의 봉기군을 구원한다.

 

 

 

 

 

시몬 볼리바르의 실패

 

시몬 볼리바르는 발렌시아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다. 군사적 기지로서 구축해놓은 푸에르토 까바요(Puerto Caballo) 시 요새에 가두어놓은 왕당파 포로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한 것이다. 1812년 6월 30일에 푸에르토 까바요에 갇혀있던 왕당파 포로들은 소홀한 감시를 틈 타 반란을 일으키고 요새의 무기고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문에 요새는 포로들의 감옥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요새가 되어버렸고 왕당파 군인들은 무기고의 대포들을 이용해 푸에르토 까바요 시내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 때문에 전세가 뒤집혀 푸에르토 까바요의 공화국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반란이 일어난 지 불과 나흘 만에 시몬 볼리바르는 불과 여덟 명의 동료들과 함께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해방자(Libertador) 시몬 볼리바르. 수많은 실패를 겪었으나 강력한 카리스마로 독립세력을 이끌며 남미 각국을 에스파냐 통치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는 다른 도시들의 비협조로 인해 ‘건국’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던 미란다의 베네수엘라 공화국에 중대한 타격이 되었다. 미란다는 차별 받는 파르도들에게 공화국군에 종군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아울러 왕당파와 에우로페오들에 대한 공개 재판과 처형을 하는 등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살리려 하였으나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한 독립 운동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까지의 독립 운동은 사실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천명하는 독립 운동이라기보다는 잡다한 봉기와 운동의 집합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서의 운동은 독립 운동이라기보다는 가난한 민중들에 의한 민란에 가까웠고 미란다의 베네수엘라 건국은 사실 지식인 엘리트에 의한 공화제(共和制) 설립 운동이었다. 미란다가 베네수엘라를 세운 것은 최종적인 목적이라기보다 다만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공화제를 정립한다는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꼬로(Coro) 시의 에스파냐군 사령관인 몬테베르데(Monteverde)가 카라카스 정부에 반대하는 군을 일으키고 각지에서 공화국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의 거병이 이어지자 미란다의 공화국 정부는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때 카디즈에서 제정한 헌법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고 카디즈 의회가 국왕 페르난도 7세의 이름을 걸고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약속하자 미란다의 공화국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미란다는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몬테베르데와 비밀협약을 통하여 자신이 항복하는 대신 베네수엘라를 무사히 떠날 수 있게 하는 비밀 협상을 시작한다. 이 비밀협상을 알게 된 볼리바르는 분노하면서 미란다를 ‘배신자’로 규정하고 미란다를 사로잡아 몬테베르데에게 넘긴다. 이로써 누에바 그라나다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다만 볼리바르는 미란다를 넘겨준 대가로 무사히 남미를 떠날 수 있었으며 그가 소유한 장원(莊園)과 막대한 재산에 대한 압류가 취소되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공화국으로 만들려 하였던 이상주의자 미란다는 카디즈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본격적인 독립 운동으로의 변화

 

한편, 페루에 대한 1차 공략에 실패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조용히 지도부 교체가 이루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훈타는 이미 스스로를 1810년부터 리오 플라테 연합주국(聯合州國, Provincias Unidas del Rio del Plata)으로 칭하고 있었지만 아직 다른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리오 플라테의 정치를 주무르다시피 하고 있던 베르나르도 리바다비아(Bernardo Rivadavia)란 인물은 극단적 공화주의자였고 성격도 극단적이어서 자신에게 온전히 찬동하지 않는 인물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때 카디즈 의회를 이탈한 까를로스 알비아르와 호세 산 마르틴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면서 합중국의 판세는 바뀌었다.

 

아르헨티나 5페소 지폐에 그려진 산 마르틴의 초상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던 알비아르는 발이 넓었고 무엇보다 지역유지들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총독부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산 마르틴은 군대를 조직하고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준비도 없이 섣불리 민병들을 모아 페루를 공격하였다가 실패한 기존 인사들과 달리 산 마르틴은 도착한 후 불과 수 개월 만에 잘 훈련된 정예 기병대를 만들어냈다. 공화제의 이상에 충실하기는 했지만 리바다비아는 그 이상의 것이 없었다. 1812년 10월에 이르러 알비아르와 산 마르틴은 그 정치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리오 플라테의 정치를 장악하고 그 지역의 독립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달고 신부의 처형이후 멕시코 봉기군을 이끈 호세 모랄레스.

한편 이달고 신부의 체포와 처형으로 지리멸렬되었던 멕시코의 민중 봉기는 메스티조인 호세 모랄레스의 지휘 하에 다시 살아난다. 이전 목표이던 쿠아우트라에서 힘없이 후퇴한 후 6개월간 남부 시에라 마드레(Sierra Madre del Sur) 산맥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봉기군 사령관 모랄레스는 봉기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오악사카를 목표로 진군을 시작한다. 오악사카의 주교는 골수 왕당파였고 모랄레스를 악마로 묘사하는 등 봉기군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기에 봉기군에게 충분히 동기가 될만한 목표였다. 아울러 지역 도로의 교차로에 위치해있고 요새화된 도시라는 점에서 군사적인 이점도 상당했다. 오악사카의 총독부 병력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산에서 ‘도적질’이나 하고 있던 봉기군이 오악사카를 정면공격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모랄레스의 대군이 좁은 산길과 협곡을 통한 2주일의 강행군 끝에 1812년 11월 25일에 오악사카 앞에 나타나자 크게 당황한다. 요새 수비군은 한 때 대포를 쏘면서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봉기군 지휘관 중 한 명인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 본명 José Miguel Ramón Adaucto Fernández y Félix)가 단신으로 성을 둘러 싸고 있던 해자를 건너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병사들에게 종용하자 총공격이 이어졌고 오악사카는 불과 두 시간 만에 함락되었다. 모랄레스는 오악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1813년에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의 대표들을 모아 칠판싱코 국민회의(Congreso de Chilpancinco)를 소집한다. 여기에서 봉기군은 ‘국민의 생각(Sentimentos de la Nacion)’이라는 문서를 채택하는데 누에바 에스파냐의 독립, 카톨릭의 국교화와 함께 삼권분립을 기본으로 하는 정부의 수립을 천명한다. 봉기가 민란을 벗어나 본격적인 독립 운동과 공화제 운동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노예제의 폐지와 함께 인종을 불문하고 아메리카 태생의 모든 국민은 ‘아메리카노’로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기존의 보수파와 왕당파들이 이를 용인할 수 없었음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모랄레스의 봉기군은 외부와의 원활한 교통로를 확보하고자 항구도시 아카풀코를 공략하고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 와중에 전직 총독군 사령관인 깔레하스가 총독이 되었고 봉기군이 아카풀코 공략에 붙들려있는 동안 군을 재정비한다. 이전 미구엘 이달고의 봉기군을 격파하고 이달고를 죽이는 데 공이 컸던 깔레하스는 감히 왕실와 에스파냐에 도전하는 ‘천한 잡종’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며 모렐로스를 추격한다.

왕정의 복귀와 독립파의 패배

 

상황은 점차 독립파 세력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우선 지도부를 물갈이하고 재차 페루에 대한 원정에 나섰던 3천의 리오 플라테 군대는 1813년 2월 20일에 살타(Salt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3400명의 페루 총독부군을 격파하면서 기세를 올린다. 6월에 벌어진 페케레케(Pequereque) 전투에서도 승리를 올리면서 현 볼리비아 지역으로 진격하나 10월 1일 현재 볼리비아에 있는 빌카푸히오(Vilcapugio) 전투에서, 그리고 11월 14일에는 아요후마(Ayohuma) 전투에서 페루 총독부의 호아킨 페주엘라(Joaquin Pezuela) 준장이 이끄는 에스파냐군에게 패하고 ‘북방원정군’이라는 거창한 명칭으로 기세 좋게 출발한 리오 플라테군은 패잔병이 되어 살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살타 전투를 묘사한 그림. 살타에서 승리한 리오플레테군은 볼리비아를 공격하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1814년에는 소위 반도 전쟁(Peninsular War,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영국-에스파냐 동맹군이 승리하고 프랑스군을 에스파냐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잠시 에스파냐왕이 되었던 조셉 보나파르트도 쫓겨나고 페르난도 7세가 에스파냐의 왕이 된다. 페르난도 7세는 카디즈 의회를 마음 속으로 인정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계를 거꾸로 돌려 이루어진 모든 것을 카디즈 의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없애려 했다. 우선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골자로 하는 1812년 헌법을 무효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사실상의 정부로 기능하였던 카디즈 의회를 반강제로 해산했다. 이와 더불어 페루의 총독부도 본격적인 소탕작전에 나섰고 우선 현 칠레 산티아고에 세워진 훈타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에 나선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왕의 권한을 축소하는 헌법을 제정한 산티아고 훈타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인 베르나르도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의 지휘 하에 페루 총독부/왕당파 군대를 맞아 선전하나 총독부군의 우세한 화력과 병력에 밀리며 고전하다가 1814년 랑카구아(Rancagua) 전투에서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면서 산티아고 훈타는 해체되고 에스파냐는 다시 칠레 지역을 ‘회복’하게 된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페르난도 7세 초상화. 왕위에 복귀한 후 헌법을 폐지하고 왕실의 권위를 재확립하려 하였다.

이에 앞서 1812년 12월에 다시 카르타헤나(Cartegena)에 복귀한 볼리바르는 “카라카스의 한 사람이 누에바 그라나다 시민들에게 보냄‘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통하여 누에바 그라나다의 근본적인 문제는 왕정이라기보다는 부당하게 아메리카 땅에서 아메리카노들을 괴롭히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있는 에우로페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미란다나 다른 혁명가들이 내세운 공화주의적 이상은 민중들에게 속된 말로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볼리바르는 그의 전쟁을 아메리카노들이 독립을 위하여 에우로페오들을 몰아내는 싸움으로 틀을 짰다. 그리고 에우로페오들에게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그의 군대에 의한 약탈이나 기타 가혹행위가 있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아메리카노들에게는 아무리 과거에 왕당파의 편에서 싸운 일이 있어도 용서한다는 내용이었다. 에우로페오들에 대항하여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는 결의를 과시하였다.

볼리바르의 구호는 민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제2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다. 카르타헤나에서 출발한 볼리바르의 군대는 1813년 2월에 쿠쿠타(Cucuta)를 점령하고 현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를 향해 쳐들어간다. 그리고 8월에는 카라카스에 화려하게 개선하였고 시민들로부터 해방자(Libertador)라는 칭호를 수여 받는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제2공화국은 미란다의 제1공화국 만큼이나 불안한 기반 위에 있었다. 사실 ’해방자‘가 해방시킨 도시들은 누에바 그라나다의 몇몇 도시에 불과하였고 많은 지역은 아직 왕당파와 보수파들의 수중에 있었다. 왕당파와 보수파들은 베네수엘라 내륙에 있던 일종의 직업적 소몰이꾼들은 야네로스(Llaneros)들을 끌어 들여 공화국군을 공격한다. 야네로스는 아르헨티나의 가우초들과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목장을 관리하고 인디오들과 싸우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데 익숙하였고 왕당파들에게 강력한 기마 전력을 제공해주었다. 이들은 에우로페오이기는 하지만 수십년간 야네로스로 살아온 토마스 보베스(Tomas Boves)란 인물의 지휘 하에 볼리바르의 군대와 싸웠고 볼리바르는 결국 보수파들에게 패하고 1814년에 제 2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다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1815년에는 에스파냐에서 강력한 토벌군을 파견한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했던 노련한 정규병들이 왕당파 세력에 가세하면서 전황은 독립파에게 더욱 불리하게 된다. 결국 1815년 12월에는 베네주엘라 공화파/독립파들의 중심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르타헤나마저 에스파냐군에 함락이 된다. 이에 앞서 1815년 11월에는 멕시코 봉기군 수장인 모랄레스가 테즈말라카(Tezmalaca)에서 패하면서 멕시코 봉기군은 거의 완전히 붕괴된다. 다만 모랄레스 휘하의 부장(副將)들이었던 과달루페 빅토리아와 비센테 게레로가 일부 병력을 수습하여 봉기세력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한다. 1816년,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세력과 반왕파들은 거의 완전히 소멸되었고 리오 플라테를 제외한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들은 다시 에스파냐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

 

경제적으로나 인구의 규모로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보다 작았지만 브라질의 사회 구조는 에스파냐 식민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다에 가까운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과 목화 농장이 생겨났고 그 노동을 담당하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와 내륙에서 잡아들인 인디오 노예들이었다. 식민지가 커지기 이전인 1600년대부터 내륙에 대한 탐험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탐험가’들이 내륙으로 파고 들었고 그들이 발견하는 땅마다 포르투갈 국왕의 ‘왕토(王土)’임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통치는 못하더라도 이미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최소한 명분 상 포르투갈 왕의 브라질 땅은 지금의 브라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개발이 지지부진하던 브라질의 내륙, 특히 미나스 게라이스(Minas Gerais) 지역에서 금맥이 발견되면서 해안가의 인구가 내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아마존강과 그 수많은 지류는 내륙개발에 필요한 고속도로 역할을 하였다.

채찍으로 얻어맞고 있는 브라질 노예.

브라질의 산업 중 가장 크게 성행한 것은 역시 사탕수수였고 브라질은 당시 프랑스령이자 최대의 사탕수수 재배지인 카리브해의 산살바도르에 이어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설탕 생산지였다. 이러한 브라질 산업의 노동력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브라질에서도 혼혈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브라질의 혼혈인에는 에스파냐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메스티조와 물라토들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다인종 혼혈인 파르도(pardo)들이었다.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파르도 혼혈인들은 브라질의 해안 도시에 모여 서비스업과 기술직에 종사하였고 백인 포르투게스(Portugues)들로부터 받는 차별에 매우 민감했다.

브라질의 광물과 설탕은 수출을 위하여 강을 따라 해안 도시로 옮겨져 수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헤시페(Recife), 살바도르(Salvador), 그리고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가 큰 도시들로 발전했다. 당시 브라질의 총 인구 2백만 중에서 반인 100만이 이 세 도시에 모여 살았다. 내륙은 해안에 비하여 인구가 적었지만 광업의 중심지인 미나스 게라이스 같은 경우 발달이 잘 된 편이었다.

독립 전쟁의 씨앗

 

 

처형대에 오른 브라질 개혁가 티라덴테스.

아메리카의 다른 식민지들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브라질은 오히려 호황을 누렸다. 예를 들어 서반구 최대의 설탕생산지인 산살바도르섬에서 반란이 일어나 노예제가 폐지되고 생산이 중단되자 브라질은 대체 시장으로 등장해 국제 설탕 시장에서 떼돈을 벌어 들였다.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의류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브라질 산 면화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그러나 아무리 브라질이 다른 식민지에 비해 부유했다 해도 그 부는 식민 모국이 차지하는 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다른 식민 모국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 왕실 역시 브라질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과 운송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 같은 대사건의 영향은 브라질에도 미쳤다. 1789년에 내륙의 광업도시인 미나스 게레이스에서는 정치적 음모가 ‘발각’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파르도이자 민병대의 장교였던 티라덴테스라는 인물이었다. 티라덴테스는 빌라 리카 시(현 브라질 오루 프레투) 시장의 아들인 조세 마시엘이란 인물을 만났는데 영국 유학파인 마시엘은 영국의 발전과 브라질의 낙후성을 비교하며 한탄하였고 개혁 사상에 물든 인물들을 모아 조직(Inconfidencia Gerais)을 만들었다. 이중에는 작가이자 관리인 마누엘 코스타, 역시 관리인 토마스 곤자가, 그리고 사업가인 알바렝가 페이초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독립 사상과 루소 등의 프랑스 사상가들에게 매료되어 있었으며 미국과 프랑스에서 개혁적인 사상을 도입해 브라질에 퍼뜨리고자 하였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브라질을 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티라덴테스는 사분형(四分刑, quartering)을 받고 죽는다. 그러나 티라덴테스와 개혁가들의 사상은 이미 리오와 헤시페 등의 도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1807년 포르투갈 왕실이 프랑스군에 쫓겨 브라질로 망명하게 된다.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에 자리잡게 되자 보수파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고 포르투갈의 왕당파 끄리올로들은 왕실을 브라질에 잡아 두고 브라질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왕실이 브라질로 옮겨오며 브라질의 개혁파와 독립파들은 위축 되는 듯 했으나 개혁에 대한 열망에 불타는 지식인들과 파르도 자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음모와 반란을 일으킨다.

조앙 6세와 페드로 1세의 선언

 

포르투갈 국왕 조앙 6세. 체제수호에는 누구보다도 단호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조앙 6세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서 포르투갈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왕으로서 극진히 모셔주는 리우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의 아들인 페드로 왕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왕비인 카를로타 조아키나(Carlota Joaquina)는 달랐다. 원래 에스파냐 공주 출신인 그녀는 브라질에 와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고 포르투갈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조앙 6세는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브라질 왕당파들의 의도대로 브라질을 자신의 본국(本國)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815년 조앙 6세는 포르투갈을 연합국(United Kingdom)으로 선포한다. 즉 포르투갈이 본국과 식민지가 아니라 포르투갈과 브라질이라는 두 개의 동등한 주체가 합쳐져 이루어진 나라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공식 명칭은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베스 연합왕국(Reino Unido de Portugal, Brasil e Algarves)이 되었다. 개혁 운동이 아닌 왕의 선언에 의해 식민지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이다. 물론 브라질을 인정해 주었다 하여 왕이 갑자기 개혁파가 된 것은 아니었다.

리오 델 플라타의 호세 산 마르틴이 페루 총독부의 에스파냐군을 연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브라질은 다시 공화주의의 열기에 휩싸이고 유럽의 기업인들과 지식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헤시페에서는 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화주의 모임들이 무수히 조직되었다. 헤시페가 속해 있던 페르남부코 주의 지사는 이 모임들을 해체하고자 그 구성원들에게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수백 명의 개혁인사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1817년 3월 6일에 주지사의 병력들에게 끌려가던 한 개혁파 군장교가 그를 압송하던 관리를 죽이고 그 병력들을 선동하여 ‘혁명’의 기치를 올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헤시페의 상류층과 카톨릭 사제들까지 이 봉기를 지지한다. 수년 간 퍼지고 있던 개혁사상은 헤시페의 상류층까지 물들인 것이었다. 봉기군은 페르남부코의 독립을 선포했으며 무엇보다도 새 나라는 왕국이 아닌 공화국임을 분명히 했다. 페르남부코의 소식을 들은 인근의 두 도시 역시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혁명의 기치를 든다. 페르남부코의 '공화국‘ 정부는 육류에 대한 세금을 내리고 병사들의 급료를 올리는 등의 정책으로 민중과 군대의 지지를 유지한다. 아울러 공화국은 상인들을 약탈로부터 지켜주었는데 이는 자본의 유출과 무역의 중단이 야기할 수 있는 경제적 붕괴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 식민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페르난도 7세와는 달리, 조앙 6세는 바로 브라질에 있었고 왕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정규군과 민병대로 구성된 대군을 페르남부코로 보냈고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아무리 유약한 군주라도 왕권을 쉽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렇게 페르남부코 공화국은 멸망하고 그 수장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죽었다.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는 페드로 1세.

브라질의 개혁열기를 겨우 없앴나 싶었을 때인 1820년,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개혁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절대 왕정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하고 대신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 헌법이 선포된다. 그리고 개혁 정부는 왕실이 브라질에 계속 있어야 할 명분이 없다며 리스본으로 돌아와 입헌 군주의 역할을 해줄 것을 종용했다. 이에 리스본으로 돌아갈 명분을 얻은 왕비는 리스본 행을 적극 주장했고 이윽고 1821년 조앙 6세와 그의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포르투갈로 귀국한다. 조앙 6세는 페드로 왕자도 따를 것을 종용했지만 페드로는 거부했고 조앙 6세는 하는 수 없이 페드로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떠난다. 하지만 페드로 왕자는 부왕이 떠나자 마자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다. 브라질 개혁파들의 요구사항을 상당부분 받아들이고 1822년 9월 7일,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고 입헌 군주이자 브라질 제국의 황제 페드로 1세로 등극한다. 브라질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브라질의 많은 정치 사회적 모순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후에 입헌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된다

 

 

 

 

독립전쟁의 대 반전

 

1816년 들어 에스파냐 식민지의 독립운동은 벼랑 끝으로 몰려 있었다. 누에바 에스파냐, 누에바 그라나다, 그리고 페루의 독립 세력은 모두 에스파냐의 반격에 밀려 패하고 거의 소멸되었다. 오직 리오 플라타만이 에스파냐에 맞서고 있었는데 에스파냐에서 왕위에 복귀한 페르난도 7세는 리오 플라테의 독립 세력마저 끝장내겠다며 카디즈에 2차 원정군을 소집하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저항은 물론 게릴라 활동도 변변치 않아 깔레하(누에바 에스파냐)와 아바스칼(페루) 등의 총독들은 ‘영웅’으로서 은퇴하여 조용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독립의 대반전은 리오 플라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리오 플라테의 군사 책임자가 된 호세 산 마르틴은 리오 플레타군이 1813년에 上페루(Alto Peru, 현재 볼리비아)에서 참패한 직후부터 병력을 모으고 훈련시키면서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산 마르틴은 벨그라노가 이끈 오합지중 혼성군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된 정규군을 육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산마르틴은 리오 플라테군의 기본 전략이 수정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남미에서 에스파냐 세력의 중심이 되는 곳은 리마(Lima)를 비롯한 현재의 페루 지역이었고 리마가 주요 공략 대상이 되어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볼리비아 지역을 통한 페루에 대한 직공(直攻)은 일단 수백km의 광대한 고원을 넘어야 하고 티티카카 호수 인근의 데사구아데로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통신과 보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칠레 산티아고를 1차적 목표로 하여 안데스 산맥의 가장 좁은 지점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선 칠레지역을 장악한 뒤 함선들을 준비하여 페루와 리마를 공략한다는 대전략을 세웠다. 일단 산 마르틴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안데스 산맥의 동쪽 기슭에 있는 멘도자(Mendoza)로 옮기고 이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다.

우루과이의 국부(國父) 호세 아르티가스(Jose Artigas)의 초상.

다른 지역에서, 특히 페루 지역에서 독립세력이 소멸되면서 리오 플라테에게 힘을 보태 줄 수 있는 있는 세력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실패하면 리오 플라테마저 그 운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산 마르틴이 주둔한 멘도자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의 군 육성계획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정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리오 플라테 정부는 산 마르틴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리오 플라테 건국에 참여하였던 호세 아르티가스(Jose Artigas)란 인물이 리오 플라테의 정부 수반인 알비아르가 전횡을 하고 있다며 자신의 휘하 주(州)들을 선동하여 리오 플라테에서 이탈하려 했기 때문이다.

아르티가스는 몬테비데오(Montevideo, 현 우루과이 수도) 출신의 끄리올로로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12세부터 가문소유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가우초(목동)들의 생활방식에 매료되어 그들처럼 생활하였다. 청년기에는 아예 집을 떠나 소도둑질과 밀수를 하면서 파타고니아의 목장주들에게 위험 인물로 인식되었고 총독부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1800년대 초에 리오 플라테 지역에 영국의 침략이 임박해오자 총독은 그의 지명 수배를 풀어주는 대신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총독부 민병대에 종군하게 하였고 아르티가스는 1807년 몬테비데오에 대한 영국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정식으로 대위가 된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가우초들은 물론 아메리카노들을 차별하는데 분노하여 독립파에 가담하였고 1814년에 몬테비디오에서 최후의 리오 플라테 총독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리오플라테가 19세기의 미국처럼 느슨한 연방제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리트들은 강력한 중앙정부 개념을 고수하였고 일부는 유럽에서 왕족을 들여와 군주제를 하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르티가스의 몬테비데오 세력과 리오 플라테 정부와의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몬테비데오 세력은 리오 플라테에서 이탈한다. 몬테비데오 지역은 잠시 페드로의 브라질 제국에 점령 당하였다가 1825년에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한다.

어찌되었건 리오플라테 정부와 몬테비데오 세력간의 알력은 산 마르틴이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다행히도 아직 정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벨그라노가 산 마르틴에게 향하는 질시와 의심을 막아주었고 에우로페오 농장주들의 농장에서 풀려난 노예들이 앞다투어 산 마르틴에게 몰려들면서 산 마르틴은 상당수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보수파 교회들의 농장을 압수하면서 빼앗은 노예와 농노들도 병사로 동원되었다. 이들 흑인 병사들은 별도의 부대로 편성되었는데 당시 리오 플라테의 법에 의하면 이들 흑인부대도 백인 장교가 지휘해야 했다. 비록 법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였지만 산 마르틴은 룰을 약간 바꾸어 흑 인병사들이 부사관까지 진급할 수 있게 했다. 랑카구아의 전투에서 패하고 리오 플라테로 피신해있던 칠레 병사들도 산 마르틴의 휘하로 몰려들었고 칠레의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던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역시 리오 플레테군에 속하게 되었다. 비록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산 마르틴이 주둔해있던 멘도자의 시민들은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산 마르틴을 환대하였고 산 마르틴의 정규군 육성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멘도자의 여인들은 빈부를 막론하고 가진 패물을 모두 군자금으로 내놓고 정규군의 군복을 만드는데 기꺼이 참여하여 수천 벌의 군복을 만들 수 있었다. 멘도자의 장인들은 도시 근처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질산염을 채취하여 많은 양의 화약을 제조하였다. 교회들이 기부한 교회 종들은 용광로에서 녹여져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리오 플라테 정부는 이미 실질적으로 에스파냐에서 독립한 상태였지만 이때까지 에스파냐와 연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816년에 투쿠만(Tucuman)에서 소집된 의원 대회에서 많은 진통과 격론 끝에 공식적으로 페르난도 7세의 신민(臣民)임을 부정하고 독립을 선언한다. 산 마르틴 본인은 국왕제의 폐지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겼지만 기본적으로 국가의 주권은 국민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군주도 헌법에 의하여 그 권한이 제한되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절대왕정을 반대하였다.

 

멘도자(Mendoza)에서 훈련중인 안데스 군단을 지켜보는 호세 산마르틴.

산 마르틴의 진격과 볼리바르의 승리

 

1816년 말, 드디어 산 마르틴의 정규군 조직 작업이 완료되었고 산 마르틴은 새로이 만들어진 군대에 ‘안데스 군단 (Banderos de los Andes)'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1817년 1월에 공격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가 남반구로서는 한 여름이어서 고원지대에도 얼음과 눈이 없기 때문이었다. 산 마르틴은 1월에 공식적인 출정식을 갖고 3일간 축제를 벌여 시민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 다음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안데스를 넘어 칠레로의 진격을 시작하였다.

산 마르틴의 준비 기간이 길었기에 칠레의 왕당파들은 이미 안데스군단이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대비를 하고 있었다. 산 마르틴은 왕당파군을 정면으로 들이치기 보다는 최대한 기습을 하려 하였다. 산 마르틴은 군을 나누어 서로 다른 길로 가게 하였고 1813년 2월 12에 산티아고 인근의 차카부코에서 2500명의 에스파냐군을 만난다. 산 마르틴은 군을 나누어 협공하는 작전으로 차카부코의 에스파냐군을 완파한다. 이 전투에서 에스파냐군의 피해는 전사자만 500에 포로가 600명에 이르는 대승이었다. 이에 비하여 안데스 군단의 피해는 120여명에 불과하였다. 차카부코에서 대승을 거둔 안데스 군단은 지체 없이 산티아고를 점령하였다. 이에 콘셉시온(Concepcion) 방면에 있는 에스파냐군이 안데스 군단을 공격하였지만 4월 4일의 쿠라팔리후에(Curapalihue) 전투에서 패하고 격퇴된다.

 

안데스를 넘고 있는 산 마르틴과 오히긴스.

에스파냐군의 잔인한 진압작전을 지켜보아야 했던 산타이고의 시민들은 안데스 군단이 대승을 거두자 산 마르틴을 환대하였고 안데스 군단은 산티아고에 입성하였다. 시민들은 1만 페소라는 거금을 모아 산마르틴에게 ‘용돈’이라며 전달하려 하였지만 산마르틴은 군공(軍功)으로 치부하는 것은 부정(不正)한 일이라 생각하여 받은 돈을 산티아고 공공도서관 건립비로 내놓았다. 산티아고 주교의 저택을 사령관 관저로 받았을 때도 화려한 은식기를 사용하기를 거부하였고 그에게 6천 페소의 연봉을 준다고 하는 것도 마다하였다. 그는 그러한 것을 누리는 대신 다음 작전에 대한 조직과 보급에 대한 업무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산 마르틴의 지나친 청렴은 대민(對民)관계를 악화시켰다. 시민들과 산티아고 원로들의 관점에서는 진정한 고마움의 표시로 주는 선물을 모두 거부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산 마르틴은 원래부터가 다소 딱딱한 성격이었고 아울러 지병(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다. 그리고 각혈의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가끔씩 아편을 복용하였기 때문에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더더욱 시민들 앞에 나서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성정이 엄격하고 딱딱한 산 마르틴에 비하여 시몬 볼리바르는 속된 말로 ‘스타’로서 각광받는 것을 좋아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였다. 볼리바르는 제2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잔여 세력을 망명지인 아이티에서 만나 다시 베네수엘라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베네수엘라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한다는 조건 하에 당시 아이티의 대통령이던 알렉상드르 페티옹(Alexandre Petion)의 지원을 받아 꾸이리아(Guiria)에 남아있던 독립 세력과 합류한다. 그러나 구이리아를 거점으로 천천히 진격하자는 그의 동료들과 달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중부해안에 기습상륙을 고집하였다. 베네수엘라의 중심을 타격하여 보수파들을 지리멸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고집은 그나마 독립파들에게 남아있던 병력을 전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화가 난 그의 ‘동료’들은 볼리바르를 그대로 쫓아내고 상종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동료들은 부두에 막 내린 볼리바르를 칼로 위협하여 다시 배에 태워 쫓아 보냈다고 한다. 한때 ‘해방자’로 환대 받았던 볼리바르로서는 그야말로 대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볼리바르를 싫어하는 인물들도 볼리바르의 지명도가 높은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볼리바르의 이름으로 기치를 올려야만 사람들이 모이고 뭉칠 수 있기 때문에 볼리바르는 동부 베네수엘라의 독립파들에게 1817년에 다시 귀환 요청을 받았다. 이때 볼리바르를 부른 것은 마누엘 피아르(Manuel Piar)라는 파르도 지도자였다. 피아르는 토마스 보베스 사후 자신에게 동조하는 야네로스들을 모아 효과적인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피아르는 1817년 4월에 에스파냐군을 대파하면서 주가를 올리지만 앞으로 나서기 좋아하는 볼리바르는 피아르의 인기를 용납할 수 없었다. 1817년 독립군은 오리노코(Orinoco)강 유역의 앙고스투라(Angostura, 현재 베네수엘라 Ciudad Bolivar)를 점령하여 베네수엘라 중심부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지만 볼리바르는 피아르의 승리 직후 잘했다고 몇 마디 칭찬한 후 피아르의 지휘권을 박탈하였다. 피아르는 당연히 앙심을 품었고 자신이 파르도여서 차별을 받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대부분이 파르도였던 야네로스 기마병들이 술렁거리자 볼리바르는 즉시 피아르의 체포를 명했고 그를 총살하였다. 그리고 기마병들의 급료를 높이는 것으로 불만을 무마시켰다.

피아르의 처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군 용병 800명이 베네수엘라에 도착하여 독립파와 힘을 합하였다. 사실 이들은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된 후 군대가 감축되면서 직장을 잃게 되자 용병으로 고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용병들은 기후와 환경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여 전력에 그리 보탬이 되지 않았고 결국 볼리바르도 야네로스들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오리노코 평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파 야네로스 부대의 수장인 안토니오 파에즈(Antonio Paez, 이후 볼리바르에 이어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된다)를 만난다. 거친 소몰이꾼인 파에즈와 귀족적 성향의 볼리바르는 의외로 죽이 잘 맞았고 파에즈는 볼리바르의 든든한 동료가 된다. 그리고 1819년에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동남부 앙고스투라에서 ‘정부’를 조직하고 각지의 ‘대표’를 불러 의회를 소집한다. 그리고 2월 16일 새로운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볼리바르의 정부는 대통령이 거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형태였다. 볼리바르는 새로운 나라에 수많은 인종과 부족들이 있고 이들은 에스파냐의 압제 밑에서 주권을 발휘해 본 경험이 없기에 당분간은 강력한 중앙정부와 지도자가 이들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식의 연방제를 반대하였다.

 

1820년의 그란 콜롬비아.

볼리바르는 취임하자마자 누에바 그라나다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보고타(현 콜롬비아 수도)에 대한 공략을 계획하였고 1819년 5월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공격이 시작된 5월은 우기였기 때문에 보고타 남쪽의 평야는 거의 물바다가 되었고 인근은 강도 모두 불어나 있었다. 더군다나 보고타로 가려면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안데스 산맥의 끝자락을 넘어야 했다. 총독은 볼리바르의 건국과 거병에 대해서 듣기는 하였지만 우기의 불어난 강물을 뚫고 볼리바르가 공격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거느린 야네로스들은 거친 환경에 익숙해있었고 8월에 보고타 인근에 나타났다. 힘든 진격이었지만 다행히 중간에 민중들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보고타 바로 정면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8월 7일에 보야카 다리(Puente de Boyaca)에서 에스파냐 총독군을 크게 무찌른다. 이때의 총독군은 대부분이 유럽에서 파견된 본국 병력이었으며 총독들은 이들을 등에 업고 독립파들을 소탕한다는 명분하에 지독한 탄압과 강권통치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아메리카노들과 에우로페오들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페르난도 7세가 본국 군대를 파견한 후 에우로페오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중의 적이 되었다. 동시에 총독부와 싸우는 아메리카노 독립파들은 무조건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보야카의 승리는 이러한 과정의 당연한 결과였고 볼리바르의 독립군은 누에바 그라나다의 수도인 보고타마저 점령하게 된다.

칠레와 페루의 독립

 

분위기와 기세로 움직이는 볼리바르와는 달리 산 마르틴은 철저한 준비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다음 목표인 리마 공략을 위한 함선과 무기들을 준비하느라 산티아고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이는 에스파냐 왕당파들에게 반격을 할 시간을 주었다. 아울러 1818년 2월에 칠레의 독립파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통치’를 시작해야 했기에 준비는 더욱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왕당파들은 에스파냐 세빌랴 출신의 군인인 마리아노 오소리오(Mariano Osorio)를 중심으로 뭉쳐 산티아고의 안데스군단을 공격한다.

1818년 산티아고 인근의 칸차 라야다(Cancha Rayad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7천의 안데스 군단은 5천의 에스파냐군의 야습을 받았다. 준비되기도 전에 기습을 받은 안데스군단은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천명 이상이 싸움의 와중에서 실종되거나 탈영하였다. 산티아고를 회복한 후 처음 당하는 패배였고 한때 산 마르틴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산티아고를 떠나 멘도자로 가는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오히긴즈와 같이 산티아고로 돌아와 군을 수습하였고 실종되거나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 군세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단이 지닌 대포들이 대부분 손상되어 이를 복구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된다. 한편, 에스파냐군은 비록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2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600명이 실종되는 등 피해가 상당하여 산티아고 공략과 회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이 전투로 결정된 것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칸차 라야다 이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4월 5일에 양군은 마이푸 평야의 전투에서 다시 충돌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양군은 약 5천의 동일한 규모였으며 이 전투에서 안데스군단은 1천의 전사자가 발생한 데 비하여 오소리오의 에스파냐군은 2천이 죽고 3천이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에스파냐군은 전멸하였고 마이푸의 전투로 인하여 칠레 땅에서 에스파냐 세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칠레의 독립 운동을 이끈 베르나로도 오히긴스(Bernardo O'Higgins)

에스파냐군이 전멸한 후 산 마르틴의 페루 원정 준비는 빨라졌고 칠레의 정권을 잡은 오히긴스는 세금을 걷고 함선을 마련하는 등 독립군 지원에 총력을 기울였다. 새로이 창설된 칠레 해군을 이끌 해군 장교가 없어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전직 영국해군 장교인 토머스 코크란(Thomas Cochrane)이 맡게 되었다. 비록 욕심이 많고 허영이 심했지만 코크란이 유능한 함장인 것은 사실이었고 그는 원정의 사전 준비 격으로 페루 해안에 대한 소규모 기습을 여러 차례 단향하여 페루의 병력을 붙들어둠은 물론 새로이 생긴 칠레 해군 병사들에게 전투 경험을 쌓게 하였다. 페루 총독부의 해군기지가 있는 탈카우아노(Talcahuano)에는 대규모 공격을 가하였고 해군 기지와 항구 주요시설을 전부 파괴하였다. 이로써 페루의 왕당파들은 칠레에 남아있는 왕당파에게 병력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었고, 산 마르틴이 리마를 습격할 때 후방을 위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거점을 없애버렸다.

이때 리오 플라테에서는 정쟁이 격화되면서 현 아르헨티나 북부의 투쿠만 의회 세력과 몬테비데오의 자유민연방세력(Liga de los Pueblos Libres)으로 분열되었다. 연방세력의 공격으로 인하여 투쿠만 의회가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였고 리오 플라테 정부는 산 마르틴의 귀환을 종용하였지만 자신의 전략적인 목표가 더 중요했던 산 마르틴은 연방주의를 거부하라는 격문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연방세력에 밀린 리오 플라테 정부는 무너지고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외에는 통치가 불가능해졌다.

리오 플라테의 상황이 어떻건 간에 산 마르틴은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이윽고 1820년 8월 20일에 산 마르틴인 23척의 함선에 선원을 제외한 병력 4100명, 말 800마리, 대포 35문과 소총 15000정을 싣고 발파라이소(Valparaiso) 항구를 출항하여 리마로 향하였다. 산 마르틴의 원정군은 페루 남부에 일단 상륙하여 총독부의 관리들과 협상을 벌였는데 총독부는 만약 해산하면 국왕 페르난도가 개혁적인 법안을 제정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원정군은 일단 칠레와 페루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협상의 전제조건임을 강조하였고 협상은 곧 결렬되었다.

칠레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페루에는 여전히 23000의 병력이 있었고 칠레함대의 수병들을 포함하더라도 원정군은 6천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본격적인 상륙 이전에 리마 인근의 원주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에 우호적인 총독부 병력 일부가 원정군에 합류하면서 리마 공략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에 총독 페주엘라가 쫓겨나고 들라 세르나(Jose de la Serna)가 총독이 되어 다시 원정군과 협상하지만 재차 결렬되고 원정군은 리마를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칠레에서 보내기로 한 추가 지원 병력은 칠레의 정쟁으로 인하여 오지 못하게 된고 원주민 반란이 의외로 신속하게 진압되자 산 마르틴은 외부 지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볼리바르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아울러 산 마르틴은 리마인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게릴라 세력을 규합하고 자신의 원정군 병력과 함께 리마 가까이 포진하게 된다. 이때 총독이었던 세르나가 갑자기 휘하 병력을 거느리고 리마를 떠나게 된다. 궁지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모으려는 의도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리마에는 더 이상 총독이 없었고 원정군은 리마에 입성하게 된다. 페루에는 칠레와 달리 조직적인 정치세력이 없어 산마르틴은 1821년 7월 28일에 페루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페루의 독립을 선언하고 있는 호세 산마르틴.

이투르비데와 멕시코의 독립

 

 

야심가였던 이투르비데는 독립파와 힘을 합쳐 멕시코를 독립시키고 황제로 등극하나 나중에 쓸쓸히 물러나게 된다.

멕시코의 저항 세력은 1818년과 1819년에는 그저 명맥을 유지하기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그 힘이 약화되어있었다. 1818년 3월 6일에 비센테 게레로가 하우힐라(Jaujilla)를 잠시 차지하기는 했지만 오래 지키지 못하고 물러나와야 했다. 조그만 도시를 일시 점령한 것이 ‘성공’으로 간주될 정도로 저항세력은 심히 약화되어 있었다. 멕시코의 저항세력이 이렇게 심하게 약화된 까닭은 끄리올로 왕당파 군인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in de Iturbide)의 활약때문이었다. 이뚜르비드는 이달고 신부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부터 총독부의 장교로서 싸웠으며 그의 일기에 봉기군을 ‘도적떼’라고 쓸 정도로 멸시하였다. 이 때문에 봉기군을 상대로 싸울 때 매우 잔인했으며 잡힌 포로는 살려주지 않고 처형해버렸기 때문에 총독부에서 조차 그의 잔인함을 여러 차례 지적할 정도였다. 1810년에는 몬테 크루세스 전투에서 비록 패하기는 하였지만 용맹하게 싸운 공을 인정받아 대위로 진급한다. 이달고가 잡혀 처형된 후 1813년에 모렐로스의 봉기군이 바야돌리드(Valladolid)를 포위하고 있을 때 봉기군에 효과적인 기병공격을 전개하여 봉기군을 격퇴하고 바야돌리드의 포위를 푼다. 이 전투의 공으로 총독 깔레하로부터 치하를 받고 대령이 된다. 봉기군 수장 모렐로스의 숙적으로서 여러차례 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며 1814년 1월 5일에 푸루아란(Puruaran, 현 멕시코 Turicato)에서 모렐로스가 지휘하는 봉기군에 또 다시 크나큰 패배를 안겨준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6백이 전사하고 7백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하고 기세등등하던 봉기군의 세력이 크게 꺾여 모렐로스는 수세에 처하게 된다. 결국 모렐로스는 이전의 군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이투르비데에게 쫓기다가 결국 테즈말라카에서 다시 패배하고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왕당파 관점에서는 이투르비데만큼 유능하고 잘 싸우는 인물이 없었지만 이투르비데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자신이 관장하는 지역의 각종 사업과 이권에 개입하여 실질적인 독점권을 확보하고 아울러 적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의 행위로 엄청난 개인적 부를 축적하였다. 아울러 총독부에서 금하고 있는 밀수에도 손을 대개 된다. 그리고 금전적인 부정은 차지하고라도 그는 1814년에 성 금요일(Good Friday)를 기념한다며 300명의 포로를 집단처형하였다. 그는 아울러 남성 전투원뿐만 아니라 봉기군의 아이들과 아내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감금하고 사형(私刑)을 가하는 등의 행위로 악명이 높아져갔다. 심지어 군의 자금으로 쓰게 되어있는 공금까지 횡령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총독부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투르비데의 수많은 부정행위가 드러나게 되면서 1816년에 부정부패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진다. 총독 깔레하는 본보기 차원에서 이투르비데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사령관직에서 해임시킨다. 다행히 이투르비데는 총독부와 왕당파들사이에 강력한 비호세력이 있어 그의 해임은 취소되었지만 이투르비데는 총독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가 지은 죄가 많아 완전한 복직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이투르비데는 1820년 11월에 다시 군에 돌아올 수 있었다.

 

비센테 게레로. 이달고 사후 멕시코 독립군을 이끌었고 이후 멕시코 공화국의 2대 대통령이 된다.

이투르비데가 복직된 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멕시코 시티 외곽지역에서 저항군을 이끌고 있던 비센테 게레로를 무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면서 정식 군사정치조직을 만들려고 했던 모렐로스와 달리 게레로는 철저히 게릴라 전술로 일관하면서 이투르비데의 토벌군을 괴롭혔다. 이투르비데는 게레로를 결전(決戰)으로 끌어들여 격파하려 하였지만 게레로는 이투르비데의 수에 말려들지 않았고 오히려 이투르비데가 방심할 때를 노려 이투르비데가 파견한 부대들을 격파하였다. 1821년 1월 2일에는 자포테펙(Zapotepec)에 게레로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수백명을 파견하였으나 게레로의 매복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한다.

이 와중에 1820년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자유주의 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한다. 에스파냐의 쿠데타 세력은 페르난도 7세를 연금시키고 1812년 헌법의 회복과 의회의 재소집을 요구한다. 페르난도 7세는 할 수 없이 받아들이고 에스파냐에는 일시적으로 개혁정부가 서게 되었다. 본국에서의 쿠데타는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의 왕당파 세력에게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들었다. 국왕을 부정하고 헌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명령을 듣기도 싫었고 헌법에 명시된 데로 저항군들을 에스파냐 시민들로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왕정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투르비데 역시 아메리카노로서 에우로페오들의 차별의식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유주의와 의회민주주의가 대세가 되어가는 듯이 보였다. 이를 막을 능력이 없는 페르난도 7세를 섬길 이유가 없으며 결국은 새로운 땅에 다른 왕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투르비데는 비센테 게레로에게 서신을 보내어 사면(赦免)을 조건으로 종전을 논의하자고 한다. 게레로는 자기는 죄인이 아니니 총독부의 사면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였지만 일단 독립을 위해서라면 만날 수는 있다고 하였고 둘은 2월에 이구알라(Iguala, 현 멕시코 게레로 주에 있다)에 만나 이구알라 강령, 또는 삼약 강령(三約綱領, Plan Trigaranta)를 발표한다. 삼장이란 카톨릭이 멕시코의 국교(國敎)가 되고 멕시코가 독립국이 되며 멕시코 시민들은 사회적 지위와 인종을 막론하고 평등하다는 것은 보장한 일종의 약법(略法)이었다. 그리고 이투르비데와 게레로를 군을 합치고 이 군대를 ‘삼약강령군(Ejercito Trigarante)'이라 명명한다.

 

시우다드 데 메히코(멕시코 시티)로 입성하는 삼약강령군 (Ejercito de Trigarante).

물론 왕당파들이 모두 이투르비데와 함께한 것은 아니고 총독부와 왕당파들인 삼약강령군에 맞서서 싸운다. 삼약강령군(멕시코군)은 코르도바에서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였고 이어 1821년 8월 21일에 아즈카포찰코(Azcapotzalco)에서 다시 에스파냐군을 대파하였다. 당시 누에바 에스파냐의 총독이었던 후안 오도노후(Juan O'Donoju)는 스스로도 자유주의자인데다가 무엇보다도 이미 멕시코에서 에스파냐의 운명이 기울었음을 알고 그 휘하 장병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이투르비데 측과 협상을 개시한다. 그리고 1821년 8월 24일에 멕시코의 독립을 공식화하는 ‘코르도바 조약(Tratados de Cordoba)'에 서명한다. 그리고 9월 27일에 삼약강령군이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면서 누에바 에스파냐 총독부는 종언을 고하고 다음 날 멕시코 제국이 선포된다.

 

멕시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

이구알라 강령에 의하면 멕시코는 입헌군주국이 되어야 했기에 멕시코 건국세력은 페르난도가 멕시코로 와서 즉위식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투르비데는 페르난도가 에스파냐를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페르난도가 올 때까지 멕시코를 잠시 맡겠다는 명분하에 ‘섭정’이 되었고 한편으로 이면에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멕시코의 독립을 이끌었기 때문에 인기도 상당하였다. 결국 이투르비데를 왕위에 올리라는 여론이 높아졌고 이투르비데는 1822년 7월 21일에 황제가 된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은 이투르비데가 입헌군주제를 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새로운 황제를 맹비난하였고 안토니오 산타아나(Antonio Lopez de Santa Anna)를 중심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삼약강령군의 일원으로 이투르비데와 손을 잡았던 게레로도 이투르비데의 신의없음을 비판하며 산타아나와 손을 잡는다. 당시 멕시코 제국의 일부였던 중앙아메리카 지역도 이투르비데의 등극을 반대하며 제국에서 이탈한다. 이에 산타아나는 이투르비데의 하야, 의회의 재소집, 그리고 완전한 공화정 수립을 요구하며 멕시코 시티로 진격하였다. 이투르비데는 이에 맞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대들을 보내어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결국 이투르비데는 1823년 2월 1일에 산타아나를 만나 그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고 5월 11일에 가족과 함께 망명을 하게 된다. 저항세력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왕없는 멕시코’가 마침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집단지도체제 기간을 거쳐 헌법과 제도를 정비한 후 1824년 10월 10일에 과달루페 빅토리아(Guadalupe Victoria)가 멕시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누에바 그라나다의 붕괴

 

에스파냐 본국에서 일어난 쿠데타의 영향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누에바 에스파냐와 남미에도 느껴졌다. 5년 전인 1815년까지만 하여도 에스파냐는 반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것 같았다. 그러나 산 마르틴이 안데스를 넘어 칠레를 공략하고 볼리바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뚜기처럼 일어나 보고타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의 세력은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도처에서 반란과 봉기가 일어나면서 볼리바르의 공화국에 참여하였고 누에바 그라나다 총독부는 고립되어갔다. 한편, 이베리아 전쟁 당시 에스파냐 독립을 위하여 싸웠고 이제는 누에바 그라나다의 총독부 병력을 이끌고 있던 파블로 모리요(Pablo Morillo) 장군은 식민지 재정복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쿠데타 직후 새 정부로부터 볼리바르와 평화 협상을 하라는 지령이 오자 즉시 1820년 11월에 만났고 당분간 휴전을 선언했다.

 

카라보보 전투.

협상을 위한 휴전이었으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볼리바르는 에스파냐 세력과의 공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투는 다시 재개되었고 1821년 6월 24일, 카라보보(Carabobo, 현 베네수엘라 북부 카라보보 주)에서 볼리바르의 그란 콜롬비아 병력 8000명은 마지막 남은 총독부 병력 5000명과 격돌한다. 그란 콜롬비아군에는 파에즈의 야네로 기마병들을 포함하여 2500의 기병이 있었고 이들은 전투에서 결정적인 우위로 작용한다. 그란 콜롬비아군 사상자는 120명에 불과하였지만 총독군은 5천중 3천이 죽고 다치는 대패를 당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포로로 잡히고 인근 항구도시인 포르토 까베요(Porto Cabello)로 온전히 후퇴한 병력은 400명에 불과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그란 콜롬비아군은 카라카스를 점령하였고 한달 후에서는 마라카이보(Maracaibo)湖 전투에서 승리하며 11월에는 포르토 까베요까지 점령한다. 에스파냐인들은 그란 콜롬비아와의 협상 후 완전히 철수하였고 누에바 그라나다 총독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괴야낄 회동

 

산 마르틴이 리마를 점령하고 볼리바르가 카라보보에서 대승을 거둔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오직 현재 페루의 고원지대와 알토 페루(현재 볼리비아)만이 에스파냐의 땅으로 남아있었다. 남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 세력을 무너뜨린 두 주역은 1822년 7월 26일에 에스파냐의 해군기지이자 조선소(造船所)가 있는 항구도시 과야낄(현재 에콰도르 Guayaquil)에서 만난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산 마르틴은 옛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즈코에 자리잡은 페루 총독 세르나를 공략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산 마르틴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일단 싸움없이 리마에 너무 오래 머물게된 안데스 군단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난동과 약탈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다. 칠레 해군을 지휘하여 안데스군단을 페루에 데려다준 코크란 함장은 봉급을 받지 못하자 함선들을 가지고 그대로 사라졌다. 건국의 이상이 아닌 ‘사업’으로서의 전쟁을 하는 용병의 한계였다. 아울러 산 마르틴의 동료이자 칠레의 독재자가 된 오히긴즈는 산티아고에서 거센 정치적 도전을 받아 그 정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칠레로부터도 아무런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구상한 해방계획을 완수하고 싶었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볼리바르뿐이었다.

 

시몬 볼리바르.

원래 산 마르틴은 과야낄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볼리바르의 수하인 26세의 청년장교 안토니오 수크레(Antonio Jose de Sucre)가 이미 점령을 한 상태였다. 볼리바르는 과야낄을 그란 콜롬비아에 포함시켰고 과야낄에서 그란 콜롬비아 대통령의 자격으로 산 마르틴을 맞았다. 후세에 과야낄 회동(Conferencia de Guayaquil)이라 명명된 이 모임에서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페루 고원에 있는 총독군을 공격하기 위한 병력지원을 요청하였다. 볼리바르는 원론적으로는 동의하였지만 산 마르틴이 기대하는 만큼 많은 병력을 주려 하지 않았다. 볼리바르의 반응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자 산 마르틴은 심지어 페루원정 총사령관직을 볼리바르에게 제안하였고 자신은 그 지휘를 받겠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임을 안 볼리바르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산 마르틴인 페루를 입헌군주제 국가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하였지만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던 볼리바르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에 왕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결국 산 마르틴은 자신이 원하는 것(전폭 지원)에 대한 확답을 얻지 못한체 그날 저녁 볼리바르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큰 꿈이 좌절되었다는 생각에 산 마르틴은 도무지 연회가 즐겁지 않았고 술도 하지 않고 춤도 추지 않은 체 그날 밤 자신의 배로 돌아간다. 그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바로 산티아고로 향한다. 그리고 산티아고의 상황 역시 혼란스런 것을 목격하고는 가족을 데리고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남미의 독립 영웅이 스스로 전쟁을 포기한 것이다. 이제 싸움은 온전히 볼리바르의 것이었다.

어찌보면 에스파냐로서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1823년의 전황은 일단 왕당파에게 그다지 불리하지 않았다. 이해 처음 전투은 세로 데 파스코(Cerro de Pasco)에서 벌어졌는데 독립파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카(Ica)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왕당파가 승리하였고 왕당파는 토라타(Torata)와 모케구아(Moquegua)의 전투에서 고원으로 침투하는 독립파 병력을 연이어 격파했다. 그리고 현재 페루-볼리비아 국경인 푸뇨(Puno) 지역의 전투에서 독립군을 완파하면서 현재 볼리비아 행정수도인 라파즈(La Paz)를 점령한다. 산 마르틴이 페루에서 떠난 후 벌어진 정쟁(政爭)도 독립파의 발목을 잡았다. 대통령인 아구에로(Aguero)와 정적인 타글레(Tagle)는 서로를 반역자라고 부르며 페루 정부 내의 혼란을 부추겼다. 아구에로는 국회의원들을 쫓아내려 하였지만 의회는 도리어 그에게 국가반역의 죄를 물어 칠레로 추방하였다. 이에 볼리바르가 본격적으로 페루에 개입하였고 타글레는 아예 왕당파 쪽으로 붙어버린다.

상황이 이러하여 옛 총독인 세르나는 해안쪽으로 다시 진출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 본국 개혁정부의 지지자인 세르나는 본국의 개혁정부가 무너지면서 골수왕당파인 올라네타라는 인물의 공격을 받는다. 결국 유리한 상황에서 에스파냐군내에 내분이 생긴 것이고 왕당파 지역의 경계를 경비하고 있던 병력들이 모두 집안 싸움에 동원되었다. 이에 볼리바르는 그란 콜롬비아군을 몰아 페루고원지대로 본격적으로 진입한다. 세르나의 지휘 하에 왕당파의 내분은 수습되고 고원지대로 진입하고 있던 수크레의 군을 다시 한 번 격파하지만 왕당파들은 내분에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였고 외부지원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하여 볼리바르는 대통령으로서 그란 콜롬비아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야쿠초 전투, 최후의 결정타

 

1824년 12월 9일에 약 8500의 그란 콜롬비아와 페루의 병력이 연합한 소위 ‘연합독립군’이 약 9000정도의 에스파냐 왕당파 병력을 아야쿠초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이 전투에서 왕당군은 약간 오르막에 포진하여 수비하다가 연합군이 진격해오자 오르막을 내려와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외국 용병기병의 역격(逆擊)이 이어지면서 왕당군의 한쪽 날개가 완전히 무너졌고 왕당파 기병이 다시 공격을 하고자 하였으나 연합군 보병의 맹렬한 사격으로 돌격이 좌절되며 일제히 후퇴하였다. 연합군은 정면으로 총공격을 단행하여 전장에 남아있던 왕당군을 일제히 쓸어버린다. 오아당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다가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투가 끝났을 때 독립군의 사상자는 1천도 안되었지만 왕당군은 2천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3500명이 포로로 잡히면서 완전히 붕괴된다.

 

아야쿠초 전투도. 아래쪽이 왕당군, 위쪽이 독립군이다.

아야쿠초의 전투는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최후의 에스파냐 총독이 거느린 병력이 총체적인 붕괴 수준으로 대패한 것이다. 이제 독립군과 싸울만한 세력이나 병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원지대에 몇몇 요새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들도 얼마 가지 않아 독립군에게 소탕되고 만다. 이 때문에 아야쿠초의 전투는 결국 라틴아메리카에서 에스파냐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최종전투로 역사에 기록된다.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노들의 땅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다고 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한 정쟁과 반목이 이어졌고 한때는 독립의 영웅이었던 사람들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하였다. 볼리바르가 세운 그란 콜롬비아는 여러 나라로 쪼개졌고 수십 년 후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브라질이 큰 전쟁을 벌이게 된다. 빈부의 차이도 여전하였고 인디오들과 가난한 자들은 여전히 예전과 다르지 않은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은 큰 의미를 지닌다. 유럽인들이 남북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아 그들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이식하였다.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는 분국(分國)이었고 자신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건설한 아메리카는 수백년이 지나면서 아메리카는 유럽과 서서히 다른 땅이 되어가고 있었고 사람들도 달라지고 있었다. 유럽인들과 다른 정체성이 생겨나면서 유럽인들의 지배와 멸시를 견딜 수 없었다. 분국과 식민지로서 차별이 당연시되는 상황을 고치고 싶었다. 북미의 아메리칸들이 먼저 유러피안들에게 맞서 독립하였다. 아이티의 흑인들도 독립하였다. 이를 중남미의 아메리카노들도 식민지배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목숨을 걸고 싸워 에우로페오(Europeo)들을 몰아냈다.

앵글로 아메리카 또는 라틴 아메리카의 그 누구도 아메리카의 형성에 유럽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과 아메리카는 엄연히 다른 땅이 되었고 에우로페오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가 독립했다고 당장 아메리카가 낙원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아메리카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에우로페오들과 싸워 독립한 것은 단 한 가지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노들의 땅이며 에우로파(Europa)의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고문헌

[The Cambridge History of Latin America Vol. 3], From Independence to 1870; Archibald Alison, [The History of Europe Vol. 14], From the Commencement of the French Revolution to the Restoration of the Bourbons; Timothy E. Anna , [Spain and the Loss of America]; John Charles Chasteen, [Americanos]; Paul K. Davis, [Besieged: 100 Great Sieges from Jericho to Sarajevo], [100 Decisive Battles]; Marc Ferro, [Colonization: A Global History]; J.B.Trend, [Bolivar and the Independence of Spanish Amer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