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호남지역의 한국전쟁에 전쟁은 없고 학살만 있었다

구름위 2013. 11. 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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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간을 통해 전쟁이 벌어지지도 않은 지역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전투도 없었는데 점령 당해버린 곳, 전쟁이 난 것인지 인민군이 점령을 하긴 한 것이지 느끼지도 못한 채 역도의 땅이 되어 버린 지역이 있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사』는 ‘7월 5일 이후 경부국도 연변의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옥천과 영동으로 철수함에 따라 호남지역이 무방비지역이 되었다. 그러자 7월 8일 제5사단과 제7사단을 새로 편성하였으나 신병으로 급하게 편성된 데다가 무장력이 전혀 없었다. 당시 전투가 가능한 부대는 민부대, 해병대, 오부대, 이영규부대 등 모두 합해야 1개 연대규모에 그쳤다’라고 적고 있다.

 

전쟁발발 전후의 호남지역 상황

 

영등포전선이 붕괴된 직후인 7월 5일 육군본부는 전투력을 유지하지 못한 사단들은 통폐합했다. 기존의 2사단, 5사단, 7사단을 해체하여 그 병력을 수도사단, 1사단, 2사단으로 통합했으며, 이 사단들로 1군단을 창설했다. 그리고 7월 8일에는 5사단과 7사단을 새롭게 창설했다. 국군 5사단은 본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제15연대를 순천에, 제26연대를 광주에서 새로 재편했다. 그리고 제7사단은 전주에 본부를 설치하고 제3연대를 전주, 제9연대를 남원에 편성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군대라고 부를 수준은 되지 못했다. 이들 중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의 수는 20%가 되지 못했으며 나머지 군인들은 목총으로 훈련하는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이 소총부대조차도 얼마 뒤 육군본부의 명령에 의해 모두 대전방어선으로 보내야 했다.

 

호남지역을 일부러 내준 것이라는 주장

 

육군본부 작전국장 강문봉은 인민군의 ‘부산 진격의 고삐를 늦추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호남지역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을 벌였는데, 알만한 장교들이 이 작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와 관련하여 헌병학교 김익순 대위는 “신태영 소장과 원용덕 준장이 전북에서 임의로 철수하여 대구로 갔다고 해서 문제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승만, 계인주, 8사단에 이어 다시 한 번 대구가 철수지역으로 등장한다. 커티스의 ‘낙동강전선’이 다시 주목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대전전투이래로 “전남북도는 안전한 지대이다”라는 풍문이 근거도 없이 나돌았다고 한다.

 

호남지역의 방어를 책임지던 신편 7사단과 5사단은 소총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연작전을 펴야 했다. 그 방법은 결국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전투를 치르는 척 했다가 바로 후퇴하는 방법으로 인민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어쨌든 강문봉이 주장하듯이 이것이 유인작전이었고 성공한 것이었다면 그 결과 인민군의 부산 진격이 늦춰졌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며칠이나 진격을 늦췄을까? 대전 함락이후 호남지역 전 지역을 통과한 인민군은 방호산 사단으로 불리는 6사단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남침에 동원된 인민군 10개 사단 중 1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단순하게 계산할 경우, 즉 인민군 9개 사단이 7월 20일 대전점령 후 경상북도 북부지역을 압박하면서 낙동강 전선에 이르기에 10여 일이 걸렸다는 사실과 인민군 1개 사단이 경남서부지역 낙동강전선에 이르기까지 11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비교해 본다면, 실제 호남지역으로 유인함으로서 얻은 시간은 불과 하루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고의든 아니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든 이승만 또는 미국의 호남포기과정은 전쟁의 반민중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호남지역 보도연맹사건, 나주부대 사건 등에서 입증되듯이 전투에 쓸 총과 총알은 대전으로 보내 없었다고 하면서도 학살에 쓸 총과 총알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전선의 호남진입 전 서해안지역 피해 현황

 

앞에서 살펴봤듯이 오산전투 후 미군과 국군은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일정하게 역할이 분담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부국도는 미군이 담당하고 그 동쪽은 국군이 담당하는 것이 그것인데, 그렇다면 경부국도의 서쪽은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곳도 일부러 내 준 것이었을까? 방기되다시피 했던 호남지역의 상황은 충남 서해안지역 상황의 연장선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이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과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즉, 이 지역을 방어하려 했는가, 국군이 존재했는가, 전투가 있었는가,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충남 서해안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시기는 7월 10일부터 15일까지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7월 7일 천안전투 직후였음을 알 수 있다. 사건은 아산, 당진부터 서산, 태안, 부여, 논산 등 전선의 남하와 함께 순차적으로 저질러졌는데 군인들이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주로 경찰에 의한 것이었다. 발생일이 확인되는 사건은 다음 <표>와 같다.

 

<표> 충남서부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발생 현황

발생일

지역

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7월 10일(추정)

아산

풍기리 냇가

경찰

7월 10일(또는 12일)

당진

한진포구

160(또는 360)

경찰

7월 10일(또는 12일)

서산

일람리 메지골

100

경찰

생존자 있음

7월 10일

태안

평천리 사기실재

100

경찰

화장

7월 10일

보령

옥서리 이어니재

경찰

7월 10일(추정)

청양

온직리 싸리티

경찰

7월 10일(추정)

홍성

용봉산 등

100

경찰

7월 10일(추정)

서천

보령 이어니재

경찰

7월 11일

예산

화천리 뒷산

12

경찰

재검거 학살

7월 14일

부여

백마강 구드레나루터

50

경찰

7월 15일

논산

300

경찰

 

이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중 특이한 경우는 예산에서 있었는데, 예비검속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지 않고 후퇴했다가 다시 돌아와 검거․학살했다. 예산에서는 1차로 100여 명의 주민들을 예비검속했으나 예산경찰서는 이를 그대로 두고 1950년 7월 7일 후퇴했다. 그러나 상부의 질책을 받고 복귀하여 일부를 다시 검속하게 되었다. 이때 다시 연행된 12명의 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7월 11일경 대술면 화천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인민군이 예산에 진입한 때는 7월 12일이다.

또 다른 경우로 충남 각 지역 주민 상당수가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희생되었는데 청양, 서천, 논산에서 이 사실이 확인되었다.

경부국도 서쪽인 충남 서부지역에는 인민군과 국군 측의 전투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며, 국군이 배치되었다는 기록 역시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국민보도연맹원 사건은 각 지역의 경찰에 의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호남지역에서도 반복되었을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호남지역의 전투와 민간인학살

 

호남지역에는 전북지구편성관구와 전남지구편성관구가 설치되었으며, 각각 신편 7사단과 신편 5사단이 있었다. 전북지역에서는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 동안, 전남지역에서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7월 16일은 충남 논산지역에서 미군이 후퇴하던 날이다.

 

국방부 자료에는 이 기간 국군․경찰과 인민군이 전투를 벌인 곳으로 7월 18일 이리 웅포나루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에는 7월 20일 전주에서 경찰수비대 200여 명과 교전, 영광․고창에서는 해병대와 교전, 7월 23일 나주 접경지역인 영광 삼학리에서 국군과 교전하는 등 3회의 전투가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호남지역에서 방어를 위한 국군과 인민군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으므로 이로 인한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각 경찰서가 있는 지역에서는 예외 없이 국민보도연맹사건과 형무소사건에 의해 민간인들이 집단희생당했다.

 

이리 군산(7월 16일 ~ 19일)

 

7월 16일 논산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전선이 전북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비무장 상태였던 국군 7사단이 재무장과 훈련을 위해 진주로 떠나자 300여 명의 장병들만 남게 되었다. 7월 18일에는 해병대가 웅포나루에 집결한 인민군과 교전했으나 탄약 부족으로 곧 군산으로 철수했고, 다음 날인 19일 인민군이 다시 군산에 상륙하자 목포로 후퇴했다.

 

국군과 경찰이 이리와 군산지역에서 완전히 후퇴한 때는 7월 19일로 나타나는데, 이 직전에 주민들이 집단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리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150여 명이 1950년 7월 9일과 13일 완주군 화산면 와룡리 새터마을에서 총살당했으며, 7월 16일에는 70여 명이 정읍 내장산 골짜기 등에서 희생당했다. 같은 시기인 7월 11일 이리시 철인동에 있는 이리역과 평화동 변전소 인근, 만경강 철교 등에 미 극동공군 소속 B-29 중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하여 이리역 근무자, 이리역 이용자, 이리역과 변전소 인근 거주민 등 91명 이상을 살해했다. 7월 15일에도 미 전투기 4대가 이리 상공에 나타나 40여 분 동안 철도와 만경강 철교를 공격했다. 폭격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오폭으로 보기 어렵다.

 

군산(옥구)에서는 군산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 일부가 군산시내 야산골짜기에서 총살당했고, 나머지는 경찰서의 후퇴가 임박했던 1950년 7월 19일 군산경찰서 유치장에서 총살당했다. 한편, 같은 시기인 7월 16일 군산형무소 재소자들이 군산비행장 굴(옥녀봉 화산) 등에서 헌병과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전주 김제 임실 남원(7월 19일 ~ 22일)

 

7월 20일 경찰혼성부대는 새벽 2시 전주에서 남원으로 철수했으며, 21일 다시 후퇴하였다. 당시 임실과 정읍에만 실제 군이 배치되어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인민군은 서부지역인 김제와 정읍 사이가 거의 개방되었으므로 7월 20일 저항 없이 태인에 진입했으며, 7월 21일 정읍에 주둔했던 해병 제3중대는 목포로 후퇴하였다. 7월 22일 정읍과 고부 저지선이 붕괴하여 고창으로 후퇴했다.

 

금산에서는 경찰서 유치장과 인근 연초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20일경 CIC의 지시를 받은 금산경찰서 소속 경찰들에 의해 트럭에 실려 금산군 부리면 현내리 윽박골 등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금산지역의 희생자 수가 1,500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무주에서는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던 300여 명이 1950년 7월 17일 무주읍 당산리 으름숯골과 무주읍 오산리 밤숯골 금구덩이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전주(완주)지역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 수백 명이 ‘황방산’과 ‘소리개재’에서 총살되었으며, 전주형무소에서는 정치범은 1,600여 명이 1950년 7월 4일부터 16일까지 형무소 인근 공동묘지에서 7사단 3연대와 5사단 15연대 헌병대에게 총살당했다. 전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전주형무소로 연행된 경우가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경우이다. 김제에서는 경찰서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던 100여 명의 주민들을 1950년 7월 16일부터 19일까지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동 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

 

임실에서는 1950년 7월 20일경 임실경찰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말티재와 임실읍 두만리 모래재에서 살해당했다.. 같은 시기 남원에서는 경찰서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던 100여 명이 헌병대에 의해 고죽동 황죽마을 야산에서 사살당했다. 부안에서는 부안경찰서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던 170여 명이 3차례에 걸쳐 총살당했는데, 제1차는 100여 명이 1950년 7월 6일 상서면 감교리 개암동 골짜기에서, 제2차는 40여 명이 7월 19일 줄포면 줄포리 후촌 골짜기에서, 제3차는 80여 명이 7월 20일 산내면(현 진서면) 운호리 여룬개 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정읍에서는 1950년 7월 초순경 일부 주민들이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구슬재에서 살해당했으며, 입암면 등천리 군룡마을 주민 10여 명은 7월 21일 새벽에 철모를 쓴 경찰(혹은 군인)에 의해 비로골짜기에서 집단희생당했다. 고창에서는 유치장 4곳에 갇힌 주민들 중 A급만 7월 20일경 고수면 부곡리 지수재 고랑에서 희생되었다.

 

광주 장성(7월 23일)

 

7월 23일 장성, 광주 등 전남지역으로 전선이 이동했으며, 각 경찰서는 23일 후퇴했다.

 

광주 지역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광주형무소 등에 감금되었다가 1950년 7월 9일부터 23일 사이에 국군 5사단 20연대 헌병대 등에 의해 광산군 산동교 인근 야산 불갱이고개(광산군 극락면 동림리)와 광주시 지산동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 수가 3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장성에서는 400여 명이 7월 7일 북이면 원덕리 갈재정상, 7월 12일 북상면(현재 북하면) 신성리 남창골, 7월 18일 삼서면 홍정리 가막재골짜기, 7월 20일 장성읍 단광리 밤실재 인근 야산에서 희생되었다. 화순에서는 연행된 주민들이 7월 21일경 보성군 복내면 예재터널 인근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영광에서는 1950년 7월 10일 경 군남면 검덕산과 7월 12일 경 영광읍 입석리 깃봉재에서 20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되었으며, 7월 중순 월산리, 화천리 보도연맹원 등 40여 명의 주민들이 화천리 석장마을에서 집단희생되었다고 한다. 함평에서는 함평여중(현재의 함평교육청 자리) 강당에 감금된 주민들이 목포형무소로 이송된 후 7월 13일 목포시 인근 바다에서 총살당했다. 7월 21일에는 학교면 죽정리와 고막리 사이 얼음재에서, 7월 23일에는 나산면 구산리와 대동면 강운리 사이 넙태에서 희생되었다. 갑종은 목포, 을종은 얼음재, 병종은 넙태에서 희생된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 나주에서는 예비검속당한 주민 70여 명이 나주경찰서 유치장과 무덕전(경찰서내 교육장)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15일 5사단 20연대 헌병대에 의해 나주군 영산포읍 동수리 온수골에서 집단희생되었다.

 

목포에서는 경찰 후퇴 전날인 1950년 7월 23일 목포교도소에 수용되었던 무안, 함평 등 목포 인근지역에서 예비검속된 주민들이 전남도경 경비선 ‘금강호’에 실려 신안군 비금면 해상에서 수장되었다. 당시 희생된 재소자는 1천여 명, 국민보도연맹원은 4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무안, 신안 등 지역에서도 피해사실이 확인되나 구체적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영암에서는 영암읍 마을회관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7월 15일 10여 대 트럭에 실려 금정면 연소리 덤재로 끌려가 희생되었고, 7월 22일에는 금정면 연보리 차내마을 뒤 야산에서 집단 희생되었다.

 

구례 순천 보성(7월 24일 ~ 26일)

 

7월 24일 국군은 곡성, 구례, 순천, 벌교에만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나주, 영암이 점령당했다. 하지만 7월 25일에 구례, 순천, 벌교가 점령당했고, 26일에는 국군과 경찰이 해상으로 마산과 부산을 향해 퇴각했다.

 

구례에서는 갑종 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7월 14일 담양군 문학리 옥천나들 골짜기에서 희생되었으며, 토지면 주민들이 7월 24일 인근 섬진강변 모래밭에서 총살되었다. 곡성에서는 7월 16일에서 7월 19일 사이에 200여 명의 주민들이 곡성읍 도림사 인근 야산에서 총살당했으며, 오곡지서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 등은 오곡면 침곡리 ‘바람재모퉁이’와 곡성읍 신기리 ‘당등’에서 총살당했다. 보성에서는 7월 14일부터 23일까지 기러기재, 덕고개, 버드재 등에서 저질러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보성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한 전체 희생자의 수가 5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벌교경찰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순천 송광면 “돌더미”에서도 총살당했다고 한다.

 

고흥에서는 고흥경찰서 유치장과 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19일에서 7월 22일 고흥읍 봉북재 야산, 포두면 골짜기, 풍양면 벼락산 등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광양에서는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17일경 경 순천시 서면 압곡리 구랑실재(또는 반상쟁이 고개)와 광양에서 하동방향의 고개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순천에서는 경찰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7월 21일부터 24일까지 서면 학구리 ‘송치재’, 서면 압곡리 ‘구랑실재’ 등에서 총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순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 수를 최소 150여 명으로 판단하였다. 여수에서는 최소 110명의 주민들이 여수경찰서와 각 지서에 감금되었다가 7월 16일과 7월 23일 경 여수시와 남해군 사이의 무인도(속칭 애기섬)에서 총살당했다. 마산으로 후퇴하던 2사단 25연대 헌병대가 여수옆 의 보도연맹사건을 저질렀다.

 

완도에서는 각 섬에서 예비검속 되어 완도경찰서에 감금된 주민들이 7월 17일 완도읍 제1부두에서 한국식량공사 소속의 ‘장영호’에 실려 목포항의 해군에 인계된 뒤 목포시 인근 바다에서 희생되었다. 이어 7월 22일경에는 군내리 김금예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완도읍 망남리 재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각 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완도군 내 바다에서 희생되었다. 완도경찰서는 9월 중순경 완도읍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950년 9월 14일에는 완도경찰 등 전남 서남부 경찰부대가 완도군 청산도와 여수시 거문도로 후퇴하면서 완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중이던 20여 명의 주민들을 청산면 앞 바다에서 수장시켰다. 장흥에서는 7월 22일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 바다에 두 사람씩 손이 묶인 채 빠뜨려진 후 사살되었고 또 다른 주민들은 안양면 해창저수지 인근 야산에서 희생 되었다. 인민군은 7월 28일 장흥에 진입했다고 한다.(장흥군지) 진도에서는 진도경찰서에 감금된 주민들이 7월 17일 진도군내 바다에서 희생되었다. 『진도군지』에 의하면 진도 보도연맹원 10여 명이 경비정 ‘진도환’에 실려 서쪽바다에서 총살당했다.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희생규모는 더 컸을 것으로 보이지만 더 이상 조사되지 않았다. 해남에서는 연행된 주민들이 해남경찰서와 해남식량영단 창고(혹은 공회당) 등에 감금되었다. 해남경찰서는 7월 16일 이들을 어란항에서 끌고 나가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 갈매기섬에서 살해했다. 한편 또 다른 주민들은 해남식량영단 창고에 구금 되었다가 7월 22일 해남군 화산면 맹원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해남 보도연맹원의 수는 600여명에 이르렀다.

 

학살이 임무였던 나주경찰부대의 활동

 

전투가 없었던 호남지역에서 순전히 학살을 목적으로 한 경찰살인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를 ‘나주경찰부대’라고 불렀다.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 직후 해남과 완도지역에서 인민군으로 위장한 채 주민들을 기만하여 학살하였다.

해남에서는 1950년 7월 16일과 22일, 완도에서는 7월 17일과 23일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해남경찰과 완도경찰은 각각 7월 23일과 7월 24일 부산과 금일읍 소랑도로 후퇴했다. 그런데 다음 날인 7월 25일 해남과 완도경찰이 수백 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후퇴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나주경찰부대가(이를 몰랐다면 인민군으로 위장한 나주부대 경찰과 해남 완도경찰 간의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므로) 경찰신분을 숨긴 채 해남에 들어와 인민군 행세를 하며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전날까지 후퇴하던 경찰에게 가족들을 학살당한 유족들과 주민들이 반신반의하면서 소집되었다. 주민들 소집이 끝나자 변복한 경찰들이 신분을 밝히며 학살하기 시작했다.

 

해남에서는 이런 수법에 의해 1950년 7월 25일 해남읍 주민 40여 명이 학살당했으며 마산면 상등리에서도 15명의 주민이 학살당하는 등 모두 60여 명이 희생되었다.

 

완도에서는 마찬가지 수법에 의해 1950년 7월 25일 완도읍 죽청리 주민들이 학살당했으며, 1950년 7월 26일 완도중학교에 소집된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1950년 7월 27일 청산면 도청항과 청산국민학교에 모였던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이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저질렀던 경찰이, 이에 대한 보복감을 갖고 있었을 주민과 유족을 의도적으로 선동하여 다시 한 번 학살한 것으로 반인륜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화순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1950년 7월경 능주국민학교에서 열린 인민군 환영대회에 참가했던 주민 3명이 소속을 알 수 없는 경찰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사건 일지

 

사건

희생지

희생자수

가해

비고

7월

6일

부안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상서면 개암동

30

7일

장성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북이면 갈재

30

9일

이리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완주 와룡리

70

10일

영광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군남면 검덕산

30

희생자 수 추정

11일

이리역 미군폭격사건

철인동

91

미 공군

12일

영광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영광읍 깃봉재

200

장성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북상면 남창골

100

희생자 수 추정

13일

이리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완주 와룡리

80

함평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목포 바다

30

희생자 수 추정

14일

구례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담양 옥천나들

30

희생자 수 추정

15일

나주 국민보도연맹사건

영산포 동수리

70

영암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금정면 덤재

300

10여대 트럭

16일

이리 국민보도연맹사건(3차)

정읍 내장산

70

전주형무소사건

형무소

1,500

7, 5사단

여수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애기섬 등

30

희생자 수 추정

해남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의신면 갈매기섬

30

희생자 수 추정

17일

무주 국민보도연맹사건

으름숯골 등

300

광양 국민보도연맹사건

서면 구랑실재 등

100

완도 국민보도연맹사건(1차)

목포 앞바다

30

희생자 수 추정

진도 국민보도연맹사건

진도 바다

100

희생자 수 추정

18일

장성 국민보도연맹사건(3차)

삼서면 가막재

100

희생자 수 추정

19일

군산 국민보도연맹사건

유치장 등

100

이리, 군산 등 철수

김제 국민보도연맹사건

부안 상서면 개암동

100

김제 미군폭격사건

김제역 부근

2

미 공군

부안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줄포면 후촌골자기

40

곡성 국민보도연맹사건

곡성읍 도림사

15

16일부터 19일까지

20일

금산 국민보도연맹사건

부리면 윽박골 등

150

전주, 김제 등 철수

임실 국민보도연맹사건

오수면 말티재 등

60

남원 국민보도연맹사건

고죽동

100

부안 국민보도연맹사건(3차)

산내면 운호리

80

고창 국민보도연맹사건

고수면 지수재고랑

100

희생자 수 추정

장성 국민보도연맹사건(4차)

장성읍 밤실재

100

희생자 수 추정

21일

정읍 국민보도연맹사건

성내면 구슬재 등

100

희생자 수 추정

함평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학교면 얼음재

100

희생자 수 추정

화순 국민보도연맹사건

보성 예재터널

100

희생자 수 추정

22일

영암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금정면 차내마을

100

희생자 수 추정

고흥 국민보도연맹사건

봉북재 등

100

19일부터 22일까지

완도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완도읍 망남리재

100

희생자 수 추정

장흥 국민보도연맹사건

수문리 앞바다

30

해남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화산면 맹원

600

23일

함평 국민보도연맹사건(3차)

나산면 넙태

200

영암경찰 등 철수

광주형무소사건

불갱이고개 등

3,000

5사단

목포형무소, 목포 국민보도연맹사건

비금도 해상

1,400

해군

보성 국민보도연맹사건

기러기재 등

500

14일부터 23일까지

여수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애기섬 등

200

24일

구례 국민보도연맹사건(2차)

섬진강변

100

완도경찰 철수(추정)

순천 국민보도연맹사건

비촌리 등

150

21일부터 24일까지

25일

해남 나주부대사건

해남읍 등

60

27일

완도 나주부대사건

죽청리

100

25일부터 27일까지9추정)

 

소결, 민중을 적으로 여긴 전쟁

 

미군의 후퇴정책으로 보아 국군과 미군의 호남포기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인이 아니라 병력과 무기가 없어 포기한 것 뿐 아니라 처음부터 호남지역 방어계획이 없었거나 방어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승만의 초기 부산 도주, 한강교 폭파와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강문봉이 회고하는 유인작전은 낙동강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시간벌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쟁 시나리오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아래에서 벌어진 자기 국민에 대한 학살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호남지역에서의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전투의 관계는 다른 지역의 경우와 달리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호남지역의 특징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투의 주도권이 국군과 경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침략의도를 갖고 있는 공격자가 아니라 후퇴계획을 갖고 있는 방어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기이한 전투였던 것이다. 둘째는 전투가 없었으므로 후퇴일정에 맞추어 체계적, 계획적으로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1, 2, 3차 등 체계적으로 학살이 이루어졌으며, 희생 일정이 대체로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에 가담한 가해 측 군인이나 경찰관들은 인민군이 점령할 경우 이들이 적에게 협력할 것이므로 미리 살해했던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승만으로서는 전쟁 상황에 놓인 국민 대부분이 점령군을 지지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적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는 지역의 주민들에 대해 피난 계획은 세우지 못할망정 학살계획을 세우는 것은 국가 범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고,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 못하는 권력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 지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