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전쟁 (美英戰爭) - 1812년 ~ 1814년
미영전쟁은 영국과 그 식민지인 캐나다 및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각 부족들이 미국을 상대로 일으킨 북미 식민지 전쟁으로
일명 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는 <1812년 전쟁>, <제 2차 독립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미국과 영국은 캐나다, 미 동해안,
미국 남부, 대서양, 에리 호스, 온타리오 호수의 영토를 다투었는데 또 두 진영은 인디언으로 대리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미영전쟁의 배경에는 다섯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미국과 영국이 점유했던 토지들은 원래 인디언의 영토였기에 인디언
각 부족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싸울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두번째는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는데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해상봉쇄로 인해 미국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며 영국이 미국선박을 검문하면서 반영기운이 높아졌다.
세번째 이유는 미국 국내에서 백인들이 인디언의 토지를 빼앗으며 확장해 나갔는데 인디언들의 격렬한 저항배경에는 영국의 획책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반영감정은 더욱 높아져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영국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 전쟁에서 인디언들은 미국인의 침략활동에 의한 서부진출을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네번째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은 신대륙에 전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는데, 미국은 이를 노려 영국령 캐나다를 빼앗았다.
다섯번째로는 이 네번째 이유로 인하여 미국의 지휘관들은 전쟁은 금방 끝날 것이라고 낙관했었다. 이에 전쟁의 불똥은 미국이
공세를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1812년 6월 18일에 미국 제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 정권하에 미국의회는 영국에 선전을 포고했다. 외교적인 논쟁이 몇년을
이어서 벌어진 개전이긴 했지만 어느 쪽도 전쟁준비는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에 매달려 있어서 영국육군의
주력은 스페인에서 반도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영국해군은 유럽의 해상봉쇄를 강화중에 있었다.
1812년 6월에 캐나다 주재 영국군은 공식적인 숫자로 6,034명이었는데, 여기에 캐나다 민병이 지원하고 있었다. 미영전쟁의 시기에
영국육군 및 식민지 담당장관은 제 3대 바세스트 백작 헨리 바세스트였다. 개전으로부터 2년간,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군대를 보강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 총사령관인 조지 프레보스트 중장은 방어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1814년이 되자 전쟁경험이 많던 25,000명 이상의 대규모 증원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보스트의 뉴욕 침공은 플렛츠버그
전투에서 대패하며 좌절되었다. 또 남부의 루이지애나 침공도 뉴올리언즈 전투에서 미군에게 반격당했다. 한편 미국은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는데 매디슨 대통령은 민병이 쉽게 캐나다를 확보하면 그 후 정전교섭이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다.
1812년에 미육군 정규군은 12,000명으로 정해졌다. 미국의회는 육군병력을 35,000명까지확장하는 것을 인정했지만 당시 병력은
지원제였고 급여도 적어 인기가 없었기에 모병에 한계가 있었고 또한 훈련경험이 풍부한 사관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민병은 정규군의
응원을 요청했지만 각 소속 주 이외에서의 종군에는 반대했기에 규율도 그다지 좋다고 볼 수 없고 자신의 지역 외엔 출동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경비를 마련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대륙봉쇄령에 의한 여파도 있었지만 북동부의 민간은행이 전쟁에 반대하면서
중앙은행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의 준비부족과 미육군장관인 윌리엄 유스티스의 지도력 부족으로 인해 유스티스가
경질되기 전까지 미군의 상황은 매우 비참한 지경이었다.
유스티스의 후임자였던 존 암스트롱은 1813년 말에 몬트리올의 점령을 목표로 연대전략을 시도했지만 병참의 파탄과 비협조적이며
싸움이 잦은 지휘관들의 문제 및 훈련부족 병사들로 인해 실패했다. 1814년까지 미육군의 사기와 지도력은 그다지 개선되지 못해서
수도인 워싱턴이 방화당하면서 존 암스트롱은 사직하고 말았다. 이에 후임 육군장관인 제임스 먼로가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기 전에
전쟁은 끝났다.
미국의 전쟁수행은 특히 반전론의 목소리가 높았던 뉴잉글랜드에서 인기가 없었다. 뉴잉글랜드 민병은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못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뉴잉글랜드는 미합중국에서 탈퇴하겠다는 위협도 해서, 영국은 이 분열을 즉석에서 이용해 해상봉쇄를
남부의 항구로 한정하여 밀무역을 권장했다.
미영전쟁은 주로 3개의 전선에서 일어났는데 모두 인디언의 영토여서 지역 인디언들이 미영 양진영의 항쟁에 휘말려 학살당하기도 했다.
첫번째 전장인 오대호 주변과 캐나다에서 미국은 영국령 캐나다의 탈취를 노려 캐나다 영내로 침공했다. 에리 호수, 온타리오 호수를
비롯해 어퍼 캐나다의 제압엔 성공했지만 세인트 로렌스 강의 수운을 장악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몬트리올과 퀘벡의 공략은 실패해
로어 캐나다의 제압은 불발로 끝났다. 이리하여 미국은 캐나다 침공야망을 접었다.
전쟁 전에 조지 워싱턴은 이곳을 본거지로 한 일로코이족 학살을 지휘했는데, 이에 반감을 품었던 일로코이족이 영국과 손잡고
미국에 맞선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이었다. 당시 워싱턴은 살해한 일로코이 인디언의 가죽을 벗겨 군대 장식품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크고적은 인디언들의 반항은 식민지인들로 박해를 주도한 미국을 피해 영국으로의 협력으로 미국을 곤란하게 했다.
한편 대서양에선 해전도 일어났었다. 미해군은 영국해군에 비해 전함 숫자와 질도 압도적으로 열세였지만 전쟁초반엔 선전했다.
그러나 유럽대륙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귀추가 대프랑스 동맹측에 유리하게 되자 영국은 해군력을 미국으로 돌렸기 때문에 후반엔
미해군의 활동이 막혀버렸다.
1814년에 영국해군에 의해 수송된 영국육군은 수도인 워싱턴의 직접공략을 위해 미 동해안에 상륙하여 워싱턴 D.C를 함락하고
대통령 관저도 방화해버렸다. 이후 대통령 관저를 보수할 때 불타버린 자국을 은폐하기 위하여 백색 페인트로 칠해버렸기에
대통령 관저는 화이트하우스(백악관)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또 이 전쟁에서 가장 격렬했던 전투는 1814년 9월 13일에 일어난 <맥헨리 요새전투>였다. 마군병사는 독립전쟁 당시에 만들어진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맥헨리 요시에서 농성했다. 당시 볼티모어는 미국 사략선의 근거지였는데 이에 체사픽 만으로 침입한
영국군은 주저없이 함포사격을 가했다. 양군은 25시간에 걸쳐 격전을 벌였는데 정전 후에도 바람에 나부낀 성조기는 전설이 되었다.
이를 본 프랜시스 스코트 키는 성조기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것은 후에 작곡이 되면서 미국의 국가가 되었다.
남부 각 주에서는 토착 인디언들이 미국과 영국의 침략에 대해 봉기했는데, 쇼니족의 젊은 전사인 테크무세의 호응에 의해
미군과의 철저항전을 주장한 크릭족 인디언과의 싸움과 휴전조약시 멕시코만 연안에서의 영국군에 의해 침공된 상태였다.
1814년 3월에 앤드류 잭슨은 테네시주 민병, 체로키족 전사 및 미육군 정규병을 거느리고 남부로 향하여 크릭족 전사단과 싸웠다.
3월 26일에 잭슨과 존 카피 장군은 호슈스 밴드 전투에서 크릭족을 격파하고 크릭족 1,000명 중 800명을 죽였지만 약 2천명의
미군, 체로키족 연합군은 40명의 전사에 154명 부상에 그쳤다. 잭슨군은 살아남은 크릭족을 추적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크릭족 인디언은 영국측의 지원을 받았기에 많은 역사가들은 크릭족 전쟁을 미영전쟁의 일부로 본다.
잭슨은 죽인 인디언의 코르 베어낸 후 전리품으로 삼고 사체에서 가죽을 벗겨 군마의 고삐로 만들었다. 또 여자를 남겨두면 다시
인디언을 낳는다고 하여 아기부터 소녀들을 막론하고 모든 인디언 여자들을 학살했다. 영국군은 9월에 뉴욕 주와 메릴랜드 주에서
전과를 올리지 못해 시점을 남쪽으로 돌려 10,000명 이상의 부대를 태운 함대를 멕시코 만에 파견해 잭슨도 서쪽으로 향하여 1814년 봄에
영국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서로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채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과 영국은 군사,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강화협상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814년 12월 26일에 벨기에에서 간(Ghent)에서 간 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과 영국은 강화하여 미영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 후, 앤드류 잭슨이 이끄는 민병군이 뉴올리언즈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이것은 당시, 신, 구대륙간의 연락에는 배로 몇주나 걸리던 사정도 있어서 강화성립을 알지 못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인디언을 학살하고
영토를 빼앗은 승리로 인해 앤드류 잭슨은 백인들의 영웅이 되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영국군은 뉴올리언즈의 탈환을 꾀했지만
앨라바마의 모빌 마을로 공격을 돌렸다.
미영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1815년 2월 11일에 일어난 보우여 요새 전투였다. 이 때 약 1천명이 넘는 영국군이 370명의 미군수비대를
항복시켰다. 이 때 미국이 받은 공격이후 미국본토는 태국의 공격을 받은 일이 없었는데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 2월 24일에 일본의
伊-17 잠수함이 실시한 캘리포니아 주 산타바바라의 석유저장고 포격이 미본토에 대한 현재 마지막 공격이었다.
(당시 진주만 공습을 받은 하와이는 미 본토가 아니었는데, 1941년에는 주도 아니었다)
한편 미영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디언 부족이 소멸직전까지의 학살로 내몰려 영토를 빼앗기고 산산히 흩어졌다. 인디언을 내 쫓은 후
광대한 토지들은 미국의 소유가 되었다. 간 조약의 체결로 인해 양국은 인디언이 점령한 지역을 모두 원래 국가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합의했다. 미국은 세인트 로렌스 만에서 어업권을 획득하고 부채와 침략재산을 반환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영국은 자유인으로서 종군한 노예를 돌려주는 대신에 현금으로 그 댓가를 받았다. 전쟁 중에 영국상품의 수입이 중지되면서 미국은
경제적인 자립에 나서게 되었는데, 미국 북부를 중심으로 산업과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영전쟁은 정치적인 독립을 거둔
<독립전쟁>과 달리 경제적인 독립을 거두었다는 의미로 <제 2차 독립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출처 : 로버트 레미니 <앤드류 잭슨과 인디언의 전투>
'전쟁.....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헨티나ㆍ브라질 전쟁 (0) | 2013.12.18 |
---|---|
그리스 독립전쟁 (0) | 2013.12.18 |
멕시코 독립전쟁 (0) | 2013.12.18 |
스페인 독립전쟁 (0) | 2013.12.18 |
나폴레옹 전쟁 - 1803년 ~ 1815년 (0) | 2013.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