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괴멸위기 몰렸던 한국전時 중공군

구름위 2013. 6. 2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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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남한을 침공했던 북한의 기습남침은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참전을 불러왔다.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차단당하고 지리멸렬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원 경계선이 38선까지 와서 일단 정지했지만, 다시 진격을 개시해서 북한 영내로 진격해 갔다. 기대할 것은 오로지 소련과 중국 밖에 없었던 김일성은 모스크바와 북경에 간부들을 보내서 정신없이 원조 구걸에 매달렸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대결했다간 자칫 세계대전이 될 수도 있는 병력 파견을 소련 입장에서는 할 수 없었고, 중국만이 북한에 군사력 지원을 할 입장이었다. 사실 중국의 한국전 참전도 자국에 대한 미군 침공의 불안감에서 태동한 것이었다.  

2년간의 긴 내전을 통해 장개석을 대만으로 내쫓고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지 채 일년도 되지 않은 처지에 세계 강국 미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무참히 깨진 참담한 몰골이 되어 꼬리를 말아 넣고 달려와서 구조를 요청하자, 모택동은 북한을 내주면 다음 단계로 미군이 장개석 부대를 앞세우고 만주 지역을 침공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일성이가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고 숨 넘어 가는 소리로 도움을 청하자 중국의 주은래 외상은 미국에게 경고를 발하기 시작했다.

˝38도선을 한국군만 넘어오면 우리는 참전하지 않겠다. 그러나 38선을 미군이 넘어오면 우리는 참전하겠다.˝   

미국 외교의 오만함과 무지함은 여기서부터 나타났다. 이것은 중국이 자신들 안보를 위해서 미국과 대화할 의사가 있음을 내보인 것인데, 미국은 이를 무시해버렸다.

그때 북한군은 완전 붕괴된 오합지졸이었으므로 미군은 병참과 항공 지원만 해주고 한국군만이 북한 땅에 진격했더라도 북한군 섬멸의 승산은 있었다.

미국이 중국과 외교적 대화를 하면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북한군이 완전 구축된 뒤에 미군이 상황을 보가며 북한 땅에 들어왔으면 중공군은 참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외교적 노력에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한국전이 끝나고 제네바에서 한국전 참전 국가 사이에 회담이 있을 때도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수많은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 외상 주은래가 내미는 악수를 뿌리치는 다소 어린이 같은 행동을 보였다. 

영국의 애트리 노동당 정부가 중국의 실체를 인정하고. 수교를 한 것과 비교하면 한 수 아래의 외교적 감각이었다. 미국은 60년대에 들어와서야 폴랜드 바르샤바 주재 중국 대사와 미국 대사 사이의 만남을 정례화해서 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 대화가 10년만 빠랐어도 한국의 미래는 물론 미국, 중국의 미래도 달라졌을 것이다. 

1951년 10월 1일, 한국군과 미군 주축의 유엔군이 38선을 넘자 중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참전 결정에 모택동은 사흘간 잠을 자지 않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왕 싸울 것이라면 남의 땅에서 싸우자는 원칙으로 결정을 내리고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소위 30만 명의 항미원조 지원군(抗美援朝 志願軍)을 구성해서 압록강을 건너 침투하기 시작했다.  

물론, 눈감고 아웅하기 식이지만 전원 지원자들로 이뤄진 의용군이라는 정치적인 분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중국은 미국과 국가대 국가로 격돌하지 않는다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미군이 주도했던 유엔군 전략은 큰 문제점을 노출했다. 한반도 서쪽을 담당해서 북상한 워커가 지휘하던 미 8군과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진격하던 알몬드 장군 지휘 하 미 10군단 사이의 산악지대에 80킬로라는 폭을 가진 텅텅 빈 공간이 있었다.   

이 공간속으로 중공군은 들어와서 은폐해버렸다. 미군이 아무리 공중 정찰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중공군은 절대로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무장이 빈약했던 중공군이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적을 기습함에 잇다고 보았다. 그들은 준비하고 매복하고 기다렸다. 

중공군은 방심한 상태로 북쪽으로 올라온 한국군과 미군을 운산-온정리-희천 선에서 야간 기습하여 타격을 입혔다. 타격을 입은 유엔군은 청천강 선으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봤다. 

이것이 중공군이 말하는 일차 전역(一次戰役)이었다.

병참에 한계가 있었던 중공군은 미군에게 한방 먹이고 보급품이 다 하자 산속으로 잠입해버렸다.

유엔군은 한 달 가까이 공중 정찰한 결과 한국전에 투입한 중공군은 단지 5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오판해 11월 25일 다시 총공세 작전을 폈다. 중공군은 덕천-개천-군우리 선에서 잠복했다가 한국군과 미군을 기습해서 더 큰 피해를 주었다.

이것이 중공군이 말하는 제 2차 전역(2次 戰役)이다.

미군 포로들, 중공군은 북한군에 비하면 미군 포로들을 비교적 인도적으로 대해 주었다.운산에서 중공군에게 한방 먹은 뒤 중공군의 실제 참전 병력을 알게 된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이 보기에 참 이해하기
힘든 작전을 전개했다.

한국군 미군뿐만 아니라 모든 유엔 부대를 몽땅 전선에서 빼서 오던 길을 돌려 변변한 전투 한 번 없이 평양도 내주고 삼팔선으로 철수를 해버린 것이다.

다 된 통일의 앞에서 전투도 없이 그저 한정 없이 후퇴를 거듭해야하는 국군 장교들은 비감한 생각에 눈물까지 흘렸지만 병권을 한손에 쥔 미군이 하는 짓이니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이르러 진을 쳤지만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이 방어선을 압도적인 병력을 퍼부어서 공격했다.

서울 점령을 위해서 중공군이 벌인 전역[戰役]이 제 3차 전역 [三次 戰役]이다.

한국과 유엔군은 또 다시 서울을 내놓고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후퇴를 남쪽으로 내려갔다. 미군이 운산에서 한판 깨지고 난 뒤 제대로 된 전투도 없는 일사천리의 후퇴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서울로 들어와 김일성의 북한군이 그 작년, 9월 28일 내쫓겼던 서울을 다시 차지하였다.


서울을 재점령한 중공군과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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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천리의 남하 진격을 한 중공군의 진격은 하여튼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지켜보며 탄복했다.

이는 중공군의 압도적인 승리였으며 태평양과 유럽에서 두 강대국 일본과 독일을 한꺼번에 상대해서 대승리를 거두었던 미국의 꼴사나운 패퇴였다.

미군이 상대했던 일본군이나 독일군과는 질적으로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빈약한 무장의 중공군이 미군을 격퇴시키고 추격까지 해서 서울을 점령하자 중국에 대한 평가는 하늘같이 솟아올랐다.

미국의 체면은 말 할 수없이 구겨졌고 국제적인 조소가 보내졌다. 더구나 미군의 볼품 없었던 퇴각을 시작할 무렵부터 언론에 미군들이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서 염전 사상이 전군에 확대되어 전투력이  말이 아닐 정도로 저하 되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가 되었다.

반면 이승만 이하 한국의 정부 관리들은 미군이 싸우지도 않고 철수를 거듭하다가 수도까지 내준 상황에 대해서 미군의 처사에 불만이 팽배 해 있었다.


전투 한 번 없는 기약 없이 남행열차를 탄 듯한 이해 할 수 없는 미군의 무작정 후퇴에 대한 이면 분석을 해본다.


지금에 와서 미군의 대 후퇴는 병참과 보급에 취약한 중공군을 병참선을 연장 할 만큼 연장하게 해놓고 공중 공격에 노출시켜 중공군을 약화시킨 뒤 공격하겠다는 전략 때문에 이렇게 후퇴 했다는 뒷말을 전하고 있다.

인생을 마감하는 나이 70대에 자신이 평생 쌓아온 명장으로서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싸움을 해버린 맥아더의 분노한 심리 상태가 이 후퇴 전략의 기본에 깔려있었다.

중공군이 한반도에 잠입해 들어와서 잠복할 때까지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다가 중공군 포로가 다수 획득되면서 그제서야 반도 참전 중공군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대 승리가 필요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의 완전한 대량 섬멸이었다.

그 정도의 대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중공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군사적 판단도 유엔군내에 이미 확립된 상황이었다.

그는 새로 나타난 이 중공군이  숫자는 많았지만  가진 화력이단지 기본적인 보병 화기뿐이고 보급도 엉망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비록 자신의 부대가 자만의 대가로 두 번이나 두들겨 맞았으나 기습이 아니라 적당한 장소에서 정면으로 맞붙으면 중공군은 미군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맥아더는 중공군 수십만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하는 대 섬멸전이 가능 하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모택동의 부대이기도 한 이 중공군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티는 장기전에 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사람들의 바다 중국은 수 십만이고 수 백만이고 아무리 사람들이 죽어도 인적자원은 물 붓듯이 제공할 수 있으니 추스릴 수도 없는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서 압록강 밖으로 내쫓고 든든한 방어선을 쳐서 다시는 한반도에 얼씬 거리지 않게 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말해서 일차 세계 대전 때의 탄넨부르그 대회전이나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역시 독일이 소련 군을 대파했던 초기 바바로사 작전 같은 포위 섬멸전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166개 사단을 동원하여 소련을 친 바바로사 작전.한꺼번에 60만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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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타격을 주고 방어선을 튼튼히 하면 중공군은 다시는 한반도를
넘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지휘했던 유엔군과 한국군의 병력 규모는 단지 20만의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했던 북한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 위한 규모였다. 거기에 30만이라고 하는 병력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미군 병력 증파와 더해서 대만군 5 만 명의 파병을 요청했다.

대만군이란 장개석 군대를 말하는데 모택동 군에 대만으로 볼품없이 쫓겨 갔지만 대만에 자리를 잡은 뒤 훈련에 힘쓰고 군 장비 개선에도 노력한 끝에 상당히 향상 된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더해서 맥아더는 한반도와 중국 국경지대, 중공군이 침투하기 좋은 국경 산간 지대에는 원자로에서 나온 방사능 재를 뿌려서 인원의 통과를 불가능하게 만들 예정이었다.

이것만 아니라 만주를 폭격해서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중.소의 철도망과 도로망을 모두 폭격할 계획도

세우고 일부 중국 연안 지역에 대만군으로 하여금 상륙 공격을 하게 하는 계획을 세운다.

어떻게 보면 중국과의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것인데 하여튼 이 정도의 계획을 세우만큼 맥아더는 투지에 불타있었다. 물론 워싱턴과 협상 카드로 과하게 내세운 것도 있을 것이다.

요청한  병력이 증파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중공군의 대병력을 맞아서 섬멸해버릴
넓은 평야 지대가 필요했다.
그가 결전의 장소로 삼은 곳은 한강과  금강 사이의 넒은 평야지대 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맥아더와 리지웨이[오른쪽에서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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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주요 인구 밀집지역으로서 중공군으로서 반드시
욕심을 낼만한 가치가 있었고 또 이 지역은 중국에서 북한을 거쳐 일선에 오는 보급은 대부분 서울을 거쳐 한강을 도하하여야만 가능하다는 취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의 보급로를 최대한 미군 항공 공격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긴 거리까지 후퇴할 필요가 있었다.

적의 보급로 차단하는 것은 맥아더 전략의 항상 주요 근간이었다. 그러나 보급로 연장을 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였고 병력 보강을 위한 시간 벌기와 중공군 섬멸을 위한 전장 선택이 더 큰 변수였던 것이다.

그런 중요한 판단에 한국민의 통일 염원은 미군 수뇌부에 눈에는 안 보였을 것이다.

미군의 사기가 너무 저하되어서 전력이 극히 약해졌다는 소문이 났던 것은 미군 정보 당국이 중공군에게 죽음을 안겨 줄 전장으로 유인할 목적으로 언론 플레이를 해놓은 결과였다.


[언론의 이런 거짓 소문 전략은 미군이 즐겨 사용하는 상투 수법이다.  심리전의 일환인 이런 기만 전략은 미군이 60년대 말 월남 고원지대 케산 기지가 고립되자 더 많은 월맹군을 이곳에 집결시켜 항공력으로 전멸시켜 버리기 위해서 마치 이곳이 제2의 디엔 비에 푸가  될 듯이 위와 꼭 같은 심리전을 전개했지만 케산 기지를 포위했었던 월맹군은 덫에 걸리지 않고 철수해버렸다.미군은 이런 언론 플레이의 심리전을 걸프전에서도 써먹었다.]

 

미 해병대와 월남군이 77일간 버틴 케산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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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리전이 얼마나 감쪽같았는지 의정부에서 사고사 했던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한국 전선에 온 매튜 리지웨이 중장도 그 소문을 믿고 한국에 왔다가 사실과 다름을 알고 매우 놀랐다는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여기까지가 남하 전략에 대한 맥아더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적은 워싱턴에서 나타났다.

맥아더가 계획한 자신의 마지막 전쟁은 내부로 부터의 반대에 의해서 좌절을 겪어야했다.

워싱턴의 합참과 육군성은 물론이고 국방성까지도 그의 증파 요구와 중국에 대한 확전을 차단하고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먼저 미군이 청천강 이북에서 큰 타격을 입고 일사천리로 후퇴하자 미국내에 반전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전투를 비싼 세금을 낭비해  가며 계속할 이유도 없고 남의 나라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을 무가치하게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있었던 트루만 대통령은 별로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가는 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할 실정이었다. 더구나 그는 평소 거만하고 항명을 밥 먹듯 하는 맥아더에 안 좋은 감정이 있었다.


맥아더와 트루만 - 서로 웃고 있지만 사이가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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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더해서 미 국방성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국방 장관 마샬 원수가 틀고 나섰다.

그도 역시 맥아더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야전형 맥아더 장군은 행정형 장군이었던 마샬을 미워했었다.

마샬은 표면적으로는 정책적인 이유를 들고 나왔다. 이렇게 아시아 구석에 대규모 미군이  붙들려 있는동안 소련이 미 국익에 훨씬 더 중요한 유럽에서 불장난을 해버리면 미군이 이를 방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샬은 원래 유럽을 중시하는 정책 신봉자로서, 아시아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서 아시아를 중시하는 맥아더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가져졌다.

그는 불과 몇 년 전에도 붕괴되어 대륙에서 쫓겨나고 있던 장개석 군 지원 정책을 틀어버린 일이 있었다.


조지 마샬 - 그의 장개석 정부 불지원,한국전쟁 조기 종결, 이스라엘 불인정 정책은 후세의 논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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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미국 수뇌부의 분위기는 한국에서는 적당한 수준에서 정전한 뒤에 유럽에 미국의 국방력을 집중하자는 이야기였으니 이들의 명예 회복을 절실하게 바라던 맥아더의 투지나 한국민의 통일 염원은 관심조차 없었다.

맥아더는 분통을 터뜨렸으나 여론과 대통령의 비협조를 등에 업은 워싱턴의 군부세력이 내부에서 걸어온 택클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출현한 중공군 때문에 두 서너 배로 커버린 적군을 그냥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싸우라니 그가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어중간한 상황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내놓고 일단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였다.

유엔군이 이렇게 복잡한 사연을 안고 철수를 계속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사기는 하늘같이 치솟았다. 세계 강국 미군을 꺾었으니 기고만장 할만도 하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교만한 군대는 필히 패한다는 교병필패[驕兵必敗]라는 전략 원칙의 상태에 전 군대가 발을 드려 놓는 순간이었다 .

[교병필패[驕兵必敗], 전격전의 아버지 바실 리델하트가 승리에 6일 전쟁뒤 승리에 도취했던 이스라엘에게 찬사대신 충고 할 때 인용했던 손자의 명언이다. 이스라엘은 10월전쟁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

중국은 한반도에 투입되었을 때 미군에 대한 공포 심리가 다분했다. 그들의 빈약한 무장과 병참은 막강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처음 1,2차 전역으로 미군과 격돌했을 때 이들에게는 항공지원은 커녕 변변한 포병 화력도 없었다.

위력있는 무기라야 기관총과 박격포 정도뿐이었다. 식량은 콩가루 아니면 미숫가루였다. 부식은 없었다.

슬리핑 백 같은 것은 물론 없어서 몸에 걸친 누비옷이 유일한 방한복으로서 밤에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입은 채 그냥 새우잠을 자야 했다. 전투가 길어지고 겨울이 깊어지자 동상에 의해서 일개 연대가
완전히
전투 불능화 된 사건도 있었다. [제 196사단으로서 동상 환자가 속출해서 제 586연대는 그로 인해  전투력이 마비될 정도였다.]

병참을 위한 트럭 지원을 일선까지 받지 못해서 각 보병이 가지고 있는 실탄, 가지고 있는 식량으로 전투를 하고 그것이 소진되면 다시 보급 받을 방법도 없으므로 전투를 마감하고 철수해야했다,

그 기간이 대강 닷새에서 이레정도였다. 미군은 일찌감치 중공군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알아내고 작전수립에 크게 활용했다.


중공군처럼 세계에서 빈약한 무장의 가난한 대군은
현대 군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과거 이태리 침공군에 대항했던 이티오피아 군대도 이보다는 훨씬 나았었다.

이런 부대가 최강 미군을 타격해서 큰 피해를 주고 격퇴시키고 이를 추격까지 해서 적 수도까지도 다시 탈환하지 않았던가 !

중국은 민관군이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열광했다. 각 도시에서 승리 축하 행진이 있었고 신문들은 연일 사설을 동원해서 미군들을 현해탄으로 쓸어 넣으라고 들뜬 어조로 선동기사를 해댔다.
과장과 몽상과 태만은 민간에게만 전파된 것이 아니었다. 항일 원조 지원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공군에게도 퍼져나갔다. 중공군 병사들 사이에 미군들이 별 것 아닌  잡병들로서 트럭을 타고 도망만 가는 비겁한 군대라고 멸시하는 풍조가만연 하기 시작했다.

38선을 넘을때 축배를 드는 중공군- 유엔군을 한참 우습게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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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미군의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은 도망가는 미군 꼴만 보았던 이들 병사들은 미군을 그들이 대륙에서 내쫓았던 장개석군보다 못한 오합지졸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군 경시 사상은 사병들뿐만 아니라 중공군 장교들 사이에 까지 만연되어서 무리한 공격 일변도의 의견들이 난무했다.
많은 중공군 지휘관 들이 저 따위 오합지졸 같은 미군을 바로 부산으로 몰고 내려가서 바다 속에 처넣을 공격 행동도 없이 중공군을 한반도 중부에 정지해놓고 서성거리는 지휘부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털어 놓고 있었다.
덩달아 김일성까지도 팽덕회에게 와서 미군을 부산 앞바다로 쓸어버리라고 보챘다. 주 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가 여기에 합세해서 팽덕회에게 압력을 가했다.


북한 공연단의 중공군 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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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들뜬 심리는 최고 통치자 모택동의 심리상태에 비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일선에서 싸우는 중공군의 상태도 생각하지 않고 철수하는 미군의 의도도 깊이 연구하지 않고 걸핏하면 팽덕회에게 계속적인 공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노련한 팽덕회는 중공군 안팍에 넘쳐흐르는 교병[驕兵]의 심리에 남모르게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원래 적이 싸우지 않고 도주하는 것을 보고 뭔가 있다는 의심을 품고 일단 38선 근처에서 정지하고 사태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모택동의 채근으로 다시 힘이 부치는 서울을 공격했고 유엔군을 한강 이남으로 몰아냈다.

이것이 3차 전역[三次 戰役]인데 팽덕회는 지칠대로 지친 부대와 빈약한 병참으로 ‘어거지로 했다.’ 고 자평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은근히 자기 의견이라는 겸손을 떨면서 남진을 명했다.

허나 의심 많은 팽덕회는 그의 주력 부대를 한강을 넘어 남진시키지 않고 위력 정찰 부대들만 평택- 안성선까지 내려 보내 정찰을 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유엔군들이 질서정연하게 방어선을 구축해놓고 중공군의 무턱 된 남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팽덕회의 판단은 역시 맞았던 것이다.


미군의 포격 - 헐벗은 한국의 산야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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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더 이상 남하하지 않자 유엔군은 반격의 수순으로 들어갔다.
워커 중장이 죽고 리지웨이를 새 사령관으로 맞아들인 미군은1951년 1.25일부터 전선을 정리하고 전 전선에서 신중하게 진격하기
시작했다.

서울을 향하여 전진해오는 미군의 진격을 늦추고 모택동의 바램도 만족시키고자 팽덕회는 횡성, 홍천 전선의 한국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것이 4차 전역[四次 戰役]이다.

중공군은 여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황인지라 팽덕회가 주저했지만 모택동의 압력은 거셌다.

서부 전선의 50군과 112사단이 전진하는 미군을 막아 내는 동안 39군과 40군, 그리고 42군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을 명했다.


중공군의 사[師]는 한국군의 사단(師團),군(軍)은 한국군의 군단(軍團), 집단군(集團軍)은 한국군의 군(軍)에 해당한다.


중공군은  2월6일 서부전선에서 횡성지구로 이동해서 한국군11사단에게 타격을 가하고 양평군 지평리에서 미 7연대와 프랑스군 대대를 포위했으나 미군과 프랑스군의 막강한 방어력에 제대로 공격도 못하고 대치중에 미군  기동부대가 구출을 위해서 달려오자 맥없이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와 이어 한강 이남에서 진격하던 미군들과 [기습의 효과가 사라진] 전투를 해 본 팽덕회는 미군들이 종이 호랑이가 아니라 마음만 먹는다면 공격이건 방어건 마음대로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그러나 서울을 내놓고 북쪽으로 철수한 팽덕회는 본국에서 계속 새로운 대부대가 도착하고 포병대까지 도착하자 모택동의 바람대로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주도권을 노리고 대공세를 기획하게 된다. 이번 새로운 작전의 목표는 대전과 안동을 잇는 선까지 진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벗어나 말을 해보자.

2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가 일선 부대의 일일이 작전에 개입했다가 독일군 멸망의 결과를 가져왔는데 모택동도 허욕과 전선 정보도 시원치 않은 상황에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중공군의 대병력이 다음 5차 전역에서 몰사를 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실수를 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근대 전에서 요소인 보급 또는 병참이라는 문제를 너무도  경시했다.

개전 이래 미군 공습으로 파괴된 트럭만 중공군의 트럭만 3,400대나 되었다.

그래서 이런 대규모의 전역을 개시하면서 중공군이 아쉬운 대로 찾은 보급 방식은 사람이 끄는 수레 7,500대와 말이 끄는 2,000대의 달구지 동원이었다.

수나라 때 고구려를 친 수양제의 보급 방식과 다르지가  않았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현대의 대군이 대규모 작전을 전개하기에 너무 한심한 병참체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중공군은 겁 없이 공격 전투에 뛰어 들었다. 적을 우습게 본 교만의 작전 심리학 때문일 것이다.

중공군이 계속해서 한반도로 증강되고 한반도에만 중공군의 숫자가 백 만 명이 넘자 조심스러웠던 팽덕회는 드디어 1951년 4월22일 대 공세의 공세를 열었다.

전선에 투입한 병력만 5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유명한 5차 전역[五次戰役]이 막을 올린 것이다.

[한국 쪽에는 중공군의 일차 춘계[春季] 공세라고 부른다.]

이렇게 압도적인 병력의 태풍을 휘몰아치는데 감히 이에 맞설 적군이 있겠는가? 하는 자만심을 중공군 상하에게 모두 갖게 만들기에 충분한 대군의 투입 이었다.

더구나 작전 개시 불과 열흘 전 맥아더와 앙앙불락하던 트루만은 4월11일 맥아더를 해임시켜 버렸다.

팽덕회로 보면 승리를 예견하는 기분 좋은 전조였다.


중공군 5차 전역 - 붉은 화살이 중공군 공격 병력의 규모룰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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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은 서울의 재탈환이 아니라 중부전선에 큰 타격을 주어서
한국을 동서로 양분 한 뒤에 남진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희망적인 일차 목표는 모택동이 원했던 대전과 안동선이었다. 이번 작전의 특징은 대부대 이동선과 병참선이 일단 서울 북방에서 비스듬한 하향선을 그으며 남동쪽 한강 상류 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4월 22일 황혼 무렵 38선 전 전선에서 포성이 진동했다.

좌익 돌파부대인 제 40군이 쾌조의 진격 속도를 보였고 다른 20군, 26군, 27군이 쾌조의 진격을 보여 남한 영토 15킬로 이내까지 진격했다.

서부전선 임진강에서도 중공군은 대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한편 63군과 64군은 십 여 개의 임진강 도하점으로 넘어 진격을 개시해서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의 일개 대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섬멸해버렸다.

영국군이 패전한 뒤 동남으로 이동한 이들의 공격으로 한국군 6사단이 사창리에서 큰 손실을 보았다.

반면 한강 하류에서 한국군 1사단을 공격했던 64군은 한국군과 미군의 선방과 미군 73탱크의 화력으로 공격이 돈좌되어 64군 사령관등과 일부 간부들이 해임되는 사태까지 보였다.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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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이 마무리 되는 5월초에 팽덕회 사령부에서
중공군 간부들 회의가 있었다.

공격의 결과로 의정부 가평 춘천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그들이 목표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대량 동원했던 병력 규모에 비하면 그 성과가 영 기대 이하였다. 이미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유엔군은 아무 생각없이 북상 하다가 호되게 당했던 그 전의 유엔군이 아니었다.

대전- 안동선의 점령은커녕 유엔군은 질서 있게 철수해 버려서 한강 북쪽 일부를 점령하는 정도의 흐지부지한 결과만얻을 수가 있었다.

이미 이 때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의 전략을 읽어 버려서 중공군이 공격해오면 포병 화력으로 최대한 타격을 하면서 질서 있게 후퇴를 했다가 적의 보급이 떨어 질 때쯤 되면 반격으로 반전하여 공격을 했다.

중공군의 간부들은 이렇게 해서 후퇴한 적군들이 일부는 한강 이남에서 반격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였다. 회의는 다시 한 번의 공격을 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일차 전역에서 이미 병참 물량을 다 소비했는데도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대규모 전역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발상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 때 까지도 중공군 간부들은 수의 마술, 즉 병력만 왕창  동원해서 적을 덮치면 적은 무너진다는 잘못된 신념에 헤어 나오지 못했다.


미군 155밀리 롱 톰 장거리포의 포격 -1951 봄 서울 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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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전역의 2 단계,
한국군이 2차 춘계공세 부르는 전투 목표는 여전히 거창했다. 북한강 이서 지역의 미군 3개 사단, 영국군 터키군의 3개 여단, 한국군 1,6 사단을 섬멸하고 제천 단양으로 진격하는 옹골찬  목표가 다시 설정되었다,


팽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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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새로이 인민군 제 1군단이 배속된 제 19집단군이 추가로 동원되어 경기도 고양에서 청평 쪽으로 진격하고 , 한편 제 9집단군과 제 3집단군, 북한군 일개 집단군이 춘천 일대의 동쪽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그저 병력만 늘이면 다 된다는 전쟁 철학이 다시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1951년 5월 16일 황혼 무렵이었다. 5차 전역 2단계  대공세가 문을 열었다. 한국군에서 이를 2차 춘계 공세라고 부른다.

유엔군의  전선이 여러 곳이 뚫렸지만 중공군 사령부에서 보아도 초장부터 작전이 제대로 되어 가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중공군의 간부 중에 지각있는 지휘관들은  한국 중부 전선에 엄청나게 투입했던 병력이 뒤섞이고 엉켜서 엉망이 되어 작전 지도가 안 되고 항공공격에  부대가 노출 되는 것을 불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중공군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대던 인해전술이 그 한계를 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의 진격은 가능했지만 미군과 한국군은 발 빠르게 후퇴해버렸다. 작전이 개시되고 불과 나흘도 안 되어서 9집단군과 3집단군의 사령관등은 식량 고갈의 위협이 눈앞에 보이자 드디어 팽덕회에게 작전 중지를 건의했다.

팽덕회도 낙심천만이었지만 할 수없이 이의 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거의 떨어져서 63군 군장이라는 전숭벽[傳崇碧]조차 뽕나무 잎을 끓인 물을 점심 대신 먹어야 했다.

이때 일 개월 전부터 중공군의 틈을 노리고 있던 유엔군은 비로소 일제 반격에 나섰다.

미군은 이들이 지난달 4월22일 공격을 위한 중공군의 부대 이동을 항공 정찰로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한국군의 정찰대를 투입해서 추가 정보를 수집했었다.

그리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미군에게 중공군은 제 2단계 작전을 전개하면서 허점을 보였다.

좁은 지역에 너무 무리하게 동원하였던 대 병력이라 은폐가 힘들었다.

서부 전선에서 중부 전선으로 긴 행렬의 인간과 우마차의 이동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노출했다.

수송력의 부족은 길디 긴 손수레와 마차 대열을 서부에서 중부 전선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속도도 늦고 적재량도 적었으니 수많은 수레가 움직여야 했다. 그러니 고구려를 정벌하러 나섰던 수나라식의 수레 부대가 미군의 항공 정찰에 노출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작년 30만이나 되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침투해 들어올 때 완전 기도비익이 이루어져 미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물량이 너무 많았고 시간을 다투었던 이유도 있었다.

또 미군에 대헤서 느슨해진 경계심이 이런 주의성 없는 모습을 노출한듯하다.

미군은 중공군 후방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부대와 수레의 비스듬한 소시지 행렬을 지켜보다가 차기 작전의 틀을 짰다.

이들 횡으로 길게 늘어진 인원과 물자의 보급선중 목 부분을 그대로 절단해서 한반도의 중공군을 동서로 갈라놓자는 작전이었다.

중국이 무리하게 전개한 작전에서 획득했던 중공군 포로들로부터 이들이 보급은 물론 식량에도 큰 부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군 9군단과 10군단은 적군의 보급이 바닥을 낼 무렵인 5월 22일 전차 200대를 주축으로 하고 보병과 장갑차들로 이루어진 태스크 포스를 앞세우고 번개와 같은 반격에 나섰다. 실로 태풍 같은 화력의 역습이었다.


기갑의 공격은 적의 섬멸을 목표로 하는 포병과 달리 그 기동력으로 적의 급소를 찔러서 붕괴 시키는 것에 목표를 둔다.

기록을 보면 이번 반격은 바로 이 원칙에 충실하게 적에게 숨 쉴 여유도 주지 않는 가차 없는 기동과 돌파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 성공에는 스피드가 중요하다.


1950년 혜산진에서의 M 4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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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군단장 알몬드는 헬리콥터를 타고 선두에서 전차부대의 돌격을 지휘했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전차 부대가 정지하거나 기동이 느리면 그는 지상에 착륙하여 불호령을 내렸다.

무턱 댄 돌격 같이만 보였던 태스크 포스의 공격은 그 결실을 거두었다. 200여대의 전차들이 살갗을 찢고 뼈를 베어버리듯 대군의 중공군 안으로 마구 뚫고 들어오자 턱없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적의 무지막지한 전차 육박에 중공군은 지휘와 통신 병참의 모든 신경계통과 순환계통이 토막 나서 문자 그대로 기갑부대의 목표인 붕괴 상태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다음의 일이지만 춘천 청평 사이에서 미군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던  60군장 전승벽, 63군장 위걸등도 퇴각하다가 미군 전차부대에 덜미를 잡혀서 차를 버리고 산으로 도주했다. 두 군장들은 산 두더지처럼 산길을 타는 고된 후퇴에서도 미군 전차들을 또 만나서 공격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도주했다.]

반격의 주역 M26 퍼싱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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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전을 해보지 않았던 중공군에게 이런 빠른 역습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변변한 대전차 화기가 없었다. 미리 전차의 전진을 방해하는 대화구를 파놓는 다거나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지도 않았고 대전차 지뢰도 충분히 준비하지도 않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전차들의 기동은 아무 방해 없이 쾌속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중에 한강을 건너서 용문산 자락에 방어진지를 공격했던 187사 사장 서신[徐信]은 격렬한 저항에 공격이 돈좌되자 철수를 건의해왔다.

중국 측 기록은 이들의 진격을 가로막고 막대한 타격을 안겨준 부대가 한국군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있다. 마치 훨씬 더 강한 미군과 싸우다가 철수한 듯이 기록하고 있다.

이들을 용문산 기슭에서 막아낸 부대는 한국군 6사단 2연대였다. 연대는 적의 3개 사단이 공격해왔지만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서 이들의 공격을 좌절시켰다. 

중국측 기록으로 보아도 한국군 2연대는 대단히 선방했다. 6사단 청성부대의 용사들은 선배들이 중공군 2차 춘계공세에서 거둔 승리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63군은 한 달 전 사창리에서 6사단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준 군단이고 이중 서신이 지휘하는187사는 그 전에 파주 설마리에서 영국군 그로스터 연대를 공격하여 한 개 대대를 섬멸해버린 부대였다.

그래도 전숭벽의 과단성있는 결정으로 타이밍에 맞게 철수했던 것이 63군을 그런대로 전멸의 위기에서 탈출하게 만들었다.

63군과 나란히 병렬해서 한강 상류 쪽 가평과 춘천 사이의 전선을 담당했던 60군의 180사는 한국 전쟁 최악의 운명을 만났다.

공세의 전면에 섰던 13 집단군-60군과 63군의 상급부대-의 사령관 진강(陳康)이 병을 얻어 후송되었기 때문에 부사령관 왕진산이 이번 5차 전역의 총 지휘를 맡았었다. 왕진산은 한국 전선에 투입된 지 몇 주밖에 안 되는 신참내기였다. 그는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우직한 자였다. 미군의 기계화 전투력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었다.

그는 미군이 아무리 강해도 서 너 배 되는 병력으로 밀어 누르면 제까짓 것이 버티겠느냐는 수준의 한심한 몽상만 가지고 이 중요한 5차 전역의 일선 사령관으로 투입되었었다.

적의 반격이 점점 격렬해지기 시작하자 부상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왕진산은 60군 군장 위걸에게 180사를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미군의 반격으로 속출한 부상병의 후송을 엄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위걸 휘하 180사는 지시에 따라 한강을 건넸다. 180사는 압록강에서부터 열흘간을 노숙하면서 순 도보로만 그 먼 길을 걸어서 한국 전선에 와서 전투에 투입되었던 부대였다.

사단장 정기귀[鄭其貴]는 이 중대한 시기에 한국군 상식으로 보면 도저히 일선 지휘관이 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중공군에는 소련군과 같이 정치위원이라는 공산주의 선전과 세뇌, 때로는 지휘관 감시 같은 업무를 맡은 인간들이 있다.

전 소련 수상 후르시초프도 정치 위원 출신이었고 [유명한 스타린그라도 공방전 - 그의 역할이 저격병 영화  에네미 엣 게이트에 나온다.] 중국의 실력자 등소평도 이 정치위원 출신이다.

그런데 이들이 정식으로 군사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일도 없는데도 때로는 부대 일선 지휘관을 할 때가 있다.

중국의 주은래도 대장정 때 군사 경력이 없었음에도 정치위원을 거쳐서 사단장을 했었다. 


사단장 주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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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우리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정치위원을 하다가 사단장이 된 정기귀는 성실하고 명령에만 충실한 그런 사람이지 때로는 야수적 감각도 발휘 할 줄아는 정글의 파이터가 아니었다.

이런 형의 간부들은 평소 군대 행정이라는 틀 안에서는 유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야전의 상황에서는 터무니없는 무능함을 보인다.

[러일 전쟁 때 아무 전략도 없이 러시아 발틱 함대를 극동으로' 인솔'하고 왔다가 전멸의 운명을 맞게 했던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엄연히 신속한 탈출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히틀러의 미친 명령에 매달려 독일 6군을 소련군의 포위에 내맡겨 스스로 자멸의 길을 가게 만든  파우루스 원수와 같은 사람도 있다.]


파우루스 원수-영리해 보이지만 무능해서 부하들을 몰죽음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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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기귀는 일단 힘들게 한강을 건너 반대편 남쪽 강안에 붙었지만 상황이 심각 한 것을 깨닫고 22일 군단장 위걸에게 도강 후퇴를 건의했다. 위걸은 13집단군단장 왕진산에게 품신했으나 거절당했다.

드디어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폭풍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23일 그들의 측면에 느닷없이 미군 전차가 나타나서 한바탕 사격만 주고 받고 철수했다. 바로 이때 정기귀가 철수를 결정하고 상부 명령에 관계없이 독단 전횡으로 전군을 이끌고 일단 강을 건너놓고  볼일이었다.


M26 탱크 보전 합동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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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대전차 화기가 없는 부대에게 아주 안 좋은 비상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차가 나왔다는 것은 수색 소대가 활동했다는 말이고 수색소대는 전차의 기동로 확인, 적의 대전차 화력의 유무나 대전차 장애물 발견이 주요 임무이다.  수색 결과 전차 진격에 이상이 없다면 이 전차 수색 소대 뒤에는 전차 중대가 본격적인 돌격을 해온다는 것을 뜻한다.

전차가 나타났다는 말을 접한 정기귀의 부하들은 안색이 변했다. 닥쳐올 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것이다.

적의 전차가 그들의 배후인 한강의 북쪽으로 진출하면 180사는 통 채로 포위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서 강의 상류 쪽에서는 미군이, 하류쪽에서는 한국군이 강을 건너 북진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정 기귀는 60군 사령부에 철수를 건의 했으나 60군은 3 집단군 부 사령관 왕진산의 지시에 의해 이 건의를 묵살하였다. 정기귀의 부하들은 거듭 그에게 23일 야간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 후퇴하기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지식한 정기귀는 명령 없는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업무에 충실하기를 지시했다.

“상급의 명령은 지상 명령이다. 상급의 명령은 결코 어기지 못한다.”

이 어이없는 하루의  지체가 사단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다음날 24일 미24사단 전차부대는 그들의 배후를 덮쳐들어 성황당 고개에 배치해놓은 180사 포병대대를 전멸시키고 사단의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은 60군단은 숨 넘어 가는 다급한 지시를 연달아 내려 보냈다.

단 하루의 지체가 사단 병사 10,000명의 목숨을 결판 낸 것이다. 그날 밤 24일 심야에서 25일 새벽까지 180사가 필사적으로 감행한 때 놓친 도강은 끔찍한 도살 현장을 연출했다. 야간임에도 미군기들이 날아와서 조명탄을 던지고 로케트 공격과 기총소사를 하였다.

이미 강 북안에 자리 잡은 한국군과 미군들은 강에 얼씬 거리는 물체들에 대해서 사정없는 포문을 열었다.

날이 샐 무렵 한강 주변에는 죽은 중공군 시체들로 눈을 뜨고 볼 수없는 잔혹한 지옥도를 연출했다.

그러나 강을 건너 강북의 산에 붙은 병사들은 그들이 나아갈 북쪽은 미군 24사단의 전차와 보병들에게 차단되고 그리고 26일에는 미군 7사단이 서부를 차단했고 한국군 6사단이 지암리 지구로 진격해서 앞길을 막는 최악의 사지(死地)에 몰려있는 절망적 상황을 발견해야 하였다.

180사가 나갈 길을 모두 막아놓고 한국군과 미군은 그날 하루 종일 포위망 안의 중공군들을 사냥하듯 섬멸했다.

미군 전차 부대와 보병 부대는 골마다 진입하여 민둥산에서 방황하는 180사단의 병사들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정 기귀는 지휘는 커녕 사단의 지휘부와 살기 위해서 정처 없이 산골길을 따라 도망 다녀야 했다.

그러나 도주도 한계에 달하자 사단장 정기귀는 사단 사령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살길을 투표로 결정했다.

[위기의 부대 지휘관 답지 못한 행위이다.]
각자 알아서 도주하자는 결론이 나와 사령부는
해체되어 각자 헤매게 되었다.

정 기귀는 산속을 기약 없이 먹지도 못하고 며칠을 헤매다가 미군 전차 부대에게  전차포 사격을 받아 대부분의 요원들이 죽고 그와 정치 위원등의 소수만이 5월 30일에야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60군을 찾아 왔다.

사실 중공군이 미련하게 전개한 5차 전역 2단계는 미군의 대반격을 불러왔고 한반도 중부 한강 가에서 공세의 선봉에 섰던 부대는 거의 붕괴되어 버렸다.

중부전선에서의 중공군의 붕괴를 보자 유엔군은 한국 전선에서 총 반격을 명했다. 팽덕회의 대군은 미군과 한국군의 반격을 받고 전 전선에서 맥없이 지리멸렬하게 후퇴해버렸다.

반격의 선봉에 섰던 미군은 말한바와 같이 탱크 부대를 앞세우고 종횡무진으로 중공군을 살육했다.

한국 전쟁에서 전차들이 여러 번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번 반격에서처럼 최고의 위력을 발회한 일은 없었다.

보병을 동반한 전차부대는 중공군의 방어선을 찢고 내부로 뛰어 든 뒤  공중에 떠 있던 정찰기로부터 퇴각하는 중공군 부대의 발견을 통보받으면 골짜기 안에 서슴지 않고 진입해서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중공군을 제압하고 또 다음 골짜기나 마을로 이동하여 방황하는 중공군들에게 사정없는 화력을 선물했다.
이에 후속하는 보병화력이 합세했다.

중공군 시체 -미군은 해병대이다. 촬영일시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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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기동하며 보병을 이렇게 공격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전사 연구가들에게 다소 낯설 수도 있다. 전차의 최대 목표는 적의 전차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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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문산을 거쳐 고랑포[지금은 흔적도 없어졌다.]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금파리와 적성사이에 식현리라는 지역에 상당히 넓은 평야가 있다. 남쪽으로 높은 파평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른다.

바로 이 지역에서 영국군 여단이 5차 전역 초기에 63군의 대 공세를 받아서 고전한 지역이다.

필자는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뒤 이곳에서 군 복무를 했다. 이곳 주민에게서 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지역에서 중공군이 미군 전차 부대에게 공격을 받아서 전멸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파평산 북쪽과 임진강 냠쪽의 평야 지대가 끝나고 임진강을가로막듯 길고 낮은 산맥형 언덕이 길게 임진강을 따라가며 나있었다. 언덕을 넘으면 바로 임진강이다.지금은 숲이 우거졌지만 그때는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이었다.

후퇴하던 중공군들이 이 언덕에 붙기 전에 미군 전차부대가 파평산 기슭의 산길에서 갑자기 후속하여 나타나서 병렬하면서 화력을 퍼부어  임진강가의 언덕을 미처 넘지 못한 중공군을 다량 살상했다.

동네 어른들은 이 언덕에서 흐르는 실개천에 며칠을 두고 피가 흘렀다. 시간이 가면서 중공군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심하게 나서 주민들은 중공군들을 다 매장해주었다고 했다. 매장한 시체만 500구가 넘었다. 따져 보니 바로 5차 전역 2단계 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후퇴하던 이들이 한국군 1사단을 지원했던 미군 73탱크의 1개 중대에게 기습 당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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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화력만 중공군 사냥에 동원 된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새카많게 뒤덮은 미 공군 전투기들이 각다귀들 같이 달려들어서 민둥산의 계곡과 능선에  그대로 노출된 수많은 중공군을 기총소사를 하고 로케트 폭격을 했다. 드물지만 진지를 만들고 저항하는 중공군들에게는 쌍발의 B26기가 날아와서 끔찍한 네이팜탄들의 불비를 뿌렸다.


M26 탱크의 시가지 전투 - 서울 수복 작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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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을 한반도 중앙에서 동서로 단절해놓고 미군과
한국군은 금화와 철원선에서야 겨우 진격을 멈추었다.

중앙이 뚫리자 유엔군은 한국의 전 전선에서 맹 반격을 했다. 중부 전선에 크게 뚫린 구멍에 측면 공격을 두려워했던 서부 전선의 중공군과 동부 전선의 중공군도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 동안 수없는 중공군이 죽었다. 유엔군의 화력으로 죽기도 했지만 이미 식량이 떨어진 상태라서 굶주림으로 죽기도 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보급품을 나르던 죄 없는 몽골 말들도엄청나게 죽었다.

아이러니칼하게 이들 중공군 병사들을 아사에서 구해준 것은 한국의 산야에서 파릇파릇하게 나던 나물들이었다.

전사자만 많이 나온 것이 아니라 항복한 병사도 많았다. 굶주림과 화력 앞에서 버티어낼 중공군 병사는 별로 없었다.

화천 지역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된 중공군 - 대부분 순박한 농민들인중공군은 일본군처럼 극한 상황까지 저항하는 경우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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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적 사살 통계나 자신들의 피해보고는 도대체가
신뢰 할 수가 없지만 5차 전역의 2단계 작전에 죽은 사람만 3만 명이나 된다고 발표했다. 1단계 전역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은 중공군의 붕괴와 괴멸은 한국군과 미군들에게 대단한 전과를 거두게 하였다.

파로호라는 호수 이름을 탄생시킨 제6사단의 대승도 이 추격전 와중에 탄생하였다. 미군들은 중공군의 대량 섬멸로 끝난 중공군의 5차 전역 2단계 전역을 오월의 대 학살[May massacre]이라고 부른다.

학살당하듯이 중공군이 죽었다는 것이다.

철원 북방까지 쫓겨간 뒤에 중공군에게 더 이상  저항할 변변한 여력조차 남아 있지 없었다.


드디어 유엔군에게 맥아더가 염원하던 적의 대량 섬멸을 위한 최고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미군의 전차 200대가 주역이 되어서 이룬 공로니 좀 더 많은 기계화 부대 병력만 있었다면 그대로 치고 북상하여 대동강을 넘어 평양을 포함한 대 포위망을 형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평양지역에 중공군 4개 사단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전차화기가 빈약해서 평양 이북으로 물러갔거나 막았어도 붕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1973년 수에즈를 기습으로 건넌 이스라엘군의 기막힌 남하기동으로 수에즈 운하를 따라 배치되었던 이집트 제 3군 전부를 포위해 버렸다.

이집트 군들은 나중에 종전 협상 중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사정하여 식수를 공급해주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다.


수에즈 운하 서쪽 녹색 부분이 운하를 넘은 이스라엘군에게포위당한 이집트 3군의 지역이다. 1951년도 한반도에서도능히 가능했었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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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까지 고갈되었던 중공군은 이집트 군보다고 더 비참한  처지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와싱턴의 행정 장교들과 다음 선거만 생각하고 있던 트루만은 한국 전쟁을 끝내 버릴 이 절호의 찬스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 유엔군은 원래의 진출 계획선[철원 김화]에서 정지해야만 했다.

이 5차 전역이 끝나고 죽었다가 살아난 중공군의 병사나 장군들은 허망한 꿈에서 깨어났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대전이 어떻게 안동이 어떻고 하는 들뜬 이야기를 입에 달고 있던 모택동도 즉시 현실 감각을 찾았다.

그는 당 최고 회의를 열고 한반도의 전쟁은 38선 부근에서 대치하며 미국과의 휴전을 추진하고 전쟁을 끝내자고 말했다.

그 뒤에 그의 입에서 더 이상 미군을 부산 앞바다로 쓸어 넣고 한국을 공산 통일 하자는 헛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실패로 끝난 5차 전역은 결과적으로 맥아더가 청천강 이북에서 철수하여 이들을 남한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려던 전략은 워싱턴의 지원 거부와 조심스러운 팽덕회의 진격 중지로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맥아더의 대량 섬멸 기회는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온 중공군의 과대망상적인 전략 판단이 제공했다. 단지 모두 섬멸해버릴 기회는 유엔군 측의 병력부족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었다

미군은 아르덴느의 숲을 뚫고 덩케르크로 돌진하던 독일군이 2,500량의 탱크로만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번 전역에서 단지  증강된 2개 대대의 규모의 전차들만인 200량의 전차만으로 50만 대군의 심장을 찢고 들어가 산산조각을 낸 사실은 중공군이 통상 쓰는 인해 전술이라는 구시대적인 인적 물량 동원의 전략이 대규모 야전에서 기계화 부대의 공격에는 통하지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인원만 대량 동원하면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전략 의식이 이번 무리한 5차 전역을 추진하게 만들었지만 좁은 전투 정면에 무조건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은 병력 운용의 문제,보급의 문제, 수송의 문제, 통제의 문제등 여러 가지로 문제점을 들어냈다.

다시 말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전술단계, 적의 기계화 부대가 활동 할 수없는 산악전에서나 유용하지 전략단계, 야전에서는 오히려 대량의 병력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중공군의 무모한

작전은 보여주었다.

작전이 끝나고 미군이 철원 김화 지역을 점령한 뒤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951년 6월초 강원도와 함경도 지경에 있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접경에 위치했던 공사동의 팽덕회의 사령부에서 군장[군단장]이상의 간부들이 모인 대 군사회의가 있었다.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다. 팽덕회가 입을 열었다.

성질 괄괄하고 욕 잘하는 그였지만 자신의 책임도 컸던 만큼 상당히 자제하는 모습이 역역한 태도로 말을 해갔지만 불편한 심기는 대목 대목에서 들어냈다.

그는 이번 전역의 실패가 능력도 없는 처지에 너무 입을 크게 벌리고 대어를 삼키려고 했던 비현실적인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연설 초반부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80사장 정기귀와 60군장 위걸의 무능과 실수를 힐책 할 때는 자기 성질을 다 들어내어 폭언을 퍼 부었다.

[정기귀와 간부들은 병[전사]으로  강등당하고 군에서 쫓겨났다.]

그는 휘하 중공군이 저지른 대실수로서 대 전차전 준비의 미비를 지적하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 아군 철수시 반드시 도로를 통제하고 중요한 구간은 파괴하여
적군 탱크 부대의 진격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선부대에서는 이점을 소홀히 하여 모든 도로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 결과 적군 탱크가 종횡무진으로 덮쳐들었습니다. ---

그러나 이날 팽덕회의 분노 섞인 질책에서 이번 5차 전역에서 대실패의 가장 정확한 지적은 아래에 있었다.


---이 세상에는 강자위에 또 강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최고로 여겨서는 절대 안 됩니다. 교만과 자만은 헌신짝처럼 버려야 합니다. 일단 그런 마음을 지니게 되면 진취심이  없어지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낭패를 봅니다.겸손에는 항상 낭패가 없습니다.--

팽덕회의 이 말처럼 그들이 벌린 터무니없는 5차 전역 실수의 핵심을 지적한 말은 없다. 모택동과 중공군 간부들과 사병들의 사이에 팽배했던 교병[驕兵]의식이 만용을 부려서 대량의 병력을  적화력의 밥으로 만들어 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번 만용을 부리고 숫자의 마술에 취해서 대공세를 취했다가 대패를 한 중공군의 5차 전역,즉 1,2차 춘계공세를 한국 전쟁에서 통일의 기회를 놓쳐 버린 오늘의 한국 민족의 눈으로 분석해본다.

중공군을 한반도로 출병하게 만든 원인은 일단 중국과 일체의 대화를 거부했던 미국의 외교 부재에 책임이 크다.

대화는 물론 한국군이 38선을 넘으면 상관하지 않겠지만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는 주은래의 경고를 너무 교만하게 무시했다.


닉슨의 중국 방문- 덜레스의 철없는 짓에 대한비난을 의식했었던 닉슨은 주은래와 첫 악수를 정중하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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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추가 병력을 더 파견하고 대만군 5만 명을 출병시키며 중국 연안에 대한 봉쇄 만주 폭격에 부정적이었던 미국 와싱턴 트루만 - 마샬의 거부는 세월이 지나서 평가해보면 문제가 있었다.

마샬이 미군이 한반도에 묶여 있는 동안 스탈린이 유럽에서 불장난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한반도에서 다리를 빼겠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이건 참 모순이 있는 결정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정책 결정에서 스탈린의 의지와 능력을과대 평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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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상황을 매우 두려워해서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 면에서 조심했었다. 그는 미국이 한반도에 발이 잡혀 있는 동안 유럽에서 무슨 장난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압록강 상공에 중국 지원차 출동한 소련 조종사들에게 중국어로 무선교신을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려서 조종사들의 반발을 샀던 일도 그런 사례의 하나이다.]

 한반도에서 빨리 발을 빼고 유럽에 집중하겠다는 마샬의 구상은 그 뒤 한국 전쟁이 2년 반이나 계속된 사실로 그의 구상이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그가 주동이 되어서 거절했던 미군의 증파는 맥아더가 물러난 뒤 결국 전황이 진행되면서 축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아주 문제가 있는 전쟁 수행의 방법이었다.

맥아더의 요청대로 미군과 대만군을 증파해서 바로 제 5차전역의 실패 같은 결정적 승기(勝機)를 잡아서 적을 붕괴시키고 그대로 북진하여 평양을 포함한 거대한 포위망을 한반도 서부에형성해서 대 섬멸전을 했더라면 휴전의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의 통일 문제도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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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모르는 얼치기 평화주의자들 여기서 택클 걸지 말기 바란다. 섬멸이라는 단어야 말로 중공군이 입에 달다시피 쓰던 단어였고 이 섬멸을 위한 작전으로 한국군을 공격을 해서 수많은 국군 장병들을 죽게  만든 것도 중공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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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휴전으로 조기 종전을 했더라면 그 뒤의 한국 전쟁 에서 수없이 발생했던 남북 양쪽,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인명 살상을 방지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워싱턴의 책상물림들이 맥아더의 안을 거부 했던 것은 미국에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맥아더가 구상했던 중공군의 대 섬멸없이 전쟁을 끝낸 미적지근한 한국 전쟁의 결론으로 미국은 두고두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 3국이 보았을 때 한국 전쟁은 중국이 이긴 전쟁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가난한 빈국이 강국에 얼마든지 도전할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을 중국이 증명해 보인 전쟁이었다.

전쟁 기간 중국군의 전사자가 미군 전사자보다 열배나 많았던 것은 그들이 대단치 않게 건너 뛰는 요소이다.

그 뒤 동서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에서 얻은 프리미엄은 중국을 전 제 3 세계의 맹주로 군림하게 도와주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졸전을 한 것으로 비쳐진 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막대한 비용을 그 뒤 20여년의 세월을 두고 지불하게 만들었다.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의 신생국은 중국을 스승으로 모시고 때로는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반미의 길을 걸었다. 이들 친공 사회주의 국가의 벌떼 같은 발호는 거의 3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미국은 이들과 싸우고 중국을 포위하느라 한반도에서 들였던 군비의 수십 배를 지출하고 국력을 낭비했다.

정략(政略)이 전략(戰略)에 끼어들면 그 전략은 엉망이 된다는 군사학의 원칙이 생각나는 미국의 실패한 전쟁 지도가 한국의 분단고착을 가져온 것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유감스러울 따름이다.