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장고봉 전투-1938년

구름위 2013. 11. 2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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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봉 전투-1938년

 

근세 동아시아 전사에서 주시해 볼 전투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

두만강 하류 부분은 강 출구까지 아래쪽은 북한, 위쪽은 불과 폭 수키로 미터의 긴 띠 같이 좁은 중국 땅이 두만강을 따라 달린다

그리고 그 긴 띠를 마치 압박하듯 러시아의 영토가 바깥을 에워싸고 있다

그 긴 띠의 중국 땅과 러시아 땅 사이에  해발 150미터의 작은 산이 있다. 두만강 하구를 향하여 한참을 달리다 보면 중국 동포들이 사는 방천이라는 곳에 못 미쳐 좌측에 보인다.
    
                                                     

 

                                           장고봉


나무도 별로 없는 낮은 야산으로서 한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생김새다.

그런데 만주 괴뢰국 시절 이 산 꼭대기 부분의 소속이 불분명했다.
분쟁이 있던 이 산의 정상 부분을 소, 일 양국은 서로 점령하지 않고 그냥 무주공산(無主空山) 형태로 놔두었는데 1938년 7월 12일 소련군이 정상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은 마쓰지마 하사 이하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소련군에게 사격을 받고 도망치다가 마쓰지마가 죽는 등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두만강 하구 전망대에 가보면 중국 측의 기록이 있는데
 영토 분쟁에 대한 설명 없이 소련군이 진지 공사를 하던 중에 일본군 편의대 특무들이 도발해 와 총격을 가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 관동군 사령부는 중국 전선의 한코우 대공세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소련군의 공세에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지만, 관동군 작전부서의 젊은 참모들이 '그 곳은 좁은 지역이니 큰 전투로 비화되지도 않을 것이고 또 소련이 탱크 같은 중무기도 도입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1 개 사단을 동원해서 소련군을 격퇴하기로 했다.



  

                                                                   장고봉 정상의 소련군 


동원한 사단은 조선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고 있었던 19사단이었다.

[일본군내에서는 조선군으로 불렸다.- 일본은 조선에 두 개의 보병 사단을 두었는데
다른 사단은 지금의 서울인 경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은 7월 29일 장고봉 북쪽 사초봉[沙草峰]을 점령하고 
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일본군 19사단이 공격을 했지만 이미 대 규모로 증강된 소련군을 격퇴하지는 못했는데, 7월 31일 19사단 75연대가 성공적인 야습을 가해 소련군(40사단)을 격퇴하였다.


  

                                                                 장고봉 정상에서 본 사진


[전사에 보기 드문 성공적인 야습으로서 연대장이었던 사토오 대좌는 나
중에 무타구치 렌야 중장이 주도했던 인팔 작전 에 사단장으로 참전했었다.

보급도 잘 되지 않았던
이 작전은 결국 공격에 나섰던 일본군의 대비극으로 끝났다.


                                        사토오 대좌
                            태평양 전사에서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다.

사토오 사단장은 작전 중 더 이상 부하를 죽일 수 없어 무단 철수를 했다가 정신병자로 몰려 강제 퇴역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8월에 들어와 소련군이 몇 번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은 중포의 지원도 없이 선전해서 이를 막아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일본군에게 상황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소련군 포로


지지부진한 전황에 격분한 크렘린은 1개 군단과 1개 기계화 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서 8월 6일 대반격을 해왔다.

19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장고봉과 능선에서
버티고는 있었지만,시간이 지나면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반격에 일본 관동군 젊은 참모들의 예상과는 달리 대 부대가
몰려왔고 전차 부대와 포병의 화력이 극심하게 쏟아 졌던 것이다.

  

                          두만강 남안에서 바라본 장고봉. 앞에 선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철도 역인 듯. 


게다가 대규모 소련 항공대까지 동원되어 조선 북쪽 도시들과
두만강 일대의 목표들을 폭격하면서 소련군의 지상 작전을 돕고 있었다.



  

                                                                          소련군


일본군은 러 일 전쟁과 시베리아 출정에서 소련군을 격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심 소련군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차와 전투기를 앞세우고 나타난 소련군의 전투력은
전과 비교를 하기 힘들 만큼 대 변신을 해있었고 결국 19사단은 죽을 힘을 다하여 장고봉을 지켜내기는 했지만 전사자가 525명이 발생했다.[소련군의 전사자는 707명이었다.]

 
                 

                                                 소련 폭격에 파괴 된 농가.  소가 죽어 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 모두 확전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일본의 마쓰오카 외상과 소련 외상 막심 리트비노프 대표가 회담을 계속해서 8월 11일 휴전에 합의하게 된다.


                              소련의 맹폭에 파괴된 민간 가옥

[이 때 현지에서 일본군 대표로 소련 측과 협상한 사람은 조오 대좌이다 .그는 한반도와 가까운 야마구치 현 출신으로 평소 자기 조상이 조선에서 건너왔다는 말을 자주했었다. 그는 1945년 오키나와 방어군 참모장으로 미군과 맞서다가 자결했다.]



장고봉 전투를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이 전투는 일본이 1차 세계 대전 시 칭타오 공략전에서
독일군과 한판 붙은 이래 구미의 군대와 오래간만에 한판 붙은 전투였다.

더구나
양측이 사단 병력을 동원, 4만 여 명이 맞붙은 대규모 전투였다.

장고봉 전투에서 소련군은 1 차 세계 대전 후 크게 변화되고 있던 군 기계화의 새 특징으로서 탱크와 항공기를 대거 선보였는데, 육탄 돌격으로 표현되는 정신력 대신에 기계력이 전투력을 대치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작은 신호가
떴던 것이 바로 장고봉 전투였다.


  
 
              

                                        두만강 건너 조선 쪽에서 본 장고봉. 포화에 덮혀있다. 


그리고 10개월 뒤, 일본군은 장고봉 전투의 교훈을 새기지 못했는지 
몽골의 할힌골 또는 노몬한 이라는 삭막한 초원에서 또 다시 막강 소련군과 정면 대결을 펼쳤다.

장고봉 사건을 확전으로 몰고 간 관동군 작전부서의
참모 요원 쓰지 마사노부 등이 전쟁 확대의 주모자들이었고 독소전의 소련군 총 사령관이었던 쥬코프가 이 노몬한 전투를 지휘했었다.

이 전투에서 항공기, 전차, 트럭 등 소련의 기계적 전투력들이
엄청난 규모로 등장하였는데 장고봉과는 비교가 안되는 대 화력과 병력의 공세였다.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트레이드 마크인 정신력 따위는 기계력 앞에서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깊이 알려주는 경종을 울려주었던 전투였다.




시대의 대 변화를 알리는 신호는 미세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흔한 핸드 폰도 디지털 카메라도 처음에는 하늘 언저리에 조그마하게 나타났던 한조각의 구름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한 여름의 뭉게 구름처럼 엄청나게 확산 되어 세상을 덮고 있다.


 

일본군도 전차가 있었지만 투자와 개발이 되지 않아 성능도 안 좋았고 수량도 적어 구미 군대가 보유한 기갑사단전쟁 말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 사진은 인도네시아의 네델란드 군을 공격하는 일본군 전차.


전쟁의 발달도 이와 같은 양상을 가지고 있다.

1차 세계 대전 시 참호 전투로 변질된 답답한 전황을
타파하고자 영국이 미국의 한 회사가 습지에 쓰기 위해서 개발한 궤도 차량과 유럽 전선에 적합한 장갑을 결합해서 전차를 개발하였고 이 것이 점차 개량되면서 전쟁의 양상이 무섭게 바뀌어 갔다.

장고봉에서 소련이 선보인 전차와 전투기의
대거 투입 작전은 앞으로 먹구름 처럼 전개 될 미래전을 예고하는 작은 조각 구름이었다.

일본의 상식적인 군사 전문가라면
장고봉 전투나 다음에 이어진 노몬한 전투에서  기계력이 등장하는  새로운 전투의 양상을 파악했을 것이고 일본 육군의 대 개혁을 시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력 배양을 하는 동안 소련은 물론 서구 세력과도 충돌하는 상황은 적극 피했을 것이다. [일본 육군 내부에 이런 의견을 가진 간부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군부는 물론  정권까지도 장악하고 있던 쇼와 군벌들은 이런 현실 감각에 무척 둔했다. 현실 인식 부족의 책임은 쇼와 시절에 들어와
등장한 쇼와 군벌들로부터 기인한다.

쇼와 군벌의 주축은 육군대학을 졸업한 수재들로서
군에서 부잣집 도령 같은 특별 대접을 받았다.

엘리트 우대의 환경은 이들 군벌들이 오만한 심리를 가지게 했었고 '
신주불멸론(신의 나라는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이니, '야마도 다마시(일본 민족 고유의 용맹스런 정신)'니, '무적 황군'이니 하는 미신에 심취한 허황된 자만심을 가지게 했다.

그들의 머리는 굳을 대로 굳어져 현실 감각의 유연성은
다 없어져 버리고 매사가 자기들 마음대로 되는 자기 본위에 젖어 버렸으며 정치 맛까지 알아 정권을 넘보았다.




                        

                                                         일본군이 노획한 소련 기관총



쇼와 군벌들은 약한 중국군만 상대하면서 자신들이 영미 군대와 싸울 경우에 대비한 깊은 연구를 하지 않았었다.
[남한을 침공한 김 일성이 미군의 참전에 대비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것과 같다.]



 

           

                                                                        도오조 히데키


군벌의 상류에 일본 수상 도오조 히데키가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정신 전력을 강조해온 인물로 가미소리[면도날]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지만 상황판단에는 융통성이 없었다.
[그의 부하였던 이시와라 간치는 그런 그를
도오조 상등병이라고 불렸다.]

전장의 주역이 된 기계력은 각국의 경제력이 좌우했다.
도오조는 일본의 공업 생산력이 미국의 십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대미 개전을 서둘렀다.

결국 영국, 미국과 격돌이 뻔한 중일 전쟁을 월남[북월 및 남월 진주]까지 확대했다가 영미를 자극한 쇼와 군벌들은 국민들을 이끌고 자멸의 늪으로 빠져 들게 되고 말았다.

일본 군부가 일찌감치 다가올 세상을 알려주는 장고봉 전투와 노몬한 전투를 경각심을 가지고 집중 연구하지 않았던 탓에
일본군이 멸망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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