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한국전 이야기 파로호 전투

구름위 2013. 9. 2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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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이야기 파로호 전투

 

국군 6사단 소속의 우리 본대대는 용문산 방어전투에서 大勝(대승)을 거두고, 일로 北進(북진)하여 이곳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에 도착하였다. 우리 목적은 화천 발전소를 공격하는 데 있었으며, 그곳은 적의 군단 보급창과 사령부가 있는 적의 심장부였다.

우리 대대는 용문산 앞 설악전투에서 敵(적)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대응, 적을 섬멸하였다. 우리 대대는 비록 그 전투에서 승리를 했지만 근 20여 일간의 전투에서 대대장 이하 20여 명만이 살아남았으며 게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5일간이나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굶었으므로 우리 대대의 잔여 병력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조금의 휴식도 없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도착한 장소엔 우리 연대 중 각 대대에서 차출된 병력이 약 100여 명 가량이었으며 그중 부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으로 10명씩 한 조로 분대단위를 조직, 7개 분대가 편성되었다. 각 분대는 중공군에게서 노획한 말(일명 노새) 한 필과 60㎜ 박격포 1문, 경기관총 각 1문씩을 지급받았고, 또한 개인 화기에 총탄을 수령, 만반의 전투태세를 완료하였다.

그후 지프로 연대장이 도착, 全(전)대원을 집합시켜 놓고 일장의 작전명령을 지시하였는데 훈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대는 구만리 발전소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한다. 구만리 발전소는 38선 이북지점에 위치해 있고, 그곳은 敵의 전기 공급원이며 전략기지이다. 만약 우리가 구만리 발전소를 탈환한다면 금화 및 금성평야까지 공격하는 데 교두보가 될 것이다. 또한 중공군은 그곳에 군단 본부를 설치하고 막대한 군사장비 및 보급품 저장소로 이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全대원들에게 정종(술) 한 잔씩을 따라 주시는 한편 한 사람씩 악수하면서 『용감히 싸워 꼭 구만리 발전소를 탈환하길 바란다. 죽지 말고 구만리 발전소에서 꼭 만나자』고 힘 있게 말씀하셨다.

야간 행군

우리는 오래간만에 쇠고기 국물에다 저녁식사를 배불리 먹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석양이 서산에 기울 무렵 출동을 개시했다. 그 당시 춘천 발전소로부터 구만리 발전소까지의 도로는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만리 발전소에서 뻗어나온 산맥을 타고 칠흑 같은 밤길을 재촉하며 행군했다.

구만리 발전소까지의 거리는 약 32㎞로, 산은 울창한 숲과 험한 낭떠러지가 많아 전진하는 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얼마나 행군했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반쯤 이상이나 행군한 지점부터 산이 가파르고 악산이라 통과하는 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가까스로 오른 산등성이를 고삐를 당기고 뒤에서 채찍질을 하면 탄약을 실은 노새는 앞발을 버둥거리면서도 힘차게 올라왔다. 이를 본 우리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기 때문에 중공군이 산악전에 노새를 대거 이용한 것 같았다.
우리는 담배도 못 피우며 소리 죽여 행군을 하였는데 계속되는 산봉우리를 넘어도 또 산이 계속되었다. 아마도 몇 수십 봉우리를 넘었을까. 드디어 우리 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적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어둠이 걷히기 전에 무사히 발전소 가까이 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각은 새벽 5시께인 것 같다.

그 당시 대대장은 우리 대대의 대대장이 아니고 타부대에서 온 장교였다. 대대장은 全분대장을 집합시켜 놓고 작전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로 아래 북쪽으로 약 1㎞ 지점에 구만리 발전소가 있고 그 뒷산 너머엔 댐에 의한 호수가 있다. 또한 저 북쪽에서 바로 아래로 흐르는 강이 있다. 우리의 공격 지점은 발전소 건물의 중심이다』라고 하시면서 각 분대장에게 일일이 공격 대기지점을 지시하였다. 이때 우리 분대는 강건너 북쪽 약 500~600m 지점을 지정받았다. 그리고 대대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각 분대는 한 시간 내로 공격 대기지점까지 각별히 주의하여 도착해야 한다. 만약 적에게 발각되면 이 작전은 실패할 것이며 우리 대대는 전멸될 것이다. 아무쪼록 작전이 무사히 성공하길 바란다. 목적지에 도착 후 권총 신호탄 세 발을 발사하면 총공격을 개시하고 60밀리 박격포와 경기관총은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발전소 건물을 집중 사격하도록 하며 全분대원들은 단독무장으로 돌격해라. 점령 후 대대장 위치는 제일 큰 건물로 지정하니 연락해라』 하시며 각 분대장에게 성공을 다짐하는 악수를 힘있게 하셨다.

분대장인 나는 분대를 인솔하여 공격 대기지점으로 출발하였다. 우리 분대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계곡을 따라 하산하였는데 얼굴이 가시덩굴에 찢기면서 피가 흘렀고, 후미에서 노새를 끌고 오는 대원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적군에게 발각될까봐 숨을 죽여가며 물이 허리춤이나 차는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고 나니 어찌나 춥던지 아래 윗니가 저절로 부딪쳐 떨릴 지경이었다. 우리는 물에 젖은 옷을 말리기는커녕 짤 사이도 없이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며 행군을 계속했다. 빽빽이 들어선 참나무 숲 사이의 비탈진 길을 기어오르기란 너무나도 힘든 苦行이었다.

우리 분대는 악전고투 끝에 목적지인 공격 대기지점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공격개시 시간이 지연될까 봐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이 60밀리 박격포와 경기관총을 신속하게 장착하였으며 분대원도 만반의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우리가 대기한 산은 해발 약 300~400m의 高地(고지)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대대장의 권총 신호탄이 오르기만 기다리는 긴장되고 적막한 시간을 보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동쪽 저 멀리 붉은 해가 호수 한가운데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이 가시기 시작하더니 구름인지 안개인지 강을 따라 지나갔고 구름이 지나가고 잠시 끊어진 사이 강줄기가 보이더니 강가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중공군이 세수하는가 하면 수백 마리의 말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지 않은가. 또한 수십 대의 소련제 지프차와 가스 화물차가 산재해 있었으며 대공포 같은 고사포가 은폐도 하지 않은 채 산재해 있었다.

중공군과 마주치다

우리 분대원들은 눈앞에 전개된 상황을 지켜보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100여 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어떻게 쳐부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는커녕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백에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됐는지 모르지만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뜨리는 총성이 울렸다. 대대장이 발사한 신호탄이 화염을 뿜으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더니 연거푸 세 발이 발사되었다. 우리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경기관총을 미친 듯이 발사하였고 박격포는 집중 포격을 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각 高地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집중 사격하였고 발전소에 떨어지는 포탄은 계곡에 메아리쳤다.

폭음과 기관총 총성에 놀란 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사방 팔방에서 쏘아대는 아군 사격에 놀란 적군은 갈피를 못 잡고 혼비백산하였다. 예상치 못한 아군의 공격에 중공군은 얼마간 대항 사격을 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중지되었다. 아마도 아군의 집중포격으로 희생자가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분대원을 인솔, 명령받은 공격지점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산 밑에는 발전소 진입로가 있었으며 도로에서 강쪽으로는 경사가 심한 동시에 강물의 수심도 깊었다. 우리는 가까스로 渡江(도강)하여 약 30m쯤 갔을까. 큰 묘 같은 흙더미가 강 연안부터 발전소까지 수백 개가 산재해 있었고, 그 흙더미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곳에서는 수증기 같은 김이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나는 분대원을 散開(산개)해 대기시켜 놓고는 副(부)분대장을 내 뒤에 따라오게 한 후 첫번째 무덤 같은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적군의 토치카였으며 김이 나는 입구 쪽으로 총을 겨누면서 들여다 보니 15~16명 가량의 중공군이 오들오들 떨면서 웅크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서툰 중국말로 『거수래래』 하였다. 그 순간 탕- 하는 총성이 바로 내 등 뒤에서 났다. 돌아보니 중공군 장교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副분대장이 사살한 것이었다. 내가 호 속을 들여다보고 적에게 나오라고 했을 때 뒤쪽에서 중공군이 튀어나오며 권총으로 나를 겨누었기에 사살했다고 한다.

나는 6명 가량의 분대원을 바로 20m 뒤에 배치, 경계하게 한 다음 副분대장과 분대원 2명과 함께 선두에서 토치카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 참호에서 보통 15명 정도의 중공군 포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참호라 중공군을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우선 2개의 참호에서 잡은 20여 명의 중공군 포로를 일일이 무장 해제시키고, 副분대장과 분대원 3명에게 인솔케 한 후 큰 건물 쪽으로 보냈다. 나는 나머지 분대원과 합세하여 다음 참호를 수색, 20여 명의 중공군을 더 생포하여 대대장이 있는 큰 건물로 갔다.

수천 명의 중공군 포로와 지샌 밤

대대장은 무전기를 이용하여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는 것 같았다. 총성이 산발적으로 계곡을 메아리치는 가운데 각 분대에서 잡아온 포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어느 분대는 중공군 포로를 잡아온 족족 창고에 가두었다.

정오가 지나도록 우리는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해 기진맥진했고 배가 고팠다. 하는 수 없이 팔뚝만한 굵기의 길다란 자루 속에 있는 중공군의 비상식량인 미숫가루로 허기를 채웠다.

그 후 우리는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1㎞ 내에 있는 강변의 수색은 물론 발전소에 인접한 건물의 수색작전을 계속하였다. 우리 분대는 중공군의 참호를 거의 다 수색하고 나서, 한 건물을 집중사격한 다음 문을 열어보니 수십명의 중공군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중공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군복 및 신발인 일명 「상해 농구화」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으며, 또다른 한 창고에는 미숫가루가 쌓여 있었고, 또다른 창고에는 수수포대가 쌓여 있었다.

우리는 포로를 창고에 가두고 철저히 경계하였으며,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수천명의 중공군을 잡아놨으니 후송해 가라고 재촉했다. 또한 밤이 되어 적이 반격해 올 경우 현재의 아군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할 것이라며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현재 춘천댐에서 아군과 교전 중이며 적의 저항이 심해 시간이 걸릴 것인 즉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철저히 경계하라는 연대측의 답신을 받았다.

날은 곧 어두워졌으며 각 분대는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체코식 기관총과 M1 소총, 카빈총 및 실탄을 장치, 적의 공격을 대비한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중공군 포로가 건물을 뛰쳐나와 우리를 덮칠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중공군 포로들은 우리 부대원이 소수 인원인지 모르는 듯 창고에 조용히 있었고 그날 밤은 중공군의 공격 없이 무사히 날이 밝았다. 날이 밝아오자 중공군 가마솥에는 우리가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말고기가 끓었고, 경계병력을 제외한 全대원은 오랜만에 말고기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후 일부 경계병력을 제외한 각 분대는 인근 수색에 출동되었고, 우리 분대도 수색을 계속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 얼마 안되어 댐이 보였고, 강 건너 저쪽에는 서너 채의 초가집이 보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재빨리 강을 건너 民家(민가)를 우회하여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가만히 살펴보니 말이 두세 마리씩 여기저기 나무에 묶여 있었다. 한 열 마리 정도였을까. 아침이라 중공군이 추워서인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중공군이 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가 총을 쏘라고 지시도 하지 않았는데 꽝꽝…하고 사격이 개시되었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포로 5명, 말 10필을 체포, 노획했다.

중공군 보급품으로 갈아입다

해가 지기 전에 본대로 무사히 돌아와 보니 중공군 포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 당시 다른 분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분대도 제대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늦은 봄인데도 불구하고 겨울 군복을 여름 군복으로 갈아입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군복은 눈, 비에 젖었을 때 불에 말리느라 군데군데 구멍이 났으며, 찢어진 구멍에서 솜이 튀어나와 말이 군복이지 거지나 다를 바 없었다. 또한 목욕은커녕 속옷을 빨아입을 새가 없어 「이」가 득실득실하였으며, 우리는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창고에 쌓여 있는 중공군 내의와 군복으로 갈아입고 깨끗한 상해농구화로 갈아 신었다. 갈아입은 후 상쾌한 그 기분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대장을 제외한 아군은 철모와 총을 빼놓고는 중공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대대는 敵地(적지) 내에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창고에 있는 수수를 삶아 먹게 되었는데 메수수라도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밤이 되기 전에 우리 분대는 개인호 속에서 경계임무에 들어갔다. 우리 대대는 발전소를 점령하는 데 10여 명의 戰死者(전사자)가 났기 때문에 현재 인원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반경 500m 거리에 개인호를 파고 경계를 하였다. 그러나 여러 날 전투에 시달려서인지 눈이 감기고 졸음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 10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총성이 들리며 강 건너에서 적의 기관총탄과 따발총탄이 불과 40~50m 정도의 거리에서 아군을 향해 날아왔다. 곧이어 사방에서 중공군이 물 밀듯 쳐들어오고 적군의 수류탄도 날아와 터졌다. 우리 아군은 이에 질세라 적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까지 분전했다.

결국 날이 새기 전에 우리는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적이 버리고 간 戰死者는 수십 명이었고 아군의 戰死者는 불과 10여 명 내외였다.

우리는 주야간 수색작전과 방어전투에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낮에는 경계병을 제외한 인원은 모두 다 곯아 떨어졌다. 그러나 기다리는 지원부대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으로써 대항하니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그후 2일 정도는 적의 반격 없이 무사히 지냈다. 그러나 그날 어둠이 깔리기 전 초저녁에 적의 병력이 발전소를 향해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 정보의 출처는 미군인지 아군인지 몰라도 항공정찰에 의한 정보였던 것 같다.

그 정보가 입수되자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대원들은 모두 지쳐 있고 적의 병력에 비해 아군 병력은 소수여서 대항할 수 없으니 전멸하기 전에 지원군을 빨리 보내줄 것을 애걸하다시피 요청했다. 그러나 연대장의 답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군 2연대는 현재 춘천 발전소에서 총공격 중이고, 美8군이 야간 항공공격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받았다』고 하셨다.

중공군, 강을 건너기 시작하다

대대장은 분대장들을 집합시켜 놓고 연대장의 명령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려주었고 우리 분대장들도 대원 모두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우리는 이 밤이 지나면 아군 지원부대가 도착한다는 생각을 하니 용기가 생기고 힘이 치솟아 올랐다.

우리가 가져온 소총탄이 모두 떨어졌으므로 중공군에게서 노획한 무기 중에서 쓸 수 있는 무기는 각 분대마다 잔뜩 갖다놓고 전투준비를 했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강에 접한 고수부지에 개인호를 파고 잡풀로 위장해서 적이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얼마만큼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강 건너 산 중턱에서 적의 체코식 기관총탄이 비오듯이 날아왔으며 적의 82밀리 박격포탄이 연거푸 날아와 작렬했다. 우리는 대항하지 않고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적이 유효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적은 대대장 위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기관총을 발사했다.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에 심적 동요 없이, 적의 소총부대가 와서 우리와 한판 접전한 후 승패를 가리길 바랐다.

그러던 중 동쪽 산너머에서 아군 전투기가 날아와 조명탄을 수십 개 떨어뜨렸다. 그로 인해 칠흑 같은 밤은 대낮같이 밝아졌고 뒤이어 날아온 7~8대의 艦載機(함재기) 무스탕은 우리 주위를 선회하며 접근해 오는 중공군에게 사정없이 폭격을 감행했다. 무스탕은 아군이 위치한 건물 주변을 제외한 곳에 기총소사했으며 좀 떨어진 곳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화염이 치솟았다.

그러던 중 얼마 안 있다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중공군이 허리만큼 되는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나는 『사격 개시』하면서 구령을 외쳤다. 「드르륵」 아군의 체코식 기관총이 사정없이 발사되고 대원들은 한 놈이라도 놓칠세라 사격을 계속했다. 우리 분대는 한 시간 가량 적과 맞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적을 물 속에 水葬(수장)시켜 버렸다. 우리 대대는 날이 샐 때까지 적의 치열한 공격을 방어했다. 나는 이날 밤 전투에서 적의 따발총 사격에 콧등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상이 아니어서 다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미군 무스탕은 날이 샐 때까지 조명탄을 떨어뜨리면서 중공군의 근접을 견제하기 위해 폭탄과 기관총탄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적의 총성은 멎었고 강 어귀에는 적의 시체가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강을 건너오던 중공군을 많이 죽였는데 강물에 떠내려 갔는지 시체는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우리 분대는 다행히 한 명의 전사자도 없었으며, 나를 빼놓고는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는 또 살았다!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가슴속에서 울려 나왔다.

적군과 아군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밤새껏 요란했던 총성은 멎고 서서히 새벽이 되었다. 언제 그 치열한 전투를 했느냐는 듯이 고요한 가운데 바위에 부딪쳐 흐르는 강물 소리와 이따금씩 말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지축을 흔들며 나타난 美軍 탱크

우리 대원들은 기진맥진하였고 밥을 구경한 지 5일이나 된 듯했다. 우리는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비상식량 미숫가루를 몇 움큼 털어넣고 강물을 떠 마시고는 허기진 배를 달랬다. 하늘에선 아군 전투기가 이따금씩 우리 주위를 선회하며 중공군에게 기총사격을 가했다.

우리 대원들은 한두 명의 경계병을 놔두고 곯아 떨어졌다. 어찌나 잠이 오던지 쏟아지는 졸음을 견딜 수 없었다. 일생의 단 하룻밤도 잠을 편히 못 잔 것 같았다. 얼마나 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대원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적이 再공격하나 싶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군 탱크 20여 대가 지축을 흔들며 강 건너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와- 하고 목청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감격이란 말로 다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일이었다. 우리는 대대장을 위시하여 全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탱크 위로 올라가 미군과 악수하며 기뻐했다.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듯이.

그후 약 서너 시간 뒤에 20여 대의 트럭에 탑승한 아군 지원부대가 도착하였다. 바로 2연대 병사들이었다. 그중에는 대구 제10교육대 동기생도 있었고, 우리 동네에서 같이 出征(출정)한 고향 친구도 있었으며 우리 연대에서 사귄 전우도 있었다. 나는 어깨를 얼싸안고 웃고 울었다. 나는 전우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때처럼 절실하게 실감해 본적이 없었다.

탱크 부대를 뒤따라 연대장은 연대 참모들과 같이 도착했는데, 연대장께서는 푸른 안경을 쓰고 지휘봉을 손에 든 채 지프차에서 하차하셨다. 대대장께서는 연대장님이 도착하는 걸 미리 알았는지 마중나와 악수했다. 그 일행 중에는 6사단 정훈부 사진 기자가 있어 사진도 찍었으며 또한 종군기자도 끼어 있었다.

연대장께서는 우리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들 모두 다 중공군 복장에 신발까지 상해제 농구화를 신었기 때문이다. 연대장께서는 우리 분대원과 일일이 악수하시며 다음과 같이 치하하셨다. 『잘 싸웠다. 용감하다. 구만리 발전소 탈환작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우리 국군 전투사에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군들이 구만리 발전소를 점령했기 때문에 全軍이 북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후 우리는 지원부대와 합세하여 막대한 戰果(전과)를 올렸다. 우리 3대대는 병력을 보충받아 예비대로 발전소에 주둔하였다.

破虜湖

그 당시 부산에서 발행한 신문과 6사단 「블루스타」 정훈 주간지에서 발표한 戰果는 다음과 같다.

▲중공군 포로:1만5000명 ▲말:100필 ▲소련제 고사포:4문 ▲소련제 지스 및 가스차:20여 대 ▲일제 야포:2문 ▲수수:수천 포대 ▲중공군 군복 및 내의:여러 창고
이상과 같은 戰果로써 우리 6사단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중공군 포로를 많이 잡았다고 해서 구만리 저수지를 「破虜湖(파로호)」라고 명명하셨다. 지금도 화천 발전소 뒷산 「파로호」 도로 옆에는 李承晩 대통령이 친필로 쓴 전승비가 있다.

그후 대대 수색대의 敵情보고에 의하면 백암산에 중공군 주력부대가 포진해 있으며 그 戰力(전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구만리 발전소 점령 즉시 포로가 후송된 것은 물론이려니와 창고에 쌓여 있는 중공군의 식량인 수수와 미숫가루는 모조리 실어가 버렸다. 또한 노새·말도 다 후방으로 실어가 버렸으나 그 중 몇 마리는 숲속에 몰래 숨겼다가 중대 단위로 잡아먹기도 하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軍 보급 행정에 부정이 행해지고 있었다. 일반 노무자들은 중대 단위로 음식을 만들어 각 소대로 운반했는데 그들은 M1 실탄통, 양철통에다 밥을 담고, 국물은 기관총 탄통에 담아서 양손에 들고 다녔다. 그러나 밥과 부식의 양은 코끼리가 비스켓을 먹는 정도의 소량이어서 대원들은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렸다. 그로 인해 중대장은 취사반장에게 기합까지 주었는데 취사반장은 『보급품인 쌀 한 가마가 명색이 한 가마이지 반 가마도 채 안 들어 있으니 어찌합니까』 하고 중대장에게 하소연조로 해명했다.

어느 날 나는 (그 당시 나는 정훈병이었음) 중대장에게 불려 갔는데 하시는 말씀이 『他중대는 민가를 수색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갖다 먹는다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면 대원들의 허기를 다소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물으셨다. 중대장께서 나에게 지시하는 것 같아서 『제가 가겠습니다』 하니 중대장께서 쾌히 승낙하셨다.
나는 곧 노무자 1명을 데리고 아침 9시경 구만리 발전소 댐 쪽으로 거슬러 올랐다.

댐에 올라가 보니 물은 滿水(만수)되지 않은 채 3분의 2정도만 차 있었다. 댐 위를 건너 북쪽 연안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강 어귀에는 팔뚝 길이보다 더 큰 잉어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총을 쏘아 몇 마리 잡고 싶었으나 총성이 나면 적군에게 발각될까봐 그만 두었다. 호반은 동쪽으로 넓게 퍼져 있었으며 우리는 금강산 쪽에서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이따금 강 어귀에 있는 민가를 뒤져보긴 하였으나 먹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 중대 위치에서 약 4㎞ 정도는 온 것 같다.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 민가를 찾았으나 강벼랑이 심해 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좌측 골짜기 쪽에 민가가 있을 것 같아 그리로 올라갔으나 큰 산이라 계곡이 깊었다. 다행히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어 골짜기 중턱쯤 올라서니 화전민이 사는 집이 보였다. 그 집은 울타리도 없는 一字(일자) 오두막집이었다.

우리는 다리가 아파 민가를 바라보며 앉아 쉬고 있었는데 중공군(그 당시 떼놈이라고 불렀음)이 부엌에서 물을 떠가지고 나와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그때는 구만리 발전소를 점령한 지도 1개월 이상 지났으며 또한 소강상태여서 敵의 전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때였고, 때문에 중공군은 보기 힘들었다.

중공군 포로가 내미는 만년필

나는 식량 대신 중공군이라도 잡아 가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같이 온 노무자에게 중공군을 잡아올 테니 그간에 적이 대항하면 나를 엄호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무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중공군을 처음 봤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는 카빈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살금살금 다가가 찢어진 창살 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 보니 2명의 중공군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골격이 장대한 놈이었고, 다른 한 명은 조금 아까 물을 떠갖고 들어간 놈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전투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적군에 대한 공포심이 없었다. 나는 문을 열고 총을 겨누면서 『거수래래』 하고 소리쳤다. 중공군은 깜짝 놀라 벌벌 떨면서 손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나는 물을 떠가지고 들어갔던 조그만 놈에게 방 안에 있는 총을 갖고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엉거주춤 따꽁총과 따발총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키가 5척도 되지 않는 떼놈(물을 갖고 방안에 들어갔던 중공군)은 내가 무서웠던지 눈물을 흘리면서 손짓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귀중한 물건을 놓고 왔나 싶어 들어갔다 오라고 손짓했다. 그때 문이 열려진 상태라 방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는데 그는 방바닥에 있는 구질구질한 보따리를 뒤져 무언가 손에 쥐고 나오는 것이었다. 혹시 나는 소형 수류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차하면 총을 쏘리라 마음 먹었다.

그는 방 안에서 나와 손에 쥐고 온 물건을 내 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나는 황급히 그것을 꺼내 보니 가는 면실로 짠 주머니 속에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나는 만년필을 꺼내서 뚜껑을 열어 보니 펜촉에는 「메이드 인 상하이 14K」라고 씌어 있었으며 잉크도 묻어 있지 않았다.

나는 만년필을 받고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만년필을 나에게 준 조그만 놈이 손짓으로 북쪽을 가리키며 보내달라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와이로」를 주었으니 그 대가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 나이로 약 18세도 안되어 보이는 소년이었기에 불쌍한 마음에 보내주고 싶기도 하였으나 만약 그 소년을 보내 준다면 우리는 적에게 노출되어 추격당하기 때문에 놔줄 수는 없었다. 나는 안된다고 호통을 치면서 따발총과 따꽁총을 뺏고는 카빈 개머리판으로 그 꼬마놈의 어깨를 쳤다.

그리고는 두 놈의 중공군 포로를 앞세워 내려오는데 갑자기 적의 82밀리 반격포탄이 연거푸 다섯 발이 날아와 불과 2~3m 앞에 떨어져 터지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엎드렸다. 내 소속이 12중대 중화기 중대 정훈하사관이었기 때문에 적의 화력이 82밀리 박격포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곧 적의 집중사격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재빨리 행동, 허둥지둥 탄막을 벗어났다.

그후 다시 10여 발의 포탄이 날아와 터지고는 포격이 멎었다. 나는 부상없이 무사했다. 그런데 중공군 포로 중 어린 중공군과 노무자는 온데간데 없어졌고 키가 6척이 넘는 중공군 포로 한 명만이 내 옆에 엎드려 있었다.

중공군 포로가 중공군을 무장해제시키다

나는 탄막을 벗어나려고 키 큰 포로만을 앞세워 빠른 걸음으로 골짜기를 내려오는데 앞세운 중공군 포로가 걸음을 멈추고는 손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대략 해석하자니 자기들이 타고 온 말이 저기 있으니 끌고 가자는 것이었다.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골짜기 덤불 숲 사이로 두 필의 말이 보였다. 나는 중공군 포로에게 총을 겨누고는 말을 끌고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덤불 속을 헤치고 두 필의 말을 끌고 와서는 나보고 타라고 손짓했다. 내가 중공군 포로에게 노획한 따발총과 따꽁총을 말 안장에 잡아 매라고 하자 그는 말 안장에 총을 단단히 매었다. 그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말 한 마리는 그가 끌고 앞장 섰으며 나는 다른 말에 올라 타고는 비좁은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30여 m 앞의 우측 산등성이에서 중공군 15명 가량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말에서 내려와 엎드려 사격태세를 취했다. 앞서 가던 중공군 포로는 내가 따라오지 않으니까 뒤를 돌아봤다. 나는 포로에게 눈짓 손짓으로 우리 앞으로 내려오는 중공군을 가리켰다. 그때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엎드려 적에게 총구를 겨누고는 여차하면 사살하리라 마음먹고 적의 동향을 살폈다.

그런데 내가 잡은 키 큰 중공군 포로가 말 안장에 매달린 따발총을 재빨리 끌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발포하려는 순간 그는 무심코 다가오는 중공군들에게 위협사격을 가하고는 무어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중공군들은 벌벌 떨면서 키 큰 중공군 포로 앞에 일렬횡대로 정렬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랠래』하고는 엎드려 총구를 겨누고 경계하는 나를 손짓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다가가니 키 큰 중공군 포로는 나에게 중공군을 무장해제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가 하는 행동이 미덥지 못했으며 내가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순간에 혹시 나를 해칠까 의심이 났다. 그래서 나는 키 큰 중공군 포로에게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라고 손짓했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중공군들로부터 일일이 총을 빼앗았다. 빼앗은 무기를 보니 따발총, 따꽁총, M1 소총, 칼빈 소총, 일본군 구구식 소총 등 각국의 소총들이었다. 키 큰 중공군 포로는 빼앗은 총들을 말 안장에 묶었다.

그런데 중공군 포로의 배가 유난히 부르기에 살펴보니 옛날 우리나라에 있었던 비단(모 본단) 반 필 가량을 배에 감고 있었다. 나는 비단을 빼앗아 마침 지나가는 산골 피난민에게 주었더니 고맙다며 굽실거리며 갔다. 또 한 중공군은 성냥알을 한자루 메고 있었고, 몇 사람은 미군에게서 뺏은 치약, 담배, 껌, 만년필과 중공제 담배를 갖고 있었다.

나는 키 큰 중공군 포로를 선두에 서게 하고 다른 중공군 포로에게 말을 끌게 하고는 강변을 따라 화천댐에 도착했다. 나 혼자서 여러 명의 중공군 포로를 인솔하는 것이 힘들었고 같이 갔던 노무자가 도망가지만 않았더라면 힘이 덜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중대 및 대대본부가 있는 발전소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대대장과 중대장을 위시한 全부대원들은 나를 열렬히 환영하여 반겼다. 나는 갑자기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포로를 잡게 된 경과를 자세히 보고했다. 중대장은 내 말을 자세히 듣고 나더니 도망간 키 작은 중공군 포로를 마저 잡아 오라고 하였다.

퇴비 더미 속에서 붙잡힌 어린 중공군

나는 취사장에 가서 허기를 채우고는 1개 소대를 인솔, 또다시 산골 민가로 향했다. 그때가 1951년 5월 말께인 것 같다. 댐을 건너 강변을 따라 올라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1개 분대를 인솔, 전투대형으로 골짜기를 따라 올랐고, 다른 2개 분대는 1개 분대씩 나누어서 양쪽 능선을 따라 전진해 올라갔으며 골짜기를 수색하는 우리 분대를 엄호하였다. 그때 당시 장교가 충원이 되지 않아 내가 직접 지휘했다.

우리들은 비를 흠뻑 맞으며 아까 왔던 민가에 도착, 수색했으나 놓친 포로는 없었다. 아군은 산등성이에서 우리 분대를 엄호하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나는 분대원들과 함께 민가를 지나 산봉우리를 향해 오르면서 수색을 계속했다. 그때는 비가 멎었고 하늘은 먹구름이 걷히고 구름은 동쪽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간간이 봄볕 햇살이 내려 쬐었다.

그런데 앞을 보니 잡풀이 무성한 큰 무덤 같은 곳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수상히 여겨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무덤이 아니고 오래된 중공군 토치카였다. 그러니까 김이 나는 데는 토치카 입구였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니 비좁은 호 속에서 중공군 6명이 총을 껴안고 쪼그려 앉아 자고 있었다. 나는 대원들을 불러 그들을 모두 생포했다.

중공군들을 생포, 하산하려 하는데 골짜기 덤불 속에서 말 울음소리가 났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 사람이 탈 수 있는 노새였다. 생각건대 아까 내가 키 큰 중공군과 나이 어린 중공군을 생포했을 때 추격해온 기마병의 노새인 것 같았다.

우리는 중공군 포로를 데리고 민가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는데 다른 분대에서 아까 놓친 중공군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들에게 생포하게 된 경위를 물었더니 마당에 쌓여 있는 퇴비 더미 속에 중공군이 숨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 나이 어린 포로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울고 있었다.

우리 소대는 중공군 7명과 말 6필을 잡아서 무사히 본대로 귀대하였다. 돌아와 보니 연대장 및 연대 참모진, 사단 정훈부 소속의 종군기자가 와 있었다. 연대장은 악수를 청하시며 전공을 치하하셨다.

그때 당시 중공군은 아군 春期(춘기) 공세에 패하여 전력을 상실했으며 전력보강 및 再정비를 위해 시간을 얻고자 휴전을 제의했다. 미8군은 중공군의 제의를 받아들여 원산만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에서 회담을 하고 있었을 때다.

잊혀진 戰功

그러므로 전황은 약 1개월 이상 교착상태에 빠졌고 그로 말미암아 중공군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미약한 때에서 내가 잡은 포로는 敵情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존재였다. 내가 잡은 키 큰 포로는 장개석軍 상사 출신인데 장개석 장군이 패배, 대만으로 갔을 당시 도매금으로 중공군에게 편입, 아군 계급으로는 일등병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국부군 출신이라 천대를 받아왔으며 또한 감시대상이었다는 데 환멸을 느껴 아군에게 귀순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그후 내가 화천 발전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듣기를 나의 戰功(전공)이 신문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그 신문이 어떤 신문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부산에서 발간한 신문인 「민중신문」과 6사단 정훈부 발간 주보인 「블루 스타지」에 나의 전공이 게재되었다. 나는 그 신문을 오려 한동안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산리 전투를 거쳐 금성벌판을 점령하는 와중에 유감스럽게도 그 신문을 분실하고 말았다.

그후 나의 戰功을 육군본부로 상신한 줄로 알고 있었으나 훈장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목숨만 건졌으면 되지 하고 신경쓰지 않았으며 나의 전공을 기억할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