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중국이 6.25참전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구름위 2013. 8. 2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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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이 끝난지도 50여년이 흘렀다. 6.25전쟁에 대하여는 사람들마다 보는 바가 다르다. 극단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자가 있는 가 하면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자도 있다.

 

6.25전쟁이 쌍방에 미친 손실은 엄청났다. 중국측의 사망90여만, 북한측의 사망 52만, 유엔군의 사망14만, 한국측의 사망 34만. 중국측의 물자투입은 100억달러이상이었고, 미국의 물자투입은 800억달러이상이었다. 이같은 대규모의 전쟁을 한마디로 말하거나 하나의 관점에서 말하거나 하나의 평가로만 개괄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이 6.25에 참전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 중국군대의 위신을 세웠다는 점이다.

 

6.25전쟁시 제공권이 없고, 대포, 탱크등 중장비가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지원군은 온몸으로 유엔군의 탱크, 비행기, 대포등에 맞섰다. 매번 진지방어전을 펼칠때마다, 지공하는 유엔군은 비행기로 지원군이 지키는 진지에 융단폭격을 가하고, 대포를 이용하여 비오듯이 포탄세례를 퍼부었다. 유엔군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 이러한 공격이라면 지상에 절대 어떠한 생물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땅위에 나타나고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많은 전투에서 지원군은 단지 1명이 진지를 지키고 있었으면 그 1명뿐이었더라도, 유엔군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진지공격시 유엔군의 화력이 얼마나 세더라도 지휘관의 명령하나면 지원군 병사는 앞에 쓰러진 병사를 밟고 또 앞으로 나아갔다. 유엔군은 지원군 병사들의 거의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볼때, 그들은 종교와도 같은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원군의 진격나팔소리만 들리면 남한군은 듣는 즉시 궤멸했고, 미군도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한다. 이외에 장비의 낙후로 지원군은 다리를 만들 수 없었다. 전투에 필요하면 지원군병사들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도강작전을 펼쳤다. 자동차등 교통수단도 모자라서, 지원군의 행군은 거의 두 발로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물자조달이 부족하여 지원군병사들은 잘 먹지도, 잘 입지도 못하였다. 눈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고, 밤낮으로 행국하면서 겨우 옥수수 몇 알을 먹었다. 그러나 일단 명령만 떨어지면 지원군은 체력의 극한을 초월하여 수백리 떨어진 지정위치까지 행군하였다. 유엔군은 이러한 광경을 볼 때마다 지원군 병사들에게는 날개가 달렸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지원군병사들의 이러한 "극한을 초월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맥아더조차도 "중국육군과 전투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러한 정신은 유엔군이 더 이상 싸우려고 하지 않고, 휴전을 하려고 한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신은 미국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두려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자 할 때는 맥아더가 한 말을 그들은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 군사현대화건설의 인식을 강화하였다.

 

지원군이 출전하여 전투하기 전에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전통을 보내어 "적들을 섬멸하라"고 지시했다. 전체 전쟁과정을 보면 모택동의 이러한 지시는 실현된 적이 없다. 모택동은 제5차전투종결후에 부득이하게 "미군의 몇개 사단, 혹은 1개 사단 심지어 한개의 연대를 포위하더라도, 섬멸임무를 달성하기 어려웠다"고 인정한다. 6.25전쟁에서의 잔혹한 현실은 모택동, 팽덕회와 같은 고위지도자들뿐아니라 보통의 지원군병사들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현대전쟁은 입체전쟁이다. 전선과 후방이 통일된 전쟁이다. 현대전쟁에서 승리를 얻으려면 소총만으로는 부족하다, 중국군사현대화건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6.25전쟁에서는 세가지 괴이한 현상이 있다. 하나는 지원군은 단지 저녁에만 싸우고 낮에는 숨기만 한다는 것이다. 제공권이 없으므로 낮에는 유엔군의 비행기가 쉽게 지원군의 진지에 포격을 가할 수 있었으므로, 낮에 작전을 펼치는 것은 죽으려고 하는 것과 같았다. 둘째는 지원군이 매번 공격할 때마다 단지 8일을 유지하였을 뿐이다. 교활한 리지웨이에 의하여 "주일공세"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공권이 없어 유엔군의 비행기는 쉽게 지원군의 물자조달선을 끊을 수 있었다. 지원군의 원시적인 물자조달방식은 대규모 군대의 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어려웠다. 주일공세가 끝나면, 지원군은 이미 총알도 없고 양식도 없어 더 이상 작전을 계속할 수 없다. 세번째는, 지원군은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유엔군을 포위하지만, 상대방을 섬멸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두개의 전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한번은 지원군 9병단이 미육전1사단을 포위했다. 그러나 미육전1사단은 성공적으로 포위망을 뚫었다. 두번째는 지원군이 8개병단으로 지평리의 미2사단20연대를 포위하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는 상대방의 화력이 너무나 맹렬하여 지원군은 엄청난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전투에서 철수했다. 이것은 완전히 쌍방의 장비의 우열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6.25전쟁에서 잔혹한 현실을 중국인으로 하여금 군사현대화건설의 문제를 화두로 던져주었다.

 

6.25전쟁으로 잃은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첫째, 중국의 현대화건설이 30년 낙후되었다.

 

6.24전쟁은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항하는 길로 들어서게 하였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로부터 전면적인 봉쇄를 당하게 된다. 이후의 사실이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현대화를 실현하고자 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고자 하면, 자력갱생에만 의지해서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미국과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이 왜 WTO에 가입하고자 하겠는가. 미국은 최강국이고, 과학기술, 경제무역, 관리경험등이 세계일류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중국이 필요하고 모자란 것들이다. 이외에 중국인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미국과 협력하는 자는 흥하고, 미국에 대항하는 자는 망한다. 소련, 동독이 방하고, 북한이 비실비실하는 것과 서독, 한국, 대만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충분히 증명된다. 6.25전쟁은 중국과 미국으로 하여금 30년(1949년에서 1979년)간 대항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의 현대화건설은 1979년에 시작되는데, 이것은 바로 미국과 중국이 수교한 첫번째 해이다.

 

둘째, 북한인민들을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역사는 이처럼 무정하다. 중국인민지원군이 피를 흘리면서 마지막까지 보위해준 것은 하나의 독재적인 파시스트정권, 즉 김씨왕조였다. 김씨왕조는 국내적으로는 백성들이 먹고살지 못하도록 만들고, 국제상으로는 핵문제를 일으켜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안보를 위협한다.

 

셋째, 개혁개방에 불리하였다.

 

만일 6.25전쟁참전이 없었다면, 결과는 분명히 유엔군이 북한을 멸망시켰을 것이고, 남한이 한반도를 통일하였을 것이다. 그 후에 유엔군이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밀고 들어왔을 것인가? 답은 그러지도 않았을 것이고, 감히 그러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6.25나 중국내전때 보여준 행동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6.25때 특히 제3차전투이구, 맥아더는 여러번 전통을 날려 미국대통령 트루먼에게 전쟁확대를 요구했다. 여기에는 중국동북, 동남연해지방에 대한 포격, 장개석군대의 참전도 포함된다. 트루먼은 들은척도 하지 않고 그를 사임시킨다. 중국내전의 초기, 중기, 후기에 미국은 여러가지 행동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병사를 보내지는 않았다. 심지어 6.25전쟁전에 대만에 발을 붙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망하지 않는 한, 미국은 절대로 미국의 전국력을 소모시키는 대규모 전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므로 단정할 수 있다. 6.25참전이 없었다면 가장 나쁜 결과는 당시 중국이 엄청난 군비를 들여 중한 1000킬로미터의 국경에 병사를 배치하여 방어하여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는데 100억달러이상이 들 것인지? 90만명이상의 사망자를 낼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중국의 개혁개방이후, 연해의 일부 성 특히 광동은 빠르게 경제가 발전하였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광동은 경제가 발달한 무역자유항 홍콩에 인접해있다는 것이다. 만일 6.25전쟁참전이 없었다면, 1979년, 중국과 미국이 수교한 후, 중한 1000여킬로미터의 국경선은 중한무역의 전선이 되었을 것이고, 동북지방은 지금의 광동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도 더욱 활력을 가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