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아르헨티나ㆍ브라질 전쟁

구름위 2013. 12. 18. 09:51
728x90

아르헨티나ㆍ브라질 전쟁 - 1825년 ~ 1828년 

 

 

1811년에 반다 오리엔탈 주(현재의 우루과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에 의해 이 주는

리오 데 라 플라타 연합주의 연방파 거점이 되어 아르티가스는 연방동맹의 거점으로서 반다 오리엔탈을 동방주(東方州)로

재편했다.

 

그러나 동방주는 1816년부터 포르투갈군의 침공에 의해 1820년에 아르티가스가 타쿠아렘보에서 패배하자 이후 완전히

점령당하고 말았다. 1821년에 동방주는 반(反)아르티가스파의 현지 지역세력의 협력 등으로 포르투갈에 의하여 시스플라티나 주로

개명되어 브라질이 독립한 후엔 브라질 제국 최남부의 주가 되었다.

 

라 플라타 연합주로 망명한 동방주의 사람들은 브라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과 연합주로의 가맹을 원했다. 또 연합주 내부에서도

특히 구 연방동맹을 형성했던 리트랄 3주를 중심으로 한 동방주의 탈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했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부재하여

탈환은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있자 각 주의 협의에 의해 1825년 1월에 기본법이 제정되어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가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을 인정했다.

 

1825년 4월에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 장군은 33명의 동방인을 거느리고 시스플라타 주로 개명된 조국에 잠입하여 게릴라전을

개시했다. 이 싸움은 이후 반다 오리엔탈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어 몬테비데오를 점령할 때엔 그 숫자가 3,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몬테비데오 점령 후 라바예하 장군은 8월에 마누엘 올리베와 플루튜오스 리베라와 함께 독립과 아르헨티나와의 연합을 선언했다.

 

10월에 연합주 의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격노한 브라질은 12월에 이 싸움을 지원한 라 플라타 연합주에 선전을 포고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브라질 제국의 황제였던 돈 페드루 1세는 해군을 이용해 연합주의 몬테비데오 항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을

봉쇄하자 아르헨티나 해군의 기지는 카르멘 데 파타고네스로 이전했다.

 

1827년에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 대해 한층 더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카르멘 데 파타고네스를 습격했지만 이것은 현지주민들의

저항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1825년 11월에 국명을 아르헨티나로 개명한 라 플라타 연합주는 1826년 1월에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수행을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2월에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사로 일했던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전쟁을 지휘하게 했다.

 

리바다비아는 국내안정을 위해 중앙집권헌법을 제정하고 수도령을 발효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를 연방직할의 수도로 정하려

했지만 이 시도는 반감을 샀다. 국내의 많은 주들이 중앙집권주의에 회의적이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를 연방의 수도로 하는 것은

연방에게 항구를 빼앗긴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의 권익을 도로 찾을려는 명분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연방파와 카우딜료를 중심으로 한 통일파의 국내의 모든 계층이 리바다비아의 정책에 반대하였기에

1826년 헌법에서 리바다비아의 시도는 각 주에 의해 거부되었다. 서전에서 브라질군은 비록 패하긴 했지만 아르헨티나 내부의

통일파와 연방파의 대립 등으로 인해 1826년 11월에 몬테비데오를 탈환하고 1827년 1월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공략을 위한 출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827년 2월에 이투잘린고 전투에서 브라질군은 대패하여 이후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국내의

혼란으로 요동쳤는데 리바다비아는 1827년 5월에 전쟁을 유리하게 진행해 나가는 것 보다는 동방주의 브라질 귀속을 인정하는

강화회담을 맺었다.

 

결국 이 굴욕적인 강화협상에 반발한 아르헨티나 각계 계층의 분노로 인해 리바다비아는 6월에 실각하여 8월에 중앙정부는 소멸했다.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지사였던 마누엘 드레고가 전쟁을 계속 벌여나가 라바예하는 승리를 거듭하여 1828년의 화평 직전에는

리베라가 브라질에게 점령당했던 동 미시오네스 주를 점령하였다.

 

전쟁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쌍방에게, 그리고 이 지역에 상업적 우월권을 지니고 있던 영국에게도 큰 피해를 안겼는데 1828년에

영국과 프랑스의 조정에 의해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아르헨티나가 국제하천인 라 플라타 강의 양안을

소유하는 것을 싫어했던 영국의 강한 압력으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제국과 1828년 4월 28일에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고

반다 오리엔탈을 우루과이 동방국(Estado Oriental de Uruguay)으로서 독립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진 우루과이에 연방주의적인 경향이 있던 라바예하는 대통령이 되지 못하여 1830년에 제정된 헌법에 의해

자유주의자이며 친브라질파였던 플루튜오스 리베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완충지대로서 독립한 우루과이였지만

독립 후엔 아르헨티나, 브라질 양국에 지원을 요구한 보수파와 자유파 사이에서 대립이 이어져 이것은 후에 대전쟁과 삼국동맹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 아르헨티나에서도 연방파와 통일파의 대립이 이어져 연방파였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지사인 마누엘 드레고는 동방주의 탈환에

실패한 것에 분노한 병사였던 후안 라바제에 의해 1828년 12월에 살해되어 이후 라바제 자신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주지사로 취임해

연방파와 통일파의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 대립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세력을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속주를 상실하고 대패한 브라질은 경제적인 손실과 더불어 많은 인명이 희생되어 국내 인구숫자가 대폭으로 줄어드는 위기를 맛보았다.

여기에 황제였던 페드루 1세는 시스플라티나주의 상실로 인하여 지지도가 하락했는데 우루과이라는 신생국이 다시 성립하자 결국

퇴위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거둔 것은 영국이었다. 이 전쟁에서 영국은 전략상 중요한 라 플라타 지역에 있어서 자유무역지대를

손에 넣는 것에 성공하여 다소나마 이익을 거둔 셈이었다.

 

 

출처 : 엔리케 멘데스 <우루과이의 역사>

'전쟁.....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차 세계대전 - 1914년 ~ 1918년   (0) 2013.12.18
마지ㆍ마지 반란   (0) 2013.12.18
그리스 독립전쟁   (0) 2013.12.18
인디언 전쟁  (0) 2013.12.18
멕시코 독립전쟁   (0) 201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