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한국전,,,아, 현리전투.....

구름위 2013. 9. 2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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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현리전투.....

 

현리 전투는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0일 사이에 인제군 현리일대에서 3사단과 9사단으로 구성된 3군단이 중공군과 북괴군에 포위되어 방태산,창촌, 광원리, 을수재등을 거쳐 하진부까지 분산 철수한 육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기록한 전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전인 16일과 17일의 상황을 요약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0만분의 1 또는 30만분의1 지도를 참고하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당시 부대 배치 상황

3군단(장 유재흥 소장) 지휘소 하진부

9사단(장 최석 준장) 지휘소 용포
좌전방 28연대(장 이창정 대령) 지휘소 다닥구미
우전방 30연대(장 손희선 대령) 검우석
사단예비 29연대(장 차갑준 대령) 하답
3사단(장 김종오준장) 지휘소 현리
좌전방 18연대(장 유양수 대령) 박수터
우전방 22연대(장 장춘권 대령) 회전동
사단예비 23연대(장 김종순 대령) 중답

군단의 서쪽은 미 10군단 예하의 한국군 7사단과 지경선을 이루고 있었음.

5월 16일 16:00 한 7사단 지역에 대한 공격으로 예하 5연대가 붕괴되었는데 이 사이를 뚫고 공산군이 침입함으로써 비극이 시작되었다. 원래 3군단장은 하진부, 창촌, 율전, 방내리, 상남리,오마치,하남리, 현리로 이어지는 군단 주보급로의 대부분이 미 10군단 관할하에 들어감으로써 주보급로의 안전보장이 인접군단의 작전성패에 의존하게됨을 우려하여 9사단 29연대로 하여금 1개 대대를 오마치에 배치케 하였으나 미 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의 항의와 미 8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29연대 2대대를 5월 11일 철수 시킨 바있었다.

그런데 17일 00:30 경 수 미상의 북괴군이 오마치로 침투하여 도로 장애물을 설치했는데 7사단에서는 이들의 규모를 1개 중대 정도로 판단하였으나 이를 9사단이나 3군단에 통보하지 않았다.

9사단에서는 좌인접 7사단의 방어선이 붕괴되어 사단 좌측방이 노출되기 시작하자 17일 03:00에 작전회의를 열고 야포, 차량등을 오마치 남쪽으로 빼내고 병력도 현리 용포 선으로 철수 시키기로 결정하였다.

9사단 예하부대가 04:00에 하달된 철수 명령을 받고 사단 지휘소가 있는 용포에 집결하였으나 용포 서쪽 고지에서 요란사격이 있자 9사단장은 29연대장에게 1개 대대를 차출하여 이를 격퇴케 하고 그 밖의 병력은 현리로 북향 이동토록 조치하였다. 이러는 동안 현리에는 3사단, 9사단, 7사단5연대 병력이 내린천변에 집결하게 되었다.

17일 동 틀 무렵 9사단의 공병 및 보급차량이 오마치에 접근하는데 총성이 울리자 1개 분대 규모의 정찰대를 차례로 올려 보냈으나 모두 돌아 오지 않았다. 오마치 차단을 확실히 알게된 9사단은 29연대 3대대에 오마치 공격을 명했으나 소극적 공격으로 임무를 달성할 수 없었고 이에 9사단장은 3사단장에게 오마치 공격을 요청했으나 3사단 또한 예하연대에게 다른 임무를 부여하여 가용병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러던 중 15:00에는 2개 연대 이상의 중공군이 오마치 일대에서 행동하는 것이 관측되었다는 7사단 수색대의 보고가 있었고 7사단 3연대 2대대가 상남리에서 오마치로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16:00 현리 오마치 간에 투입된 공산군은 1개 사단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18:00에는 2개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오마치 남쪽 고사리재의 7사단을 공격하여 붕괴 시켰다)

17일 14:00 현리에 날아 온 군단장은 3사단과 9사단의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열고 양 사단이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오마치를 탈환하고 포위망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철수간 군단 지휘권을 3사단장에게 이양한 후 보급 및 인접군단, 상급본부와의 혖조를 위해 15:30경 현리를 떠나 군단 지휘소로 돌아 갔다.

양 사단장은 전투력이 강한 18연대와 30연대를 돌파 부대로 선정하고 30연대가 먼저 용포 오마치 간의 서쪽 고지를 공격하여 오마치 인근에 이르면 18연대가 추월 공격하여 오마치를 돌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어둠이 깔릴 무렵 9사단장은 18연대 지휘소에 찾아 와 이번 작전에 자신 있는가고 물었고 연대장은 9사단장이 돌파작전에 회의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9사단장은 용포 주변의 교전 상황으로 보아 야간 공격으로 10 KM의 목표지대를 탈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당시 사단장을 수행하던 군수참모 김재춘 중령은 후일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리니까 사단장이 부대 지휘를 포기하고 방태산으로 올라 갔다며 그 때 최석 준장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

30연대의 공격을 기다리던 18연대는 공격 기미가 없고 30연대가 매화동 골짜기에서 방태산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단장에게 보고하였다.

3사단장은 방태산,용포 상남리 북방고지를 연결하는 삼각지형에서 우군 반격시까지지 全面방어를 실시 하자는 고문관 에머리치 대령의 건의를 받아 들이지 않고 18일 03:30에 방태산 경유 창촌으로의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많은 부대가 임의로 철수를 개시하고 있었고 차량을 포함한 주요 장비는 각급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파괴되고 있었다.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어내고 사병들은 화기나 무전기를 내버리기도 하였다. 사병들은 누구의 지휘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장교들 또한 이러한 병사들을 지휘하려 하지 않았다.상하부대의 통신은 완전히 두절되고 지휘체계마저 완전히 무너져 오합지졸로 전락하였으며 탈주로인 방태산, 창촌, 광원리, 을수재에서 굶주림과 중공군, 북괴군의 매복 추격 등으로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