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기체폭파용 시한폭탄 달았던 미군비행기

구름위 2013. 11. 26. 17:22
728x90

 
 

12월 4일, 이란 국영텔레비전방송은 이란군이 동부 지역에서 영공을 침범한 미군의 스텔스 무인정찰기 RQ-170를 격추했다고 보도했다. 가벼운 손상을 입은 기체가 이란군의 통제하에 있다는데,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에 등장한 RQ-170무인기는 금년의 빈 라덴 사살행동을 위해 정보를 제공했다니까 이런 고성능비행기가 고스란히 이란의 손에 들어갔다면 미국이 골머리를 앓을 노릇이다.
 
아프가니스탄 주재 나토연합군은  격추된 무인기가 “가능하게” 미국의 것이라면서, 무기장비가 없는 정찰기로서 지난 일요일 느지막해 아프간 서부지역상공에서 정찰임무를 수행했노라고 주장했다.
 
나토군은 비행기의 모델명을 거들지 않았고,  “이 무인정찰기의 조종사는 비행기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고 그 상태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설명했으니 과연 서방다운 해석이다. 
정보를 대량 공개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정보를 엄밀히 통제하는 게 미국의 일관적인 방식이다. 1950년 겨울에 벌어진 장진호반 전투를 기록하면서 아무 중대의 아무개가 어찌고 아무 대대의 아무개가 어찌고 따위로 구체적인 인물들을 거들면서 실감을 조성했지만 사실은 손실을 극력 줄였다. 어떤 중국인은 미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미 해병대 1사단의 손실숫자를 아래와 같이 단언했다.
 
전사 83명
부상 후 사망 20명
실종 7명
부상 506명
합계 616명
 
중국어로 전해진 미국 측 자료에서는 해병대 사단이 중국인민지원군 9병단의 포위를 벗어나 흥남항에서 배에 오를 때 인수가 22215이고, 약 1000명 중상자들이 이미 비행기로 일본에 실려갔기에, 장진호에서 해병대 1사단의 순수 손실(전사와 실종)이 2000명을 초과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와 반대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손실은 극력 과대추산하는 터이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이후에 전문 다루려는데, 미국 측의 주장만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조선(북한)과 미국이 여러 해 진행해 온 실종자 찾기 행동이야말로 커다란 타격이 될 것이다. 미군이 제일 많이 실종된 고장이 바로 장진호반이고, 얼마 전에 조미연합행동이 다시 시작된다는 소식이 나온 다음 한 영국신문이 보도에서 실종자수를 2000명 정도로 꼽았으니 말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시인한 비행기 손실숫자도 우스울 지경으로 적었고 그런 숫자가 뒷날 공중전역사를 다룬 영국의 전문서적에 버젓이 실릴 지경이었다. 사실 미군은 사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불리한 소식들은 엄하게 통제했다.
 
1952년 2월 10일, 짜이후이(张积慧)가 “분사식 비행기의 Ace(중국에서는 흔히 王牌라고 표시한다) 비행사” 죠지 아 데비스를 격추, 격살하고 1953년 4월 7일 한더차이(韩德彩)가 “Ace비행사” 할로드 에드워 페시르를 격추시켜 상대방을 포로로 만든 사건들은 당시 굉장히 선전되었고 두 사람도 후에 승진을 거듭했다. 그런데 사실은 위의 두 미국인보다 더 유명했던 “3중 Ace비행사”도 격추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적기 5대를 격추하면 “Ace”로 불리니까 그 사람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15대 이상의 격추기록을 세웠는데 그런 인물이 격추됐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 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봉쇄됐다. 약 40년 지나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생애소개에서 어느 해 어느 날 반도의 서북부에서 일어난 공중전에서 명중되어 서해에 떨어졌다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미군의 정보를 꾸준히 추적해오던 중국군은 곧 교전기록을 뒤져서 그 해 그 날 그 지역에서 지원군 공군 만이 전투를 벌였음을 확인했고(전쟁당시 인민군 공군과 지원군 공군, 소련군 공군이 모두 많은 전투를 치렀다) 해당 부대의 전투실적에 “3중 Ace비행사”격추를 보탰다. 유감스럽게도 조종사를 격살하거나 생포하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이름난 적수를 격추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렇게 유능한 적수를 격추한 지원군 비행사도 승진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미군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1952년 여름 지원군 총부 직속 탱크병 지휘소 통신중대가 황해도 신계군 창양동에 주둔할 때 어느 날 깊은 밤에 적기 한 대가 저공으로 지나갔다. 이튿날 새벽에 지휘소의 통보가 왔다. 그 적기는 아군의 고사포사격에 격상된 것으로서 이미 남산 비탈에 추락했으니 사람을 파견하여 경계하라. 중대장 류우씽한(刘兴汉)이 통신원(연락병) 쩡시더(郑喜德)를 데리고 가보니 기체가 절반쯤 땅에 박히고 비행기에 남은 사람들은 이미 죽었는데, 부근의 농민들이 부속품을 뜯거나 물건을 뒤지고 있었다. 류우씽한은 백성들을 말려서 떠내보내고 연락병에게 경계를 명령했다. 이때 지휘소의 명령의 의해 자동차수리중대에서 파견한 고급 수리기술자들이 현장에 이르렀다. 발동기를 뜯어내어 발전에 쓰려는 것이었다. 류우씽한이 기술자들을 이끌고 비행기를 해체할 때 기체가 갑자기 폭발해 7명이 희생되고 연락병은 숱한 알루미뉴움 조각들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사후의 어느 집회에서 탱크부대 사령원 짜오제(赵杰)가 무척 유감스러워하면서 밝혔지만, 사고 전날 밤 고사포 대대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적기 조종사를 이미 사로잡았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아 제때에 정보를 얻지 못했다. 후에 심문에서 조종사가 털어놓은데 의하면 비행기는 이륙하기 전에 시한폭탄 2개를 장착했단다. 첫째로 비행기가 제때에 돌아오도록 요구하는 것이고 둘째로 위험에 처했을 때 기체를 폭파해버리기 위해서였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의 무차별 폭격은 그야말로 유명했다. 사람이던 짐승이던 어른이던 아이던 가리지 않고 폭탄을 던졌는데, 그중에서 일부는 귀항하던 비행기들이 “버린” 시한폭탄이 아니었을까? 폭탄을 장착한 상황에서의 착륙은 굉장히 위험하니까 아무데나 버리고 돌아가려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미군의 교훈 찾기 능력은 인정해줘야 한다. 필자가 전에 소개했다시피 1968년 1월에 일어난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에서 비밀자료들이 고스란히 조선인민군의 손에 들어가 골탕을 먹은 미군은 사후에 유사시에 비밀자료들을 없애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했고, 그 덕분(?)에 2001년 4월의 중미 비행기 충돌사건에서 정찰기가 중국 비행장에 착륙하기 전에 정탐기재와 자료들을 많이 파괴해 손실을 줄였다.
 
이번의 무인기 격추사건을 거쳐 미군이 무인정찰기에다가 자폭장치를 보태지 않겠나 짐작해본다. 그러면 비행기의 비밀은 유지할 수 있더라도 정찰기능은 많이 떨어지지 쉽다. 무게가 늘어날수록 기동성은 떨어지기 마련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