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9.28수복과 소위 `부역자 처리`|

구름위 2013. 11. 2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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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혐의 희생사건’은 ‘한국전쟁 중 국군이 인민군 점령지를 회복하기 시작한 1950년 8월 20일경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고착된 1951년 3월경까지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그 점령정책에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은 민간인과 그의 가족들이 법적 절차 없이 집단적으로 살해당한 사건’을 이른다. 이런 성격의 학살은 유엔군이 북한지역을 점령하는 동안에도 발생했음이 확인되며, 1․4 후퇴 시기인 1950년 12월에도 인민군 점령기 부역혐의를 받았던 주민들과 그 가족들이 예비검속되어 희생당했다. 그리고 국군이 2차 수복하던 1951년 2월경 또 다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부역자에 대한 정의는 ‘인민군 점령기간 중 북한에 협력한 자’이다. 그러나 당시 경찰당국은 부역자를 ‘공산주의 사상에 동의하고, 대한민국의 정치를 반대하며, 반민족적 비인도적 행위를 강행한 자’로 정의하면서 반정부 활동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일반화시키기도 한다.

‘부역자’는 범법자이므로 법원의 판단에 의해서만 처벌받아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 법원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학살당했다. 수복하던 국군이나 경찰이 ‘즉결처분’한다며 마을 공회당이나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가까운 강변이나 골짜기, 동굴에서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살아남았거나 도피를 잘하여 뒤늦게 잡힌 주민들이 그나마 법정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판사의 얼굴을 보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대부분 자신이 재판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사형선고를 받았다.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도 형이 확정되어 형무소에 가기 전에는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 10년형을 받았는지 5년형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빨갱이’죄에 ‘부역’죄가 더해지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국가보안법이 불법 학살 행위를 조장하는 합법적 근거였다. 단독정부 수립 직후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이 제정되었다. 국가보안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입증 가능한 행위가 아닌 범죄의도를 추정하여 처벌하는 데 있었으므로 당시 이승만 정부는 주관적․정치적 판단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형법은 1953년 9월 18일에서야 제정되었는데, 이 보다 국가보안법이 먼저 제정되었던 것은 1949년에만 11만 8,621명이나 되는 정치적 반대자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 법은 시간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1949년 12월 2차로 개정하려고 했는데 그 내용은 단심제, 사형까지 형량을 확대, 미수에 그친 경우도 처벌하는 것이었다. 결국 당시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으나 이 내용은 6․25 전쟁 발발 직후 「비상조치령」으로 부활했다.

 

․학살의 제도적 준비

 

전쟁 발발 후 이승만 정부에서 보여 준 가장 빠른 조치는 6월 25일 오후 2시경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도 경찰국에 보낸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과 「비상조치령」이었다. 이는 일종의 학살명령처럼 작동했다. 내무부장관 백성욱(白性郁)은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하면서, 이 긴급명령에 의거하여 예비검속을 시작하면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인 「비상조치령」은 엄벌 위주의 가혹한 법령이었다. 당시 판사 유병진은 「비상조치령」이 이승만 정부의 거짓 방송을 믿고 남았던 주민들 모두에게 부역혐의를 두었으며, 점령군보다도 그를 도운 부역자가 더 가혹하게 처벌받는 결과를 낳았고, 단독판사가 단심으로서 증거설명도 생략한 채 전쟁전이라면 4~5년 형에 해당될 범죄에 사형을, 2~3년 형에 해당할 범죄에 무기 혹은 10년 형을 판결해야 하는, ‘고약한 법’이라며 한탄하였다. 즉, 단심으로 20일내 기소하여 40일 내 판결하고 증거설명을 생략하는 등의 내용으로 이는 거의 즉결처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인민군 점령기 시민들의 처지

 

1950년 6월 30일 서울시임시인민위원회는 <고시6호>로써 “과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권에 적대되는 행동을 한 자로서 자기의 과거죄과를 청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책을 적극지지하며, … 과거죄과 내용과 함께 자수청원서를 제출하면 과거의 죄과 여하를 불구하고 관대히 처분 한다”라고 공포하였다. 자수자들은 ‘자수청원서’, ‘자서전’, ‘이력서’, ‘보증서’ 등을 함께 내야 했다.

국민보도연맹원 출신들은 변절의 낙인을 지우기 위해 의용군 동원 등의 압력을 받았으며, 대한청년단 등 우익인사들은 점령 초기 내무서로 끌려가 폭행을 당하며 협력할 것을 강요당했다. 우익인사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주민들은 협력하는 흉내라도 내야했으며, 북한 정권의 특성상 대부분의 주민들이 민청, 여성동맹, 농민동맹 등의 사회대중조직에 가입해야 했다.

 

․부역자 문제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입장

 

9․28 수복은 인민군 점령하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던 시민들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혼란이었다. 당시 혼란에 대해 강원용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재빨리 피난을 간 사람들은 애국자가 되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용공분자나 부역자가 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분노했다.

반면, 이승만은 군통수권자로서 반성보다는 오히려 국민들이 적극적인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초기에 패배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20일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까지의 우리 전략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국민들의 투지를 자극하는 대신 2~3일 안에 지원병과 보급품이 도착하는 즉시 유엔군이 전면적인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말로 국민들을 무지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안심한 국민들은 스스로 국토방위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7월 20일이면 호남지역의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절정에 이를 시기로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이날 하루 동안 충북 영동을 비롯하여 전북 금산, 고창, 남원, 임실, 전남 장성, 경남 산청 등에서 1,200여 명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6월 27일 이후 한동안 대전에서 피난하던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는 국회의원들의 의결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택상은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민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의결하였다. 이에 해공과 죽산과 내가 도지사 관저로 이박사를 찾아가 그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간곡히 청했으나 ‘어디 내가 당 덕종이야?’ …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사과를 할테면 당신들이나 해요’라고하며 그 자리를 뿌리치고 나가는 것이었다.”라고 했으며 그 뒤로도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했다는 말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한편, 9월 22일 이승만은 기자회견 석상에서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간이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토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국군 수복지역에 불 피바람을 예상케 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수복 직전의 부역자 파악

 

대통령부터 패전 책임 회피와 국민에 대한 보복을 꿈꾸고 있을 정도니 정부 역시 이 일에 몰두했다. 합동수사본부 검사였던 오제도는 1950년 8월 부산에 있으면서 인민군 점령지를 수복할 경우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관계자 회의를 가졌다고 증언하였다.

미군 역시 유엔군의 수복을 앞두고 부역자 처리 방안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20일 441 CIC Team이 미8군 G-2에 보고한 「방첩대상목록(Counter Intelligence Target Information)」에는 이승엽(서울시 인민위원장), 조소항, 김규식, 여운홍 등 전 국회의원, 한신, 송호성 등 국군 장군, 김효석 전 내무부장관 등 38명을 체포대상으로 기재하고 있다. 9월 30일의 보고에는 경기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이남 전 지역의 인민위원 379명의 명단을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 10월 4일 보고에는 전국농민회,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 24개 좌익계열 정당 및 대중단체의 이름과 설명을 정리하여 보고하고 있다. 목록의 머릿말에는 “다음 좌익 조직의 구성원과 지도자는 사회 안전을 위협하므로 더 조사하기 위해 체포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는데, 이 목록에는 정당과 농민, 노동단체 외에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민주여성동맹, 민주애국청년연맹, 민주학생연맹, 문학가동맹, 인민위원회, 국민보도연맹 등이 기재되어 있다.

 

수복하던 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최초의 부역혐의 학살사건은 인민군 점령지를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당시 국군 제3사단장 보좌관 겸 민사부장이었던 신동우는 “추격해 올라가는 곳마다 애국청년들이 부역자들을 잡아 놓고 우리에게 즉결을 호소했지만 사단장의 엄명으로 모두 후송, 의법 처단케 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과연 그랬을까?

통영 등 경남지역에서는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8월 20일경부터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상주, 안동, 울진 등 경상북도지역에서는 1950년 9월 20일경부터, 경기도 지역은 9월 30일경부터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희생사건이 확인된다. 이 시기 학살사건은 국군이 수복하는 즉시 발생했으므로 수복하는 국군의 진주 경로에 따라 확인된다.

 

․미군 예비사단이었던 국군 1사단의 민간인학살

 

미 1군단에 배속되어 낙동강 전선 다부리에서 전투를 치르던 국군 1사단은 미군의 예비사단이 되어 ‘잔적을 소탕하며 군위를 거쳐 청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9월 25일 선산에, 9월 26일는 상주, 9월 27일 보은에 주둔했다. 제12연대가 상주를 담당한 반면 제11연대는 괴산과 미원지역, 제15연대는 보은지역을 담당했다. 이들은 10월 4일까지 10여 일간 속리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에서 소탕작전을 했으며, 이후 10월 7일 안성을 거쳐, 10월 10일 파주 고랑포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들이 소탕작전을 했다는 곳마다 민간인들이 집단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진하던 국군 1사단에 의해 가장 먼저 피해가 발생한 곳은 경북 상주였으며 사건 발생일은 북진을 막 시작한 9월 25일 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한 피해는 10월 2일까지 나타난다.

1950년 9월 25일 북진하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연대장 김점곤)가 상주에 주둔하게 되었다. 연대 본부는 청리면 가천리에, 제1사단 사령부는 공성면 옥산리에 주둔하였고, 각 부대는 숙박과 휴식이 가능한 인근 민가로 흩어져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주둔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성면 산현2리에 주둔하게 된 군인들은 인민군 점령 당시 인민위원장 등 부역혐의가 있는 주민들을 마을 재실 공터에 소집하여 재실에 가두고 고문했다. 국군은 밤 12시경 재실에 갇혀 있던 주민 모두를 재실 앞 냇가로 끌고 가 백봉원 등 8명을 총살했다. 1차 총살이 끝난 후 9월 26일 새벽, 국군들은 다시 주민들을 잡아와 백명월 등 6명을 콩밭고랑에서 총살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마을 주민들이 총살현장을 볼 수 있었다. 냇가 희생자들의 시신은 머리카락과 옷가지가 보일 정도로 흙이 옅게 덮여 있으며, 콩밭고랑의 희생자들은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당해 포개져 있었다. 콩밭고랑의 희생자 6명 중 4명이 여성이었는데, 모두 속옷이 벗겨진 상태였다. 같은 날 청리면 가천리에 주둔했던 국군 역시 9월 26일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하여 마을회관에 감금했다가 마을 뒤 방천 등에서 총살했다. 또 다른 주민들은 9월 28일 공성면 시내로 끌려간 뒤 옥산리 창말 산제비골짜기에서 수십 명과 함께 총살되었다고 한다.

괴산에 주둔하던 11연대는 9월 28일 청천면 청천리에 진입했으며 수복과 함께 인민군 점령 하에서 인민위원회 등에 부역한 주민들을 색출해 즉결처분하기 시작했다. 희생자가 확인된 사례는 증평 송능섭의 처, 연풍면 갈금리 임종국 등이다. 9월 29일 청원 가덕면에 집입한 국군 1사단은 가덕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가덕면내 31개 마을과 이웃인 남일면 문주리 등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 100여 명을 색출하여 연행하였다. 마을 앞에서 행정리 주민 한 명이 군인들에 대한 태도가 나쁘다며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으며, 나머지 연행된 주민들은 병암리에 있던 가덕지서와 가덕국민학교로 집결되었다가 지서 앞 방공호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이후 11연대는 10월 1일 청주 일대에 진입하여 10월 2일까지 작전한 결과 486명을 사살했으며, 806명을 생포했다고 하는데, 이들 희생자들이 주민들이었는지 여부는 조사되지 않았다.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저지른 학살은 10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전쟁사』의 전투기록과 일치한다. 이로보아 이들이 말하는 전투성과 대부분은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에 대한 공격의 결과로 보인다.

한편, 9월 28일 보은에 집결한 15연대는 회북면 신대리와 죽암리에 진입하여 3일 동안 주둔하면서 마을의 부역자를 색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죽암리 양재길, 신대리 양재호 등 5명의 주민들이 회남면 거교리 야산에서 희생당했다. 같은 시기 죽암리 홍선표 등 3명은 죽암리 잔디말랑에서 희생당했다. 10월 1일에는 30여 명의 주민들이 중앙리 입구 개울가에서 희생되었다.

 

․국군 3사단의 민간인학살

 

동해안지역에서 수복작전을 하던 국군 3사단은 25일 영덕을 수복한 후 27일 울진을 거쳐 29일 삼척을 수복하였다. 이들이 북진하는 동안 울진과 삼척에서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울진을 수복하던 3사단 22연대는 9월 26일 추석에 노음3리 마을에 공포탄을 쏘면서 들어와 방공호로 숨어있던 주민들을 살해했다. 정오에 노음1리로 들어온 22연대 헌병대는 추석 제사 후 술에 취해 있던 최종구를 우물가로 끌고 가 사살했다. 같은 날 수산리와 산포리에 들어 온 국군 제22연대 군인과 CIC군인들은 수산리 김동옥과 산포리 박원출을 사살했다. 한편 3사단 23연대 군인들은 9월 27일부터 28일 사이에 평해로 상륙하여 기성면 사동3리에 진입했는데, 소집에 늦은 15살 소년을 사살했다.

3사단은 9월 29일경 삼척 원덕리와 풍곡리에 진주하여 김덕삼 등 11명을 입산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연로하여 집에 있던 엄계상은 군인들의 방화로 사망했으며, 김순례는 군인들을 피해 도망하다 물에 빠져 사망했다. 9월 28일에는 인민군 점령기에 장호리 인민위원장이었던 김상범이 3사단 헌병에게 총살당했다.

 

․수도사단의 민간인학살

 

영양은 9월 26일 수도사단 18연대와 1기갑연대, 1연대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후 1연대가 수도사단의 예비연대가 되어 잔적을 소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9월 27일 국군이 영양읍 대천동 주민들을 마을 하천가에 모이게 한 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총살하였다. 당시 오태원 등 18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영양경찰서의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처형자명부」에도 기록이 있는데, 명부상의 희생자들은 모두 11명이고 모두 ‘6․25 미후퇴자로서 1950년 9월 26일 아군 선발대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양양을 수복한 수도사단 18연대는 바로 부역자를 색출했다. 10월 6일 국군을 피해 다니던 오호리 주민 1명이 자수했으나 죽산면사무소 앞에서 국군에게 총살당했다.

 

․국군 8사단의 민간인학살

 

8사단은 9월 25일 의성, 26일 안동, 28일 단양을 거쳐 30일 제천을 수복하고 10월 1일 원주에 도착했다. 이들이 후퇴하던 경로인 의성, 안동, 양평 등에서 주민들이 집단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동에는 9월 25일 국군 7사단, 8사단, 수도사단이 진입했으며, 수도사단은 29일 예천으로 더났다. 국군이 안동지역에 진입하면서 일직면 명진리 주민 2명이 국군의 짐을 지고 가던 중 명진리 마을 앞산에서 국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일직지서 경찰들에게 연행된 같은 마을 주민 27명이 남후면 광음리 암산골에서 국군에게 집단 살해되었다. 남선면에서는 정하리 주민 25명이 9월 26일 8사단에 의해 강 건너 영남산 법흥리 상수원 뒤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남후면에서는 9월 25일 개곡리에 주둔한 국군이 방공호에 피신해 있는 마을 주민들을 소집해 마을 공터에 집결시킨 후 마을 구장이었던 개곡리 인민위원장을 풍산면 계평리 삿시골로 끌고 가 살해했으며, 9월 26일에는 개곡리 주민 2명을 광음리 암산골에서 살해했다. 풍산면에서는 수동리 주민 10여 명이 9월 25일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국군에 의해 개천과 막곡리 막실마을 인근에서 희생되었으며 막곡리에서는 9월 29일 인민군 점령기 인민위원장을 한 권을수 등 9명이 마을 인근에서 희생되었다.

의성에는 9월 24일 국군 8사단 21연대(연대장 김용배)가 진입했다. 신평면에서는 9월 26일 청운리 주민 5명이 군인들에게 총살당했으며, 춘산면에서는 1950년 9월말 북진하는 1개 소대 규모 국군이 인민군에 협조한 주민을 조사하던 중 마을로 내려오는 백용암과 김영길을 마을어귀 들판 빙계2리 거느골에서 총살했다. 그 후로 피난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총살당할 것을 염려한 마을 주민들이 모두 산속에 숨어 지냈다.

8사단이 양평에 진입한 때는 10월 1일이었다. 10월 2일 우익청년들에 의해 신애리 공회당에 감금되었던 40여 명의 양평면 덕평리 주민들이 공회당 앞과 도장굴 공동묘지에서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희생자들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이었다.

 

․국군 6사단의 민간인학살

 

6사단은 9월 25일 함창, 28일 충주를 거쳐 30일 원주를 수복했다. 원주 문막에서는 10월 초 국군에 의해 주민 20여명이 지서로 연행당해 심하게 고문을 당했으며 원주로 이송 당하던 중 군군에 의해 동화리 세고개(속칭 쇠고개) 숲속에서 학살당했다.

 

․국군 7사단의 민간인학살

 

예천에는 국군 7사단 3연대가 주둔한 후 이동했는데, 이들이 주둔한 각 면에서 민간인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9월 24일 보문지서로 잡혀간 오신리 주민들이 미호리 내성천 백사장에서 사살되었으며, 9월 25일에는 지보면 고평리 김학봉이 수복하던 국군에 의해 고평리 고평다리 부근의 서울나들에서 인민군 패잔병 1명과 함께 희생되었다. 9월 26일에는 수복하는 국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감천면 벌방리 주민 2명이 국군에 의해 끌려가 총살당했으며, 용궁면 산택리 고영창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마을을 지나던 국군에 의해 불려나가 가야리 진입로에서 희생되었다. 같은 날 풍양면에서는 방앗간을 숙영지로 사용하던 국군이 마을에서 부역자를 색출한다면서 김진묵 등 2명을 사살했다.

 

․국군 17연대의 민간인학살

 

국군 해병대와 국군 17연대는 서울을 점령한 직후 서울시경찰국을 통해 과거에 국민보도연맹원이었거나 부역혐의가 의심되는 서울 잔류 시민들을 군 주둔지나 해당 경찰서로 연행하여 살해했다. 17연대 1대대 3중대는 장충단(현재 서울시 중구 신라호텔)에 주둔하면서 부역자를 색출하여 중대장이 임의로 ‘즉결처분’했다. 동국대 학생이었던 이병진이 의용군으로 차출되었다가 서울로 돌아왔는데 당시 수복 한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살해된 채 서울시 중구 장충단 인근 야산에 암매장되었다.

 

․미군이 관련된 민간인학살

 

미군에 의해 수복되던 지역에서도 민간인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은 인천, 합천과 산청에서 확인되었다.

인천에서는 미 극동사령부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8월 18일과 8월 20일 각각 덕적도와 영흥도에 상륙한 군인들에 의해 150여 명의 주민들이 인근 해안가인 먹염과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서 살해했다. 영흥도의 희생자들 중에는 인민군 점령기 서울시 인민위원장이었던 이승엽의 일가족 1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합천에서는 미 2사단이 9월 24일 진입한 뒤 율곡면 와리 주민 3명이 9월 25일 수복한 군인들에 의해 부역자로 끌려간 뒤 희생되었다. 합천을 수복한 미군은 인민군에게 부역한 주민들을 색출하여 심기환 등 3명을 부역활동혐의로 연행한 후 총살했다는 소문이 났다.

산청에서는 1950년 9월 하순 미 25사단이 진주를 통해 산청으로 북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마을에 진입한 뒤 인민군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을 연행했다. 트럭 두세 대에 주민들이 가득 실려 갔는데, 끌려가던 주민들은 “이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살아나면 마을로 돌아와 반드시 알리자”고 했고, 결국 한 사람이 살아서 학살사실이 알려졌다. 희생장소는 차탄리 인근 구시골이었다. 당시 차탄리에 진입하였던 군대는 미 9군단 25사단 35연대 돌빈특수임무부대로 확인된다. 주민들을 직접 연행한 자들은 한국인이었으므로 이들은 미군에 배속된 경찰이었거나 수복 시 부역자처리 업무를 맡고 있었던 특무대나 군정보대(G-2)일 가능성이 있다.

 

합법을 가장한 처형식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다

 

국군이 북진한 후 이어 경찰이 복귀하였다. 최초 복귀한 경찰은 북진하던 유엔군에 배속된 경우가 많았으며, 며칠 뒤 경찰 선발대와 경찰서장 등이 복귀했다. 경찰서가 공식적으로 복귀하자 마을 치안대 또는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던 마을 주민들이 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사찰계 소속 경찰관 또는 군 정보기관에 의해 A, B, C 등 3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등급이 결정된 주민들은 경찰서 인근에서 경찰관들에게 학살당했던가 아니면 합동수사본부로 인계되었다.

 

서울․경기․인천

 

서울, 경기와 인천지역은 분단선에 근접해 있었으므로, 6․25전쟁 발발 초기 상대적으로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전쟁발발 후 하루 또는 10일 만에 점령당했다. 이 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 곳은 여주, 안성, 평택, 이천 등이며 이후 사건이 발생한 충청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것으로 보인다. 그 원인이 인민군의 빠른 진군속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국군과 경찰의 다급함 때문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6월 25일 예비검속 지시 이후 최초로 사건이 발생한 날이 6월 28일로 강원도 횡성에서 국군 6사단이 저질렀다는 것으로 보아 인민군 측 보다는 가해 주체의 준비정도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국군 6사단은 춘천지역을 3일 동안 방어했으며 체계적인 후퇴를 통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장 많은 사건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본다면, 경기지역에서는 가해주체가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덜 발생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9․28수복 후 사건들에서 다시 확인된다. 서울과 인천, 경기지역의 선발경찰은 해병대에 배속되어 9월 16일 인천에 상륙하여 복귀하기 시작하며 10월 1일이면 군․검․경이 모두 복귀하기 시작하여 부역자처리에 몰두하였다.

수복하던 국군에 의한 부역자 학살이 몇 초의 고민도 없이 막무가내로 이루어진 반면,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부역자처리는 하루에서 일주일 정도의 조사 형식을 거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지역보다 가장 먼저 체계화했던 이 지역의 부역자처리는 ‘합법을 가장한 민간인학살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부역자처리 방법은 개인적 보복, 즉결처분 형식의 총살, 「비상조치령」 등에 의한 총살로 모두 국민의 동의를 받지 못한 것으로 반인륜적이었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지역에서는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5건의 개별피해 외에 더 이상 조사하지 못했으나 1952년 3월 14일 미 국무부가 “서울에서 이승만의 명령으로 5,000명의 부역혐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였다”라는 보고를 받았음이 확인된다.

인천에서는 권투선수 심태영 등 700~800명이 주민들이 1950년 10월경 경찰, 군 CIC, 헌병에 의해 합동으로 민간선박에 태워져 팔미도 인근 해상에서 집단 살해당했다. 소월미도 해상에서도 학살이 있었으며, 대부면에서는 10월 15일 영흥면 주민 8명이 대부면 남리 새방죽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강화에서는 강화산업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복귀하는 경찰에게 폭행을 당해 상당수가 사망했으며, 선원지서와 내가지서, 서도지서에서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경기북부지역인 가평에서는 1950년 10월 25일경 가평읍 일대의 주민들이 가평경찰서 앞 폭탄구덩이와 강변에서 가평경찰서 소속 경찰관 등에 의해 총살당했으며, 설악면에서는 1950년 10월 18일~20일 김한호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포천에서는 10월 9일경 신북면 주민 30여 명이 소집당해 무럭고개 골짜기에서 총살했으며, 양주에서는 진접면 주민 50여 명이 10월 21일경 진접면사무소 뒷산에서, 은현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수십 명이 11월 17일 은현면 선암리 은현지서 뒤 옹기구덩이에서 집단희생되었다.

경기서부지역인 파주에서는 교하면 청석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수백 명이 10월 23일경 교하면 다율리 청석골에서 집단희생되었으며, 산남리에서도 신씨 형제를 포함한 일가족 20여 명이 한강변에서 몰살당했다. 고양에서는 고양경찰서로 연행된 200여 명의 주민들이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인근 금정굴에서 집단희생되었으며, 이 외에 송포지서, 벽제지서, 신도지서에 의해 수백명의 주민들이 한강변, 귀일안골 뒷골계곡 방공구덩이 등에서 희생되었다. 김포에서는 9·28 수복 후부터 1·4 후퇴 직전까지 600명 이상의 주민들이 고촌면 천등고개, 김포면 여우재고개, 대곶면 소라리고개, 양동면 마곡리 한강변, 양촌면 양곡지서 뒷산, 하성면 태산골짜기 등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경기동부지역인 양평에서는 수백 명의 주민들이 10월 초부터 11월 초까지 양수리 강변, 떠드렁산, 용문역 등에서 희생당했다. 여주에서는 연행된 주민들이 9월말부터 10월 말까지 여주읍 교리 여주향교 뒷산, 영릉 입구 약수터, 가남지서 뒷산(현 태평터미널 뒤, 태평근린공원 입구) 폭탄 구덩이, 대신면 보통리 강변, 북내면 버시고개, 홍천면 계신리 강변 등에서 잡단희생되었다. 용인에서는 10월 주민들이 송전고개 등에서 집단희생되었으며, 남사면에서는 남사지서의 에 감금되었던 50여 명의 주민들이 ‘안어고개(안이고개로도 불림)’에서 집단희생되었다.

경기남부지역인 수원에서는 신풍동 주민들이 우익단체에 끌려간 뒤 실종되었다. 화성에서는 태안읍 주민 수십 명이 10월 18일 용주사 골짜기에서 총살당했으며, 오산면에서는 지곳리 주민 10여 명이 10월 21일 지곳리 공동묘지에서 희생되었다. 광주에서는 동부면 덕풍리 주민 30여 명이 10월 6일 ‘동경주(현 하남시 천현동)’에서 집단희생되었으며, 중부면에서는 수진리(현 성남시 태평1동)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평택에서는 평택읍내 병원과 양곡창고 건물에 감금된 주민들이 계엄 군인들에 의해 분류되어 총살당했으며, 청북면에서 20여 명의 주민들이 10월 16일 현곡리 청북지서 뒷산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강원

 

강원지역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을 비롯하여 미군폭격사건, 국군 토벌사건, 부역혐의 사건이 빠짐없이 벌어진 것으로 확인되며 어떤 한 유형의 사건이 압도적으로 벌어지는 경향이 없어 보인다. 이는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조사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원인이 있을 수 있으므로 아직 전체적인 양상을 거론하기 어려운 처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들만으로 일정한 경향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의 주민들이 받은 피해는 주로 전선의 장기간 고착화에 따른 미군폭격과 토벌사건으로 보이며 특정시기에 국한되는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부역혐의사건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 보인다. 부역혐의에 의한 대규모 단일 피해 사건이 확인되는 지역은 홍천으로 100여 명이 희생된 경우이다. 226명이 부역혐의로 희생된 영월의 경우로 보아 각 지역마다 홍천과 비슷한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동해안인 강릉에서는 성덕면 주민 7~8명이 10월 9일 유산리 도깨비재에서 총살당했으며, 성산면 금산리 주민들이 왕산지서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구정면에서는 10명의 주민들이 11월 7일 개낼골에서 희생되었고, 같은 시기 묵호 앞바다에서도 주민들이 수장당했다. 삼척에서는 노곡면 금계리 주민 20여 명이 11월 22일 근덕면 교곡리 드릅재에서 집단희생당했다. 울진에서는 각 지서에서 경찰서로 이송된 주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경찰, 헌병대 등에 의해 신림리 올시골 등 5곳에서 희생되었다.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1956)에 “수복 후 시국을 불인식한 자 259명을 송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죽변에 주둔한 군인들은 연행한 100여 명의 주민들을 후정리 부둘골에서 총살했으며, 온정지서는 주민 12명을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 문둥이골에서, 하당지서는 주민들을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기성지서는 주민들을 후포항에서 살해했다.

내륙 산악지역인 춘천에서는 신북면 주민들이 9월 말 율문리 강변 모래사장에서 총살당했다. 홍천에서는 홍천경찰서로 연행되었던 김수열 등 100여 명의 주민들이 10월 18일경 홍천읍 연봉리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신남면 주민들은 11월 26일 아홉사리 고개에서 총살당했다. 횡성에서는 11월 24일 횡성경찰서로 이송된 주민들이 희생되었으며, 강림면과 서원면 주민들은 10월과 11월 고둔치재 등에서 희생되었다. 영월에서는 1970년 내무부 정보과 『업무지시』에 따르면, 영월지역에서 한국전쟁시기 부역자라며 즉결처분된 주민들의 수는 226명으로 나타난다.

 

충북

 

충북지역은 국군 후퇴시기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으며, 국군 수복 시기에는 속리산 인근 패잔병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미 8군의 예비사단이었던 국군 1사단에 의해 다시 대규모 피해를 입었다. 반면, 치안이 안정된 후 부역혐의를 받아 집단 처형된 사례는 음성과 진천에서만 확인된다.

음성에서는 음성경찰서에 의해 갑종으로 판단된 주민들은 인근의 구덩이에 총살되었는데, 감곡면 상우리 주민 10여 명이 11월 1일 희생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진천에서는 진천경찰서에 갇힌 주민 30여 명이 봉화산에서 총살당했다.

 

충남

 

충남지역은 천안, 대전 등 경부국도가 지나는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투가 없었다. 그럼에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대규모로 저질러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미 전투기의 폭격을 당했다. 수복 당시에도 이 지역에 진입한 미군이나 국군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부역혐의로 인한 피해는 극심하여 각 군 단위에서 1천여 명에 이르거나 이를 넘어서는 규모였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수복하던 미군은 천안, 아산, 예산에 진입했다.

천안에서는 성환면 주민들이 둔포방향 야산 등에서, 직산면 주민 200여 명은 직산면 군동리 성산 금광구덩이 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아산에서는 온양경찰서로 연행된 주민 200여 명이 매일 밤 트럭에 실려 탕정면 구령리(현 배방면 남리) 성재산 등에서 총살당했으며, 이외에 탕정면 주민 90여 명이 탕정지서 뒷산 방공호에서, 염치면 주민들이 새지기 공동묘지 등에서, 선장면 주민들은 읍내 쇠판이골에서, 신창면 주민 50여 명은 염통산 방공호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예산에는 예산경찰서로 연행된 600여 명의 주민들은 신리 수암산 오생이뻘 등에서 집단희생되었으며, 덕산면 주민 50여 명은 예산경찰서 총살현장이기도 했던 신리 수암산 오생이뻘에서, 봉산면 주민 30여명은 대지리 고개(일명 붉은고개)에서, 삽교면 주민들은 신가리 꽃산 등에서 집단희생당했다.

수복 군인들이 없었던 당진, 서산, 태안, 당진, 보령, 서천, 홍성 등에서도 대규모 학살의 형태로 부역자처리가 이루어졌다.

당진에서는 당진경찰서로 연행된 200여 명의 주민들이 10월과 11월 한진리 목캥이 바닷가, 한진리 한재 교통호 등에서 집단 살해되었으며, 면천지서는 주민 100여 명을 상하리 공동묘지 교통호 등에서, 송악지서는 한진리 어업창고에 감금했던 주민들을 중흥리 야산 등에서, 순성지서는 면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을 광천리 남원천 냇가 모래구덩이 등에서, 신평지서는 20여 명의 주민들을 인근지역에서, 우강지서는 면 창고로 연행된 주민들 중 89명을 우강면 전파송신대에서, 합덕지서는 면 곡물창고에 감금했던 주민들을 송산리 은골 등에서 집단살해했다.

서산․태안에서는 각 면에서 연행된 주민들이 각 지서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살아서 서산경찰서로 이송된 주민들은 서산 갈산리 교통호와 수석리 소탐산에서, 태안경찰서로 이송된 주민들은 장산 공동묘지와 한티재 등에서 집단 살해되었다. 서산경찰서의 『경찰 연혁』에는 “경찰 환주 후 2개월간에 부역자 1천여 명을 검거 송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산경찰서 관할이었던 고북면 주민들은 장승고개 등에서, 대호지면(현 당진군) 주민들은 지서 뒤 골짜기에서, 정미면(현 당진군) 주민 100여 명은 똑때기 터 아래 갯골에서, 지곡면 주민들은 화천리 공동묘지에서, 해미면 주민들은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 등에서 집단희생당했다. 한편, 태안경찰서 관할이었던 근흥면 주민들은 안흥항 바위(현재 수협창고) 등에서, 소원면 주민들은 신덕리 해안 등에서, 이북면 주민들은 관리 옹동벛 등에서, 원북면 주민들은 솜틀다리 등에서, 남면 주민들은 몽산리 몽산포 교통호 등에서, 안면 주민들은 딱쿵골에서, 고남면 주민들은 장곡리 앞 바다에서, 팔봉면 주민들은 어송리 솔감목 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보령의 대천경찰서(현 보령경찰서)는 양곡창고 2개에 감금된 800여 명의 주민들을 성주산 골짜기, 남포면 이어니재, 대천항에서 총살했다. 이외에도 웅천면 주민들이 새안이재에서, 주산면 주민들이 주산지서에서, 천북면 주민들이 이어니재에서 각 지서에 의해 희생되었다.

서천에서는 전체 희생규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10월 1일 서천경찰서에 의해 종천면 장구리 수리넘어재에서 8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으며, 한산면 돼지고개에서도 40여 명이 희생되었다. 전체 희생규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각 지서에서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시초면 주민들이 지서에 의해 사무소 뒷산에서 학살당했다.

홍성에서는 홍성경찰서로 연행된 600여 명의 주민들이 소향리 붉은고개와 용봉산 절 입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이와 별도로 갈산면 주민들 지서에 감금되었다가 희생되었으며, 결성면 주민 100여 명은 아홉골목쟁이 금광구덩이, 영장골 방공호 등에서, 광천면 주민 36명은 담산리 금광구덩이(꿀꿀이봉)에서, 구항면 주민들은 오봉리 뒷산에서, 금마면 주민 50여 명은 화양리 안골에서, 은하면 주민 60여 명은대천리 공동묘지 등에서, 장곡면 주민 100여 명은 가송리 배밭 교통호 등에서, 홍동면 주민 200여 명은 송월리 모래강변 등에서, 홍북면 주민 100여 명이 대동리 뒷산 교통호 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논산에서는 강경경찰서 『연혁사』에 따르면, 부역혐의로 희생된 주민의 수는 모두 1,223명이었는데 이중 성동면의 희생자는 절반이 넘는 643명에 달했다. 같은 시기에 광석지서는 공룡산 구덩이에서, 양촌지서는 양촌리 오산2구 먹수바우 골짜기에서 수십 명의 주민들을 총살했다. 부여에서는 각 면에서 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는데, 개별적인 피해사실 외에 집단희생당한 장소가 조사되지 못했다. 청양에서는 주민들이 금정리 둘레골(또는 싸리티 고개)에서 희생되었다.

 

전북

 

전북지역은 충남서부, 전남지역과 마찬가지로 국군의 방어전투가 없었으며 대규모의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국군 수복 후에는 국군 11사단, 8사단과 경찰의 토벌작전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는데, 초기 토벌작전의 명분이 패잔병 소탕에 있었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대부분 부역자 처단에 있었다. 따라서 부역행위에 대한 자백 형식을 빌린 즉결처분은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다. 하지만 경기지역이 1950년 10월말 1단락 짓는 것에 비해 이 지역에서는 토벌작전과 연동되어 1951년 말까지 지속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서해안 지역인 군산에서는 회현면 주민 수십 명이 1950년 10월 12일과 13일 금강리 해변 등에서 희생당했다. 김제에서는 금산지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1950년 11월 금산면사무소 뒤 자갈밭에서 희생되었다. 고창에서는 1951년 1월 10일 장성에서 온 피난민 13명이 모양성 백토굴 공동묘지에서 희생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대산지서는 여성동맹위원장이었던 주민 등을 군유오거리 등에서, 부안지서는 연행한 심원면 하전리 주민 14명을 면내에서, 심원지서는 심원면 월산리 청년 4명을 연행하여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살해했다.

내륙지역인 금산에서는 금산경찰서 유치시설에 갇혀 있던 300여 명의 주민들이 비비미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이들의 희생사실은 금산경찰서에서 작성한 『처형자명단』(1973)과 『사실조사서』(1981)에서 확인된다. 한편, 남일면 주민들은 남일초등학교 뒤 골짜기와 초현리 골짜기에서, 부리면 주민들은 금산경찰서로 이송되거나 어재리 형석굴, 현내2리 부처당 암자 골짜기 등에서 희생되었다. 인근 진안에서는 경찰서로 연행된 주민 수백 명이 알 수 없는 곳에서 희생되었다. 장수에서는 각 지서를 거쳐 경찰서로 이송된 주민 수백 명이 장계면 ‘싸리재’에서 집단희생되었다. 학살은 수복 후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된 시기는 1951년 1월 8일, 1월 10일, 2월이다.

이리에서는 황화면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임실에서는 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청웅면 ‘노루목’ 등에서 집단희생되었으며, 신덕면 월성리 주민 11명은 신덕지서에 의해 수천리 율치재 등에서 희생되었다. 남원에서는 경찰서에 감금된 주민 20여 명이 1951년 3월 9일 산동면 대상마을 한재골 뽕나무 밭에서 집단희생당했다. 정읍에서는 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알 수 없는 장소에서 희생되었는데, 소성면 주민 수십 명은 지서 부근 야산에서, 옹동면 주민 수십 명은 지서인근에서 사살당했다.

 

전남

 

전남지역은 전쟁 발발 후 국군이나 인민군이 대규모로 주둔하지 않았다. 특히 국군은 후퇴 시는 물론 수복 직후에도 이 지역에 진입하지 않았으며 10월 초 창설된 국군 11사단을 미9군단에 배속하고 12월이 되어서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토벌작전을 본격화하는 정도였다. 당시 빨치산의 활동에 대해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제 어느 정도 무장력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해 국군 수뇌부가 얼마나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이 지역의 피해는 대부분 국민보도연맹사건과 11사단의 토벌작전에 의한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전북지역의 토벌작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작전의 성과는 인민군 패잔병 처리가 아니라 토끼몰이식 부역자처리로 나타났다. 조사결과 나타난 희생자 대부분은 토벌작전을 피하던 피난민들이었다. 실제 합법을 가장한 부역자처리는 드물게 나타나며 이 경우도 대부분 경찰의 토벌작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피해는 1951년 말까지 이어진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전남 북부지역에서는 광주를 비롯하여 장성, 담양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양산동 ‘마당고개’ 등에서 희생되었다. 광산에서는 1950년 12월 8일 삼도지서가 주민 8명을 총살했으며, 1951년 2월 8일 평동지서는 용곡마을 주민 9명을 총살했다. 한편, 효지면 주민들이 1951년 1월 12일 이강매재에서, 지한면 주민 10여 명이 1951년 1월 16일 용산리 몰몽재에서 희생당했다. 장성에서는 장성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단광리 가작동 어더기, 북상면 덕재고개 등에서 총살당했으며, 북일지서는 주민 10여 명을 지서 뒤편 공터에서, 동화지서는 10여 명을 지서 인근에서, 삼계지서는 삼계면 목침재에서 총살했다. 담양에서는 1950년 11월 30일 담양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월산면 주민 70여 명이 금과면 방축리 야산에서 총살당했으며, 수북지서는 1950년 11월 20일 10여 명의 주민들을 한시동 골짜기에서, 용면지서는 주민들을 1950년 12월 30일 금성면 학동 지푸실골짜기에서, 창평지서는 1950년 11월 15일 주민들을 삼천리 서낭당 고개에서 총살했다.

중부지역인 화순에서는 도암지서가 20여 명의 주민을 ‘김체골’에서 총살했다. 나주에서는 경찰서로 연행·이송된 주민들이 나주대교 영산강변에서 희생되었는데, 당시 다리 밑에는 시신이 즐비했다. 문평면 주민들을 옥당리 공동묘지 등에서, 봉황면 주민 수십 명이 ‘바재’ 등에서 총살당했다. 영암에서는 영암경찰서가 수복 초기인 1950년 10월 6일 주민 6명을 총살했으며, 10월 8일에는 영암면 용흥리 탑동마을 주민 10여 명을 총살했다. 이후 연행된 주민들도 곳곳에서 희생되었다. 군서지서는 1951년 1월 2일 군서면 동구림리와 도갑리 주민 12명을 배바위 옆에서, 1951년 2월 28일에는 군서면 서구림리 주민 10여 명을 연행한 후 영암면 ‘세실마을’에서 총살했다.

서부해안지역인 무안에서는 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고절리 무안천변의 한다리교 밑, 등에서 총살했으며, 망운지서는 1950년 10월 중순 연행된 주민 중 30여 명을 압창포 백사장에서, 삼향지서는 1950년 11월 4일 섬너리 갈대밭에서, 해제지서는 주민들을 지서 인근 바닷가 등에서, 현경지서는 1950년 10월 31일 주민들을 속칭 장가테에서 총살했다. 신안에서는 비금지서에 갇혔던 주민 10여 명이 1950년 11월 29일 도초로 가는 길에 희생되었으며, 지도지서는 지서 인근 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 30여 명을 ‘깨대골’ 등에서, 암태지서는 1950년 9월 26일경 50여 명의 주민들을 박달산 근처 해변에서, 중도지서는 1950년 10월 21일 주민 18명을 증도면 등선리 야산에서, 장산지서는 11월 3일 오음리 바닷가에서, 자은지서는 1950년 12월 2일 주민들을 자은면 남진선착장에서 살해했다. 진도에서는 진도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1950년 11월 10일 벽파부두 부근에서 총살당했으며, 고군지서는 주민 30여 명을 지망리 절골짜기와 의신면 창포리 하천가에서, 군내지서는 연행한 주민들을 송산리 잿등 등에서, 임회지서는 100명이 넘는 주민들을 밤마다 20여 명이 끌어 내 석교리 수장동 밭에서 총살했다.

남부 해안지역인 해남에서는 해남경찰서로 연행된 해남읍 구교리 주민 80여 명이 1950년 11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삼산면 신금리 방오리산 방공호 등에서 총살당했으며, 계곡지서는 계곡면 주민 50여 명을 성진리 월암고개 등에서, 마산지서는 주민 60여 명이 화내리 두드럭재 등에서, 우수영지서는 문내면 주민 50여 명을 율돌목 야산에서, 남창지서는 북평면 주민 60여 명을 남창리 붉은잔등 등에서, 산이지서는 주민들을 진산리 뻔지 등에서, 삼산지서는 50여 명의 주민들을 창리 남산뫼 중턱 등에서, 산정지서는 송지면 주민 400여 명을 산정리 산진목 등 4곳에서, 현산지서는 주민 100여 명을 딱골재 등 5곳에서, 화산지서는 주민들을 해창리 나붓재 등 4곳에서, 옥천지서는 주민들을 만대산 골짜기에서, 화원지서는 10여 명의 주민을 신덕리 안골 산중턱 등에서 희생되었다. 완도에서는 완도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 200여 명이 완도읍 망남리 재, 죽청리 야산, 대야리 야산 등에서 총살당했으며, 고금지서는 봉명리 뒷산 등 10여 곳에서, 군외지서는 서홍리 소나무 숲 등 5곳에서, 금당지서는 수십 명의 주민들을 세포리 신섬 바다 등에서, 금일지서는 50여 명의 주민들을 울포리 공동묘지 등에서, 노화지서는 주민들을 보길면 정자리 산 등에서, 소안지서는 10여 명의 주민들을 황간국민학교 뒷산 등에서, 신지지서는 주민 31명을 완도읍 작은 개머리 끝에서, 약산지서는 주민들을 약산수협 뒷산, 해동리 곤고지산, 장용리 앞바다 등에서 살해했다. 장흥에서는 국군 수복 후 유치면 보림사계곡으로 피신한 인근 지역 주민들이 경찰토벌작전에 의해 많은 피해가 있었는데, 장흥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된 주민들을 1950년 12월 4일 장흥읍 남외리(장흥서초등학교 부근) 다리 밑에서 총살당했으며, 대덕지서는 1951년 3월 15일 옹암리 주민 5명을 내저마을 고개에서 총살했다. 같은 사건이 장평지서와 안양지서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강진에서는 주민 수십 명이 1950년 12월 5일 군동면 까치내재와 성전면 풀치재에서 희생되었다.

동부지역인 보성에서는 1950년 12월 복내지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용전마을 뒷산에서 총살당했으며, 벌교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석거리재, 열갈재 등에서 총살당했다. 여수에서는 주민 수백 명이 1950년 10월 20일, 10월 28일, 12월 24일, 1951년 1월 14일, 2월 4일, 3월 12일 오동도 앞바다(여수 앞바다), 연곡동 한재, 밤촌 뒷산 등에서 살해당했다. 곡성에서는 11월 7일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 20여명이 곡성읍내 묘천리 냇가에서 총살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고흥에서는 연행된 주민 중 A급 부역자로 판단한 주민들을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 등에서 총살했다. 광양에서는 주민 수백 명이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무선쟁이고개, 반송재 골짜기, 검단재 등에서 총살당했다. 순천에서는 수복 직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부역자를 선별하여 즉결처형 했다는 증언이 있다.

 

경북

 

경북지역은 국군의 후퇴 경로에 있어 이들에 의한 국민보도연맹사건 피해를 입었으며 낙동강 전선에 위치함으로서 미군의 근접지원 폭격 또는 차단폭격 등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950년 9월 말에는 국군의 수복경로에 자리하고 있어 후방 예비사단의 패잔병 소탕작전에 의해 다시 피해를 입었다. 반면 인민군 미점령지역이므로 주민들이 부역혐의를 받을 수 없긴 했으나 점령지역 역시 경찰 치안 안정 후 피해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북부지역인 영양에서는 영양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어금골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영주에서는 1개면에 많게는 50여 명의 주민들이 부역혐의로 총살당했다고 한다. 안동에서는 1950년 9월 29일 안동경찰서로 연행된 안동읍 태화리 어개골 주민 11명이 서부리 야산에서 총살당했으며, 서후지서는 자품리 주민 7명을 자품리 부처골에서, 이하출장소는 주하리 주민들을 이하역 맞은 편 골짜기에서, 일직지서는 일직면 주민 50여 명을 남후면 광음리 암산골에서 살해했다.

남부지역인 고령에서는 우곡면 주민들이 경찰서로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구미에서는 도개면 주민들이 칠창강변 등에서 희생되었다. 군위에서는 군위경찰서로 연행된 주민 수십 명이 1950년 10월 20일 서부리에서 희생됐다. 김천에서는 구성면 주민들이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경찰을 피해 지낼 수 있었는데, 1951년 이들이 구성지서에 잡힌 뒤 꿀재에서 희생되었다. 대구에서는 달성군 주민 10여 명이 유가면 용동 비슬산에 있는 대견사지(大見寺址)에서 희생되었다. 성주에서는 성주경찰서로 연행된 주민 48명이 1950년 10월 27일 선남면 선원리 강변에서 총살당했다.

 

경남

 

경북지역과 마찬가지로 경남지역의 주민들 역시 인민군 미점령지역이 많았음에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대규모로 저질러졌으며, 한 달 반에 걸친 낙동강 전선으로 인해 미군폭격사건에 의한 피해가 컸다. 반면, 부역혐의사건에 의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산청 단성지서는 청년 12명을 지서 인근에서 살해했으며, 화계지서와 금서지서도 같은 사건들이 저질러졌다. 합천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옥가장터’에서 희생되었으며, 가야지서로 연행된 매안리 주민들은 야로면 만대산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함양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구시골에서 희생되었다고 한다. 하동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하동읍 송림 옆 섬진강변 모래사장에서 사살되었으며, 진주경찰서로 이송된 주민들은 하동방면에서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경찰서로 연행당한 주민 30여 명은 개천면 원동골에서 희생당했다. 통영경찰서 유치장과 헌병대가 주둔한 항남동 멸치창고로 연행된 주민 200여 명은 명정동 뒷산과 통영 앞바다 등에서 총살당했으며, 도산면 주민 10여 명은 해군에게 끌려가 이끼섬 부근에서 희생되었다.

 

1․4후퇴 시기의 피해

 

중국의용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자 1950년 12월 15일 경기도 전 지역에서는 경기도경찰국의 후퇴 지시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23일 시민의 피난을 공식적으로 명령했으며, 12월 24일 서울시민소개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만 1951년 1월 3일까지 114만 명이 철수했다고 하는데, 이 때 6․25 전쟁 초기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이 일으킨 국민보도연맹사건과 같은 사건이 반복되었다.

서산경찰서 연혁사에는 당시 저질러진 사건의 배경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38 이북까지 전진하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거 남침에 따라 재차 후퇴를 하게 되었으니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이왕 후퇴하려면 적색분자를 일제히 살해하고 후환이 없도록 하라는 여론이 중천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당시에 다시 한 번 대량 학살이 선동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피해의 대부분은 인민군 재점령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경기지방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아산 배방면의 경우처럼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충청지방에서도 대규모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경기지역에서는 포천, 남양주, 강화, 여주에서, 충북에서는 음성에서, 충남에서는 서산, 아산에서 확인된다.

이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후퇴한 지역이었던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에서는 1950년 1월 3일경 김산이 일가족 7명과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유씨 집안 2가족 12명이 설운리 진설모루마을 다리밑에서 총격을 받아 김순배를 제외한 18명은 모두 사망했다. 남양주에서는 1950년 12월 15일 경기도경찰국의 철수 명령을 받은 양주경찰서가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으로 의심되는 주민 229명을 연행하여 12월 19일 오후 7시경부터 다음 날인 20일 오전 4시경까지 진건국민학교 뒷산에서 집단총살했다. 강화에서는 400명이 넘는 주민들이 ‘강화향토방위특공대’, ‘교동해병특공대’ 등에 의해 갑곶나루, 옥림리 갯벌, 월곶포구, 돌모루포구, 철산포구, 온수리사슬재, 선원 대문고개, 매음리 어류정(개학뿌리) 등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여주에서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하리 고려병원 뒤 양섬 강변에서, 능서면 매류출장소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고령토 구덩이에서 총살당했다.

충북에서는 음성 대소면 오산리에 1951년 1월 5일 주둔한 국군 6사단 19연대가 대소면 국민방위군에게 지시하여 부역자수자들을 대소국민학교로 소집시킨 후 1월 6일 오후 주민 59명을 대소국민학교와 대소중학교 부근에서 총살했다.

충남에서는 서산 주민 수십 명이 소탐산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아산에서는 신창지서가 1951년 1월 주민 20여 명을 총살했으며, 배방지서는 1951년 1월 6일 주민 183명을 인근 금광굴에서 총살했다.

 

2차 수복 후 피해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수복된 지역에서 또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여주에서는 1․4 후퇴 후 재수복 되자 1951년 2월 18일 마래리 변사복 등이 치안대로 활동하면서 양평에서 피난 온 조문환 등 일가족 6명을 매류리 공동묘지(고령토 구덩이 옆)에서 총살하였다.

충북 음성 대소면에서는 1951년 2월 10일 복귀한 대소면 국민방위군 대장의 지시에 의하여, 삐라 배포를 빌미로 주민 20여 명을 대소지서 유치장에 감금당했다. 이 중 8명이 대소면 국민방위군에 의하여 2월 23일과 2월 24일 두 차례에 걸쳐서 오산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법에 의한 부역자 처리의 실체

 

이승만 정부는 9․28 수복 후의 부역자 처리가 모두 재판을 통한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복 직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 대부분이 ‘즉결처분’이라며 임의로 총살을 당했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주민들 대부분이 「비상조치령」, 「국방경비법」에 의해 다시 사형을 당했거나 고문사․옥사당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던 것으로 보아 이승만 정부의 발표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발표였다.

실제, 판결문이나 ‘처형자명부’, ‘신원조회서’ 등 정부 공식 문서에서 ‘인민위원장으로 부역하다가 아군치안대에 의해 처형’이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승만 정부는 희생자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학살 행위를 공식적인 국가의 처벌행위로 여겼거나 또는 적어도 불법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부는 합법성을 가장하기 위해, 증거 없는 1심만으로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군사법정을 열었다. 그리고 이 법정은 떡장사를 인민위원회 서기로, 여맹위원장의 추대를 거부한 보도연맹원을 여맹위원장으로 조작하기도 했지만 상당 부분은 학살과정에 이용했던 진짜 부역자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이에 대해, 합동수사본부 지휘부 검사 오제도는 “10월초에 서울에 와서 보니까 부역자 처리가 엉망이에요. 완장을 두른 자치대원들이 경찰과 협동해 부역자들을 잡아들이는데, 알고 보니 이 자치대원들 중에 일부는 진짜 부역자들이 꽤 있어요. 이 자들은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 자기 죄를 아는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아 체포한 사례가 꽤 있었어요.”라고 하였으며, 합동수사본부 부장 김창룡은 1950년 10월 29일 담화를 통해 부역자였던 치안대원이 자기 죄상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여 우익인사를 체포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치안대원들은 자신들이 체포했던 주민들과 함께 형무소에 갇혀 사형당하기도 했다.

내무부 치안국 『경찰10년사』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연행한 부역자 총수는 검거인원 153,825명, 자수인원 397,080명으로 모두 550,905명에 달했다. 이 중 극소수 의식분자는 19,116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군사재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증언 자료에 따르면, 당시 군사재판은 즉결처분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1950년 10월 12일 연행된 김복연은 사직공원 총살형장에서 총살을 면했으며, 종로경찰서로 이송되어 검사의 신문을 받은 후 1950년 12월 2일 1회 공판만으로 형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1950년 12월 30일경 대구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죄수들을 세워놓은 채 산더미 같은 서류를 쌓아 놓고 누구 사형, 누구 무기징역형이라고 선고하는 모습을 목격했으며 본인도 이런 절차에 의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아 1974년 4월 6일이 되어서 출소했다고 한다.

 

희생자와 가해자

 

국군 수복 시 이미 인민위원회 간부 등 부역자 대부분은 월북 피신하였거나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하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로 대개 각 리의 주민대표자들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의 좌익 활동은 물론 정치․사회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주민들도 많았다. 특히 당시 주민들은 인민위원회 참가 혹은 협력행위를 좌익 활동으로 보기보다는 일반 행정에 대한 지원활동으로 보았으며, 그에 가담한 사람조차도 대부분 명시적․묵시적 압력에 의해 할 수 없이 일을 하게 된 것이므로 국군 수복 후 극형을 받게 될 행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소극적 협력을 한 사람조차 일부에 해당할 뿐이었으며, 대부분은 그의 가족 또는 친척이었다.

가해자와 관련해서 약간의 오해가 있는데, 이는 부역혐의사건을 ‘개인감정’에 의한 보복으로 보려는 경향으로 국가의 개입 이전에 개인이나 집안사이의 갈등으로 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에 있어서 초기부터 공권력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각 마을의 치안대는 경찰이 공식 복귀하기 전부터 잔류 경찰, 대한청년단 등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조직되었다. 대개 경찰이 공식 복귀하기 전까지는 주로 인민위원회 등 단체의 간부들을 연행 사건감금하는 활동을 주로 했으며, 함부로 주민들 헤치는 등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부역혐의자 학살은 일부 군 정보조직이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경찰조직과 그의 지휘를 받는 민간치안조직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리고 이들은 경기도 경찰국,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지구계엄사령부의 지휘․명령을 받고 있었다. 특히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 부역자 처리를 전담하는 기구로서 이 사안에 관한 한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간치안조직은 각 경찰서에 이해 명부가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각 경찰서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외에 부역자처리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각 지역 유지를 중심으로 민간차원의 시국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고양, 거제, 해남 등에서 이들의 활동이 확인되는데, 이들은 후원금 명목으로 스스로 걷은 돈을 경찰서에 전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희생된 부역혐의자의 재산을 수탈하여 넘겨 준 것이었다. 그리고 형식상 자발적인 민간인 조직이었으나 실제로는 각 경찰서 또는 군수 등 공식 행정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음이 확인된다.

합동수사본부는 이승만의 권력유지를 위해 마치 개인을 위한 조직처럼 활동하였으며, 활동의 대부분은 공포정치에 이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사조직처럼 활동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해 온 합동수사본부를 옹호하였다. 이승만은 합동수사본부를 해체하라는 주장에 대해 오히려 “합동수사본부에서 관민간 대소 불법행동과 제5열 공작 등을 수사하는데 많은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내용에 병통이 있거나 폐단이 있을 때까지는 이를 유지해야 되겠으니 총참모장에게 지휘해서 누가 무슨 언론으로든지 이를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인지 알아서 보고하며 경비계엄령이 있을 동안에는 경찰이나 검찰에서 파견한 인원을 소환하는 것을 못하도록 할 것을 지시”할 정도였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역사적․사회적 성격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지난 시절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 단면에 그치지 않고 있다. 부역자라는 낙인을 받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연좌제 속에서 고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실제 장기수로 10년 이상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심지어는 40년이나 지난 20세기가 끝날 즈음에서야 석방되기도 했다.

이 극단적인 야만의 잔재가 지금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국가보안법이라는 헌법 위의 악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이를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헌법적 기관인 검찰과 형법에 의해 국가 안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전국에 걸쳐 저질러졌다. 전국에 조직되어 있는 경찰이라는 국가폭력기구가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저질렀으니 당연히 전국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는 유형의 사건이다. 그러나 유족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운이 없어, 험한 세상을 만나 당한 우연한 사건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진실화해위원회 신청사건 9천여 건 중에 300여 건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학살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유족들이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사회는 지금도 말 못하는 유족들에게 더 많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야 시민에 대한 시민사회의 책임,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사회가 한발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