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군의 후퇴와 국민보도연맹사건 1(배경)|한국전쟁

구름위 2013. 11. 2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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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전선에서부터 후퇴하던 국군은 인민군의 전진을 막기 위해 소위 ‘지연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진지를 구축하여 인민군의 진격속도를 늦춘 후 후퇴하여 다시 진지를 구축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집단학살 당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민간인학살 사건인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바로 이때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전투하기도 바빴던 군인들이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생명을 노리는 적군을 앞에 두고 민간인 학살에 전념할 수 없었을테니까. 그런데 전투하던 뒤편 어디선가 학살당하는 민간인들이 있었다. 전투하던 군인들은 총알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군대가 민간인들을 죽일 총알은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들을 학살한 군인들은 누구였고, 이들이 주민들을 학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낙동강전선으로 후퇴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고개의 전투를 치른 후 비록 금강과 대전에서 전투가 준비되었지만 아직 미군의 전선배치는 충분하지 않았다. 국군 17연대가 아주 낙동강을 넘어 후퇴한 것으로 봐서 미 국방부 참모 커티스가 작성했다는 우발계획 SL-17의 시나리오는 당시로서는 매우 널리 알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각 사단의 후퇴경로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전쟁의 우연성과 필연성, 또는 의도성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작업임이 분명하다. 모든 것이 의도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커다란 흐름을 이해하고 있는 자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대략이나마 살펴 볼 수 있다.

 

미 지상군의 한국전쟁 참전 이후 국군과 미군의 후퇴는 일정한 도식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즉, 북에서 후퇴해 내려오는 국군은 낙동강 전선 북쪽으로, 오산과 대전에서 후퇴하는 미군과 부산항을 통해 상륙한 미군은 낙동강 전선 서쪽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구도는 7월 5일 스미스부대의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부터 결정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경부국도는 미군이 담당하고 그 동쪽은 국군이 담당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는 낙동강전선의 시나리오와 일치한다.

 

그런데, 국군과 미군의 후퇴 과정을 전쟁 초기부터 자세히 고찰해 보면 특이한 것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서해안지역의 방어와 관련된 것인데, 국군 1사단과 17연대가 38선의 서부지역에서 후퇴한 이래 강화와 김포, 인천을 비롯하여 서산, 당진, 보령, 서천을 거치면서 군산에 이르기까지 국군 해병대 일부 외에 국군에 의한 방어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런 현상은 호남지역 전역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8사단이 방어하던 동해안 지역이 3사단으로 이어지면서 활동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후퇴하는 국군과 민간인 학살

 

 

사단의 일부가 서울 전선으로 파견되었던 국군 3사단과 해체되어 새로 편재된 7사단과 5사단, 2사단을 제외하고, 38선 최전방에서부터 후퇴했던 국군 8사단, 6사단, 수도사단, 1사단 등의 후퇴경로를 추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후퇴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이 주도하거나 개입했던 민간인학살사건이 드러난다

 

군의 후퇴와 국민보도연맹사건 2(국군의 경우)|

국군 8사단

 

후퇴 경로 : 강릉-제천-대구-단양-영주-안동-낙동강전선

 

강릉지역의 국군 8사단은 6월 25일 새벽 6시 사단장이 소집한 작전회의에서 사단 방어계획에 따라 증원부대 도착까지 최대한 지구전을 펴며, 침공을 저지하는 즉시 반격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어렵게 연락된 육군본부로부터 강릉보다 서울방어가 문제라는 답을 듣게 되었다. 명령에 따라 춘천에 있던 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원주로 이동하던 8사단은 제천으로 방향을 돌렸다. 7월 2일 제천으로 이동하해 있던 중 7월 4일 오후 ‘8사단은 대구로 이동할 것’이라는 육본의 전문작전명령을 받고 다소 의심스럽긴 했으나 어쨌든 육군본부의 명령인지라 사단장에게 전달했다. 이에 사단장은 사단에 대구철수 명령을 내리고 본인은 대전에 있는 육군본부로 명령확인을 위해 달려갔다. 사단의 선발대가 대구에 도착할 무렵 사단장은 육군본부로부터 그러한 명령을 하달한 사실이 없으니 즉각 제천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6일 사단은 다시 북상했으나 제천이 이미 인민군이 점령하였으므로 단양에 주둔해야 했다.

8사단이 단양에 머무르는 동안인 7월 6일 단양 경계부근인 제천 한수면 동창리 주민 50여 명이 8사단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제천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50여 명이 8사단 헌병대에 넘겨진 사실은 노근리 파일에서도 확인된다.

8사단은 7월 8일 전투 후 12일 죽령을 거쳐 영주로 후퇴했으며, 풍기를 중심으로 V자형 진지를 만들었다. 17일까지 전투는 없었지만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예천지역에서는 예비검속당한 주민 150여 명이 백골부대 1개 소대 군인들에 의해 예천읍 고평나들, 개포면 경진나들, 용궁면 원당고개에서 총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백골부대’라고 불린 국군의 소속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사건 당시 풍기 인접지역인 예천에 국군은 8사단이, 문경에는 6사단이 있었으므로 이 부대는 8사단 또는 6사단 소속의 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8사단은 영주 풍기에서 7월 18일과 19일 전투를 치른 후 7월 29일 안동으로 후퇴하였다. 7월 31일에는 미8군으로부터 낙동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8월 1일 철수를 시작했으며, 이후 낙동강전선에서 영천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국군 8사단이 영천지역을 담당하는 동안 8월 7일부터 11일까지 예비검속된 주민 400여 명이 임고면 수성리 골짜기에서 기관총에 의해 희생당했다.

 

국군 6사단

 

후퇴경로 : 춘천-홍천-원주-충주-보은-문경-낙동강전선

 

춘천-홍천지역의 국군 6사단은 3일 동안 방어전투를 치른 후, 7월 1일 원주 동남쪽 신림고개에서, 7월 2일에는 곤지암리에서 전투를 한 후 충주로 후퇴했다. 이 시기에 사단 주력이 전투에 전력을 기울이는 동안 헌병대가 후방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월 28일 국군 6사단 헌병대는 후퇴하면서 횡성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100여 명을 추동리 고내미 고개와 곡교리 민가에서 학살했다. 6월 30일에는 6사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에 의해 강원도 원주형무소의 수감자 18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7월 1일에는 국군 6사단 헌병대에 의해 여주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살해당헀다.

이후 국군 6사단은 7월 3일 충주에 집결하였다. 사단지휘부는 증평에 있었고, 7월 7일까지 적정이 없어 전투는 없었다. 하지만 전투가 없던 7월 3일부터 5일사이에, 장호원을 거쳐 후퇴했던 6사단 헌병대가 충주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일으켰다. 제6사단 제7연대 헌병 10여 명은 후퇴하며 충주경찰서에 들어와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경찰들은 명령에 따라 동네마다 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으며, 소집된 사람들은 헌병에게 이끌려 호암동 싸리고개로 이송되어 집단희생당했다. 당시 현장에서 최은용 등 3명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충주군 살미면에서는 73명이 희생됐다. 시신을 직접 수습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쐈으며 학살현장에는 100여 구가 넘는 시신이 쌓여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김삼룡의 고향이 엄정면이었기 때문에 좌익단체 가입자도 많았고 그런 이유로 희생된 보도연맹원도 많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음성에 주둔하던 제6사단 19연대가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음성경찰서 근무자 증언에 따르면, 중령 1명과 특수대원으로 보이는 군인이 쌍권총을 들고 경찰서로 들어와 음성군내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7월 5일부터 음성군 국민보도연맹원이 학살되기 시작했다. 대소지서에서 소집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7월 5일 진천군 만승면 조리방죽에서, 원남지서에 소집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7월 8일 원남면 문암리 백마령 고개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이외에 소이면 여인구가 음성군 소이면 ‘가막골’에서 희생되었다.


7월 8일 전투가 다시 시작되고 인민군이 충주를 점령하자 사단사령부는 9일 보은으로 후퇴했다가 육군본부의 명령에 의해 10일 문경으로 이동하여 다가 올 전투를 준비하였다. 7월 9일경 괴산에 주둔하던 국군 6사단 7연대 헌병대가 괴산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켰다. 괴산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7월 7일경 증평읍 양조장과 양곡창고, 도안국민학교로, 청원군 북이국민학교에, 괴산경찰서 유치장 등에 구금되었다가 7월 9일경 제6사단 제7연대 헌병대와 CIC,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희생 장소는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괴산군 감물면 공동묘지,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솔재티, 괴산군 괴산면 남산 등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희생자는 8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에서는 1950년 7월 9일 괴산경찰서 유치장과 청원군 북이초등학교, 증평읍 양조장 등에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북이국민학교에는 청원군 주민들을 비롯하여 칠성면, 도안면 주민들이 있었으며, 증평읍 양조장 등에는 증평읍 주민을 비롯하여 사리면 주민들이 있었다. 당시 옥녀봉에는 헌병이 구덩이를 판 채 총살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총살은 4시간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괴산뿐 아니라 청주, 청원지역에서도 끌려 온 주민들이 있었으므로 옥녀봉에서 사망한 희생자만 800여 명에 이른다.


청원군 북이면 주민들은 1950년 7월 2일에서 8일 사이 북이국민학교 교실에 감금되었다. 소집 당일 저녁, 경찰들은 간부를 제외한 보도연맹원들에게 ‘밥 먹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며 내보내기도 했다. 다시 소집된 주민들은 1950년 7월 9일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등에서 희생되었다. 청원군 오창면에서는 1950년 7월 10일 오창지서와 오창창고 등에 갇혀 있던 10여 명의 주민들이 수도사단 헌병대에 의해 사살 또는 폭행치사 당했다. 1950년 7월 11일에는 오창창고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300여 명의 주민들이 제6사단 19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희생당했다.

문경에서는 6사단이 진입한 7월 10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7월 10일에는 농암면 뭉우리재에서, 7월 14일에는 호서남면 유곡리에서, 7월 16일에는 영순면 김용리 등에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7월 14일 괴산군 연풍면 이화령에서 공방전이 시작되어 15일 소규모 전투로 이어졌으며, 16일 인민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문경에서 후퇴하였다. 문경에서 상주로 후퇴한 6사단은 7월 17일부터 23일까지 상주경찰서에 감금된 주민들을 낙동면 성골과 구잠리 부치데이 골짜기에서 학살했다.

이후 6사단은 7월 19일부터 7월 28일까지 문경 남쪽의 점촌, 유곡, 은성 부근에서 전투를 치렀다.

 

수도사단, 2사단, 7사단

 

후퇴경로 " 포천-서울-진천-오창-청원-보은-안동-청송-낙동강전선(의성)

 

포천-동두천-의정부지역에서는 7사단과 2사단, 수도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 25일과 26일 방어전투를 치렀다. 서울이 함락된 후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후퇴했다가 7월 3일 다시 후퇴하였다.

전쟁과 동시인 1950년 6월 25일 예비검속 명령이 전국에 내려졌으며, 6월 26일 김삼룡과 이주하가 총살당했다. 6월 27일과 28일 서빙고 강변에서 200여 명의 형무소 재소자가 총살당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수도사단 군인들은 마포형무소에서 나오는 재소자들을 발견하고 모두 총살했다고 한다.

7월 6일부터 11일까지 진천에 2사단이 주둔했는데, 이들이 주둔하고 있는 동안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진천에서는 일찍 소집된 보도연맹 간부 10여 명이 1950년 6월 30일 진천면 성석리 할미성 고개에서 사석출장소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얼마 후 제2사단 16연대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진천경찰서로 들어왔다. 이들은 “그냥 두고 내려가면 보도연맹원들이 일어나 피해를 볼테니 모두 처리하고 가야한다. 군이 처리할테니 색출은 경찰이 하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때 연행된 주민들은 진천면 성석리 ‘할미성 고개’와 문백면 옥성리 ‘말부리 고개’, 덕산면 신척리 ‘구시울 골짜기’ 등에서 학살당했다. 덕산면 주민 10여 명은 1950년 7월 13일 덕산면 신척리 구시울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백곡면 주민들도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진천경찰서 수사과 근무자 김씨(김수동)에 의하면 경찰과 국군은 7~8명이 한 조를 이루어 직접 색출한 후 마을 인근에서 총살했다고 한다.

 

수도사단은 12일 청원군 오창읍 화산리와 오근장의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며, 13일에는 미호천에서 전투를 치렀다.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청원군 남일면에서 전투를 치르고 보은으로 후퇴하였다.
청주 청원지역의 주민 300여 명이 1950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오창창고 등에서 수도사단 군인과 6사단 19연대 헌병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미리 보은으로 후퇴해 있던 수도사단 군인 일부는 7월 15일 보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켰다. 보은에는 전쟁 직후 G2 군인 10여 명이 진입하여 수리조합 사무실에 주둔하였다. 이들은 보은 보도연맹사무실에서 명단을 받아 주민들을 연행하였다.(사찰계 근무자 증언) 1950년 7월 15일 산외지서에 감금되었던 20여 명, 보은경찰서에 감금되었던 50여 명의 산외면, 내북면 주민들이 내북면 서지리에서 희생되었다. 같은 날 보은면, 수한면 보도연맹원 50여 명이 보은면 길상리 미륵뱅이에서 희생되었다. 마로면 보도연맹원 20여 명은 마로지서로 연행돼 관기리 야산에서 희생되었다.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줄밭골’에서는 탄부면 예비검속자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보은에 주둔하던 국군은 수도사단이었다. 6사단은 7월 10일 문경으로 후퇴했으므로 사건 당시 보은에 있던 국군은 수도사단으로 판단된다.

7월 22일부터 30일 사이에 안동에 있던 2사단 25연대 소속 군인들은 안동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 200여 명, 안동경찰서 유치장 등에 갇혀 있던 170여 명의 주민들을 수상동 한티재, 성곡리 계곡 등에서 살해했다. 국군 8사단이 29일에 안동으로 후퇴했다고 하므로 이후 사건의 가해자가 8사단이 관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성에서는 주민 50여 명이 7월 24일 군인들에 의해 연행당한 후 비안면 짝두골에서 총살당했다. 사건이 발생한 7월 24일경 의성지역에는 수도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사단은 7월 27일 청송에 진지를 구축했으며, 8월 2일 사단지휘부는 안동 길안면에 자리했다. 한편, 상주에서는 은척면 봉중리 안영기 외 4명이 후퇴하던 국군에 의해 7월 31일 총살당했다. 후퇴하던 수도사단 18연대 군인들이 1950년 7월 30일 하루 동안 은척면 봉중리에 주둔하였는데, 술도가집 아들로서 당시 반정부활동을 했다고 의심받던 이의상을 자택에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 집 일꾼들이었던 안영기 외 3명이 이의상의 무고함을 진정하기 위해 군인들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들을 만난 군인들은 “너희들도 모두 같은 놈들이다”라고 하면서 모두 마을입구 성황당 부근 건물에 감금하였으며, 성황당 나무 아래에서 취조한다며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늦은 밤까지 고문하던 군인들은 다음 날 새벽 마을을 떠나면서 이들 5명을 끌고 갔는데, 대구 방면으로 가는 길인 낙동강 상류 은척면 하홀리 소갯골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했다.

 

청송에서는 현서면 권극생 등 주민들이 7월 말 부동면 지동고개 인근, 사곡면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청송에 백골부대(수도사단 18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은 8월 4일 야간 습격을 받았으며 5일 전선을 돌파당한 후 8월 6일 의성으로 후퇴했다.

 

국군 1사단

 

후퇴경로 : 개성-파주-고양-시흥-음성-상주-낙동강전선

 

1사단이 후퇴과정에서 민간인학살을 저질렀다는 증언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1사단의 학살은 주로 미군의 예비사단으로 속리산 부근 토벌작전을 했던 9월 말 10월 초 시기에 나타난다.

국군 3사단

 

울진에서는 울진경찰서와 국군 3사단 23연대에 의해 7월 5일 ‘매화 전시골’, ‘후포 박골’, ‘죽변 후릿개’ 등에서 학살이 있었다. 매화지서와 국군은 7월 5일 원남면 주민 5~6명을 매화 전시골에서 총살했다. 같은 날 원남면과 기성면의 주민 24명이 오산지서와 기성지서 경찰에 의해 연행된 후 국군 3사단 23연대 군인에 의해 후포 박골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날 원남면 일부과 울진면 주민 8명은 묵호육전대 소속 해병대에 의해 죽변 후릿개에서 총살되었다.
영덕에서는 영해면, 창수면 보도연맹원 80여 명이 1950년 7월 8일 국군 3사단 23연대에 의해 어티재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강구지서에 구금되었던 30여 명의 보도연맹원은 7월 14일 강구지서 경찰에 의해 강구 앞바다에서 수장당했고, 영덕경찰서로 이송된 16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영덕경찰서 소속 경찰과 국군 3사단 23연대(김종원 부대) 군인에 의해 뫼골에서 총살당했다.

 

대구에는 1950년 7월 8일 계엄령 후 대구형무소에는 3사단 22연대 소속의 헌병대원 20여 명이 주둔했다. 대구와 경산 등 인근지역에서 연행된 주민들이 대구형무소 등에 감금되었다가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대구지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1,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희생 장소는 경산코발트광산, 가창골짜기 등이었다.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주로 경산 폐 코발트광산과 달성군 가창골에서 희생되었으며, 이외에 수성구 수성 못 인근 야산, 본리동, 송현동, 팔공산, 논공읍 남리 석밭 등에서도 희생되었음이 확인된다.

 

군의 후퇴와 국민보도연맹사건 3(미군과 국군17연대의 경우)|

오산 안성 평택 천안 예산 연기(7월 3일 ~ 7월 12일)

 

스미스부대가 죽미령에서 전투하던 때인 7월 5일 평택부근에서는 미 34연대가 교전했다.

이 시기에 오산에서는 103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안성에서는 삼죽면 가현리 이선재 등 30~40명의 주민들이 안성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7월 5일 미양면 신기리 소머리고개에서 총살되었다. 80여 명이 희생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인민군은 7월 6일 안성에 진입했다.

 

평택에서는 1950년 6월 27~28일 경 평택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1950년 7월 초 평택군 팽성면 안정리 소재 부용산에서 50여 명의 다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총살되었다.

 

7월 6일 미 34연대는 천안으로 후퇴했으며, 7월 7일에는 천안에서 공방전이 벌어졌다. 7월 8일 천안이 점령당하고, 7월 9일과 10일 전선은 연기군 전의면으로 내려왔다. 11일과 12일 금강 이남인 공주로 후퇴하였고, 미24사단은 12일부터 금강선 저지에 들어갔다.

 

7월 8일에는 연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17연대가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일으켰다. 조치원경찰서로 이송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8일 수멍재 ‘은고개’와 ‘비성골’에서 학살당헀다. 경찰은 비성골 산등성 부근에 호를 60여 미터 길이로 팠으며, 비성골에서 600여 미터 떨어진 ‘은고개’에도 학살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비성골 참호에서 꿇어앉힌 채 사살당한 시신 100여 구가 발견되었다. 당시 후퇴하던 수도사단 제17연대(연대본부는 공주에 있었다) 군인들도 피난민 중 보도연맹원들을 색출하여 수멍재 등에서 총살했다고 증언하였다. 조치원의 희생자는 158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1950년 7월 10일 오후 5시 충남 연기군 서면 월하리에 3~4명의 미군이 나타나 피난하지 않고 남아 있던 8명의 주민을 끌어내 트럭에 싣고 1km떨어진 월하교로 갔다. 미군은 주민들을 하천 둑으로 내려가게 한 후 다리 위에서 총을 쏴 4명이 사망하고 4명은 부상당했다.

 

1950년 7월 11일 아침 7시 미 24사단 34연대에 배속된 국군 1기갑연대 기병대대 6중대(중대장 박익균 朴翊均 중위) 2개 소대가 공주를 출발하여 예산으로 가던 중 ‘인민군 환영대회장’인 유구국민학교에 있던 인민군 6사단 소속 2개 중대를 습격하여 60여 명을 사살했으며, 국군 피해는 1명 부상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전투결과는 인민군 2개 중대 병력을 2개 소대가 공격한 것으로 보기에는 상식과 거리가 너무 멀다. 인민군은 7월 12일 예산에 진입했고, 7월 11일은 예산과 공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가장 많이 희생된 날이므로 유구국민학교에 모여 있던 2개 중대 500여 명은 인민군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에 따르면, 인민군 6사단이 유구에 도착한 것은 7월 12일 아침 6시였다고 한다.

 

공주 (7월 13일 ~ 16일)

 

공주지역에서는 미 제24사단(제19연대, 제34연대)이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주둔했다. 7월 13일은 전투가 없었으나 14일부터 포격과 함께 인민군 도하가 시작되어 전선이 돌파당했다. 7월 15일 대평리(현 연기군 금남면 용포리)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16일 금강선이 붕괴되어 대전으로 철수했다.

 

공주경찰서 유치장과 공주형무소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은 7월 9일에서 11일 사이에 공주시 상왕동 왕촌 살구쟁이와 의당면 청룡리 도살장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청년방위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CIC의 지휘 하에 청년방위대가 왕촌현장의 구덩이를 판 것이라고 한다. 공주지역에서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은 250명에서 300명 정도로 추산되며 상왕동 왕촌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는 305구인데 아직 발굴이 덜 된 곳까지 합산하면 현장의 희생자는 최소 600여 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대전 영동(7월 17일 ~ 20일)

 

대전지역으로 철수한 미 제24사단은 7월 17일부터 방어전투를 준비했으며 7월 20일 후퇴했다.

이 시기에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대전경찰서, 유성경찰서, 대전형무소 등에 며칠 동안 감금되었으며 일부는 바로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현장으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대전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충남의 여러 지역에서 온 경우였다. 대전에서는 7월 1일경부터 경찰의 후퇴시기인 7월 17일경까지 대전시 동구 산내면 낭월동에서 대전경찰서 경찰 및 육군형무소 헌병대, 제2사단 헌병대에게 집단희생되었다. 헌병과 경찰은 희생자들을 구덩이 앞에 엎드리게 하고⃇뒤에서 총을 쏘았다. 당시 제2사단 5연대 헌병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산내면 골령골 사건을 지휘한 자는 헌병대 사령관 송요찬 대령이었으며 재소자보다 보도연맹원이 더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미군 CIC보고서를 기준으로 보아 형무소 정치범을 제외한 희생자 수는 1,4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대전형무소의 재소자들도 이 시기에 희생되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1,800~7,000명이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충남지구CIC, 2사단 헌병대, 경찰에 의해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되었다. 첫 번째는 6월 28일부터 30일사이에 산내면 골령골에서 벌어졌는데, 헌병이 처형하듯 총살한 후 50여 명씩 장작더미 위에 올려 화장했으며, 미25사단 CIC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이미 당시 1,40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7월 3일부터 5일의 3일 사이에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는데, 9월 23일 미 육군 정보부의 보고문에는 1950년 7월 첫 주 3일간 1,800여 명의 정치범이 학살당했다고 적고 있다. 세 번째는 7월 6일부터 대전전투 직전인 17일일 사이에 벌어졌는데, 희생자는 주로 이감 온 재소자와 충남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이었으며, 일부나마 이 시기 희생자의 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청주형무소에서 이송된 200여 명, 서산경찰서에서 이송된 보도연맹원 400명이므로 최소 600명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종군기자 필립 딘(Philip Deane)은 1,700명,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은 3,700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상 세 차례에 걸쳐 저질러진 사건을 종합하면, 이 사건 희생자의 수는 4,900~6,900명에 이름을 알 수 있다. 앞의 위닝턴 기자는 전체 희생자 수를 7,000명으로 보고 있다.

 

영동 상주 김천(7월 22일 ~ 31일)

 

영동 상주 김천지역에서는 미 25사단(24연대, 27연대, 35연대)이 7월 22일부터 31일까지 주둔했다.

27연대는 22일 영동 남쪽으로 철수, 23일 당저(영동군 황간면 용암리)에 주둔하면서 25일까지 소규모 전투를 벌였으며, 26일에는 큰 접전은 없었다.

 

영동에서는 대전함락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영동에서는 1950년 7월 18일 충북도경국장으로부터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특무대(CIC) 영동파견대장에게 인계하라는 지시가 영동경찰서장에게 하달되었다. 1950년 7월 19일 오전, 특무대 영동파견대장 김 아무개 일등상사가 경찰서를 방문하여 전황 설명과 함께 서장에게 경찰의 협조를 요청했다. 영동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300여 명의 주민들이 1950년 7월 18부터 20일 사이에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영동읍 설계리 석쟁이재에서 사살되었다. 트럭에 태워져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로 이송된 주민들은 10명씩 99식 소총으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총살 지시는 CIC가 했는데, 주민 10명 씩 1열로 세운 CIC 군인은 “공산당을 지지한다던가 앞으로 개심한다던가 이야기 해라. 네가 1번이니까 너부터 얘기해라”라고 한 후, 손을 위에서 아래로 저으면 뒤에 있던 경찰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노근리에서는 7월 23일 영동에서 후퇴하던 미 1기병사단 7기병연대가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600여 명을 거주지에서 소개시켜 임계리와 안점에 집결시켰다. 미군은 7월 25일 이들을 주곡리를 거쳐 하가리로 몰았다.(젊은 사람들에게는 방공호를 만든다며 흙을 파게 만들었다) 하가리 하천변에서 하룻밤을 지낸 주민들은 미군이 사라진 것을 알고 일부는 마을로 돌아갔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경부국도를 따라 계속 피난했다. 7월 26일 피난 가던 주민들은 다시 미군에 의해 경부선 철길로 올라가 이동하던 중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100여 명이 사망했다. 폭격을 피한 주민들은 노근리 쌍굴로 피했다. 이후 7월 29일까지 3일 동안 미 육군에 의해 총격을 받아 300여 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7월 29일 미군이 물러나고 인민군이 도착한 후에서야 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군을 따라다니던 이복훈이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알려주어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김천지역에서 연행된 주민들은 경찰서외에 김천소년형무소에도 감금되었으며, 이들이 희생된 곳은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와 송죽리 돌고개, 구미리, 마산리, 그리고 대항면 직지사 계곡, 대덕면 등이다. 총살은 1950년 7월 10일경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형무소가 소유하고 있던 1대의 화물트럭에 2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태운 다음 서너 명의 형무관이 탑승했다. 학살 장소에는 이미 헌병들이 총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 아래에는 동네 주민들을 동원해서 파놓은 구덩이(길이 3미터에 깊이는 가슴 정도였다)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보도연맹원들은 그 구덩이 앞에 너 댓씩 앉혀졌다. 헌병들이 총을 쏘면 희생자들은 구덩이로 떨어졌다. 한 구덩이에는 열댓 명 정도가 매장되었다. 총살이 끝나자 산 너머 대기하고 있던 근처 마을 사람들이 삽을 들고 와서 흙을 덮었다. 7월 10일 이후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은 최소 500명 이상이었다.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는 1950년 7월 중순에서 말까지이며, 학살이 확인되는 날짜는 16일, 20일, 26일이다. 이 시기 동안 대뱅이재 학살지는 2곳으로, 도로를 중심에 둔 양쪽 골짜기이다.

 

함양 거창(7월 26일 ~ 7월 28일)

 

함양, 거창지역에서는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미 24사단 등이 1950년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주둔했다. 7월 24일과 25일 남원에서 후퇴한 민부대가 26일 함양-안의지역에서 전투했다. 미 제34연대가 거창에 주둔했다. 7월 27일 안의에서 전투를 치르고 거창으로 다시 철수했다. 28일 안의 저지선이 무너지고 산청으로 철수했다.

 

함양에서는 유치장 등에 갇혀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21일경 함양군 함양읍 난평리 보골(신기마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밤나무 숲, 함양읍 백연리 두재고개, 지곡면 보산리 가운데고개 등에서 총살당했다. 함양경찰서 휴천지서 특공대장 최씨(최병택)에 따르면, 휴천면 보도연맹원 50여 명이 대포리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가해자는 국군 1개 소대와 휴천지서 근무자들이었다. 수동면사건 희생자는 미군에게 연행되어 희생된 경우(김치규)도 있다. 함양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때는 7월 28일이었다.

 

거창에서는 거창경찰서 유치장과 양조장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7월 21일에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에서, 7월 27일에는 합천군 봉산면 권빈재 등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권빈재 학살 현장에서 2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합천 창녕(7월 30일 ~ 8월 3일)

 

합천지역(봉산면 권빈리)에서는 미 24사단과 국군 17연대가 1950년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주둔했다. 7월 29일 거창에서 철수한 미 34연대가 동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7월 31일 교전이 있었으며 미군은 다시 후퇴했다. 8월 1일 제17연대가 공격을 받아 야로면 덕암리로 철수했으며, 다시 낙동강선인 대구 달성군 현풍면으로 철수했다.

 

1950년 8월 3일 국군 17연대가 주둔했던 고령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고령에서는 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고령경찰이 후퇴하기 직전인 1950년 8월 3일 고령읍 회천교와 금산재, 운수면 화암금굴 등지에서 집단 살해되었다. 적어도 3차례 이상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학살이 있었다. 당시 고령경찰서 경찰관의 증언에 의하면 고령군 국민보도연맹원의 규모는 200명이 넘었다. 국군 17연대 소속 군인이었던 윤씨(윤덕로)는 고령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있던 보도연맹원 70~80명을 고령읍의 낙동강변에서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고령읍 금산재에서도 100여 명의 희생자가 있었는데, 고령경찰서 특공대장 최씨(최순기)는 97명의 보도연맹원들이 금산재에서 고령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에게 학살당한 사실에 대해 증언했으며, 이는 현장에서 살아나온 보도연맹원의 진술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8월 3일 17연대는 창녕군 대합면 십이리에서 피난민으로 가장한 지방 좌익 40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오전 10시 십이리에 도착한 17연대 2대대 7중대는 주민대표를 소집하여 적색분자 도는 수상한 자들을 색출하는데 협력하라고 지시하였다. 주민들로부터 지방공비들이 비슬산으로 올라갔다는 말을 들은 군인들은 이를 쫓아가 월곡마을 뒷산 대나무 숲에 있던 월곡재실에서 잠을 자던 지방공비 40명을 사살하고 6명을 생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낙동강을 건너면서 젖은 옷을 말리고 잠을 자고 있었으며, 전투경험이 없는 지방공비들로 아무런 경계도 세우지 않았고 대응사격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 2』는 이들이 전투경험이 없는 지방공비들이라고 했으나 같은 책에서 당시 17연대장 김희준 대령은 이들이 인민군 선발대라고 증언하고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지방공비들이라고 하지만 이들의 상태로 보아 피난민들이 공격을 당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피해 날짜로 보건대 공주 유구의 경우처럼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당시 7중대장(조경학 대위)는 이 사건에 대해 연대장으로부터 12리 일대에 원을 그리며 “이 일대의 빨갱이를 모조리 소탕하라”고 지시했으며, 6명의 포로 중에는 여순사건 14연대 군인출신과 12살 어린이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창녕에서는 유치장과 경찰서 무도관으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트럭에 실려 나가 희생당했는데, 50여명이 솔터마을 뒷산으로 끌려 가 총살당한 사건만 확인되었다. 창녕경찰서 근무자 김씨(김상낙)에 따르면, 합천경찰서, 의령경찰서, 거창경찰서원들은 후퇴하면서 창녕으로 합류하여 밀양으로 후퇴하였는데, 후퇴 전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 유치장에 가득 있었고, 당시 사찰주임(정석주)이 CIC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합천에서는 7월 7일 보도연맹원 등 100여 명의 주민들이 1차로 예비검속되었으나 합천 국회의원 노기영의 만류로 다음날 몇 명만을 수감하고 나머지는 모두 풀어주었다. 그러나 7월 18일경부터 회의를 한다는 등의 이유로 다시 검속하기 시작했다. 7월 21일 합천경찰서는 당시 군내 주민 32명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16명을 산청군 생비량면 화현리 방아재로 끌고 가 삼가지서장 이남원의 지휘 하에 집단 살해했다. 지서는 합천경찰서로부터 ‘7월 31일 저녁 9시까지 후퇴하라’는 지시를 받고, 후퇴하기 직전에 합천면의 이이영 등 12명과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40여 명의 주민들을 용주면 용주지서 뒷산, 합천면 계림리 야산 등지로 끌고 가 집단 살해하였다. 당시 합천경찰서 사찰주임은 지서장에게 ‘합숙을 시키고 있다가 후퇴하게 되면 보도연맹원등을 사살하고 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다고 한다.

 

하동, 진주(7월 25일 ~ 31일)

 

하동-진주지역에서는 영남편성관구사령부와 미 제24사단이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31일까지 주둔했다. 7월 25일 순천, 광양, 26일 하동을 점령당하고 후퇴하던 국군은 쇠고개에서 진지를 구축하던 중 27일 채병덕 소장 전사했으며, 29일 진주로 철수했다. 30일 전투 후 31일 진주를 점령당하자 의령과 군북으로 철수했다.

 

하동에서는 7월 11일부터 24일까지 보도연맹원 등을 유치장으로 연행했다. 당시 유치장은 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먼저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끌려 나가면 다시 주민들이 잡혀 들어왔으며 이런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주민들은 등급에 따라 진주형무소로 이송되거나 구례 밤재 너머 남원경찰서로 넘겨져 지리산 근처 산청 넘어가는 고개에서 희생되었다. 다른 주민 50여 명은 7월 24일 밤에 섬진강 건너 광양시 진월면 백운산 기슭 매티재에서 사찰계에 의해 총살되었다. 희생자는 250여 명에 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동은 7월 26일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진주에서는 진주경찰서와 진주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은 7월 21일부터 7월 26일까지 진주 명석면 관지리, 용산리, 우수리 등지, 문산읍 상문리,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증언을 종합하면, 진주경찰서에는 최소 100여 명, 진주형무소에는 최소 20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되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가해집단은 진주 CIC파견대(대장 탁성록)와 헌병대(5사단 진주지구 헌병대장 윤기옥), 진주경찰서, 진주형무소 특공대 등이다. 진주형무소 재소자의 희생자까지 포함한다면 진주에서는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1949년 8월 진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수는 803명이었으나 전쟁 당시에는 1,000여 명의 재소자가 수감되어 있었고, 대부분 좌익사범이었다. 이들 1,000여 명의 재소자들은 1950년 7월 중순에서 진주경찰서가 후퇴하기 전날인 26일까지 진주지구 CIC, 진주지구 헌병대, 진주경찰서, 진주형무소 형무관 등에 의해 명석면 우수리 갓골, 관지리 화령골짜기 등 여섯 곳에서 집단희생당했다.

명석면 우수리 갓골(산5)에서는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43명이 버스에 실려와 총살당했다. 시신은 경찰의 위협을 받은 우수리 주민들에 의해 매장되었으므로 여러 명의 주민들이 현장을 목격했다.

 

 

진주형무소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진주뿐 아니라 산청, 하동, 의령 등 인근 지역 주민들도 있었다. 이들은 형무소내에서 심사를 당한 뒤 7월 22일부터 26일까지 재소자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당시 진주형무소 계호과 근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살해된 보도연맹원이 2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증언을 기초로 본다면, 진주형무소를 거쳐 희생된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은 1,200여 명 이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