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중 전선을 떠난 김포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6월 26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선의 붕괴로 인해 급하게 편성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인민군의 진입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당일 보여 준 육군본부의 대응은 그렇지 않았다. 강원지역의 국군 6사단과 8사단을 제외한 모든 사단, 즉 2사단, 7사단, 수도사단, 3사단 22연대 등 최소 3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의정부 방면에 모두 투입되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김포지역에 투입된 병력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령관 계인주 대령은 명령 없이 전장을 이탈했다. 그의 행동이 군인으로서 적절했는지 여부나 이후 미 정보부대에서 했다는 활동은 심각한 것이겠지만 그를 비난할 의도도 없고 또 이 글의 주요 관심거리도 아니다. 단지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전쟁의 핵심고리 하나를 살펴보는 길목에 그가 있었던 것 뿐이다.
7월 3일 영등포 전선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등장한 최초의 전차는 김포방면에서 진입한 것이었다는 증언을 감안한다면 김포지역에서 벌어진 전투과정에 대해 꼼꼼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사령관의 실종
1950년 6월 28일 공군의 경비사령부가 수원으로 철수하자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오후 2시에 지휘소를 김포비행장으로 옮기고 개화산 진지의 보강에 주력하였다. 이때 계인주 대령이 실종되었다.
『한국전쟁사』(1977)에 따르면, 당시 계인주가 전장을 이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이유와 경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고, 다만 당시 육군특무부대(대장 김창룡 중령)가 1951년 11월 육군총참모장에게 제출한 「계인주건 경위 조사서」에는 ”(계인주 대령은) 1950년 6월 28일 야간열차편으로 가족과 함께 대구에 도착하였다가, 30일 정오에 대구역구내에서 대구헌병대가 대구지구특무대의 협력 하에 헌병대에 구인 중, 미 헌병장교의 요청으로 신병을 인계한 이후 행방불명“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그는 1950년 10월 21일 파면처분을 받았으며 1년 뒤인 1951년 11월 15일 다시 복직되어 미극동사령부 정보처에 파견근무 중 1953년 3월 20일에 예비역에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계인주는 자서전을 통해 7월 초 부산에 도착했으나 헌병에게 연행되어 대구로 압송당했고, 그 뒤 미 8군 사령부가 매아더 사령부가 특명으로 자신을 빼 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참모총장으로부터 김포지구사령관으로 임명받고 김포 현지에 왔으나 정보학교 장병 10여 명이 있을 뿐이어서 이 실상을 보고했더니 우병옥 중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개 중대를 인솔시켜 김포로 보냈으며, 자신은 우중령과 임무를 교대하고 육군본부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계인주는 자신의 회고록 『맥아더 장군과 계인주 대령』에서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 후퇴한 것었고 국방부장관과의 갈등에서 생긴 오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계인주 대령은 누구인가
계인주 대령은 만주군관학교 4기로 일제 말 만주국 육군중좌(중령)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경력에 대해 한국전쟁 발발 전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겸 HID대장(대령)이었으며, 1951년에는 “KLO부대 한국인 사령관”으로 소개하고 있다. 8240부대로도 알려진 KLO(Korea Liaison Office)는 1949년 6월 1일 창설된 맥아더사령부의 한국연락사무소로서 미군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주 임무는 낙하산으로 적진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후방을 교란시키는 간첩활동이었다. 미국대통령으로부터 무공 공로훈장(degree of legionaire)을 받았다는 그는 비록 복권은 되었으나 한국군에서는 여전히 탈영병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자신의 후배는 별 4개까지 초고속 승진하기도 했다.(그런데 그가 받았다는 상이 대통령이 주는 무공훈장인지는 모르겠다. legionaire는 재향군인회 같은 것이라고 한다)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계인주 대령의 회고록에 추천사를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있으면서 선배 계인주를 정보국 차장으로 천거했고, 이후 맥아더에게 발탁되어 인천상륙작전에서 공을 세웠지만 국방장관은 계인주를 탈영병으로 취급했으며 1951년 11월 7일에야 육군본부 특별명령으로 복직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필자가 계인주 대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951년 강화지역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조사할 때였다. 북파공작의 근거지 중 하나였던 서해안지역에서 활동하던 미군 첩보부대들은 ‘해병특공대’, ‘향토방위대’ 등의 이름을 가진 여러 종류의 독립된 정보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한 주민들의 피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행동으로 보아선 오히려 해적이나 깡패집단에 가까워 그 악행은 이승만에게도 보고될 정도였다. KLO부대원들을 모두 폭사시켜버려야 한다는 이승만의 발언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미군과 국군 모두 이들을 통합하여 통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통합된 조직이 바로 KLO였고. 그 부대의 한국인 책임자가 바로 계인주 대령이었던 것이다.
그 이름을 『한국전쟁사』의 전쟁 초기 부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김포지구전투사령관이라는 중요 임무를 받은 그는 이틀 만에 홀로 전선에서 빠져나와 도주 했다. 육군본부는 이를 탈영이라고 했고, 계인주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암살기도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변명했다.
전쟁사의 주장대로라면 부하들은 모두 죽음을 맞았고 사령관만 도망해 살아남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변명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반면, 실제 암살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명쓰고 죽느니 살고 봐야 했다는 변명도 그럴 법 하다. 하지만 자신의 회고록에서조차 6월 25일에서 28일까지의 3일은 국방장관의 암살시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것 이상의 판단을 하지 않고 있다. 전쟁 초기 중요 지구의 사령관이었던 그의 이런 행위는 국방보다 정치상황과 개인의 전망에 더 신경 써야 했던 당시 군 수뇌부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준다.
게다가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계인주 회고록의 추천사를 쓰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이라는 것이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강화와 김포지역에 인민군이 조기 진입하게 된 책임은 다름 아닌 1사단장의 방어작전 때문이었다.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있었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일주일 사이에 모두 4명의 사령관이 교체되었다.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대령 계인주, 6월 28일은 중령 우병옥, 6월 29일은 중령 임충식, 6월 30일부터 대령 최영희였다. 우중령과 임중령은 자결 또는 전사했다.
6월 25일 김포
1950년 6월 25일 개성을 방어하던 1사단(사단장 백선엽) 12연대 2대대와 3대대가 하루를 방어하지 못한 채 후퇴하게 되었다. 3대대는 배편으로 강화앞바다를 지나 후퇴했으며, 2대대는 한강을 건너 김포 하성면 시암리로 후퇴했다. 2대대가 김포로 건너온 때는 오후 7시경이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6월 25일 저녁 7시 장갑차 1개 소대를 월곶면 용강리 강령포에 진입시켰다.
김포와 강화방면으로 2대대와 3대대가 후퇴한 것은 사단장 백선엽이 전쟁 발발 전 수립했던 작전계획에는 없던 것이었다. 백선엽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문산을 중심으로 임진강 방어선을 세울 계획이었다. 백선엽은 계획과 달리 병력이 분산됨에 따라 원래 작전계획의 문산방어선도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김포로 후퇴한 병력 역시 명확한 행동지침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개성과 연백을 포기하는 백선엽의 작전계획은 한강 건너 편의 김포와 강화지역을 방기하는 것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백선엽 역시 이러한 반대 의견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비판의 핵심은 의정부와 문산 방면에서 인민군을 저지한다고 하여도 김포지역을 통해 진입한 인민군이 영등포 등 한강 이남을 점령할 경우 국군은 모두 포위되는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춘천까지 하루 만에 점령당했다면 서쪽 김포방면과 동쪽 하남방면에서 밀려 온 인민군에 의해 국군은 완전히 포위당할 위험에 놓였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김포전선을 돌파당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상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날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에서 해임되면서 육군 (남산)정보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은 계인주는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한 상태였다. 고등군사반은 재교육을 받는 곳이었으며, 남산학교의 교장업무는 실제 최복수 중령이 대행하고 있었다.
김포지구사령부의 급편과 인민군의 진입
전쟁 발발 당시 김포비행장 주변에는 육군 정보학교인 남산학교(교장 계인주 대령)와 공병학교(교장 엄홍섭 중령) 등이 있었으나 교육기관이나 지원부대였으므로 실질적인 전투력에 있어서는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다고 평가된다.
육군본부는 6월 26일 아침 구체적인 검토 없이 남산학교를 중심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급히 개편하는 임시방편의 조치를 취했다.(7월 3일 해체-753쪽) 사령관으로는 남산학교 교장 계인주 대령이 사령관이 되어 김포방어의 책임을 맡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계인주는 시흥 보병학교에 있을 때였다.
당시 전투사령부에 소속된 부대는 1사단 12연대 일부, 독립기갑연대 일부, 보국대대 일부, 보병학교 후보생 일부, 공병학교 학생 일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산학교의 장교 10여 명과 사병 30여 명이 골간이었다. 당시 계인주는 정보국의 정보통이어서 혼성부대의 지휘능력에 의문, 통신수단도 없는 상태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6월 25일 개성을 점령한 인민군 6사단 일부 병력은 6월 26일 오후 4시부터 개성 남쪽의 한강을 통해 강화 갑곶과 김포 조강리, 용강리로 진입을 시도했다. 국군은 조강리로 진입하는 인민군의 초기 시도를 막아냈으나 갑곶의 전선은 돌파 당했으며 밤에는 용강리로 이동하는 야포를 막지 못했다.
김포에 인민군 진입하다
전날 김포 진입에 실패한 인민군은 6월 27일 새벽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강령포 도하를 본격화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국군은 통진읍으로 후퇴했다. 인민군은 낮에 김포평야까지 진출했다. 김포지역 개화산까지 점령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김포공항 북쪽의 한강변을 방어하던 국군이 접근하던 피아를 알 수 없는 군인들에게 수류탄 공격으로 가한 것 외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한편, 6월 27일에는 육군본부 등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하던 중이었으므로 김포지역의 급박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포 상실
6월 28일 인민군은 새벽 6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김포 북쪽으로는 일부가 한강을 건너 배위에서 박격포 공격을 가하며 상륙했고, 서쪽으로는 한강하구를 건넌 것으로 보이는 2대의 전차까지 앞세우며 김포읍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한편, 한강인도교의 폭파 소식으로 전의를 상실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오전 11시 김포읍에서 후퇴하여 부평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철수명령이 전달되기 전에 이미 전선은 붕괴되고 있었다고 하며, 인민군은 낮 12시에 김포읍에 진입했다.
오후 1시 김포비행장의 공군 경비사령부가 수원으로 철수하자 오후 2시 전투사령부가 지휘소를 비행장으로 옮기고 개화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날이 저물고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전투사령부는 비행장을 포기하고 보급품을 소각한 후 소사읍사무소로 지휘소를 이동했다. 이어 시흥전투사령부는 우병옥 중령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편 당시 김포지역을 점령한 인민군은 1개 연대규모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이산포와 행주나루터로 후퇴하는 국군 1사단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들 역시 인민군 지휘부와의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다.
결론에 대신하여-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처절한 패배는 교훈으로 남겨진다. 하지만 비열한 패배는 망각의 대상이 된다. 한국전쟁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비교적 방어에 성공적이었던 강원지역 최전방에 비해 경기북부지역의 전선은 자세히 되새기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옹진반도의 17연대(연대장 백인엽)는 전쟁 발발 직후 몇 시간 만에 후퇴했으며 개성의 1사단(사단장 백선엽) 12연대 역시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그날 저녁에 모두 한강을 건너 철수했다. 17연대는 원래 작전이 그랬다고 하지만 1사단의 경우는 달랐다. 국군을 추격하던 인민군은 6월 26일 이미 한강을 건너 강화와 김포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이를 막지 못한다면 고립된 국군은 전멸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춘천에서 3일을 견딘 국군 6사단을 높이 평가한다. 그렇다면 하루도 견디지 못한 개성의 1사단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춘천의 전투를 재평가하자는 흐름조차 최근의 일이다. 개성의 전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다. 전쟁 초기 과정에 대한 모든 오해와 편견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계인주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자신을 암살 또는 사지로 몰아 가려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전선 이탈행위를 정당화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근거 중 하나로 들고 있는 전쟁 전 육군보병학교 고급군사과정에는 백선엽, 최영희 등 핵심 간부들이 함께 교육과정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재교육을 빌미로 한 제거과정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신성모 국방장관이 우병옥 중령으로 하여금 자신을 살해케 하려 했다는 주장 역시 중대한 전투지구를 책임지다 자결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아 암살단을 이끌고 온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계인주의 주장처럼 김포지구사령부에 병사가 10여 명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인민군을 상대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즉 정황으로 보아 계인주에게는 ‘가서 죽으라’는 말로 들렸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실제 6월 28일 1사단장 백선엽에게 김포지구를 맡아달라고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이 명령했으나(백선엽은 이를 ‘부탁’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군 위계상 적절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부대 정비를 이유로 거절하던 상황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김포지구의 전선 붕괴에는 1사단 12연대의 책임이 컸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군 1사단 12연대의 개성방어 실패에 따라 6월 26일 방어선은 김포로 내려왔다.
․육군본부는 급하게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구성하면서 사령관을 시흥에 있던 정보학교 교장 계인주대령을 임명했다.
․국방장관의 간첩혐의를 조사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은 계인주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중에 내려진 명령인데다가 실제 방어 병력은 전혀 없다고 느꼈으므로 전선을 이탈했다.
․전투사령부는 6월 28일까지 김포지역을 방어했다.
․김포를 점령한 인민군은 영등포 방면과 인천 방면을 향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분명하지 않다. 7월 3일 인천이 이들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같은 날 영등포 전선에도 나타났다.
한편, 인천지역의 경찰은 6월 28일 새벽 3시에 철수명령을 받고 LST 801함에 군인가족, 군속들과 함께 아침 9시에 인천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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