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작전이었다. 1996년 9월15일 밤 북한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 안인진리 앞바다로 침투하면서 시작된 끈질긴 추격전은 무려 51일 만에야 막을 내렸다. 침투 공작원 25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아군 8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4명이 목숨을 잃는 등 우리 측 피해도 컸다. 더욱이 그 와중에 미국에서는 로버트 김이 체포되고 러시아에선 최덕근 영사가 피살되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
1978년 11월25일 오후 6시, 경기도 안양 인근 수리산. 해가 짧은데다 산속이다 보니 일몰시각까지 30분이나 남았지만 주위를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그렇게 어둠이 깔린 수리산을 특전사 1개 중대가 소리를 죽이며 수색하고 있었다. 특전사는 일반 보병과 편제를 달리하기에 1개 중대라고 해도 병력은 겨우 10명을 상회한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 침투한 북한 공작원 3명이 군의 포위망을 뚫고 어느새 안양까지 북상했다. 더 이상 북상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간첩작전본부는 정예 특전사 병력을 출동시킨 것이다. 선두에 선 선임하사가 뭔가 이상을 감지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정지 신호를 보냈다. “뭡니까?” 중대장이 자세를 낮추며 다가왔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습니다.” 선임하사가 낙엽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용케도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공작원의 발자국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 않소?” 중대장은 신중했다. “발자국이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2~3인이 빠른 속도로 뛰어간 흔적입니다. 이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마당입니다. 등산객일 리 없습니다. 북한 공작원이라고 봐야 합니다.” 선임하사는 당장 쫓아가자고 했지만 중대장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상대는 북한의 최정예로 꼽히는 정찰국 소속의 공작원들이다. 섣불리 행동하다 포위망이 뚫리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꾸물대면 꼬리를 놓친다. 상부에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할 것인가. 아니면 중대 독단으로 추격할 것인가. 잠시 고심하던 중대장은 쫓아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담배촌 쪽으로 빠져나가려 할 텐데, 병력을 반으로 나누겠소. 내가 추격할 테니 선임하사는 대원들을 인솔하고 담배촌에 먼저 가서 매복하고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선임하사는 대원 중에서 6명을 지목하더니 앞장을 섰다. 대원들은 M16 소총을 꼭 쥔 채 선임하사의 뒤를 따랐다. 출동할 때 잔뜩 긴장했던 특전사 대원들은 막상 교전이 임박하자 평정을 되찾았다. 상대가 정찰국 소속의 공작원이라고 해도 대한민국 특전사가 그들을 제압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대원들은 부지런히 선임하사의 뒤를 따랐다. “너! 너! 저기! 그리고 너! 너는 저기!” 선임하사가 매복지점을 정해주자 대원들은 신속하게 매복에 들어갔다. 선임하사의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곧 북한 공작원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전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인기척이었다. 대원들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추격하던 중대원들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지원병력에게 위치를 알리기 위해 쏘아 올린 신호탄은 공교롭게도 매복 대원들 앞에 떨어졌고 가뭄으로 바짝 마른 나뭇잎에 불이 옮겨 붙었다. “불이다!” 갑작스러운 산불로 매복 대원들은 허둥댔고 그 사이에 북한 공작원은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긴급 출동한 특전사는 북한 공작원을 체포 혹은 사살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한 달 넘게 활보하다 월북 1978년 11월4일 광천읍 학성리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정찰국 소속 공작원 3인은 인근의 군사시설을 탐지하던 중 나무를 주우러 산에 올라온 부근 주민들에게 발각되자 그들을 살해하고 북상, 도주했다. 군은 즉각 비상경계망을 펼쳤지만 북한 공작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들은 홍성과 예산, 그리고 온양과 천안을 거치며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민간인 여러 명이 피살됐다. 긴급 출동한 군은 안양 수리산에 이어 부평, 김포에서도 공작원들과 마주쳤지만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여러 차례 포위망을 빠져나간 공작원들은 김포군 운양리 천현부락 뒷산에서 북에서 내려온 안내원을 만나 12월4일 자정 무렵 감암포에서 강을 건너 무사히 북으로 귀환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지역사단과 서부전선에 주둔한 해병부대, 특전사와 전투경찰, 그리고 예비군까지 총동원돼 한 달 이상 충청도부터 군사분계선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공작원들은 보란 듯 포위망을 벗어나 월북한 것이다. 공작원 3명이 무려 한 달이 넘도록 충청도와 수도권 일대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다 다시 북으로 돌아간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1968년에 청와대와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간첩이 남파됐을 때도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때는 휴전선에서 가까운 곳이거나 험한 산악지대여서 이번과 경우가 달랐다. 공작원들을 놓친 데는 군의 예상이 틀린 것도 큰 몫을 했다. 낮에는 비트를 파고 숨어 있다가 밤에 산골짜기를 타고 도주할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북한 공작원들은 환한 대낮에 대로로 이동한 것이다. 도주하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일지에 의해 공작원들은 평택에서 병점까지 기차로 이동했고 관악산 입구 매점에서 빵을 사 먹은 사실이 밝혀졌다. 완전히 허를 찌른 행동이었다. 탈출경로가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문책이 뒤따랐고, 해당부대는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문책을 당한 부대 중에는 지휘관 이하 부대원 전원이 삭발을 하고 매일 10㎞를 구보하며 복수를 다짐한 곳도 있었다.
wag the dog 산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군부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도 걷히기 시작했다. 한국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동안 북한은 세습을 마무리지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김정일의 후계자 승계는 속도를 더했다. 김정일은 1990년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면서 사실상 세습을 완성했다. 김일성은 노동당 총비서와 국가주석 자리만 차지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과 세습을 달성한 북한. 그런데 사회주의의 패배는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세기 내내 지속되던 이데올로기 대립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자유진영이 이기고 공산진영이 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해 저절로 붕괴할 것이라 했는데, 그전에 사회주의가 먼저 무너져버린 것이다. 자본주의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사회주의의 허구성에 비해서는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소련은 해체됐고 공산권 국가들은 개혁과 개방을 서둘렀다. 개혁과 개방만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지만 북한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 식’을 내세우며 폐쇄를 고집했다. 섣불리 문을 열었다가는 체제가 붕괴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동독이 맥없이 서독에 흡수통일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본 터였다. 이대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체제를 유지할 수는 없을까. 자연히 비대칭전력이 북한 지도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비대칭전력은 불리한 전세를 한번에 역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무기다. 그리고 비대칭무기의 대표는 핵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동북아의 안보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된다. 영변의 핵시설에서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면서 한반도에 다시 위기가 몰려왔다. 북한은 원자로임을 들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미국은 여차하면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할 기세였다. 북한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
부상(浮上)한다. 천천히 후진하라!”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은 스크루를 역회전시키며 천천히 후진했다. 함장 정영구 중좌는 부상해서 후진하는 쪽을 택했다. 그쪽이 암초를 피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면서 잠수함은 심하게 요동쳤다. 함장은 잔뜩 긴장해서 좌우를 살폈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암초들을 찾아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둔탁한 느낌과 함께 잠수함이 그대로 멈춰 섰다. 해안을 50m 남겨놓고 암초에 걸린 것이다. 우려하던 일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앞으로 빼라!” 함장이 허둥대며 전진을 명령했다. 그러나 엔진을 최대로 가동시켜도 잠수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암초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함내에 침묵이 흘렀다. 날이 밝으면 잠수함은 눈에 띌 것이다. 해상처장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7일 2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더 지체할 수 없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잠수함을 포기하고 육상으로 탈출한다.” 해상처장은 기밀서류 소각을 명했다.
생사를 건 추격전
1996년 9월18일 새벽 1시17분, 안인진리 해안 경계초소. 파도가 허연 입을 벌리고 쉴 새 없이 밀려오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해수욕객들로 붐비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해변은 어느새 썰렁한 바닷가로 변해 있었다. 이런 날은 야간 근무가 더욱 지루하다. 초병은 아직 한참 남은 교대 시간을 원망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저게 뭘까. 해안가에서 불빛이 보였다. 이렇게 파도가 센 날 밤에 누가 저곳에…? 혹시 배가 염려된 어부가 자다가 달려 나온 것일까. 한참을 지켜보던 초병은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때가 1시35분경. 비슷한 시각에 안인진리 해안도로를 운행하던 택시기사가 수상한 자들이 해안을 서성이고 있다고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만하면 발견과 신고는 신속하게 이뤄진 편이다. 그렇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 현장 정찰을 실시한 것까지는 좋은데,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면서 상부 보고가 지체된 것이다. 대간첩작전을 총괄하는 합동참모본분에 보고가 들어온 시각은 오전 4시15분. 합동참모본부는 오전 5시를 기해 강원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령했는데, 그때는 잠수함 승조원들이 이미 산속으로 도주한 다음이었다. 초기 대응은 늦었지만 이후의 조치는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합동신문조가 현장으로 급파되어 상황 분석에 나섰고, 예상 도주로에 따라 저지선이 신속하게 펼쳐졌다. 예상 도주로는 1968년에 울진·삼척, 그리고 1978년에 광천으로 남파된 무장간첩들의 복귀로를 분석해서 작성했다. 반면에 북한 공작원들은 이전에 남파된 적이 있는 공작원들로부터 탈출로를 교육받고 있었다. 북한 공작원들은 평안남도 평원군 어파리에 있는 북한 정찰국 남파공작원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데, 그곳 교관들은 남파 경험이 있는 공작원들로 구성돼 있었다. 교관들 중에는 여러 차례 남파된 사람들도 있는데, 교도대지도국 군단장 임태영 중장은 무려 27번이나 남파돼 공화국 이중영웅이 된 사람이다. 검증받은 탈출로를 따라 필사의 탈출에 들어간 북한 공작원과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대간첩작전본부. 쫓고 쫓기는 생사의 추격전이 1996년 9월에 강원도 강릉 일대에서 벌어졌다. 승조원 11명 자결 1996년 9월18일 오후 4시, 강릉시 연곡면 청학산. 잠수함을 탈출한 공작원 12명이 숨을 헐떡이며 청학산 기슭을 오르고 있었다. “저게 노인봉, 그리고 저쪽이 매봉인 것 같습니다.” 지형지물을 파악하던 부처장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잠수함을 포기하고 상륙한 지 6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이미 제1차 저지선을 돌파하고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있었다. 이대로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면 휴전선에 이르지만, 승조원들의 얼굴에서 희망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찰조와는 달리 정식으로 침투공작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그들은 이미 탈진한 상태였고 무장도 변변히 갖추지 못했다. 1차 저지선은 용케 빠져나왔지만 계속해서 저지선을 돌파할 자신은 없었다. 수색대는 이미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정찰조는 빠져나갔을까요?” 함장이 물었지만 해안처장인들 알 턱이 없었다. 미리 상륙한 정찰조와 안내조 5명 외에도 상륙해서 도주하는 과정에서 8명이 흩어졌는데 그들의 생사도 궁금했다. 헬기 소리가 나자 승조원들이 일제히 몸을 숨겼다. 벌써 발각된 것일까. 헬기 여러 대가 날아오더니 능선에 병력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달아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갖가지 상황에 대비해 여러 종류의 훈련을 받은 그들이지만 걸어서 북으로 복귀하는 경우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해상처장이 비장한 얼굴로 승조원들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으로써 장군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내가 앞장설 테니 모두 뒤를 따르라.” 말을 마친 해상처장이 머리에 권총을 갖다 댔다. 일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해상처장이 쓰러졌다. 승조원들 모두 울먹이며 무릎을 꿇고 앉자 함장 정영구 중좌가 그들의 머리에 총을 대고 차례로 방아쇠를 당겼다. 승조원들은 ‘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고 마지막으로 함장만 남았다.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결하려던 정영구 중좌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산속을 향해 내달렸다. 승조원 11명이 탈출을 포기하고 청학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즈음 그들과 떨어져서 혼자 산속을 헤매던 이광수 상위가 생포되면서 비로소 공작원들의 소속과 규모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총인원은 25명. 1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1명이 생포됐다. 19일로 넘어가면서 전과가 이어졌다. 오전 10시15분 강릉시 강동면 단막골 망덕고개에서 특공연대가 3명을 사살한 데 이어 오후 4시10분에는 긴급 출동한 특전사가 칠성산에서 도주하는 승조원 3인을 사살했다. 비슷한 시각에 철벽부대가 강동면 산성우리에서 1명을 더 사살했는데 그는 조원들과 헤어진 정찰조장으로 밝혀졌다. 미리 상륙해 있던 정찰조와 안내조는 잠수함이 좌초된 것을 알고 도주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조장은 조원들과 헤어져 단독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작전이 계속되면서 속속 전과가 보고됐다. 어차피 잠수함 승조원들과 안내조는 북으로 복귀할 능력이 없다. 문제는 남은 정찰조 2인. 그들은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도주할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대간첩작전본부는 특전사에 그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아군 피해도 속출 1996년 9월21일 오전 9시, 강릉시 칠성산 부근 982고지. 헬기에서 로프가 내려지면서 특전사 대원들이 익숙한 솜씨로 로프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섰다. “빨리 움직여!” 선임담당관 장기용(가명) 상사가 대원들을 독려했다. 공작원들이 칠성산 쪽으로 도주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긴급출동한 길이다. 현지까지 남은 공작원들은 안내조장과 안내원, 함장과 기관장, 그리고 문제의 정찰조 2인이다. 레펠링을 끝낸 특전사 대원들이 신속하게 전투대형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헬기로 정상으로 이동해서 밑으로 훑고 내려가는 수색은 효과가 큰 만큼 위험도 따른다.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른다. 상대가 북한 정찰조라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출동한 특전사는 바로 18년 전 안양 수리산에서 북한 공작원을 눈앞에서 놓친 그 부대.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낸 끝에 마침내 명예회복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982고지에서 목격된 공작원들이 정찰조라고 확신했다. 두 번의 패배는 없다. 장 상사는 대원들을 3인 1조로 편성하고 수색에 들어갔다. 예측이 틀리지 않다면 정찰조는 이 부근에 비트를 파고 어두워질 때까지 꼼짝 않고 은신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측이 너무 정확했던 것일까. 예상보다 빨리 교전이 벌어졌다. 982고지 9부 능선에 이른 특전사는 바위 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정찰조 2명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거리는 불과 7~8m. “엎드려!” 장기용 상사는 고함을 지르며 얼른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뒤따르던 대원도 재빨리 피할 곳을 찾아 자세를 낮췄다. 그런데 후미에 섰던 대원이 마땅한 엄폐물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총격전이 이어졌고 중대장이 지원병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정찰조는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중사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최초의 아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다.
최덕근 영사 피살
9월28일에 성산면 보광리에서 안내조장 유림 소좌가 일출부대에 의해 사살되면서 잠수함 공작원 색출작전은 1단계를 마감했다. 북한은 방송을 통해 잠수함은 조류에 밀려 표류한 것이며 공작원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천배백배 보복할 것임을 천명했다. 정찰조를 제외한 전원이 이미 사살되고 체포된 마당이다. 군 지휘부는 수색전에 동원된 부대들을 복귀시켰다. 그러면서 대간첩작전본부 지휘관도 군사령관에서 군단장으로 하향조정됐다. 언제까지 대간첩작전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그리고 어쩌면 북한이 저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휴전선에서 제한적 도발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찰조는 이미 제3 저지선까지 돌파했을 것으로 예상됐고 수색에 동원된 병력은 대폭 축소됐다. 이제부터는 포위와 매복 대신 추격에 주력해야 한다. 합동신문조는 정보 수집에 매달렸고 특전사는 출동태세를 완비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도 1978년처럼 공작원을 북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특전사 대원들은 이번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출동명령을 대기했다. 10월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한이 호언하던 천배백배 보복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10월이면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다. 오후 6시밖에 안 됐지만 거리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최덕근 영사는 퇴근 걸음을 재촉했다. 완성하지 못한 보고서를 아파트에 돌아가서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공작관인 최덕근 영사는 최근 북한의 나진·선봉지구 및 중국의 훈춘과 두만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 하산을 다녀왔다.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북한은 적극적으로 마약 밀수에 매달리고 있었다. 최 영사는 마약을 조사하던 중에 북한이 위조 달러 제조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지로 달려간 것이다. 위조지폐 제조는 마약 밀조와 차원이 다르다. 국가의 안보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범죄다. 미국 정보당국은 진폐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정밀 위조지폐, 이른바 슈퍼노트의 출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던 최 영사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웬 남자가 바짝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남자의 손이 더 빨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최 영사는 칼에 찔렸고 아파트 계단에 쓰러져 숨을 거뒀다. 부검 결과 ‘네오스티그민브로마이드’가 검출됐는데 이는 북한 공작원들이 휴대하는 만년필 독침에 사용되는 독물이었다.
마지막 기회 도대체 정찰조 2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9월21일 칠성산에서 특전사의 추격을 뿌리친 정찰조는 그 후로 종적이 묘연했다. 이미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귀환한 것일까. 북한에서 조용한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리무중이던 정찰조의 행방은 10월8일 오대산 재미재에서 파악됐다. 정찰조가 우연히 마주친 민간인 3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것이다. 오대산에서 종적을 감춘 지 8일 만의 일이다. 일단 월북하지 못한 것이 확인됐으니 아직 기회는 있다. 특전사는 더 상세한 정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출동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10월16일에 두 번째 정보가 들어왔다. 정찰조가 인제군 군축교 부근 도로에서 민간인에게 목격된 것이다. 군이 긴급 출동해서 도강을 저지하고 나섰지만 정찰조의 대응이 더 빨랐다. 차단을 예상하고 남쪽으로 우회해 신남리를 거쳐 양구대교 부근에서 강을 건넌 것이다. 정찰조는 그 와중에서도 군축교와 3군단 사령부를 촬영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두 사람의 정찰조는 거듭되는 포위 속에서도 여전히 북으로의 복귀를 자신하고 있었다. 이틀간에 걸친 차단과 매복이 허사로 돌아가자 군은 초조해졌다. 그 상황에서 생포된 이광수는 기자회견에서 정찰조의 북한 귀환을 장담하고 나섰다. 소양강을 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철책선뿐.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장기용 상사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지역대장에게 달려갔다. “현장으로 출동하기로 했소.” 지역대장의 말에 장기용 상사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뒤를 쫓아가서는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정찰조는 틀림없이 소양강을 우회해서 도강할 것이다. 칠성산에서 놓쳤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 현장으로 출동하는 것보다는 미리 양구대교로 가서 매복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지휘부의 판단은 그렇지 않았다. 아쉽지만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특전사 대원들은 비장한 각오로 헬리콥터에 올랐다. 아무리 저들이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체력이 많이 소진됐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라 경계병들의 눈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분신과도 같은 K2 소총을 꼭 쥐며 결전의 순간에 대비했다. 이번 출동도 허사로 돌아가면 지역대장에게 특공조 편성을 강력하게 건의할 생각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심한 탓일까. 후미 경계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돌아보니 진지 주변 제초작업을 하던 병사가 낫을 들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병사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정찰조의 단검이 날아갔다. 군단 직할 산악특공연대가 급히 병사가 피살된 용대리 연하동 일대로 급히 출동했다.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3군단 기무부대장이 동행했다. 연하동 일대는 6·25전쟁 전에 북파된 호림부대가 남쪽으로 귀환할 때 경유한 곳인데 이제는 반대로 남파공작대가 이곳을 거쳐 북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새벽 4시28분. 날이 바뀌어 11월5일이 됐다. 현장에 출동해서 탄피를 살핀 기무부대장은 북파 공작원의 소행임을 확신했다. 정황으로 봐서 멀리 달아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병력을 증원해서 일대를 완벽하게 포위해야 한다. “공작원 소행이 틀림없어, 즉시 증원을 요청하시오.” 기무부대장이 특공연대 정보장교에게 지시를 내리는 순간 총성이 울리며 두 사람이 쓰러졌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정찰조가 총을 발사한 것이다. 아군의 응사가 시작됐고 지프에 거치된 106㎜ 무반동포가 불을 뿜으며 일대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출동병력이 급히 추격에 나섰지만 정찰조는 이미 현장을 빠져나갔다. 기무사 대령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수색에 나선 특전사 대원들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군사분계선이 지척이다. 여기서 놓치면….
장 상사의 손가락이 빨랐다 날이 밝으면서 수색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부근에서 핏자국이 발견됐다. 정찰조가 106㎜ 무반동포에 부상을 당한 듯했다. 그렇다면 아직 연하동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장기용 상사는 그렇게 판단하고 골짜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선불 맞은 짐승은 사냥꾼에게 달려든다. 정찰조가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면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장 상사는 예상 은신 지점을 향해 천천히 접근해 들어갔다. 특공조를 편성할 여유도 없었다. 장 상사는 단독으로 추격에 나서기로 했다. 복수를 다짐한 것은 특전사 대원만이 아니었다. 정보장교, 병사를 잃은 특공연대원들도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그러면서 묘한 경쟁심이 일고 있었다. “…!” 살기가 전해왔다. 장기용 상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순간 총성이 울렸는데 총탄이 날아간 곳은 반대 방향이었다. 은신해 있던 정찰조가 맞은편에서 접근해오는 수색대를 보고 발사한 것이다. 곧 정찰조와 특공연대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장 상사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정찰조 둘이 예상 지점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장 상사는 숨을 멈추고 조준에 들어갔다. 타깃이 정확하게 조준선에 들어왔다. 하지만 상대는 2명이고 특수훈련을 받은 정찰조다. 살기를 느낀 것일까. 순간 정찰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얼른 총구를 장 상사에게 겨누었다. 그러나 장 상사가 더 빨랐다. 총성이 2발 연속해서 일었고 정찰조 두 사람은 차례로 쓰러졌다. 이것으로 특전사는 18년 전의 빚을 갚았다. 11월5일 오전 10시30분, 정찰조 2인이 용대리 연하동에서 사살되면서 강릉에 침투한 공작원 25명이 51일 만에 전부 사살 또는 생포되었다.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예비군을 포함해서 무려 160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출동했고 8명이 전사했다. 민간인도 4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도 3명이나 됐고 의무경찰과 예비군도 각각 1명씩 목숨을 잃었다. 강릉 잠수함 사건은 애초부터 무장간첩 남파를 목적으로 한 침투는 아니었다. 잠수함이 좌초되는 바람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장간첩 남파와 주민 선동은 더 이상 공작수단이 되지 못했다.
이후 남쪽에도 변화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 남과 북은 화해 무드로 들어갔고 북한을 보는 국민의 눈도 많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전쟁의 위험에서 해방된 것일까. 속단은 금물이다. 북핵과 장거리 미사일이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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